함창의 공자와 주자의 화상을 그려 봉안하는 서원을 설치하지 말게 하다
차대를 거행하였다. 좌의정 채제공이 또 함창현(咸昌縣)의 공자(孔子)와 주자(朱子)의 화상을 즉각 옮겨 봉안하지 않는 것은 기강에 크게 관계된다는 것으로 말하니, 전교하기를,
"니성(尼城)114) 의 궐리사(闕里祠)도 역시 완전히 옳은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전국 3백 60군데의 군현에 다 공부자를 제사지내는 곳이 있는데, 어찌 유독 니성에서만 향교 이외에 별도로 한 사당을 설치한단 말인가. 교화가 지극하지 못하고 풍속이 바르지 못한 상황에서 내가 이왕에 만들어진 사당에 대해서는 일률적으로 논할 수 없으나, 앞으로는 감히 옛 성인의 화상을 그려 봉안하는 서원을 설치하지 못하도록 예조의 관리에게 지시하여 각도에 공문으로 알리게 하라."
하였다. 이어 전교하기를,
"이런 일들은 다 당파의 버릇에서 나온 것이다. 지난날 그들이 조정의 일을 주무를 때 걸핏하면 빙자하고 등을 대는 일이 있었는데, 유림들의 시시비비는 우선 그만두더라도 군사 제도의 개혁을 하나의 칼자루로 삼아 혹은 경리청(經理廳)을 설치하기도 하고 혹은 정초청(精抄廳)을 혁파하기도 하였으니, 이것이 곧 하나의 실례이다. 고 상신 김석주(金錫胄)가 수어사(守禦使)로 있을 때 체부(體府)를 설치하여 서전(西銓)으로 삼고 금위영을 설치하여 병조(兵曹)에 붙이고는 자신이 겸 병판(兵判)이 되었다. 그때 실지 병조 판서는 정사의 명이 내리기를 기다려 정사의 자리에 참여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으며, 의망 단자도 감히 스스로 추천하지 못하고 겸 병판에게 가서 물은 뒤에야 써서 올렸다. 길바닥에 우두커니 서 있는 것이 비변사의 낭관과 다를 것이 없었으니, 그 당시 실지 병판은 참으로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옛날에는 조정에 기강이 있었기 때문에 설혹 어떤 감당키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일단 그 직책에 있으면 능히 그 직무를 수행했었다."
하고, 또 전교하기를,
"군문(軍門)의 폐단을 어찌 이루 다 말하겠는가. 무술년115) 5월 조참(朝參) 때의 하교에서 백성의 생업을 꾸려가고 군사에 관한 정사를 따져 보는 것으로 첫째 가는 내용을 삼았다. 백성들의 생업을 꾸려 간다는 것은 신역을 고르게 하는 일로서 내가 밤낮으로 한결같이 생각하는 것은 신역으로 내는 필수를 줄여 준 선왕의 훌륭한 은덕과 고심을 우러러 받들기 위한 것으로 오랫 동안 생각을 해 둔 것이 있으나 선뜻 의논할 수가 없었다. 군사에 관한 정사에 있어서는 군문(軍門)을 증설하는 것은 폐단을 이루 다 말할 수 없는데 내가 어찌 다시 쓸모 없는 군문을 만들고 싶었겠는가. 장용영을 신설한 것은 내가 본래 깊은 뜻이 있어서이니, 궁궐 호위를 중하게 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또한 비상시를 대비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민간에서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는 자는 하루에 세끼 밥을 먹지만 나는 하루에 두끼만 먹는다. 몇 년 동안 절약하여 경비를 낭비하지 않으며 단속한 보람이 약간 이뤄지고 시설이 한창 벌어지고 있으니, 내 뜻은 장차 기대하는 것이 있다. 이러한 속사정을 모르는 자야 어찌 내 고심을 알 것인가. 장차 내 뜻이 성취될 날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상이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임금의 큰 정사는 사람을 등용하고 사람을 신임하는 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다. 신임하고 등용하는 방도에 있어서는 장수와 재상에 관한 것이 더욱 중요하니 ‘의심스러우면 맡기지 말고 맡겼으면 의심하지 말라.’는 것은 옛사람의 격언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자가 있을 때 숨기고 참는 것이 옳겠는가, 밖으로 드러내보이는 것이 옳겠는가."
하고, 이어서 총융사 이주국(李柱國)을 지적하여 이르기를,
"이 사람의 처지는 어떤가. 예로부터 역적 가운데 역적 구선복(具善復)과 같은 자는 없었다. 내가 무슨 마음으로 이 역적을 군대를 거느리는 자리에 두었겠는가. 사세가 어쩔 수 없는 점이 있어서 원통함을 참고 울분을 감추면서 몇 년 동안 맡겨 두었고, 심지어는 그 아우를 별간역(別看役)으로 임명하여 내 주위를 출입하게까지 했으니, 이는 그가 딴마음 가진 것을 안정시키려는 것이 아니고 역시 내가 남에게 말 못할 것이 없다는 것을 보이고자 한 데서 나온 것이다.
병오년116) 에 이르러서야 국법에 의해 처단되었는데 시신을 저자에 버리는 형벌이 어찌 이 역적에게 법을 충분히 적용했다고 하겠는가. 사실은 살점을 씹어 먹고 가죽을 벗겨 깔고 자도 시원치 않았었다. 그리고 이 역적이 죄를 받은 경위를 어찌 병오년의 일만 가지고 알 것인가. 《명의록(明義錄)》에 들어있는 여러 역적들을 한번 보라. 그가 역적이 된 뿌리를 따져 보면, 모두 대리(代理)117) 를 방해하고 농락하던 한 가지 일에만 그치지 않는다. 조정의 신하들은 아마도 거의 이 하교의 의미를 알 것이지만, 병오년 이전에는 역적 구선복이 끝내는 법에 따라 처단될 것임을 아는 자가 드물었으니, 이 어찌 크게 미혹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도 총융사의 지체로서 오늘까지 유지하고 있으니 내가 전후에 걸쳐 보전해 준 것이 또 과연 어떠했는가.
바야흐로 역적 구선복이 붙잡혔을 초기에 세상 사람들 어느 누가 총융사를 의심하지 않았겠는가마는, 나만은 그들 종형제간이 평소에 알력이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였기 때문에 특별히 오늘날 총융사에 임명하였으니, 죽을 것을 살려 주고 마른 뼈에 살을 붙여 줬다고 할 만하다. 그러니 그가 만약 조금이나마 감격하는 마음이 있고 조금이나마 스스로 악으로부터 벗어날 생각이 있다면 마땅히 모든 일에 삼가고 두려워하여 한결같이 전철을 밟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 처신과 행위를 보면 오직 출세에만 급급해 하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준수한 기상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른바 준수한 기상이란 것이 어찌 장수에게 좋은 조건이겠는가. 지금부터는 반드시 두려워하는 생각을 갖고 고치도록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2책 32권 60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224면
- 【분류】왕실(王室) / 사상(思想) / 군사(軍事) / 재정(財政) / 인사(人事) / 정론(政論)
- [註 114]니성(尼城) : 노성(魯城).
- [註 115]
○戊申/次對。 左議政蔡濟恭, 又以咸昌縣 孔 朱畫像, 不卽移奉, 大關紀綱爲言, 敎曰: "尼城 闕里祠, 亦未嘗謂十分妥當。 三百六十郡縣, 皆有夫子俎豆之所, 何獨於尼城, 別設一祠於校宮之外乎? 敎化未至, 風俗未正。 予不能一例議到於旣設之祠, 而此後則無敢以古聖人圖像設院, 飭禮官行會諸道。" 仍敎曰: "此等事, 皆出於黨習。 在昔進退之時, 輒皆有憑藉托重之事, 而儒林是非, 姑勿論, 兵制存革, 作一欛柄, 或設經理廳, 或罷精抄廳, 卽其一也。 故相金錫冑爲守禦使, 設體府爲西銓, 設禁衛營付之兵曹, 自爲兼兵判, 而其時實兵判, 則不過待政命赴政席, 望筒亦不敢自擬, 往問於兼兵判, 然後書入, 長立道路, 無異備郞, 其時實兵判, 誠難矣。 然古則朝廷有紀綱, 故設有如許難堪之事, 旣在其職, 則能行其事矣。" 又敎曰: "軍門之弊, 尙何言哉? 戊戌五月朝參時下敎, 以制民産詰戎政, 爲第一義。 制民産, 卽均役事也。 予之夙宵一念, 欲仰體減匹之聖德苦心, 積有商度於中者, 而未可遽議。 至於戎政, 軍門增設, 弊不可勝言, 予豈欲更創無益之一軍門乎? 壯營之新設, 予自有深意, 非爲重宿衛也, 亦非爲備陰雨也。 閭巷稍饒者, 輒欲一日三飱, 而予則不過日再食。 幾年節省, 不煩經費, 團束粗成, 設施方張, 予意蓋將有待, 未諳裏面者, 何能知予苦心? 將有成就予志之日矣。" 上謂諸臣曰: "人君之大政, 莫先於用人任人, 而任用之道, 將相尤重。 疑之勿任, 任之勿疑, 古人之格言也。 其有不槪於心者, 則含忍可乎? 敷示可乎?" 仍指摠戎使李柱國曰: "此人地處, 何如也? 終古逆賊, 未有如復賊者, 予何心置此賊於將兵之地, 而事勢有不獲已者, 含痛齎憤, 幾年任置, 至使其弟, 爲別看役, 出入密邇之地, 非爲安反側也, 亦出於示予無不可對人言者耳。 及至丙午, 始伏王章肆市之典, 豈足云用法於此賊? 實欲食肉寢皮之不暇矣。 且此賊之伏法, 豈但以丙午事知之乎? 試看《明義錄》諸賊, 溯究爲賊根柢, 皆不止於沮戲代理一事。 廷臣庶幾知此敎意, 而丙午之前, 鮮能知復賊畢竟伏法, 豈不迷甚乎? 以摠使之地處, 獲有今日者, 予之前後全保, 亦果何如也? 方復賊就拿之初, 擧世孰不疑摠使, 而予獨念其從兄弟間, 平日傾軋, 故特於是日, 授以元戎, 可謂生死而肉骨也。 渠若有一分感激之心, 一分自拔之圖, 則惟當事事謹畏, 一反前轍, 而觀其處身行事, 惟恐征邁之不足, 外面見之, 有若俊氣中做去。 所謂俊氣, 是豈將臣好消息? 自今必思惕然改圖。"
- 【태백산사고본】 32책 32권 60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224면
- 【분류】왕실(王室) / 사상(思想) / 군사(軍事) / 재정(財政) / 인사(人事) / 정론(政論)
- [註 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