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강에서 《중용》을 강하다
조강(朝講)에서 《중용(中庸)》을 강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하번(下番)100) 은 곧 내가 옛날 동궁으로 있을 때 관원이고 상번도 옛날 궁료의 형인데 오늘 함께 경연에 올랐으니, 대충대충 읽고 책을 덮을 것이 아니라 문제를 제기하여 토론하는 것이 좋겠다. 대체로 우매하고 불초한 자가 미치지 못하는 것은 사실 그럴 수 있는 일이지만 어질고 슬기로운 자가 중용의 도에 지나친다는 것은 과연 어떤 것에서 지나친다는 말인가? 중용의 도는 풀어 놓으면 온 우주에 가득차고 거두어들이면 은밀한 곳에 감추어지는 것인데 어질고 슬기로운 자가 지나친다는 것은 우주의 밖으로 벗어난다는 것인가? 어질고 슬기로운 자가 지나친다면 지나치는 곳마다 감화되고 가만히 있으면 신기롭다는 성인은 더욱 당연히 지나칠 것이다. 그렇다면 우주 바깥에 대해서는 성인이 놓아두고 논하지 않는다는 말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하니, 시독관 이지영(李祉永)이 아뢰기를,
"이것은 대체로 도를 행할 것도 없고 알 것도 없다고 여긴다면 중용을 잃은 것은 마찬가지이니, 이 때문에 지나친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고, 검토관 이의봉(李義鳳)은 아뢰기를,
"이것은 활쏘는 사람의 뜻이 과녁에 적중시키려는 것은 곧 중용의 도요, 활이 과녁 밖으로 벗어나는 것은 어진 자의 지나친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고, 영경연사 채제공은 아뢰기를,
"지나친다는 말은 단지 중용에서 지나친다는 말입니다. 어질고 슬기로운 자는 항상 이치 밖에서 이치를 찾으려는 잘못을 저지르기 때문에 스스로 중용에 지나치는 결과를 부르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노자(老子)와 석가 같은 자들도 역시 어질지 않거나 지혜롭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찾는 것이 너무 지나쳐 저절로 중도와는 달라지게 된 것과 같으니, 이것이 이른바 지나친다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과녁을 넘어가는 것으로 한 비유는 옛사람의 말에서 나온 것이긴 하나 유신(儒臣)이 이른바 화살이 과녁에서 지나쳐 간다는 것이 과연 적절한 것인지 모르겠다. 중용은 과녁의 정곡(正鵠)과 같다. 그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는 것을 정곡을 지나쳤다거나 정곡에 미치지 못했다고 한다면 옳지만 만약 오로지 과녁만을 지적해 말하면 표적은 작고 땅은 크며 표적 안에도 1백여 보의 거리가 있고 표적 밖에는 허다한 땅이 있으니, 화살이 이르는 곳에 어찌 한량이 있겠는가. 그렇다면 중용에 지나쳤다는 자가 지나친 것은 장차 우주 밖에까지 벗어났다고 볼 수도 있다. 내 생각에는 어질고 불초한 자가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한다는 것은 이 한 과녁 안에서 정곡의 위 아래를 말한 것이라 여겨진다. 만약 과녁을 벗어나고 과녁에 미치지 못한 것으로 말하는 것이라면, 중(中)이란 글자가 도리어 너무 작은 것이 된다. 성인의 중은 없는 곳이 없다. 천하에는 천하의 중이 있고 한 나라에는 한 나라의 중이 있으며, 나아가 한 방이나 한 그릇에도 모두 그 중이 있다. 어찌 대지 위에 한 조각 과녁만 놓아둔 것과 같겠는가. 이 때문에 비록 노자와 석가가 우리 유도와는 다르다 해도 반드시 그 극치에 가서 머무른 것은 과녁이 없다고 말할 수 없고 단지 중을 얻지 못했을 따름이다.
대체로 하늘이 덮여 있고 땅이 깔려 있고 해와 달이 비추고 서리와 이슬이 내리는 곳이라면 어디를 간들 당연한 도리가 없겠으며 어느 곳인들 이른바 중이란 것이 없겠는가. 성인은 일상적으로 행하는 도리 속에서 그 중을 골라서 잡는 것이기에 중용이라고 하는 것이다. 중용이란 애초부터 높고 요원하여 행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디를 가든 상도가 있고 어디를 가든 중도가 있으니, 이른바 시중(時中)이라는 것이다. 중이란 글자의 뜻은 시(時)라는 글자의 뜻과 서로 표리관계를 이루니, 《주역》에 이른바 ‘시(時)의 뜻이 진실로 크다.’ 한 것이 그것이다."
하니, 의봉이 아뢰기를,
"지금 성교(聖敎)를 받들고 보니, 과녁을 쏘는 것에 비유한 옛사람의 뜻이 과연 그런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하였다. 채제공이 아뢰기를,
"신은 일찍이 가슴속에 의문나는 것이 있었습니다. 경(經)에 ‘도가 행해지지 않는 까닭을 내가 알겠다.’ 하고, 또 ‘도가 밝아지지 않는 까닭을 내가 알겠다.’ 하였는데, 명(明)이란 지(知)의 일입니다. 이는 대체로 지행(知行)을 나누어 말한 것인데 행을 지보다 앞세운 것이 《대학》에서 지와 행 가운데 지를 앞세우고 행을 뒤로한 것과 다른 듯합니다. 그러니 이것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지영이 아뢰기를,
"행동을 한 뒤에야 밝아지기 때문에 행을 지보다 앞세운 것입니다."
하고, 의봉은 아뢰기를,
"윗 대문에 ‘백성 가운데 이 도리를 능히 아는 사람이 드문 지 오래 되었다.’ 하였기 때문에 실천을 급하게 여겨 먼저 말한 것입니다. 또 공자의 말씀에 ‘백성은 도를 따라가게 할 수 있으나 알게 할 수 없다.’ 하였으니, 도를 따라간다는 것은 곧 실천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 역시 그렇지 않은 점이 있다. 비록 지와 행을 나누어 말했으나 이미 ‘도가 행해지지 않는 까닭을 내가 알겠다.’고 말하였기 때문에 슬기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로 이어 놓았으니 슬기롭다와 어리석다는 것은 지에 관한 일이고, 이미 ‘도가 밝아지지 않는 까닭을 내가 알겠다.’ 하였기 때문에 어진 자와 불초한 자로 이어 놓았으니 어질다와 불초하다는 것은 행의 일이다. 그러고보면 언제 행을 앞세우고 지를 뒤로한 것이 있었던가. 대체로 이 편의 대의는 지(知)·인(仁)·용(勇) 세 가지 달덕(達德)으로 도에 들어가는 문을 삼았기 때문에 먼저 순(舜)을 말하고, 다음으로 안자(顔子)를 말하고, 다음으로 자로(子路)를 말한 것이다. 이로써 보면 역시 인과 용을 앞세우고 지를 뒤로한 것이 없다. 비록 그렇지만 지와 행은 원래 딱 끊어서 둘로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지가 십분 분명하면 자연 행으로 옮겨지는 것이니 언제나 지가 밝지 못하기 때문에 실행에 힘쓰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이 오훼(烏喙)101) 가 사람을 해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아무리 배가 고파도 먹지 않으니, 이것이 지와 행이 서로 따라 다녀 둘로 나눌 수 없는 증거이다."
하자, 제공이 아뢰기를,
"오훼는 사람들이 사실 먹지 않지만 사람들은 사적으로 돈을 만들면 법에 반드시 죽는다는 것은 다 알면서도 간혹 범하는 자가 있으니, 이것으로 따져 보면 큰 욕심이 있는 곳에는 혹 지와 행이 혹 서로 따라다니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훼를 먹으면 백분의 일도 살아날 가망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먹지 않지만, 사적으로 돈을 만드는 것은 요행으로 발각되지 않는 경우가 있는 데다가 크나큰 이익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에 죽음을 무릅쓰고 고의로 범하는 것이다. 대체로 호랑이에게 당한 자는 호랑이 소리만 들어도 두려워하고 화살에 상처받은 자는 나뭇가지만 보고도 놀라는 것이니, 이는 모두 진짜로 알기 때문이다. 이처럼 진짜로 알면 자연 모든 행동이 그에 따라가는 것이다."
하였다. 의봉이 아뢰기를,
"경서의 뜻이 사실 행을 앞세우고 지를 뒤로 한 것인 줄 알았으나 성상께서 분석하신 것이 지극히 정밀하여 신은 실로 환히 깨달았습니다."
하고, 제공은 아뢰기를,
"1자만큼 글을 읽는 것이 1치를 실천하는 것만 못합니다. 이로써 보면 지와 행에는 자연 완급의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사람들이 용고기가 어떻다고 말만 하기보다는 돼지고기라도 먹는 것이 낫다고 말하지만, 사마광(司馬光)과 같은 사람은 그의 평소에 생각하는 것으로 본다면 진정 독실하게 실천하는 사람이라 말할 만하다. 그러나 그 분수를 아는 데 있어서는 끝내 부족했다. 이를테면 그가 맹자(孟子)를 비판한 한 가지 일이야 비록 순박한 기풍이 없어지지 않은 것으로 돌린다 하더라도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을 혁파한 일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서둘렀는가. 희령(熙寧)102) 의 정치가 물론 폐단은 많았지만 병제(兵制)를 변통한 것과 같은 것은 실로 좋은 법인데 어찌 모두 폐지해서 결국 융정(戎政)이 떨치지 못하고 나라의 형세가 더욱 약해지게 만들었단 말인가. 왕안석에서 나온 것이라면 꼭 서둘러 폐지하였으니, 어쩌면 그렇게도 지나쳤는가. 정자(程子)가 ‘우리들이 그를 격동시켜 그렇게 된 것이다.’ 한 말이 진실로 대현인의 공평한 말씀이며 공평한 마음이다. 대체로 왕안석은 고집이 너무 지나쳤지만 그 재주야 어찌 세상에 쓸 만한 것이 없었겠는가. 신종(神宗)이 왕안석을 등용한 것은 그 뜻으로 보면 큰 일을 할 수 있는 임금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하니, 의봉이 아뢰기를,
"신종은 비록 큰 일을 할 만한 임금이었으나 적임자를 쓰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인품이야 물론 어질고 못난 차이가 있지만 세상에 쓰이는 재주로 말한다면 왕안석이 절대로 사마광보다 못하지 않을 것이다."
하니, 지영이 아뢰기를,
"안석은 사실 뛰어난 재주를 지녔지만 정치를 하는 데 있어서야 어찌 사마광처럼 거의 완전한 사람을 당해낼 수 있겠습니까."
하고, 의봉은 아뢰기를,
"만약 사마광이 임금의 신임을 전적으로 받고 오랫동안 정사를 행했더라면 소강(小康) 상태의 정사를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반드시 삼대(三代) 때의 이상적인 정사도 회복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고, 채제공은 아뢰기를,
"요즘 유자들의 논의는 사마광과 왕안석은 서로 비교할 수도 없다고 말하는데 이는 정말로 편협한 것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사마광은 신법이 백성들을 뒤흔든 뒤에 나서게 되었으므로 마치 청렴한 관리가 탐욕스러운 관리의 뒤를 이어 쉽게 청렴하다는 이름을 얻은 것과 같다고 봅니다. 이 때문에 온 천하가 지금까지 그를 칭송하니, 좋은 팔자라고 하겠습니다. 구법을 바꾸는 것은 극히 어렵지만 신법을 혁파하는 것은 극히 쉬운 법이니, 어찌 사마광의 재간이 왕안석보다 확실히 뛰어난 점이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유신들은 비록 송 신종이 적임자를 쓰지 못했다고 말하지만 그 당시 천하의 형세가 크게 떨쳐 쇄신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정신을 가다듬고 훌륭한 정치를 꾀하면서 굳게 마음을 먹고 흔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내 생각에는 한(漢) 무제(武帝) 이후로는 오직 송 신종만이 일을 일답게 해보려는 뜻을 가졌었다고 여긴다. 국초(國初)에 《송사(宋史)》가 우리 나라에 미처 들어오지 않았을 때 이름 있는 석학들이 미리 헤아려 보고 혹자는 ‘왕안석은 반드시 영행전(佞幸傳)에 들어갈 것이다.’ 하고, 혹자는 ‘마땅히 명신전(名臣傳)에 들어갈 것이다.’ 하였는데, 나중에 《명신록(名臣錄)》을 보니 과연 그 가운데 들어 있고, 《송사》에서도 역시 그러하였다. 주자(朱子)도 이미 명신으로 인정했으니, 어찌 얻기 어려운 인재가 아니겠는가. 다만 여혜경(呂惠卿) 같은 무리들을 등용해 진출시킨 것이 큰 착오였던 것이다. 대체로 세도(世道)를 만회하는 것 역시 운수가 좋고 나쁜 것에 관계되는 것이다. 군주는 운명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나는 그때의 운수가 그렇게 만든 것이라고 여겨진다."
하였다. 의봉이 아뢰기를,
"성교(聖敎)가 진실로 지당합니다. 그러나 다만 생각건대 세도가 좋아지고 나빠지는 것은 오로지 인도하는 것이 어떠한가에 달려있습니다. 돌아보건대 지금은 성인께서 윗자리에 계시어 교화와 다스림이 맑고 밝으니 운수를 만회할 수 있는 적기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삼대의 정치를 오늘에 다시 볼 수 있지 않을까 여겨집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풍속이 순후하게 약간 바뀌는 것은 임금에게 달려있지만 옛 도(道)를 회복하는 문제는 세상이 더욱 말세가 되어 실현할 수가 없다. 지금처럼 기묘한 술책이 이미 생겨나고 순후한 풍속도 멀어진 상황에서는 윗사람이 아무리 요임금처럼 흙으로 계단을 쌓고 움집에서 거처한다 하더라도 백성들이 어느 누가 웅덩이를 파 술그릇으로 삼고 손으로 떠서 마시려 하겠는가. 그러나 중국은 땅이 넓고 백성이 많아서 기풍(氣風)을 갑자기 바꾸기 어렵겠지만, 우리 나라는 작은 나라이니 기풍을 따질 만한 것이 뭐가 있겠는가. 백성을 인도하여 돌려세우기가 어렵지 않을 것 같은데도 아직도 습속이 크게 변하는 것을 보지 못하겠으니, 이 점이 내가 밤낮으로 반성하면서도 그 까닭을 모르겠는 것이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2책 32권 48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219면
- 【분류】왕실(王室)
- [註 100]
○朝講, 講《中庸》。 上曰: "下番卽予舊日宮僚也, 上番亦舊日宮僚之兄也。 今日俱登講筵, 不宜草草掩卷, 發難討論, 好矣。 夫愚不肖之不及, 固也, 而賢知者之過之, 果過於何處也? 中庸之道, 放之則彌六合, 卷之則退藏於密, 賢知者之過, 過於六合之外乎? 賢知而過之, 則以聖人之過化存神, 尤當過之。 然則六合之外, 聖人存而不論者, 果何謂也?" 侍讀官李祉永曰: "此蓋以道爲不足行不足知, 則其失中, 一也, 是以謂過之也。" 檢討官李義鳳曰: "此猶射者之志彀中的者, 卽中庸之道, 矢過的外者, 猶賢者之過也。" 領事蔡濟恭曰: "過之爲言, 只過於中也。 賢知者每失於理外求理, 故自致過中。 如老、佛, 亦不可謂不賢不知, 而求之太過, 自異於中道, 此所謂過之也。" 上曰: "過的之喩, 出於古人之言, 而儒臣所謂矢過於的者, 未知其襯當也。 中如的中之鵠。 以其過不及者, 謂過鵠、不及鵠則可也, 如指全的而言, 則的小地大, 的內有百餘步, 的外有許多地, 矢之止, 豈有限量耶? 然則過者之過, 將過於六合之外矣。 予則以爲 ‘賢不肖之過不及, 是一的之內, 鵠之上下而言也。’ 若以過的不及的爲言, 則中字反至小矣。 聖人之中, 無處不在, 天下有天下之中, 一國有一國之中, 至於一室一器, 皆有其中, 豈如大地上, 只着一片的耶? 是故, 雖以老、佛之異於吾道, 而必造其極處而止之, 未可謂無的, 但不得其中耳。 夫以天之覆地之載, 日月所照, 霜露所墜, 何往無當然底道, 而何處無所謂中者耶? 聖人就其日用常行之道, 擇其中而執之, 故謂之中庸。 中庸, 初非高遠難行之事, 隨處有常道, 隨處有中道, 所謂時中者也。 中字之義, 與時字之義相表裏, 《易》所云時之義, 誠大矣哉!" 義鳳曰: "今承聖敎, 古人射的之喩, 其義果然如此矣。" 濟恭曰: "臣嘗有疑晦于中者。 經曰: ‘道之不行, 我知之矣’, 又曰: ‘道之不明, 我知之矣’, 明者, 知之事也。 此蓋分知行言之, 而行先於知者, 似異於《大學》知行之先知而後行。 以此發問, 似好矣。" 祉永曰: "行然後明, 故行先於知矣。" 義鳳曰: "上章云: ‘民鮮能, 久矣’, 故急於行而先言之。 且子曰: ‘民可使由之, 不可使知之’, 由者, 卽行也。" 上曰: "此亦有不然者。 雖分知行言之, 而旣曰道之不行, 我知之矣, 故接之以知者愚者, 知愚, 知之事也; 旣曰道之不明, 我知之矣, 故接之以賢者不肖者, 賢不肖, 行之事也。 然則何嘗有先行而後知者耶? 大抵此篇大旨, 以知、仁、勇三達德, 爲入道之門, 故先言舜, 次言顔子, 次言子路。 以此觀之, 亦未嘗先仁、勇而後知矣。 雖然, 知、行元不可截然貳之也。 知之十分分明, 則自然施之於行矣, 每坐於知之不明, 故行之不力也。 人知烏喙之能害人, 故雖甚飢而不食之, 此知行相須而不可貳之之驗也。" 濟恭曰: "烏喙則人果不食, 而人皆知私鑄錢之在法必死, 猶或犯之。 以此論之, 大欲所在, 或有知行之不能相須處矣。" 上曰: "烏喙, 百無一生, 故人皆不食, 私鑄錢, 則僥倖有不發者, 而其爲大利, 則有的知者, 故冒死故犯。 大抵傷於虎者, 聞虎亦怖; 傷於矢者, 見木猶驚, 皆有所眞知故也。 知之眞, 則自然無行之不逮者矣。" 義鳳曰: "經義果是先行而後知, 而聖敎分析, 至精至微, 臣誠怳然覺悟矣。" 濟恭曰: "讀得一尺, 不如行得一寸, 以此觀之, 知、行自有緩急之分矣。" 上曰: "人雖云談龍肉, 不如喫猪肉, 而如司馬光, 以其常時念中觀之, 眞可謂實踐篤行者, 而然於知分數, 終是不足。 如議孟子一事, 雖屬於大朴未散, 而至於罷新法。 何爲急遽乃爾? 熙寧之政, 固多弊端, 而如兵制變通, 實是美法, 何必盡罷, 終使戎政不振, 國勢益弱也? 以其出於王安石, 則必亟罷之者, 何其太過也? 程子謂吾輩激成之者, 誠大賢之公言公心矣。 大體王安石, 執拗太過, 而其才則豈無可以需世者耶? 神宗之用安石, 其志則亦可謂有爲之主矣。" 義鳳曰: "神宗雖是有爲之主, 用非其人矣。" 上曰: "人品則固有賢不肖, 而若其需世之才, 則王安石必不讓於司馬光矣。" 祉永曰: "安石誠有奇才, 而至於做治, 則何能當司馬光之九分人乎?" 義鳳曰: "若使司馬光, 得君專而行政久, 則非特少康之治, 亦將挽回三代矣。" 濟恭曰: "近儒議論, 至有司馬光、王安石不可比方之言, 誠窄矣。 臣則謂司馬光當新法撓民之餘, 如廉吏之代貪吏, 而易得淸名矣。 故天下至今稱之, 誠好八字矣。 變舊法至難, 罷新法至易, 有何才幹之的勝於安石者乎?" 上曰: "然。 儒臣雖以宋 神宗謂之用非其人, 當其時天下之勢, 不得不大振刷, 故銳意圖治, 堅定不貳。 予則以爲 ‘漢 武帝後, 惟神宗頗有事事之志矣。’ 國初《宋史》之未及出來也, 諸名碩預度之, 或曰: ‘安石必入佞幸傳’, 或曰: ‘當入名臣傳,’ 及得《名臣錄》, 則果編入其中, 而《宋史》亦然。 朱子旣以名臣許之, 豈非難得之人乎? 但引進呂惠卿輩, 此其大誤着矣。 大抵挽回世道, 亦係氣數盛衰, 雖曰人君不言命, 而予則以爲其時氣數似然矣。" 義鳳曰: "聖敎誠至當, 而第伏念世道汙隆, 專在於導率之如何。 顧今聖人在上, 化理淸明, 挽回氣數, 此正其時。 臣則以爲三代之治, 庶幾復見於今日矣。" 上曰: "風俗厚薄之稍移, 雖係於在上者, 而至若挽回古道, 則世益降而行不得矣。 如今奇巧已生, 淳風且邈, 上雖爲土階茅茨, 民孰肯汙樽坏飮乎? 雖然, 大國則地廣民衆, 風氣難於猝變, 而我國則偏邦也, 有何風氣之可論? 導率挽回, 似乎不難, 而尙未見俗習之丕變, 此予所以日夕反躬, 而莫知其所以然矣。"
- 【태백산사고본】 32책 32권 48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219면
- 【분류】왕실(王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