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관찰사 윤사국이 자규루를 중거한 사실을 보고하다
강원도 관찰사 윤사국(尹師國)이 자규루(子規樓)를 중건한 사실을 보고하였다. 그 누각은 영월부(寧越府)의 객관(客館) 곁에 있는데, 옛 이름은 매죽루(梅竹樓)였다. 단종(端宗)이 동쪽으로 옮겨갔을 때 언제인가 그 누각에 와서 소쩍새 소리를 듣고 자규사(子規詞)를 지었는데, 그 가사가 매우 처절하여 영월 사람들이 슬퍼한 나머지 그 누각을 자규루라 이름하였다. 사국이 고을을 순찰하다가 영월에 도착하여 중건할 계획으로 그 터를 찾아보니 이미 매몰되어 그 자리에 민가가 자리잡고 있었으므로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빈터를 찾아서 측량을 하려고 했더니, 갑자기 천둥이 치고 비가 쏟아져 일을 할 수가 없었다. 다음날 큰 바람이 불더니 불이 나서 객사 남쪽에 있던 집 5채를 태워버리고 나니 누각의 터와 계단이 또렷이 드러났는데 그 높이가 평지에서 1자 정도 솟아올랐다. 그 당시 날씨가 춥고 눈이 쌓여 목재와 돌을 구할 수 없으므로 사람들이 다 걱정하던 차에 마침 큰 비가 사흘이나 내려 강물이 크게 불어났다. 그리하여 금장강(錦障江)의 동쪽에서 나무를 베어서 강물에 띄워 흐름을 타고 내려오게 하고, 봉산(蓬山)의 북쪽에서 돌을 캐었는데 진흙이 미끄러워 운반하기가 쉬었다. 경연관 이만수(李晩秀)가 그 사실을 아뢰자 상이 매우 이상하게 여기고 감사에게 하유하여 그 자세한 내용을 물었다. 이때에 와서 사국이 치계하여 그 일을 갖추어 말하니, 전교하기를,
"이상하다. 이상하다. 어찌 한 누각이 허물어진 것을 수선하는 것만이 각기 때가 있다고 말할 뿐이겠는가. 옛터를 찾을 때 갑자기 불이 나서 5채의 오두막을 태우고 바람이 일어나 그 형세를 도와 재와 모래를 쓸어서 날려보내, 옛날 기왓장이 흙 밑에서 드러나고 무늬 있는 주춧돌이 옛터에서 드러났다. 심지어는 한겨울 깊은 산골에 사흘이나 큰 비가 내려 높은 산비탈의 쌓인 눈을 녹여 버려 나무를 베고 돌을 캘 수 있었다. 동지와 섣달 사이에 그것을 실어다가 1월에는 기초를 닦고 2월에는 기둥을 세웠으니, 그 공사의 신속함은 귀신의 이치가 사람의 마음과 잘 어울린 것을 볼 수 있었는데 조정에서는 전혀 이와 같은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때마침 생각이 나서 사육신의 충절에 감회가 일어나 사신(史臣)을 보내 금궤 석실(金櫃石室)에 있는 실록을 상고하게 하였다. 그런데 사신이 돌아와 복명한 날이 곧 자규루의 기둥을 세운 길일이었으니, 이것을 우연하고 예사로운 일이라 할 수 있겠는가. 제사를 지내는 일은 바야흐로 관각의 신하에게 별도로 비지를 내려 초기(草記)하도록 하겠거니와, 누각을 다시 짓는 일을 어찌 도백에게 비용을 내도록 하겠는가. 모두 공곡(公穀)으로 탕감해 주도록 하라."
하고, 대신 이복원(李福源)에게는 그 일을 기록하도록 하고 대신 채제공(蔡濟恭)과 이조 판서 홍양호(洪良浩)에게는 상량문을 지어 올릴 것을 명하였다. 또 해마다 능을 봉심하는 예조의 관원으로 하여금 한식에 맞추어 가서 신령에게 사유를 아울러 고할 것을 명하였다. 또 감사에게 자규루의 모양을 그려 올릴 것을 명하고 하유하기를,
"고을 안에 전해 내려오는 옛이야기가 있으면 간행본이나 필사본이나 혹은 조각나서 불완전한 글이라도 관계치 말고 능지(陵誌)에 실리지 않은 것이 있으면 거두어 모아서 올려 보내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2책 32권 13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200면
- 【분류】건설(建設) / 왕실(王室)
○江原道觀察使尹師國, 以子規樓改建, 聞。 樓在寧越府客館之傍, 舊名梅竹樓。 端宗東巡, 嘗御此, 聞子規聲, 作《子規詞》, 詞甚淒切, 越人悲之, 名其樓曰子規樓。 師國巡到寧越, 謀重建, 訪其址, 已沒爲民居, 不可復識。 乃就曠地, 測圭議之, 忽雷雨不克事。 翌日大風, 以火燒客舍南五戶而止, 樓基階戺, 宛然呈露, 其高出平地尺。 時天寒積雪, 不可以取木石, 人皆憂之, 會大雨三日, 江水大漲。 於是伐木於錦障之東, 浮之江, 順流而下, 斲石於蓬山之北, 泥滑易運。 筵臣李晩秀以聞, 上大異之, 下諭問其狀。 至是, 師國馳啓, 具言其事, 敎曰: "異哉異哉! 豈特一樓之繕頹, 各有時存焉云爾乎哉? 尋基也火忽起燒, 拓五箇蝸廬, 風從而助勢, 掃揚灰沙, 舊礫現於土底, 紋礎露於基上。 甚至窮冬絶峽, 大霔三日, 雨瀜盡層, 崖塞雪木, 於是斫石, 於是斲輸。 致於至臘之間, 正月而開基, 二月而立柱, 其事功之速, 雖可見神理之克叶人情, 朝家則全然未聞。 這般事實, 時適興想, 而起感於六臣忠節, 專送史臣, 奉考金櫃石室之藏。 史臣反面之日, 卽規樓立柱之吉辰, 此可謂偶然泛然之事乎? 侑祀之典, 方欲別有批旨於館閣草記, 而樓役改建, 豈宜令道伯捐廩, 竝以公穀會減?" 命大臣李福源記其事, 大臣蔡濟恭、吏判洪良浩撰上樑文以進。 又命禮官之年次奉審者, 趁寒食進去, 兼告事由。 又命道臣, 圖其形以進, 諭曰: "邑中流傳舊聞, 毋論刊本、寫本, 或斷爛殘編, 苟有不載於陵誌者, 收聚上送。"
- 【태백산사고본】 32책 32권 13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200면
- 【분류】건설(建設) / 왕실(王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