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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 32권, 정조 15년 1월 25일 경자 1번째기사 1791년 청 건륭(乾隆) 56년

저자의 백성들에게 육전 이외에서도 매매할 수 있도록 허락하다

차대를 거행하였다. 저자의 백성들에게 육전(六廛) 이외에서도 함께 매매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육전은 입전(立廛)·면포전(綿布廛)·면주전(綿紬廛)·포전(布廛)·저전(紵廛)·지전(紙廛)이다.】 좌의정 채제공이 아뢰기를,

"도성에 사는 백성의 고통으로 말한다면 도거리 장사가 가장 심합니다. 우리 나라의 난전(亂廛)을 금하는 법은 오로지 육전이 위로 나라의 일에 수응하고 그들로 하여금 이익을 독차지하게 하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빈둥거리며 노는 무뢰배들이 삼삼오오 떼를 지어 스스로 가게 이름을 붙여 놓고 사람들의 일용품에 관계되는 것들을 제각기 멋대로 전부 주관을 합니다. 크게는 말이나 배에 실은 물건부터 작게는 머리에 이고 손에 든 물건까지 길목에서 사람을 기다렸다가 싼값으로 억지로 사는데, 만약 물건 주인이 듣지를 않으면 곧 난전이라 부르면서 결박하여 형조와 한성부에 잡아넣습니다. 이 때문에 물건을 가진 사람들이 간혹 본전도 되지 않는 값에 어쩔 수 없이 눈물을 흘리며 팔아버리게 됩니다.

이에 제각기 가게를 벌려 놓고 배나 되는 값을 받는데, 평민들이 사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만약 부득이 사지 않을 수 없는 경우에 처한 사람은 그 가게를 버리고서는 다른 곳에서 물건을 살 수가 없습니다. 이 때문에 그 값이 나날이 올라 물건값이 비싸기가 신이 젊었을 때에 비해 3배 또는 5배나 됩니다. 근래에 이르러서는 심지어 채소나 옹기까지도 가게 이름이 있어서 사사로이 서로 물건을 팔고 살 수가 없으므로 백성들이 음식을 만들 때 소금이 없거나 곤궁한 선비가 조상의 제사를 지내지 못하는 일까지 자주 있습니다. 이와 같은 모든 도거리 장사를 금지한다면 그러한 폐단이 중지될 것이지만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은 단지 원성이 자신에게 돌아올까 겁내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한 지방이 통곡하는 것이 한 집안만 통곡하는 것과 어찌 같으랴.’ 하였습니다. 간교한 무리들이 삼삼오오 떼 지어 남몰래 저주하는 말을 피하고자 도성의 수많은 사람들의 곤궁한 형편을 구제하지 않는다면, 나라를 위해 원망을 책임지는 뜻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마땅히 평시서(平市署)로 하여금 20, 30년 사이에 새로 벌인 영세한 가게 이름을 조사해 내어 모조리 혁파하도록 하고, 형조와 한성부에 분부하여 육전 이외에 난전이라 하여 잡아오는 자들에게는 벌을 베풀지 말도록 할 뿐만이 아니라 반좌법(反坐法)을 적용하게 하시면, 장사하는 사람들은 서로 매매하는 이익이 있을 것이고 백성들도 곤궁한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그 원망은 신이 스스로 감당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여러 신하들에게 물으니, 모두 옳다고 하여 따랐다. 제공이 또 아뢰기를,

"서울과 지방의 공금(公金)을 맡아서 지키는 자들이 전혀 마음을 쓰지 않습니다. 영남 지방의 남창(南倉)의 돈은 원래 숫자가 21만여 냥인데, 이제는 8천여 냥이 되었고, 그나마 이것도 빈 장부일 뿐입니다. 평안도 병영의 군수전(軍需錢)의 부족분이 아직도 3만 냥이니, 매년 5천 냥씩 엄하게 신칙하여 징수하되 관서(關西)의 예를 기준으로 하여 12달로 나누어 매달마다 독촉하여 징수하게 하소서."

하니, 모두 따랐다. 또 아뢰기를,

"정호인(鄭好仁)의 지난번 일은 정원에 말을 전해 보냈고 살며시 품의하려고까지 하였으니 제멋대로 행동한 것과는 다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전 전라 감사와 같은 자도 지난번 죄를 씻어줄 때 포함시켰으나 호인만 거론하지 않았던 것은 호인을 미워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이 일은 자연 관계되는 바가 있으니 실로 용서하기가 어렵다. 대체로 자전(慈殿)의 하교가 전후에 걸쳐 간곡했던 것은 하나는 종사를 위해서고, 하나는 내 한 몸을 위해서였다. 지난날 신기현(申驥顯)을 처분한 뒤로 외부에서 시끄러운 말들이 한층 더 일어났기 때문에 자전의 하교에 매번 지나친 근심 걱정이 있으니, 민망스럽기 그지없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2책 32권 9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198면
  • 【분류】
    왕실(王室) / 상업(商業) / 재정(財政) / 사법(司法) / 변란(變亂)

○庚子/次對。 許市民六廛外, 通共和賣。 【六廛, 立廛、綿布廛、綿紬廛、布廛、紵廛、紙廛。】 左議政蔡濟恭啓言: "若論都下民瘼, 都庫爲最。 我朝亂廛之法, 專爲六廛之上應國役, 使之專利也。 近來游手無賴之輩, 三三五五, 自作廛號, 凡係人生日用物種, 無不各自主張。 大以馬駄船載之産, 小而頭戴手提之物, 伏人要路, 廉價勒買, 而物主如或不聽, 輒稱亂廛, 結縛歐納於秋曹、京兆, 故所持者, 雖或落本, 不得不垂涕泣賣去。 於是乎各列其肆, 以取倍價, 平民輩不買則已, 若係不得不買者, 則捨其廛, 更不可從他求得。 以故, 其價日增, 凡物之貴, 較視於臣之年少時, 不啻爲三五倍。 近日則甚至蔬菜、甕器, 亦有廛號, 不得私自和賣, 民生之食而無鹽, 窮士之停廢祭先者, 往往有之。 凡此都庫, 禁之則當止, 而猶且噤默者, 不過怵畏怨聲之歸於已耳。 古人曰: ‘一路哭, 何如一家哭?’ 避奸民輩三三五五之暗地咀口, 不救都下億萬人倒懸之勢, 則爲國任怨之意, 安在哉? 宜使平市署, 考出數三十年以來零瑣新設之廛號, 一倂革罷, 分付秋曹、京兆, 六廛外以亂廛捉納者, 非徒勿施, 施以反坐, 則商賈有和賣之利, 民生無艱窘之患。 其怨則臣可自當之矣。" 上詢諸臣, 僉曰可, 從之。 濟恭又言: "京外公貨典守, 專不致意。 嶺南南倉錢, 元數二十一萬餘兩, 今爲八千餘兩, 亦是虛錄。 平安兵營軍需錢虧欠, 尙爲三萬兩, 則每年以五千兩。 請令嚴飭徵納, 關西爲準, 分十二朔, 逐朔督徵。" 幷從之。 又啓言: "鄭好仁向來事, 言送院中, 至欲微稟, 異於擅行。" 敎曰: "如前完伯者, 亦與於向日蕩滌, 而好仁獨不論, 此非惡好仁而然也。 本事自有關係, 實難容恕。 大抵慈敎之前後諄複, 一則爲宗社也, 一則爲予躬也, 而向日驥顯處分之後, 外間紛紜之說, 一倍熾張, 故慈殿下敎, 每有過憂遠慮, 誠不勝仰悶矣。"


  • 【태백산사고본】 32책 32권 9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198면
  • 【분류】
    왕실(王室) / 상업(商業) / 재정(財政) / 사법(司法) / 변란(變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