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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 32권, 정조 15년 3월 13일 정해 1번째기사 1791년 청 건륭(乾隆) 56년

사근역의 오래된 환자 곡식 2천여섬을 탕감해주도록 명하다

사근역(沙斤驛)의 오래된 환자 곡식 2천 섬을 탕감해 주었다. 이보다 앞서 영남 함양군(咸陽郡)에 환곡의 폐단이 있으므로 상이 특별히 어사를 파견하여 바로잡도록 하였다. 어사가 돌아와 사근역의 환곡의 폐단이 함양과 다름이 없다고 아뢰니, 상이 감사에게 바로잡아 구제할 계책을 강구하여 아뢰도록 명하였다. 이에 도신 이조원(李祖源)이 아뢰기를,

"본역의 원래 환곡 8천 5백 섬 가운데 정실(精實)한 것 1천 5백 섬을 골라 5백 섬은 본역에 두고 1천 섬은 속역(屬驛)에 나누어 보내 환자로 운영하게 하며 이미 썩어 흙먼지가 되어버린 것 이외에는 모두 돈으로 바꾸어 다른 고을에서 사오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는데, 그 장계가 분실되어 즉시 아뢰어 처리하지 못했다. 이때에 와서 상이 찰방 유정모(柳鼎模)를 불러 보고서야 그 사정을 알고, 전교하기를,

"내가 사근역의 백성들에게 신의를 잃게 되었다. 내가 만약 진실로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어찌 이런 일이 있었겠는가. 내 매우 두렵다."

하고, 또 전교하기를,

"함양의 환곡의 폐단은 비록 이미 바로잡았다 하지만 사근역의 환곡도 함양과 다를 것이 없다. 대체로 본역은 본읍에 끼어 있는데, 읍의 백성들은 한숨 돌리게 되었으나 역에 속한 백성들은 아직도 고통을 겪고 있으니, 이 어찌 똑같이 보아주는 도리이겠는가. 작년에 어사가 조정에 돌아와 연석에서 아뢰는 말을 듣고 특명으로 감사에게 백성들의 고통을 조사하여 바로잡으라 했으므로, 내 생각에는 감사가 이미 조사하여 바로잡아 역에 속한 백성들도 역시 실질적인 은혜를 받았으리라 여겼다.

그러나 그 실태에 대하여 듣지 못해 늘 마음속으로 미심쩍게 여겨 지난 가을부터 겨울, 그리고 달포 전까지 경연에서 물은 일이 10여 번 뿐만이 아니었다. 그때마다 묘당과 정원에서는 모르겠다고 하기 때문에 직접 본도에 물어보아야겠다 생각하면서도 미처 못하였다. 그러다가 엊그제 대신의 말을 듣고서야 본도에서 아직도 회답이 내려오길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비로소 본도의 백성들이 해를 넘기면서 애타게 기다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어찌 보고가 늦다고 찰방을 죄주었던 본뜻이겠는가. 오늘 찰방을 불러 묻고서야 사실을 자세히 알았으니, 어찌 묘당에서 회계하길 기다릴 것이 있겠는가. 썩어 흙먼지가 된 곡식과 거칠고 나빠서 팔기 어려운 것으로 창고에 남아 있는 것을 모두 탕감해 주도록 하라."

하고, 이어 이조원은 파직하고 비국의 유사 당상(有司堂上) 이병모(李秉模)를 삭직하도록 명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2책 32권 34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211면
  • 【분류】
    구휼(救恤) / 인사(人事) / 사법(司法)

○丁亥/蕩減沙斤驛舊糴二千石。 先是, 嶺南之咸陽郡有還弊, 上特遣繡衣釐正之。 繡衣歸奏, 沙斤驛還弊, 與咸陽無異, 上命道臣, 講究矯捄之策以聞。 道臣李祖源啓言: "本驛元還八千五百石之中, 擇其精實一千五百石, 五百石留置本驛, 一千石則分送屬驛, 以爲糶糴之地, 已成塵土者外, 幷作錢, 移貿他邑爲便", 狀本旋遺漏, 未卽稟處。 至是, 上召見察訪柳鼎模, 得其狀, 敎曰: "予於沙斤之民, 未免失信。 予若有誠信愛民之心, 豈有是也? 予甚瞿然。" 又敎曰: "咸陽糴弊, 雖已釐正, 沙斤驛還穀, 無異於咸陽。 大抵本驛, 介在本邑, 邑民則紓眉, 驛屬則喫困, 是豈一視之道乎? 昨年聞繡衣還朝後筵奏, 特令道伯, 査正矯瘼, 而意謂道伯已査矯, 而驛屬亦蒙實惠。 猶以形止之未聞, 心常訝之, 昨秋及冬至于月前, 提問於筵席者, 不啻十數遭。 廟堂、政院, 輒曰不知, 故直欲提問本道而未果。 日昨聞大臣言, 知本道之至今待回下。 於是乎始覺本驛民人之經歲懸企, 是豈以晩報罪郵官之本意乎? 今日召問察訪, 詳知事實, 豈待廟堂回啓? 塵土穀與麤劣難貿者, 留庫牟, 一幷蕩減," 仍命李祖源罷職, 備局有司堂上李秉模削職。


  • 【태백산사고본】 32책 32권 34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211면
  • 【분류】
    구휼(救恤) / 인사(人事) / 사법(司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