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지 이서구가 영변부에 군량미를 비축해둘 것을 아뢰다
승지 이서구(李書九)가 아뢰기를,
"영변부(寧邊府)는 성지(城池)가 험준하고 견고하며 강 연변의 여섯 고을의 길이 모두 여기로 모여들기 때문에 조정에서 시설한 것들이 자성(慈城)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런데 유독 성의 군량만은 아직도 일정한 규모가 없습니다. 대체로 산창(山倉)과 저향창(儲餉倉)은 성의 군량을 비축하는 장소인데, 평야 지대에 있는 7개 면은 산창에 소속되고 산간 지대에 있는 6개 면은 저창(儲倉)에 소속되어 쌀과 콩을 각각 1만 섬으로 한정하여 두 창고에 나누어 받아 들여서 3년에 한 번씩 곡식을 바꾸는 제도를 시행해 온 것이 오래 되었습니다. 다만 쌀을 마련하기가 어렵고 돌길로 짐을 운반하는 어려움 때문에 백성들이 반드시 부근에 있는 창고로 옮겨 바치려고 하여 격식대로 바치는 때가 거의 없었습니다. 또 그 곡식의 품질이 가장 좋기 때문에 감영과 읍에서 쌀을 팔 때는 아전과 향임(鄕任)들이 농간을 부려 반드시 이 창고의 곡식부터 먼저 파니, 사리로 따져볼 때 참으로 한심한 일입니다.
지금은 본부의 곡식 수가 전에 비해 약간 줄어들었으므로 쌀과 콩을 각각 1만 석씩 옛 규례대로 회복하려면 봄에 환자곡을 나누어 줄 때마다 두 해를 묵힌 곡식은 많고 외창(外倉)에 나누어 주어야 할 것은 부족하여 혹 폐단이 없을 수 없습니다. 지난해 가을 두 창고에서 받아들인 쌀과 콩이 도합 4천 8백 70섬인데 올봄에는 그대로 두고 환자곡으로 나누어 주지 않았으니 올 가을에도 작년의 예에 따라 떼어 받아 1만 석을 채운 뒤에 3분의 2를 남기고 그 나머지를 나누어 주는 법을 정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이밖에도 병영(兵營)의 둔창(屯倉)과 운산(雲山)·개천(价川)의 두 창고가 있습니다. 운산창의 회계부에 올라 있는 절미(折米)는 2천 6백 3섬이고 개천창의 회계부에 올라 있는 절미는 6천 2백 60섬인데, 모두 반은 남겨 두고 반은 환자곡으로 나누어주는 곡식입니다. 병영의 둔창은 콩과 쌀을 합쳐서 4천여 섬인데, 병영의 비장이 감독해서 받아들임으로 본읍에서 또한 일률적으로 조절하지 못해 창고를 봉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도로 곧 전부 나눠 줘버려 시급한 때에 쓰기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제 만약 본부에 소속시켜 운산·개천의 두 창고와 함께 모두 3분의 2를 남기고 그 나머지를 환자곡으로 나누어 주는 법을 만든다면 비록 흉년을 당하더라도 자성의 곡식을 처리하는 예에 따라 조정에 아뢴 뒤에야 비로소 환자곡으로 나누어 줄 수 있도록 허락해야 합니다. 그리고 둔창의 모곡(耗穀)은 병영에서 쓰는 물자이니 혹 다른 고을에서나 혹 본 고을의 외창에서 원래 정해진 수량대로 떼 주어 모곡을 가지고 그것을 보충하게 하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관서 지방의 곡물은 어느 것인들 비상시에 쓸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하늘과 땅이 만든 자연의 보루로 만세토록 금성 탕지(金城湯池)인 곳은 오직 철옹 산성(鐵甕山城)이다. 이런 성이 있으면서도 쌓아 둔 곡식이 없다는 것은 실로 이웃 나라의 귀에 들어갈까 겁나는 일이다. 저 자성의 형편은 철옹 산성에 버금가는 곳인데도 나누어 주고 남겨 두는 제도가 오히려 저렇게 엄밀하여 비록 재작년에 흉년이 들었을 때도 보릿고개에 식량이 없어 가장 감당하기 어려운 때를 제외하고는 감사도 역시 감히 환곡을 더 늘려 주자고 요청하지 못하였는데, 철옹 산성의 그와 같은 일이 어찌 말이나 되는가. 연전에 부사 서용보(徐龍輔)가 조정에서 하직 인사를 할 때 그로 하여금 거듭 백성들을 깨우쳐 성의 창고에 곡식을 들이도록 하게 한 것은, 내 생각이 이 성에 군량이 없어서는 안 되겠다는 데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요즈음 들으니 1,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예전과 다름없이 텅 비어있다고 한다. 지난 번에 거듭 효유한 것은 바로 앞으로는 반드시 전처럼 팔아 없애서는 안되겠다는 말이었는데, 내가 이 점에서는 영변 백성들을 기만한 것이 되었으니,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처음에는 그뒤에 환자곡을 나누어 준 관찰사와 병사 및 해당 부사를 적발하여 등급을 나누어 처벌하려고 했다가 다시 생각해 보니, 3년 만에 한 번씩 곡식을 바꾸는 구례가 무너진 지 이미 오래되었고 중간에 큰 규모의 구제와 상평창에 바치는 때를 겪었으므로 조사하는 일은 우선 잠시 참기로 하였다. 그렇지만 지금 경연에서 너에게 묻는 것은 반드시 옛 제도를 엄히 신칙하여 실효를 거두게 하기 위해서이니, 즉시 묘당으로 하여금 마땅히 시행해야 할 보관 관리 문제를 네가 아뢴 것과 참작하여 이치를 따져 초기(草記)하도록 할 것이며 이 비답과 함께 해당 부에 베껴 보내, 현판으로 걸어 두고 항상 눈여겨보면서 감히 어기지 말도록 하라. 덧붙여 아뢴 군영에 소속된 둔창의 모곡을 옮기는 일도 역시 묘당으로 하여금 아울러 아뢰어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2책 32권 57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222면
- 【분류】군사(軍事) / 재정(財政)
○庚子/承旨李書九啓言: "寧邊府, 城池險固, 江邊六邑之路, 莫不綰轂於此。 朝家設施, 與慈城無異, 而獨於城餉, 尙無畫一之規。 蓋山倉、儲餉倉, 卽城餉儲置之所, 而野七面屬之山倉, 山六面屬之儲倉, 田米大豆, 各限萬石, 分捧於二倉, 仍作三年一改色之制者, 厥惟久矣。 第因米穀辦備之艱, 石路駄運之苦, 民人輩必欲移納于附近倉, 依式準捧之時, 絶無僅有。 且以穀品最精之故, 營邑發賣, 吏鄕作奸, 必先此倉, 揆以事體, 誠可寒心。 今則本府穀摠, 比前稍減, 米豆各萬石, 若復舊例, 則每當春糶之際, 兩年陳穀之夥多, 外倉應分之欠縮, 或不能無弊。 昨秋兩倉所捧田米大豆, 合爲四千八百七十石零, 而今春則仍不還分, 來秋亦依昨年例, 劃捧滿萬石後, 定爲二留一分之法, 似爲便好。 此外又有兵營屯倉及雲山、价川兩倉, 而雲山倉會付折米爲二千六百三石(雲)〔零〕 , 价川倉會付折米爲六千二百六十石零, 而俱是半留半分之穀, 兵屯倉則米豆合爲四千餘石, 營裨監捧, 自本邑, 亦不得一例操切, 封倉未幾, 旋卽盡分, 無補緩急之需。 今若屬之本府, 與雲、价兩倉, 竝爲二留一分之法, 雖値歉歲, 依慈城穀例狀聞後, 始得許分。 至於屯倉耗穀, 係是兵營需用之物, 或自他邑, 或自本邑外倉, 依元數移劃取耗, 以充其代, 恐爲得宜。" 敎曰: "關西穀物, 孰非緩急之需, 而天設地塹, 萬年金湯, 惟鐵甕山城, 是也。 有是城, 無蓄峙之穀物, 誠不可使聞於隣國。 如慈城, 形便之亞於甕城, 而分留之制, 猶如彼其嚴密, 雖在再昨年歉歲, 除非麥嶺艱食之最難堪時, 道臣亦不敢輕請加分, 則甕城事, 豈成說乎? 年前府使徐龍輔之辭陛也, 使之申諭民庶, 俾納城倉者, 予意在於有是城池, 不可無糧餉也。 近聞未過一二年, 依舊枵然云。 曩所申諭者, 卽後必不當如前散賣之謂也, 予於是, 不免欺寧邊之民。 寧不瞿然? 初欲摘發其後分糴之道帥臣及該府使, 分等勘罪, 更思之, 三年一改色之舊例, 抛置已久, 間經大賑, 及捧平倉時, 故査勘一款, 姑且含忍, 而今筵之問於爾者, 必欲申嚴舊制, 責其實效。 卽令廟堂, 合行典守事宜, 參看爾奏, 論理草記, 與此批答, 謄布該府, 使揭板常目, 毋敢違越。 附陳兵營屬屯耗移劃事, 亦令廟堂, 一體稟處。"
- 【태백산사고본】 32책 32권 57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222면
- 【분류】군사(軍事) / 재정(財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