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유생들이 고려조 조견을 숭양 서원에서 제사지낼수 있도록 청하다
경기 유생 김상목(金相穆) 등이 상소하기를,
"신이 삼가 상고하건대, 고려조의 안렴사(按廉使) 조견(趙狷)은 곧 개국 원훈(開國元勳)인 조준(趙浚)의 아우로서 아이 때부터 경학(經學)에 열중하였습니다. 고려조의 정치가 문란할 때를 당하여 벼슬이 지신(知申)에 이르렀으며, 정몽주(鄭夢周)와 함께 심력을 같이하여 왕실을 도왔습니다. 자기의 형인 조준이 새 왕조를 추대하려는 뜻이 있다는 것을 알고 울면서 말하기를 ‘우리 집안은 이 나라의 교목세가로서 나라가 보존되면 같이 보존되고 나라가 망하면 같이 망할 것입니다. 또 달가(達可)046) 는 이 나라의 기둥이자 주춧돌인만큼 만약 한 마디 말과 한 가지 일이라도 달가와 달리하기를 구한다면 이것은 국사를 해치는 것이고 나라가 망하기를 재촉하는 것입니다.’고 하자, 조준은 그 뜻을 알고 다시 영남의 안렴사로 내보냈던 것입니다. 그러자 고려의 운명이 끝났다는 소문을 듣고 통곡하면서 두류산(頭流山) 속에 들어가 그 이름을 고쳐 조견(趙狷)이라 하였으니, 이는 대개 개견[犬] 자를 따른 것으로서 나라가 망해도 따라 죽지 못한 것이 개와 같다는 뜻이며, 또한 개는 옛 주인을 생각한다는 뜻을 취한 것입니다. 두류산에서 다시 청계산(淸溪山)으로 왔는데, 매번 가장 높은 봉우리에 올라 송경(松京)을 바라보면서 통곡하였습니다.
태조가 호조 전서(戶曹典書)로 발탁하여 초빙하는 서신을 보내니, 답하기를 ‘송악산의 고사리를 캐어 먹고 살지언정 성인의 백성이 되기는 원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하루는 태조가 조준과 더불어 수십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청계산으로 가서 조준으로 하여금 나오도록 권고하게 하였는데, 조견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조준이 이불을 어루만지면서 이르기를 ‘내가 만나보지 못한 지도 벌써 여러 해가 되었다. 형제간의 정의에 어찌 그리운 생각이 없었겠는가.’고 하니, 조견이 이불 속에서 대답하기를 ‘나라도 없어지고 집도 망하여 아비도 없고 임금도 없는데 형제를 어떻게 알겠습니까.’고 하였습니다. 조준이 나와서 고하기를 ‘신의 아우의 성품이 편협해서 신도 어찌할 수 없습니다.’고 하니, 태조가 이르기를 ‘나와 옛 친분이 있으니 빈주의 예로 서로 만나볼 수 없겠는가?’고 하였습니다. 조견은 비로소 의관을 정제하고 나와 읍만 하고 절은 하지 않았습니다. 태조는 칭찬하고 감탄하면서 말하기를 ‘조견은 그 뜻이 금석 같아서 빼앗을 수 없다.’ 하고 청계 한 구역의 땅을 봉해주었습니다.
조견은 양주(楊州) 땅에 옮겨 살면서 자기의 호를 자칭 송산(松山)이라 하였으니, 이는 대개 송악(松嶽)을 잊지 않는다는 뜻이었습니다. 조견은 이따금 송도(松都)에 가서 월대(月臺)의 폐허에서 통곡하니, 옛 도성의 유민(遺民)들이 저마다 따라서 슬퍼하였습니다. 조견은 일찍이 철(鐵)·석(石) 두 글자로 자기 두 아들의 이름을 지었으며 죽을 때 임박하여 경계하기를 ‘나의 묘비에는 고려의 안렴사라고 쓰라.’ 하였으나 여러 아들들이 유언을 감히 따를 수 없어 조선조에서 내린 관직이름을 비석에 썼는데, 얼마 안 되어 비석이 갑자기 절반으로 꺾여져 ‘조공지묘(趙公之墓)’라는 네 글자만 남아 지금도 그대로 있습니다. 그 충절과 도학은 실로 정몽주와 서로 대등합니다. 이 두 신하의 정충 대절(精忠大節)은 신명을 감동시키고 금석을 뚫을 만합니다. 비록 따로 서원을 짓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응당 한 사당에서 제사지내주기를 백이(伯夷)·숙제(叔齊)와 장순(張巡)·허원(許遠)처럼 해야 할 것인데, 지금까지 그렇게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조야가 다같이 애석히 여기고 있습니다. 특별히 명하여 조견을 숭양 서원(崧陽書院)에서 제사지내도록 해 주기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그 사람의 행적을 어찌 모르겠는가. 여기까지 미처 손을 쓰지 못한 형편이니 이 이외에도 반드시 이와 유사한 경우가 많을 것이다. 너희들은 물러가 학업이나 닦으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1책 31권 32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177면
- 【분류】정론(政論) / 사상(思想)
- [註 046]달가(達可) : 정몽주의 자.
○京畿儒生金相穆等上疏曰:
臣謹按高麗按廉使趙狷, 卽開國元勳浚之弟, 自在童年, 沈潛經學。 當麗朝政亂, 官至知申, 與鄭夢周同心戮力, 翼扶王室。 知兄浚有翊戴志, 嘗泣謂曰: "吾家, 國之喬木, 國存當存, 國亡當亡。 且達可, 國之柱石, 一言一事, 若求異於達可, 是害國事而促國亡。" 浚知其志, 出之再按嶺南。 聞麗運訖, 痛哭入頭流山中, 改名曰狷, 蓋從犬也。 以國亡不死, 有類於犬, 而亦取犬有戀舊主之義也。 自頭流轉至淸溪山, 每陟最高峰, 望松京痛哭。 太祖擢拜戶曹典書, 以書招之, 答曰: "願採松山之薇, 不願爲聖人之氓。" 一日, 太祖與浚從數十騎, 幸淸溪, 使浚勸出, 狷以衾鞱面, 堅臥不起。 浚撫衾謂曰: "自我不見, 已多年矣。 兄弟孔懷, 能不依依?" 狷從衾裏答曰: "國破家亡, 無父無君, 安知兄弟?" 浚出告曰: "臣弟性隘, 臣無奈何。" 太祖曰: "與我有舊, 未可以賓主禮相見乎?" 狷始整衣而出, 揖而不拜。 太祖大加賞歎曰: "趙狷志如金石, 有不可奪。" 命封以淸溪一曲。 狷移住於楊州地, 自號松山, 蓋不忘松岳之意。 狷時往松都, 痛哭於月臺之墟, 舊都遺民相隨悲感。 嘗以鐵、石二字, 名其兩子, 臨沒戒曰: "題我墓以高麗按廉使。" 諸子不敢守遺戒, 以我朝官銜書于碑。 居無何, 碑忽中斷, 只餘趙公之墓四字, 至今尙存。 其忠節、道學, 實與鄭夢周相爲伯仲。 兩臣之精忠大節, 格神明而通金石。 雖未得別創院宇, 固宜同祀一祠, 有若夷、齊、巡、遠, 而于今闕焉, 朝野之所共慨惜。 伏願特命, 使趙狷祀崧陽書院。
批曰: "伊人之行義, 豈不知之乎? 似此, 未遑。 外此, 必多似此者。 爾等退修學業。"
- 【태백산사고본】 31책 31권 32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177면
- 【분류】정론(政論) / 사상(思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