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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 31권, 정조 14년 10월 20일 정묘 1번째기사 1790년 청 건륭(乾隆) 55년

우의정 채제공이 관리 임명의 규례를 다시 재고하여 주기를 청하다

차대(次對)를 가졌다. 우의정 채제공이 아뢰기를,

"금년 나라의 경사에 그 기쁨을 표시하려는 마음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조정 관리로서 나이 70세 이상은 모두 삼망(三望)을 갖추어 비답을 내린 후에 3대를 추존할 것을 허락하고, 선비와 서민으로서 나이 80세 이상은 모두 단망(單望)으로 중추부 동지에 붙일 것을 허락하였습니다. 대체로 단망에 붙이는 자는 자신에게만 첩지를 주고 추존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 곧 관리 임명의 규례입니다. 그러나 승정원에서는 이런 규례를 알지 못하고 단망에 붙이라는 교지 끝에 3대까지 추증한다고 곧바로 써넣었으니, 이보다 더한 착오는 없습니다. 그러나 성상의 생각에는 그들과 경사를 같이 나누기 위한 일이기 때문에 차마 도로 거두지 못하고 그저 선왕조 때 한 번 잠시 시행한 전례를 따라 사족과 상사람을 막론하고 모두 단망에 붙인 자는 모조리 동지(同知)로 그의 선대까지 추증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족과 상사람이 그 증직의 품계가 같으면 그들을 영광스럽게 하려는 것이 도리어 억울한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만약 이것을 염려하여 아경(亞卿)·아윤(亞尹)·중추부 동지 등의 직함으로 등급을 나누어 증직한다면 팔도의 장계에 그 법이 일정하지 않은만큼 혹은 품관과 사족을 같이 등록하는 것도 있을 것이고 혹은 사족과 서민을 같이 등록하는 것도 있을 것이고 혹은 사족과 서민, 그리고 상사람을 뒤섞어 등록하는 것도 있을 것이니, 이조에서 비록 등급을 갈라 증직하려 하여도 형편상 되지 않을 것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그때 단망으로 벼슬을 임명하라는 전교 내용을 선대까지 추존하는 것으로 잘못 전한 승지는 즉시 고발을 받아 파직시키고, 동지로 추천된 사람 외에 한 사람이라도 뒤따라 단망으로 붙인 자는 규례에 따라 증직하지 말며 사족으로서 문벌이 있는 자를 이조에서 혹시 추후에 발조견했을 경우에는 설사 이미 단망으로 붙인 뒤라 하더라도 다시 삼망을 갖추어 낙점을 받게 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렇게 되면 조정에서는 처음에 허락하였다가 이내 취소하는 혐의가 없을 것이고 사족에게는 실로 가문에 더없는 영광이 되며, 이조와 병조의 관리를 각도에 파견하는 폐단도 저절로 없어질 것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경의 말이 과연 사리에 맞다고 하겠다. 모두 그렇게 하도록 하라. 그와 같다면 사족으로서 현직(顯職)에 추증하기에 합당한 자는 증설한 동지(同知)의 자리에 삼망(三望)을 갖추어 낙점을 받은 후 즉시 추증할 것이다. 비록 벼슬을 거듭 내리는 일에 가깝기는 하나 또한 사족들이 크게 기대하는 심정을 충분히 위로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이 역시 이조와 병조로 하여금 알고 있게 하라."

하였다. 채제공이 또 아뢰기를,

"경상 좌수사(慶尙左水使) 이홍운(李鴻運)의 장계에 의하면 ‘신의 병영이 바다 어귀에서 10리쯤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물이 줄어들 때에는 그만 평평한 육지로 되어버리고 조수가 들어올 때에도 수심이 1척 정도에 불과하므로 허다한 전선(戰船)이 움직이지 못합니다. 돌을 쌓아 올리느라 공연한 비용을 쓰는 것보다는 차라리 병영을 옮기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기장(機張)대조포(大棗浦)는 선창이 깊고 넓으며 또 그 지형도 병영의 청사와 성지(城池)를 배치하기에 합당합니다. 그리고 관하의 각 진영이 좌우로 나열되어 있어 실로 중앙에 앉아 수응할 만한 지대가 됩니다. 본 수영을 대조포로 이설하는 일을 묘당으로 하여금 품의 조처하게 해주기 바랍니다.’ 하였습니다. 좌수영의 위치가 적합하지 못한 데 대해서는 조정의 의논에서도 또한 말이 많이 나왔으니, 수사가 이처럼 장계로 요청하는 것은 실로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병영을 이설하는 것은 그 사안이 몹시 중대합니다. 그대로 두기를 바랍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채제공이 또 아뢰기를,

"대체로 나라에 경사가 있을 경우 상소문의 허두에 축하의 말을 붙이는 것은 정례로 보아 그만둘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옛날에는 공경 재상들만 그렇게 하였지, 하급 관리들은 감히 할 생각을 못하였습니다. 근래에는 겉치레가 날로 일어나고 옛날 규례는 점차 무너져 나라의 경사가 있은 지 지금 몇 달이 지났는데도 상소문의 허두에 축하의 말을 붙이는 것이 한결같이 새롭습니다. 이렇게 계속 나간다면 비록 해가 바뀐 뒤에도 누가 자기부터 그만두려 하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지금부터 상소문을 쓸 때 이렇게 할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조정 신하들에게 신칙할 것이며, 이후로 경사가 있어 상소로 축하하는 경우 그달이 지나면 즉시 중지하는 것을 영원히 일정한 규례로 삼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 【태백산사고본】 31책 31권 33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177면
  • 【분류】
    왕실(王室) / 인사(人事) / 군사(軍事)

○丁卯/次對。 右議政蔡濟恭啓言: "今年邦慶, 所以飾喜者, 容有極哉? 以故朝官七十以上, 皆許備三望下批後追榮三代, 士庶八十以上, 則皆許單付同樞。 蓋單付者, 只給自己告身, 不許追榮, 卽銓法之不易者。 政院不識法例, 單付敎旨末端, 直書以三代推恩, 做錯莫甚, 而聖意以其欲爲同慶之故, 不忍還收, 第令遵先朝一番暫行之例, 毋論士族、常漢, 凡屬單付者, 一幷以同知, 追榮所生, 而但士族與常漢, 同其贈秩, 則其所以榮之者, 反或爲鬱抑之端。 若慮此而欲以亞卿、亞尹、同樞等銜, 分等威以贈, 則八道狀啓, 其法不一, 或有以品官、士族同錄者, 或有以士族、中庶同錄者, 或有以士族、中庶、常漢混錄者。 銓曹雖欲分等貤贈, 其勢末由。 臣意則伊時單付官敎中, 以追榮, 誤傳下敎之承宣, 捧現告罷職, 望同知外追後單付者, 依法例, 勿爲贈職, 而士族之有門地者, 銓曹如或有追後見聞, 雖已單付之後, 更爲備望受點, 則在朝家, 旣無始許旋寢之嫌, 在士族, 實爲門戶莫大之榮, 而兩銓吏隷分送各道之弊, 不期祛而自袪矣。" 敎曰: "卿言可謂得體, 竝依爲之。 若此則士族之可合顯職追榮者, 以加設同知窠, 備三望受點後, 仍卽追榮, 雖近於疊施, 亦足大慰士族懸企之情, 亦令銓曹知悉。" 濟恭又啓言: "慶尙左水使李鴻運狀啓以爲, 臣營處在海門十里之地, 水縮之時, 便作平陸, 潮漲之時, 水深不過尺許, 許多戰船, 無以運動。 與其築石之空費, 無寧移營之爲愈。 機張 大棗浦, 船艙深闊, 且其基址足爲營舍城池之排鋪, 管下各鎭羅列左右, 實爲居中應接之地。 本營移設大棗浦事, 請令廟堂稟處矣。 左水營處地之不得其宜, 廷議亦多爲言。 帥臣之如是狀請, 固無怪也, 而但營門移設, 事面甚重, 請置之。" 從之。 濟恭又啓言: "凡有邦慶, 疏章之起頭稱賀, 情禮之所不容已, 而古則卿宰爲之, 小官則有所不敢矣。 近來繁文日勝, 古規漸壞, 邦慶後今已幾月, 而起頭稱賀, 一例如新。 若此不已, 則雖改歲之後, 誰肯自我停止乎? 臣謂從今治疏之際, 不必如是之意, 申飭廷臣, 此後則遇慶疏賀, 盡其月乃止之意, 永爲定式, 恐宜矣。" 從之。


  • 【태백산사고본】 31책 31권 33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177면
  • 【분류】
    왕실(王室) / 인사(人事) / 군사(軍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