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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 32권, 정조 15년 3월 9일 계미 2번째기사 1791년 청 건륭(乾隆) 56년

문종 대왕의 왕비 공빈 최씨에 대한 의혹을 전거를 살펴 해명하다

사간 윤행리(尹行履)가 상소하기를,

"신이 일찍이 《국조보략(國朝譜略)》을 열람하다가 우리 문종 대왕의 왕비 자리가 10년이나 비어 있었던 부분에 이르러 내심 의아스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고, 지난번 한식절 제향 때 외람되게도 현릉(顯陵)의 전사관(典祀官)이 되어 능침을 우러러 뵈니 사모하는 마음이 더 한층 사무쳤습니다. 생각건대 우리 현덕 왕후(顯德王后) 권씨(權氏)062) 가 승하하신 것은 세종 23년 신유년으로 문종께서 세자로 계실 때인데 세자의 자리에 계시면서 어찌 세자빈의 자리를 하루라도 비워둘 수 있었겠으며, 또 경오년063) 에 등극하신 뒤에도 어찌 한때라도 왕비 자리를 비워둘 수 있었겠습니까. 예법으로 따져 보아도 반드시 그럴 리가 없을 것인데 단지 근거할 만한 문헌이 없기 때문에 의문을 의문 자체로 놔둔 지 오래 되었습니다.

그런데 고 정승 김재로(金在魯)가 명을 받들고 연경에 갔을 때 명나라의 서적을 보니 ‘경태(景泰)064) 경오년에 태감(太監)을 보내 조선 국왕 및 왕비 최씨의 고명(誥命)과 면복(冕服)을 주었다.’ 하는 말이 있어 깜짝 놀라 말하기를, ‘우리 나라에는 최씨 왕후가 안 계신다.’ 하고 예부에 글을 올리는 일이 있기까지 하였습니다. 그 후 충주(忠州)의 진사 김경지(金敬之)가 상소하였는데 거기에 ‘우리 나라는 근거할 만한 문헌이 없어서 최씨 왕비가 있었는지 몰랐는데, 다행히 중국의 서적을 통하여 상고할 수 있었다’ 하였으므로, 우리 영종 대왕께서 서둘러 사관에게 실록을 상고해보게 하셨으나 최씨 왕비를 세운 일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 그 일이 중지되었습니다. 신은 그때 상고한 실록이 과연 세종조의 실록이었으며 신유년 이후 경오년까지 과연 빈을 책봉한 일이 없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신이 삼가 연산조 때 대사간 김극뉵(金克忸) 등이 소릉(昭陵)065) 의 복위를 청한 글을 보았더니 거기에는 ‘문종 원비(元妃) 권씨가 죽은 시기는 노산군(魯山君)보다 앞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한꺼번에 소급하여 폐위시켰다.’ 하였습니다. 연산군의 시대는 문종조와 시기가 그다지 멀지 않은데 이미 원비(元妃)라는 말을 하였으니, 계비(繼妃)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전주 최씨(全州崔氏)의 족보에는 ‘공빈(恭嬪)’이라 되어 있고 자손이 없다고 하였으며 그 부친의 이름은 최도일(崔道一)임영 대군(臨瀛大君)의 처남이라 하였습니다. 세상 사람들 중에 혹자는 이분이 곧 문종비로서 세자빈일 때의 칭호인 공빈(恭嬪)을 쓴 것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예로부터 구전되는 말이고 문헌이 있는 것이 아니니, 신이 어찌 감히 오늘에 와서 단정하여 말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고 상신이 본 명나라 서적과 김극뉵이 말한 원비라는 내용을 가지고 최씨 족보에서 말한 공빈이란 칭호를 참조해보면 우연한 일은 아니지만 끝내 확실하게 단정지을 수 없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세종조의 실록을 다시 상고하여 신유년 이후 만약 세자빈을 책봉한 일이 있다면 근거로 삼을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일은 더없이 중대하니 묘당에 물으시고 문헌을 널리 상고하여 빠진 사실을 보충하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상소 가운데 진술한 문제는 항상 의혹스러워 감히 마음속에 잊지 못하던 일이다. 하물며 요즈음은 장릉(莊陵)에 배식(配食)하는 일로 인해 대략 의리상으로 강구하고 시행하는 조처가 있었으니, 이런 때에 이런 일을 어찌 한층 더 널리 상고하고 물어서 답답한 의심을 풀고 싶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 일은 매우 중대한 데다가 그 내막은 지극히 아리송하니 이 때문에 말을 하고 싶어도 감히 말을 하지 못하고 어느덧 지금에 이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네 상소가 올라왔다는 말을 듣고 가져다가 보았더니 처음 서두에서는 나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흐뭇하다가 차츰 읽어내려가 결말에 이르러서는 네 말도 의문인 채로 놔둔 것에 지나지 않으니, 내 의혹이 이로써 더욱 깊어진다. 고 상신 김재로연경에 갔을 때의 일을 기록한 것은 일찍이 경연관을 통해 접해 보았고 문종께서 등극하실 때 칙서를 받은 사실도 역사서에 실려있기 때문에 알고 있는 것이며, 최씨 족보에 기록된 것도 역시 상소의 내용과 약간 어긋난다. 다만 《세조실록》에 있는 금성 대군(錦城大君)의 사실 가운데 ‘처족을 왕비로 세우려 하다가 되지 않았고 중궁을 자기가 세운 것이 아니라 하여 갖가지 계책으로 이간질을 하였다.’ 한 말이 있는데, 이것이 조금이나마 근거로 삼을 만한 증거가 되지 않겠는가. 이른바 처족이란 곧 창승(倉丞) 최도일(崔道一)이다. 또 세우려고 하다가 되지 않았고 자기가 세운 것이 아니라고 하였으니, 요컨대 문종께서 계비를 세우는 예를 거행한 일이 있긴 하지만 그 계비는 창승을 지낸 최도일의 딸이 아니라는 것도 역시 분명하다.

아, 자규루(子規樓)의 옛터가 오늘에 와서 갑자기 나타난 것도 오히려 기이한 일이라 여겼는데, 이 일이 혹시라도 믿을 수 있는 분명한 근거가 나타나 1백 년 동안이나 미처 하지 못했던 일을 시원하게 거행할 수 있게 된다면, 이 어찌 다만 내 마음에만 다행이겠는가. 환하게 오르내리는 신령께서도 반드시 기뻐할 것이다."

하였다. 막 대신과 춘추관의 당상관을 불러 만나보고 근거를 찾는 방법을 모색하려던 참이었는데 이때 이미 밤이 깊어가고 또 비가 왔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특별히 대신과 각신, 춘추관의 당상관과 윤행리를 불러 하교하기를,

"선조(先朝) 때에도 이 일을 상소로 청한 자가 있었는데, 성왕께서 크게 놀라워하면서 실록을 상고해내도록 명하셨다. 나는 이 일에 대해 의문이 계속 쌓여 마음이 답답한 지 오래되었다. 지난번에 장릉의 일로 인해 《세조실록》을 조사해 온 것 중에 최씨의 사실이 있었는데 그 내용으로 보면 최씨는 애초에 빈으로 책봉한 일이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중궁은 자기가 세운 것이 아니라고 한 말로 보면 혹시 그때 이미 정해진 왕비가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혹시 현덕 성후(顯德聖后)를 두고 하는 말인지 알 수 없다. 이것은 대간이 모른다고 한 사안이자 나도 의심이 나는 점인데 경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좌의정 채제공이 아뢰기를,

"고 참판 오광운(吳光運)이 예조 참판으로 있을 때 장령 강필신(姜必愼)이 이 일을 임금께 진달할 것을 권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광운은 서적을 널리 상고하고 밤낮으로 오랫동안 깊이 생각한 끝에 깨닫고 말하기를, ‘현덕 왕후가 승하하신 뒤에 문종께서는 육례(六禮)를 갖추어 친영(親迎)하신 빈이 없었다. 경오년 2월에 상중에 접어들어 임신년 4월이 담제(禫祭)를 지내는 달이었는데 승하하신 것은 5월이니, 상중에 중궁을 책봉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예법이다. 후세의 사람들이 이 점을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왕비 자리가 비어 있었던 것에 대해 의심을 하니, 진실로 가소로운 일이다.’ 하고는 이런 뜻을 강필신에게 말하였습니다."

하고, 직각 서영보(徐榮輔)는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고 상신 김재로《부연일기(赴燕日記)》를 보니, 임자년066) 에 반포한 《명사(明史)》 가운데 우리 나라에 관한 기록의 등본에 잘못 쓴 것이 많았으니, 문종 왕비의 성을 잘못 쓴 것이 그중에 하나였습니다. 고 상신 김재로무오년067) 에 사신으로 간 것은 대개 사서(史書)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었고 끝내 그것을 바로잡고 돌아왔습니다. 이처럼 그 사실이 대간의 상소 내용과는 크게 다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래도 한 번은 역사서를 상고하지 않을 수가 없다. 먼저 춘추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선조의 실록부터 자세히 상고해 보면 《세종실록》을 상고한 일이 반드시 그 안에 기록되어 있을 것이다."

하고, 이어 채제공 등에게 명하여 다음날 춘추관에 가서 선조의 실록을 상고해보도록 하였다. 춘추관이 아뢰기를,

"신들이 선조의 실록을 삼가 상고해 보니, 정묘년068) 12월 충청도 유학(幼學) 박통원(朴通源) 등이 상소하기를 ‘《명사》 열전(列傳)에 왕후에게 고명(誥命)을 내렸다는 문장이 있는데 그 연월을 상고해 보면 문종조에 있었던 일인 듯하고, 또 고양(高陽)에 옛 무덤이 하나 있는데 옛날 노인들이 공빈 최씨(恭嬪崔氏)의 무덤으로 전하고 있으며, 연대로 추정해보면 문종조에 해당하는 듯합니다. 이로 보면 반드시 계비 최씨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증명할 만한 문헌이 없으니, 문헌을 널리 상고하기를 청합니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상이 대신들에게 물어서 의논하도록 명하니, 대신들이 모두 실록을 상고해 보도록 청했으므로 드디어 지춘추(知春秋) 김시형(金始烱), 검열 심관(沈鑧) 등에게 명하여 정족 산성(鼎足山城)에 있는 사고에 가서 세종·문종·단종 세 조정의 실록을 상고하게 하였습니다. 같은 달 22일 시형 등이 별단(別單)을 올리기를 ‘세종 23년 신유년에 세자빈 권씨가 돌아가시고, 9월에 의정부에서 가례색(嘉禮色)을 설치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습니다. 12월에 사정전(思政殿)에서 친히 처녀들을 선발했는데, 판 서운관사 문민(文敏)과 예빈 직장(禮賓直長) 권격(權格)의 딸을 취하여 모두 승휘(承徽)로 삼았습니다. 병인년069) 소헌 왕후(昭憲王后)의 상에 예조에서 복제(服制)에 대해 아뢸 때, 승휘의 복제에 대한 것만 실었고 빈궁의 복제는 애당초 거론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무진년070) 5월에는 동궁에 윤씨(尹氏)를 들여 소훈(昭訓)을 삼았으니, 곧 윤희(尹熺)의 딸입니다.’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문종(文宗) 경오년(1450)에 태감(太監) 윤봉(尹鳳) 등이 문종의 책봉에 관한 고명을 가지고 나와서 중궁에게 관복(冠服) 차림으로 나오라고 하였고 《의주(儀註)》 안에도 왕후가 나와 직접 조칙을 맞이한다는 말이 있었으나, 여러 사람들이 의논한 끝에 응답하기를 「본디 이런 전례가 없고 더구나 지금은 왕후께서 이미 돌아가셨다.」 하였습니다. 문종께서 승하하신 뒤에 예조에서는 단지 귀인(貴人)·소용(昭容)·공주의 복제만 논의했을 뿐 역시 내전(內殿)의 복제를 마련한 일이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또 아뢰기를 ‘단종 임신년에 강맹경(姜孟卿) 등이 아뢰기를 「내정(內政)은 지극히 중요한데 오랫동안 모후(母后)가 안계시니, 홍 귀인(洪貴人)이 내정을 총괄하게 하소서.」 하였고, 계유년에는 세조께서 수양 대군(首陽大君)의 신분으로 백관을 거느리고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위로는 모후의 보호해 주시는 힘이 없고 아래로는 현비(賢妃)의 경계해 주는 도움이 없습니다.」 했습니다.’ 하였습니다.

시형 등이 입시하자 상이 하교하기를 ‘이제 역사를 상고한 등본을 살펴보니, 현덕 왕후께서 빈궁으로 계시다가 승하하신 뒤에는 비록 문씨권씨를 선택하여 승휘로 삼은 일은 있었으나 빈으로 책봉한 일은 없다. 병인년 소헌 왕후의 상사 때 단지 승휘 등의 복제만 있었을 뿐 빈궁의 복제는 없었으니, 빈궁의 자리에 책봉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종의 상사 때도 단지 단종 및 내외 명빈(內外命嬪)의 3년 복제가 있을 뿐 중궁전의 삼년 복제는 없었다. 명부에 대해서도 자세히 썼는데 하물며 왕비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이 역시 근거가 될 만한 일이다. 문종께서 세자로 계실 때나 등극하신 뒤에도 공빈 최씨라는 칭호는 전혀 실려 있지 않으며, 또한 당장 해명할 수 있는 것이 있다. 경오년 태감 윤봉이 국왕과 왕비의 면복을 가져왔을 때, 내전이 영접하는 예에 대해 묻자, 여러 사람들이 「예법에 없는 일이고, 더구나 지금은 왕비가 이미 돌아가셨다.」고 대답했는데, 이로써 미루어보면 그것은 곧 현덕 왕후의 면복이었고 황제의 글 속에서도 권씨라 부르고 있다. 임신년 7월에 강맹경 등이 단종에게 아뢰기를 「내정은 지극히 중요한데 오랫동안 모후가 계시지 않았으니, 선조의 귀인 홍씨로 내정을 총괄하게 하소서.」 하였으니, 이것은 문종에게 왕비가 안계셨다는 첫 번째 증거이다. 계유년에 세조께서 잠저(潛邸)에 계실 때 정인지(鄭麟趾) 등을 거느리고 청하기를 「위로는 모후의 보호해 주는 힘이 없고, 아래로는 현비의 경계해 주는 도움이 없으시니, 왕비를 들여 세워 후사를 얻어 선왕의 대를 이으소서.」 하였으니, 이것은 문종에게 왕후가 없었다는 두 번째 증거이다. 다음해 정부와 육조가 의논을 올려 현덕 왕후의 존호 6자를 올렸으니, 문종의 왕후로는 단지 현덕 왕후만이 계셨다는 것은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다. 다만 10년 동안이나 빈위(嬪位)를 비워 두고 2년이나 왕비 자리를 비워두었기 때문에 왕홍서(王鴻緖)《명사(明史)》 기록 가운데 성씨를 잘못 최씨로 썼고 최씨의 족보 가운데 공빈(恭嬪)이라 기록한 것은 의심스러운 기록을 억지로 끌어다 댄 것이었음을 이번 걸음에서 시원하게 알게 되었다. 이로써 왕홍서의 기록은 잘못된 것이고 새로 간행된 「명사」가 믿을 만한 책임을 당장 해명할 수 있게 되었다. 중외로 하여금 모두 이런 사실을 알게 할 것이며, 호서 유생의 상소는 이제 다시 의심할 것이 없으니 돌려주도록 하라.’ 하였습니다.

신들이 삼가 실록에 있는 별단(別單)과 선조(先朝)의 하교를 서로 대조하여 고증해보니, 승휘(承徽)와 소훈(昭訓)을 뽑은 사실은 모두 실려있으나 유독 공빈 최씨만은 빠져있으니, 이것은 《세종실록》을 근거로 하여 의심을 풀 수 있는 점입니다. 고명(誥命)을 영접하는 의식에 ‘이미 돌아가셨다.’ 하였고 복제를 아뢸 때도 왕비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으니, 이는 《문종실록》을 근거로 하여 의심을 풀 수 있는 점입니다. 이미 귀인으로 하여금 내정을 총괄하도록 청하였고 또 ‘위로는 모후의 보호해 주는 힘이 없다.’ 하였으니, 이는 《단종실록》을 근거로 하여 의심을 풀 수 있는 점입니다. 나아가 왕홍서《명사》로 말한다면 그것은 곧 초고로서 강희(康熙) 이후에 추가하거나 삭제하는 일이 계속되다가 장정옥(張廷玉)이 총괄하여 마름한 뒤에야 비로소 지(志)·전(傳)을 갖추어 천하에 반포하였으니, 이것이 마땅히 정본(正本)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나라에 관한 열전을 상고해 보면, 분명히 왕비 권씨라고 실려 있으니, 이것이 바로 선조(先朝)의 하교에 당장 해명할 수 있다는 말씀이 있게 된 근거입니다.

실록을 참고해 보아도 이미 이와 같고 정사를 고증해 보아도 또 저러한 데다가 선조의 하교 또한 너무도 상세하니, 문종께서 계비를 책봉하신 일이 없고 최씨를 애초에 뽑아들인 일이 없다는 것은 거의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대간의 상소 가운데 언급한 유생 김경지(金敬之)의 상소문은 실록이나 승정원에 모두 실려 있지 않은 것으로서 근거할 데가 없습니다. 이제 이처럼 실록을 상고해 보라는 하교는 실로 일이 막중하여 반드시 자세하고 신중하게 하자는 성상의 뜻에서 나온 것이지만, 신들이 각 시대의 실록을 두루 상고해 보아도 끝내 의거할 수 있는 문헌을 찾을 수 없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일찍이 들으니, 선조께서 이 일 때문에 세종·문종·단종 세 조정의 실록을 상고할 것을 명하시고, 이어 경연관에게 하교하기를 ‘춘추관의 당상관과 낭관이 복명하기 전에는 옷을 단정히 입고 기다리겠다.’ 하시므로 대신(大臣)과 여러 신하들이 여러 날 애써 간하였으나 듣지 않았으며, 그들이 복명한 뒤에는 윤음을 내려서 중외의 의혹을 깨우쳤다고 하였다.

이 하교가 환하게 선조의 실록에 실려 있는데, 요즈음 사람들이 전고(典故)에 어두워 이번에 대간 윤행리(尹行履)의 상소가 있게 된 것이다. 그 일을 중요시하는 뜻에서 곧 대신들에게 물으니, 대신도 역시 그때의 일을 기억하고 심지어 의심스럽지 않은데 무엇을 점칠 것이냐는 말까지 하였다. 그러나 선조의 하교와 문헌을 상고하기 전에는 단지 대신이 경연에서 아뢴 말만 따라 의심스러운 일을 결정짓기가 어려워 선조의 실록을 삼가 상고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경들이 아뢴 말을 보니, 세 조정의 실록에 실려 있는 것과 선조께서 분석하신 윤음은 실로 후세에 증거로 내세울 수 있는 자료가 된다. 그러니 내 어찌 다른 의견이 있겠는가. 지금부터는 이를 받들어 믿어서 전날의 의혹을 통쾌하게 풀 수 있겠으니, 이 아뢴 말을 조보(朝報)에 베껴 반포하여 누구나 그 사실을 자세히 알 수 있도록 하라."

하고, 이어 전교하기를,

"일찍이 들으니, 선조께서 춘추관의 당상관과 낭청이 6일 뒤에 복명할 때까지 의관을 바로 차려 입으신 채 기다리셨으며 심지어 밤에도 잠자리에 들 사이가 없었으므로 대신과 여러 신하들이 극력 청해도 듣지 않으셨다 하였다. 이제 실록과 《정원일기》에서 상고한 것을 보니 과연 전에 들은 것과 같아서 선왕을 받들고 추모하는 성덕(聖德)을 우러러 엿볼 수 있다. 이것은 단지 40년 전의 일에 지나지 않는데 세상에 아는 사람이 없으니, 요즈음 사람들은 이처럼 고루하다. 앞으로 시대가 조금만 더 멀어지면 오늘날 대간의 의논과 같은 것이 다시 없으리라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 김경지의 상소문은 두루 상고해 보아도 없다고 하니, 이는 대간이 박통원(朴通源)의 상소를 잘못 듣고 말한 것은 아닌가. 이 초기(草記)도 조보에 베껴 반포하여 중외가 모두 사실을 알고 의심을 환하게 풀도록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2책 32권 30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209면
  • 【분류】
    왕실(王室) / 역사(歷史)

  • [註 062]
    현덕 왕후(顯德王后)권씨(權氏) : 문종의 비.
  • [註 063]
    경오년 : 1450 세종 32년.
  • [註 064]
    경태(景泰) : 명 대종(明代宗)의 연호.
  • [註 065]
    소릉(昭陵) : 단종의 생모 현덕 왕후의 능.
  • [註 066]
    임자년 : 1732 영조 8년.
  • [註 067]
    무오년 : 1738 영조 14년.
  • [註 068]
    정묘년 : 1747 영조 23년.
  • [註 069]
    병인년 : 1446 세종 28년.
  • [註 070]
    무진년 : 1448 세종 30년.

○司諫尹行履上疏曰:

臣嘗敬覽《國朝譜略》, 至我文宗大王壼闈之十年虛位, 竊不勝訝惑之忱, 頃於寒食節享之時, 猥忝顯陵典祀之官, 仰瞻仙寢, 倍激葵忱。 惟我顯德王后 權氏昇遐, 在世宗朝辛酉之歲, 卽文宗在震邸之時也。 莅貳極之位, 而豈可一日曠嬪位也, 又於庚午登極後, 亦豈可一時曠壼位也哉? 揆以典禮, 理所必無, 只以文獻之無可考, 屬之闕疑者久矣。 及夫故相臣金在魯, 奉命赴也, 見皇書籍, 有曰: "景泰庚午, 遣太監, 賜朝鮮國王及王妃崔氏誥命、冕服" 云, 驚曰: "我朝無崔氏王后也", 至有呈文禮部之擧。 伊後忠州進士金敬之上疏, 有曰: "我國文獻無徵, 不知有崔妃事, 而幸賴中國書籍, 可以考據。" 我英宗大王, 亟令史官, 考出實錄, 無冊立崔妃之事, 故其事遂寢。 臣未知其時所考之實錄, 果是世宗朝實錄, 而辛酉以後至庚午, 果無冊嬪之事乎? 臣竊伏見燕山朝大司諫金克忸等請復昭陵之言, 有曰: "文宗元妃權氏亡, 在魯山之前, 而一時追廢。" 燕山之世, 去文宗朝, 不甚遠矣, 旣曰元妃, 則可知有繼妃也。 且於全州 崔氏譜冊, 有云恭嬪, 以無后書之, 其考名道一也, 而臨瀛大君之妻娚也。 世之人, 或謂: "是文宗妃位, 而只書世子嬪時所稱之恭嬪" 云。 此是自古口傳之言, 非有文蹟, 則臣何敢質言於今日乎? 第以故相臣所見皇朝書籍與金克忸所稱元妃之義, 參以崔氏譜所稱恭嬪, 則事不偶然, 而終歸未詳。 臣意以爲, 世宗朝實錄, 更爲詳考, 辛酉以後, 如有世子嬪冊立之事, 則可謂考據之階梯, 係是莫重莫大之事, 下詢廟堂, 博考文蹟, 以補闕典焉。

批曰: "疏中所陳之事, 常所耿耿致惑, 不敢弛忽于中者。 況於近日, 以莊陵配食事, 略有義起講行之擧, 則此時此事, 尤豈不欲廣稽而博詢, 以決積鬱之疑? 然其事則莫重莫大, 其詳則至晦至昧, 此所以欲言不敢言, 荏苒至于今。 際聞有爾疏, 取見發語, 不覺怳然會心, 次次閱過, 至結尾, 爾言不過存疑, 予惑因此愈邃。 故相金在魯時紀述, 嘗從筵臣而見之矣, 文廟登極勑事實, 載在史傳, 故知之矣, 崔氏譜牒註錄, 亦與疏語, 差爽矣。 㝡是光廟實錄中, 錦城事, 有欲以妻族, 立爲王妃, 而不得以中宮, 非已所立, 百計離間之語, 似爲一分可據之證耶? 所謂妻族, 卽指倉丞崔道一也。 且云欲立不得, 非已所立, 則要之文廟有建繼妃之禮, 而繼妃之非倉丞之, 亦明矣。 噫! 規樓故基之忽顯於今日, 尙以爲奇異, 此事又或得出徵信之的確, 快擧百年未遑之典, 是豈特於予心與有幸焉? 於昭陟降洋洋之靈, 必有悅豫。" 方召接大臣、春秋館堂上, 諮度攷據之道, 時夜色將闌, 天且雨(雨), 而特召大臣、閣臣、春秋館堂上及尹行履, 敎曰: "先朝亦有此事疏請者, 聖心大致驚動, 命考出實錄。 予於此事, 積有疑晦, 怵惕于中者久矣。 向因莊陵事, 考來光廟實錄中, 有崔氏事實。 以此觀之, 崔氏初無冊嬪之事明矣, 而中宮非已所立云者, 或其時固有已定之壼位耶? 抑或以顯德聖后爲說耶? 此是臺臣之所不知, 而予所滋惑者, 卿等以爲何如?" 左議政蔡濟恭曰: "故參判吳光運, 爲禮曹參判時, 掌令姜必愼, 勸以此事陳達。 光運乃博考書籍, 日夕沈思, 久之乃悟曰: ‘顯德王后昇遐之後, 文廟無六禮親迎之嬪, 而庚午二月在諒闇, 壬申四月, 乃禫月, 而昇遐在於五月, 則諒闇之中, 不得冊立中宮, 禮固然矣。 後人不能思量及此, 致疑於壼位之闕, 良亦可笑’, 遂以此意, 復于必愼矣。" 直閣徐榮輔曰: "臣曾見故相金在魯 《赴燕日記》,則壬子年頒下《明史》國傳謄本多誤寫, 而文宗王妃姓氏誤書, 卽其一事也。 故相戊午使行, 蓋爲釐改史書之謬, 竟得釐改而歸。 其事實, 與臺疏, 大相左矣。" 上曰: "不可不一番考史。 先就春秋館所藏先朝實錄詳考, 則英陵實錄考出事, 必載於其中。" 乃命濟恭等, 翌日詣春秋館, 考出先朝實錄。 春秋館啓言: "臣等奉考先朝實錄, 則丁卯十二月, 忠淸道幼學朴通源上疏言: ‘《明史》列傳, 有賜王后誥命之文, 考其年月, 似在文宗朝, 且高陽有一古墓, 故老相傳以恭嬪崔氏之墓, 推以年代, 似在文宗朝矣。 此必有繼妃崔氏, 而文獻莫徵, 請博攷文蹟。’ 上命問議大臣, 大臣皆請考見實錄, 遂命知春秋金始烱、檢閱沈鑧, 進詣鼎足山城史閣, 奉考世宗文宗端宗三朝實錄。 本月二十二日, 始烱等進別單曰: ‘世宗辛酉七月, 世子嬪權氏卒, 九月議政府請設嘉禮色, 從之。 十二月, 親選處子于思政殿, 取判書雲觀事文敏、禮賓直長權格之女, 皆爲承徽。 丙寅昭憲王后喪, 禮曹服制之啓, 只載承徽服制, 而嬪宮服制, 初不擧論, 戊辰五月, 納尹氏于東宮, 封昭訓, 卽之女也。’ 又曰: ‘文宗庚午, 太監尹鳳等, 齎奉主上襲封誥, 例命中宮冠服出來, 《儀註》中, 有王后出迎賜勑之語, 而僉議答以: 「本無是, 況今王后已薨」 云云。 及至文宗昇遐後, 禮曹只論貴人、昭容、公主服制, 而亦無內殿服制磨鍊。’ 又曰: ‘端宗壬申, 姜孟卿等啓言: 「內政至重, 久無母后, 請以洪貴人摠內政」 云。 癸酉光廟首陽大君, 率百官啓曰: 「殿下上無母后保護之力, 下無賢妃儆戒之助」 云。’ 及始烱等入侍, 上敎若曰: ‘今覽考史謄本, 顯德王后在嬪宮昇遐後, 雖選文氏權氏爲承徽, 而無冊嬪事, 丙寅昭憲王后國恤, 只有承徽等服制, 無嬪宮服制, 嬪位之不冊封, 可知。 文宗國恤時, 只有端廟及內外命嬪三年之制, 無中宮殿三年之制。 旣詳書命婦, 況壼位乎? 此亦可證。 文宗在邸與登位後, 恭嬪崔氏之號, 俱無載錄, 而亦有可以立辨者。 庚午太監尹鳳, 齎來國王王妃冕服而來, 其時詢問內殿迎接之禮, 僉曰: 「禮無, 況今王妃已薨乎?」 以此推之, 此乃顯德王后冕服, 而皇制中稱權氏。 壬申七月, 姜孟卿等啓于端廟 「內政至重, 久無母后, 請以先朝貴人洪氏摠內政」 云, 此無文廟壼位之一可證也。 癸酉光廟在潛邸時, 率鄭麟趾等, 請以: 「上無母后保護之力, 下無賢妃儆戒之助, 納妃求嗣, 以承先王之統」, 此無文廟壼位之二可證也。 翌年, 政府、六曹獻議, 加顯德王后尊號六字, 文宗王后, 只有顯德, 昭然無疑。 第以十年嬪位之曠, 二年壼位之缺, 王鴻緖史記中氏姓之誤書崔氏, 族譜中恭嬪之載錄, 傅會疑錄, 今行快知。 因此而王鴻緖之誤稿, 新刊《明史》之爲信本, 可以立辨, 令中外, 咸皆聞知, 湖儒之章, 今無更疑, 給之。’ 臣等謹以實錄別單及先朝下敎, 參互考證, 則承徽昭訓之選, 無不載錄, 而獨漏恭嬪崔氏, 此《世宗實錄》之可據而釋疑也。 迎誥之儀, 旣曰已薨, 服制之啓, 又不論及, 此《文廟實錄》之可據而釋疑也。 旣請貴人之代總內政, 又言上無母后保護之力, 此《端廟實錄》之可據而釋疑也。 至於王鴻緖《明史》, 乃是草稿, 康熙以後, 增損無常, 及夫張廷玉摠裁, 然後始具志、傳, 頒行天下, 此當爲正史。 今考我國列傳, 明以王妃權氏載錄, 此所以先朝下敎, 有可以立辨之諭也。 參之實錄而旣如此, 證之正史而又如彼, 況先朝下敎, 又不啻縷縷, 文宗之幷不載錄, 無以憑據。 今此考出秘史之敎, 實出於事關莫重, 必致審愼之聖意, 臣等遍考各年實錄, 終未得可據文蹟矣。" 敎曰: "嘗聞先朝以此事, 命考世宗文宗端宗三朝實錄, 仍敎筵臣, 以春秋館堂郞復命前, 當整衣待之。 大臣諸臣, 累日力諫不聽, 及其復命, 下絲綸, 以曉中外之惑。 此敎昭載先朝實錄, 而近來人昧於典故, 有今番臺臣尹行履之疏矣。 以重其事之意, 卽問大臣, 大臣亦記有伊時事, 至謂以不疑何卜, 而先朝絲綸文蹟未考出之前, 有難只從大臣筵奏而決疑, 有奉考先朝實錄之擧。 觀此卿等啓語, 三朝實錄所載, 先朝絲綸剖示, 實爲後來徵信之資, 予豈有別見? 自今可以奉以信之, 快釋前惑。 以此啓辭, 謄頒朝紙, 俾各詳知事實。" 仍敎曰: "曾聞先朝春秋館堂、郞, 六日復命, 而整衣待之, 至於夜不遑寢, 大臣諸臣, 力請而不聽。 今見實錄及《政院日記》考出者, 果如前聞, 可以仰見奉先追遠之聖德。 此不過四十年前事, 世無知之, 今人之固陋如此。 此後耳目稍遠, 則安知無復如今日臺言之論乎? 金敬之疏, (編)〔徧〕 考而無所載, 臺臣誤聞朴通源疏而言之耶? 此草記謄頒朝紙, 俾中外咸知事實, 曉然釋疑。"


  • 【태백산사고본】 32책 32권 30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209면
  • 【분류】
    왕실(王室) / 역사(歷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