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하 정사 황인점 등이 황제를 알현한 일 등을 글로 보고하다
진하 정사(進賀正使) 황인점(黃仁點)과 부사(副使) 서호수(徐浩修)가 장계하기를,
"신 등은 관문 밖으로부터 길을 잡아 곧바로 열하(熱河)로 향하였고, 그 밖의 역관(譯官) 및 부하들은 토산물 수레와 인부와 말을 거느리고 산해관(山海關)을 거쳐 곧바로 북경(北京)으로 향하였습니다. 6월 28일에 심양(瀋陽)에 도착하고 7월 2일에 백기보(白旗堡)에 도착하였으며, 4일에 신점(新店)에 도착하여 대흑산(大黑山)의 큰길을 버리고 백대자(白臺子)의 지름길을 취하여 광녕(廣寧) 지경과 의주부성(義州府城)을 거쳐 7일에는 관문 밖으로 나갔습니다. 9일에는 조양현(朝陽縣)에 도착하였으며 12일에는 건창현(建昌縣)에 도착하였는데, 각로(閣老)인 화신(和珅)이 군기(軍機) 장경(章京)을 보내 신의 길을 재촉하여 말하기를 ‘만일 4백 리 이내의 거리에 있을 경우 밤낮으로 달려간다면 15일에 대어갈 수 있다. 대경연례(大慶宴禮)가 16일에 있으므로 반드시 그전에 가 닿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신 등은 건창현에서부터 밤낮없이 걸어서 15일 신시(申時)에 열하에 다달았습니다. 신 등은 표문과 자문을 받들고 예부(禮部)로 향하였는데, 만족(滿族)의 시랑(侍郞) 철보(鐵保)가 말하기를 ‘여러 나라의 사신들이 모두 표문을 어전(御前)에 직접 바쳤으니, 본국의 사신도 내일 연회 때 직접 바치라.’ 하고 철보는 신 등을 인도하여 먼저 만수절 축하 표문을 받들고 대궐뜰로 들어갔습니다. 이에 화신이 ‘표문은 황제의 지시를 기다려 직접 바치게 된다.’고 하면서 신 등만 먼저 들어가게 하였습니다. 철보는 표문을 통관(通官)에게 되돌려주고 신 등을 인도하여 대궐뜰 아래 서게 하였으며, 각로 화신·복장안(福長安)·왕걸(王杰) 등은 좌우에 시립하였는데, 황제는 침향탑(沈香榻) 위에 나아가 뒤로는 침향병(沈香屛)을 의지하고 바닥에는 누른 주단을 깔았습니다.
화신이 나와서 ‘사신 등은 앞으로 나오라.’는 황제의 지시를 전달하자, 신 등이 앞으로 나아가 무릎을 꿇었습니다. 황제가 묻기를 ‘국왕은 편안한가?’고 하기에 신 등이 대답하기를 ‘황상이 베푸신 큰 은덕을 힘입어 평안합니다.’고 하였습니다. 황제가 묻기를 ‘국왕은 아들을 얻는 경사가 있었는가?’고 하기에 신 등이 대답하기를 ‘금년 설날에 황제께서 복(福) 자를 쓴 서한을 내림으로써 국왕이 감격하여 명심하고 밤낮으로 축원하던 끝에 과연 6월 18일에 아들을 보았습니다.’고 하였습니다. 황제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그런가. 이는 참으로 몹시 기쁘고 기쁜 일이다.’ 하고 또 신 등의 성명과 품계를 묻자, 화신이 일일이 손으로 가리키면서 대답하였습니다. 신 등은 이어 연회 반열에 나아갔는데 반열에는 제왕 패륵(諸王貝勒)·각부 대신(閣部大臣)들이 동쪽 좌차에서 겹줄로 서쪽을 향하여 앉아 북쪽을 상좌로 삼았으며, 몽고 48부왕(部王)·회회(回回)·안남 국왕(安南國王) 및 조선(朝鮮)·안남(安南)·면전(緬甸)·남장(南掌)의 사신과 대만(臺灣) 생번(生番)은 서쪽 자리에서 겹줄로 동쪽을 향하여 앉아 북쪽을 상좌로 삼았습니다. 대궐앞 3층 전각에서 음악을 연주하고 광대놀이를 벌였는데 모두 경사를 맞아 장수를 축하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음식을 내린 것이 모두 세 차례였는데, 첫 번째와 세 번째는 황제의 식탁에 놓았던 떡과 고기를 나누어주었고, 두 번째는 각각 한상씩 차렸는데, 묘시(卯時)에 연회를 시작하여 미시(未時)에 끝냈습니다.
연회를 시작한 다음 화신이 만수성절을 축하하는 표문과 원자가 탄생한 후에 보낸 자문을 가져다 몇 차례 읽어보고 황제 앞에 바쳤습니다. 한참 뒤에 다시 철보에게 전달하기를 ‘이미 어람(御覽)이 끝났다. 이 밖의 표문과 자문은 행재예부(行在禮部)로부터 받아가지고 유경예부(留京禮部)로 보낼 것이다.’ 하고, 또 표문과 자문을 가지고 안남 국왕인 완광평(阮光平)에게 보이면서 말하기를 ‘자획도 반듯하고 종이의 품질도 정결하다. 조선에서 대국을 섬기는 예절이 이처럼 경건하니 다른 변방 나라의 모범이 될 만하다.’고 하였습니다. 17일에도 신 등이 연회반열에 참석하였는데 그 석차와 의식은 그 전날의 연회 때와 같았습니다. 18일에 신 등이 또 연회에 참석하였는데 황제가 이르기를 ‘연회가 끝난 다음 나는 돌아가겠으니 너희들은 먼저 경사에 가서 기다리라.’고 하였습니다. 19일에 신 등이 또 연회의 반열에 참석하였고, 20일에 예부의 지시에 따라 신 등은 안남 국왕 및 각국 사신들과 함께 문묘(文廟)를 배알하였는데, 문묘는 건륭(乾隆) 초년에 새로 지은 것으로서 장엄하고 화려하기가 연경(燕京)의 태학(太學)과 똑같았습니다.
신 등이 열하(熱河)에 머문 것은 5일 간이었는데, 신등과 수행한 관원과 사람들의 음식은 모두 내무부(內務府)로부터 공급을 받았으며, 각국 사신들도 다 같았습니다. 21일에 예부에서 큰 수레 13채를 보내주어 일행이 나누어 타고 행구(行具)까지 싣고 출발하여 이튿날 고북구(古北口)로 들어가서 25일에 황경(皇京)에 도착하였습니다. 26일에 원명원(圓明園)에 가서 황제의 행차를 기다렸는데 30일에야 황제가 돌아왔습니다. 신 등은 행궁(行宮)의 동문 밖에서 2마장쯤 떨어진 곳에 가서 맞이하였는데, 화신이 황제가 탄 수레 옆에 나아가 ‘이들은 조선국 사신이고 이들은 안남국 사신이다.’고 하면서 각국의 사신들을 하나하나 열거하니 황제는 돌아보며 웃었습니다.
8월 1일에 신 등은 경풍도(慶豊圖) 연회의 반열에 참석하였습니다. 날이 밝을 무렵에 대궐로 들어가 이중문을 통과하여 경풍도 앞 개울에 이르니 4척의 작은 배가 있었는데, 제왕 패륵(諸王貝勒)·각부 대신(閣部大臣)·회회(回回)·안남 국왕(安南國王) 및 각국 사신들이 나누어 타고 장주각(藏舟閣)·금오교(金鰲橋)와 옥동교(玉蝀橋)를 지나 거의 3마장쯤 가서 천향재(天香齋) 앞에 이르러 배에서 내렸습니다. 관희전(觀戱殿)의 서쪽 협문으로 들어가 연회 반열에 참석하였는데, 희각(戱閣)의 규모 및 반열의 좌차와 연회의 의식은 열하에서와 같았습니다. 다만 몽고의 여러 왕들은 열하에서 곧바로 본부로 돌아갔습니다.
2일 신 등은 날이 밝자 궐내로 들어가 연회가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 예부 낭중(禮部郞中)이 와서 신 등을 인도하여 근정전(勤政殿) 뜰로 들어갔는데 이곳은 곧 정대광명전(正大光明殿)의 동쪽이 되고 경풍도(慶豊圖)의 서쪽이었습니다. 황제는 강진향탑(降眞香榻)에 앉아 뒤로 무일병(無逸屛)에 기대었는데 무일병은 곧 황제의 어필이었습니다. 제왕 패륵은 전내 어좌의 동쪽에 서서 서쪽을 향하였고 각부 대신은 어좌의 서쪽에 서서 동쪽은 향하였으며, 회회·안남 국왕과 각성(各省)의 독무(督撫)들은 전폐의 아래에 서서 서쪽을 향하였고 신 등 및 안남·면전·남장의 사신들은 전폐의 아래에 서서 동쪽을 향하였습니다. 문관과 무관으로서 이동시켜야 할 관리들은 각각 전폐의 아래에 꿇어앉아 자기의 경력과 문벌을 아뢰었는데, 무관은 활을 한 번 당긴 후에 아뢰었습니다. 내각과 이부와 병부의 제신들은 어탑 전에 꿇어앉아 황제의 지시에 따라 보고하였습니다. 이윽고 의식이 끝나자 황제는 견여(肩輿)를 타고 희전(戱殿)으로 나아갔고, 여러 신하들은 물러나 어제 배를 타던 곳에 이르러 개울을 거슬러 올라가서 희전 앞에 나아갔다가 즉시 연회의 반열로 들어갔습니다. 아계(阿桂)가 황제의 지시로 흰 고라니 한 쌍을 끌고 각국 사신들에게 보였는데 그 형체는 말의 머리에 소의 몸뚱이고 꼬리와 뿔은 사슴과 같았으며, 하지(夏至)에 겉뿔은 빠지고 속뿔이 벌써 한 자 남짓하게 자랐습니다. 이는 성경(盛京)의 장군이 바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연회가 끝난 뒤에 또 황제의 지시에 의하여 각로(閣老) 아계·화신·복강안(福康安)·복장안(福長安) 및 안남 국왕과 조선·안남·면전·남장의 사신·부사들은 모두 복해(福海)에서 놀도록 하명하였습니다. 신 백형(百亨)은 객사로 돌아갔고 신 등은 아계 등과 2척의 배에 나누어 타고 금오교와 옥동교로 향하지 않고 곧바로 동남쪽의 개울을 따라 복해에 배를 뛰웠다가 영훈정(迎薰亭) 앞에서 내렸습니다. 화신이 신 등을 인도하여 구경을 시켰고 내시는 또 황제의 명에 의하여 청다(淸茶)·서과(西果)·빈과(蘋果)·포도(蒲萄)·도금(桃檎) 등의 과일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유시(酉時)에 객사에 돌아오니 상례로 주는 선물과 특별히 주는 선물이 벌써 내무부로부터 보내왔습니다.
7일과 8일은 연일 재계를 만나 연회를 베풀지 못하였고, 9일은 황제가 만수산(萬壽山)에 행차하게 되므로 신 등은 서쪽 금원(禁苑) 대궐 밖에서 맞이하였는데, 황제는 먼저 안남 국왕을 불러 하명하고 자주 신 등을 돌아보면서 이르기를 ‘각국 사신들도 모두 행차의 뒤를 따르라.’고 하므로 신 등이 뒤를 따라 근정전을 지나 곤명지(昆明池) 가에 이르니, 붉은 칠을 한 용배가 이미 강가에 대여 있었습니다. 배 위는 2층의 다락으로 되었고 뱃머리에는 금빛의 용을 그린 누런 깃발 한 쌍을 세웠습니다. 황제는 먼저 위층에 오르고 아계·화신·복강안·복장안·회회·안남 국왕 및 각국 사신은 아래층 창밖 기둥 안쪽에 탔는데, 배가 갈 때에는 좌우에 있는 사공들이 모두 뱃노래를 불렀습니다. 내시는 황제의 명에 의하여 향차와 진귀한 과실을 나누어 주었으며, 화신은 황제의 명령을 받고 신 등을 불러 앞으로 나오라 하여 연수사(延壽寺) 북쪽 산기슭을 가리키며 ‘이것은 만수산이다.’ 하고, 곤명지의 서쪽 산을 가리키며 ‘이것은 옥천산(玉泉山)이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만수산과 옥천산의 서북쪽 봉우리를 가리키며 ‘이것은 향산(香山)이다.’ 하였습니다. 배가 연수사 앞에 닿자 황제가 여러 신하들에게 명하여 배에서 내려 구경하도록 하였는데, 내시 수십 명이 각기 다과를 가지고 언덕을 넘을 때나 계단에 오를 때마다 내어주곤 하였습니다. 서산(西山)의 안팎에는 전각이 매우 많았는데 이를 모두 구경하고 나서 대궐 북쪽 문으로 나갔습니다.
10일에는 신 등이 연회의 반열에 나아갔고, 12일에는 황제가 경도(京都)로 돌아가므로 신 등이 대궐 밖 큰 저자거리에서 전송하고 즉시 성내의 남쪽 객사에 들었습니다. 원명원(圓明園)으로부터 서안문(西安門)까지의 길 양쪽에는 채색 가설물이 길게 뻗어 있었는데 단청과 비단으로 장식하였습니다. 13일 새벽에 신 등이 정관(正官) 30명을 거느리고 태화전(太和殿) 뜰로 들어가서 오른편에 있는 9품의 품계 표시 곁에 자리잡고 만수절 축하 의식에 참가한 다음 정관은 도로 객사로 돌아가고 신 등은 좌측문으로 나와 영수궁(寧壽宮) 동쪽에 설치한 놀이터에 이르러 반열에 참가하였는데, 희전(戱殿)의 규모 및 반열의 좌차와 연회의 의식은 원명원과 꼭 같았습니다.
15일 신시(申時)에 황제께서 석월단(夕月壇)에 친히 제사하고 환궁하였으니 추분일(秋分日)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신 등은 부성문(阜成門) 밖 광항가(光恒街)에 이르러 황제를 맞이하고 전송한 다음 다시 원명원으로 향하였습니다. 16일에 황제가 다시 원명원으로 돌아왔으므로 신 등은 또 황제를 맞이하였습니다. 17일에는 만수절을 축하하는 표문 및 황은에 사례하는 특산물 표문에 대한 황지가 내렸는데, 축하 표문에 대한 황지에 이르기를 ‘국왕이 축하한 것을 보고 잘 알았다. 금년은 짐의 나이 80이 되는 해이다. 본 국왕이 기일에 앞서 토산물을 갖추어 바쳤을 때 지시를 내려 받아들이도록 하는 동시에 다음해 생일날의 정식 공물로 대처하게 하였는데, 지금 또다시 표문을 갖추어 축하하고 특산물을 바쳐 왔다. 이는 사실 받아들이지 말아야 할 것이나 또다시 그대로 싸가지고 돌아가게 하면 이는 본 국왕의 축하하는 정성을 받아주는 예가 아니기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니, 해부에서는 그리 알라.’ 하고, 황은에 사례하는 표문에 대한 황지에는 이르기를 ‘국왕이 사례하는 표문을 보고 잘 알았다. 표문에 딸려 바친 특산물은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해부는 그리 알라.’고 하였습니다.
신 등이 처음에는 예부에 글을 바치고 아울러 특산물을 받아달라고 청하려 하였으나 예부의 상서(尙書)와 시랑(侍郞) 등이 말하기를 ‘연전에 황제께서 이미 앞으로는 사례하는 특산물을 영원히 바치지 말도록 하라는 하명이 있었고, 이번에도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는 황제의 지시도 특별한 은전에 관계되는 것인데 배신(陪臣)으로서 어찌 감히 글을 바치겠는가.’고 하므로 그만 중지하였습니다. 18일에 황제가 또 무신으로서 승진시키거나 이동시킬 관리들을 근정전에서 불러보았는데 신 등도 나아가 참석하였습니다.
20일에는 정대광명전 연회에 들어가 참석하였는데, 연회석의 식탁은 모두 겹줄로 놓아 동서로 마주 향하게 하였습니다. 제왕 패륵·몽고왕과 회회·안남 국왕은 전내의 황제 자리 동쪽에 위치하고, 연성공(衍聖公) 및 1품 문무 만(滿)·한(漢) 대신(大臣)은 황제 자리 서쪽에 위치하고, 각성의 독무(督撫)와 도륵(圖勒)·포특(布特)·토사(土司)는 궁전 뜰 동쪽에 위치하고, 신 등 및 안남·면전·남장의 각국 사신과 대만 생번(臺灣生番)은 궁전 뜰 서쪽에 위치하였습니다. 음악은 중화소악(中和韶樂)과 평장악(平章樂)을 연주하였는데, 차를 내오거나 술을 올릴 때에 모두 음악을 연주하였습니다. 궁전 뜰에는 화문주단을 깔고 여러 나라 사람들의 재주를 연기하는 장소로 만들었는데, 먼저 포고(布褲)의 재주를 보이고 연이어 여러 나라의 재주 공연을 계속하였습니다. 황제가 여러 왕과 대신에게 술을 줄 때는 호위하는 대신 화신이 황지에 의하여 신 인점(仁點)과 신 호수(浩修)를 불러 전내에 오르게 하여 황제의 자리 서쪽 계단 아래에 서게 하였습니다.
황제가 연성공을 불러 술을 준 다음 신 등을 부르므로 황제의 앞에 나아가 꿇어앉으니, 황제가 술을 부은 옥배를 손수 잡고 직접 주었습니다. 이에 신 등은 일어나서 받아가지고 꿇어앉아 마신 후 연회의 반열로 돌아왔습니다. 조금 후에 황제께서 또 신 등 및 신 백형(百亨)을 부르므로 황제의 자리 앞에 나아가 꿇어앉으니, 황제께서 말하기를 ‘너희들은 나의 말로 국왕에게 돌아가서 안부를 물으라.’ 하고, 또 말하기를 ‘내가 직접 너희 나라 국왕이 세자를 얻었다는 자문을 보니 내 마음이 몹시 기뻤다.’고 하므로 신 등이 머리조아려 사례하였습니다. 화신의 안내로 원래의 반열로 돌아왔는데, 세자 책봉의 의식이 있기도 전에 황제께서 먼저 세자라고 호칭하므로 좌우에서 호위하는 대신들이 모두 놀랐습니다.
연회가 끝난 다음 내무부 관리가 신 등을 인도하여 궁전 뜰 서쪽 누른 장막 아래에 이르러 선물을 나누어 주었으며 원명원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20일 신 등 및 수종자들의 음식 공급 역시 열하에서처럼 내무부에서 마련하여 보냈습니다. 이날 오후에 일행이 모두 철수하여 성안 남쪽 객사에 들어가 축하하기 위한 특산물은 태화전(太和殿) 앞에 있는 어고(御庫)에 수납하고, 황은에 사례하기 위한 특산물은 전례대로 임시로 남쪽 객사의 이웃에 사는 진실한 사람들에게 맡겨두고, 나머지 물건들은 각 창고의 관리, 통관(通官), 대사(大使) 등에게 전례대로 나누어 주었습니다.
9월 1일 예부에서 신 등에게 말하기를 ‘각국 사신은 이미 지난달 20일 정대광명전의 연회가 끝났기 때문에 이번에는 도착 연회와 작별 연회가 없다. 안남 국왕과 그의 수종신은 이미 지난달 24일에 떠났고 면전(緬甸)의 대신도 또한 오늘 떠난다. 귀국의 사신 일행과 남장 사신은 4일에 떠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2일에는 예부에서 회답 자문 12통을 보내왔는데, 원자가 탄생한 후 자문을 보낸 데 대한 황지에 이르기를 ‘군기 대신 태학사(軍機大臣太學士)이며 예부의 사무를 관리하는 왕걸(王杰)은 황지를 받들어 해당 국왕의 소청을 조회하여 허락해 줄 것이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곧 7월 16일 열하의 연회 석상에서 황제가 친히 읽어 보는 앞에서 주달하여 허락을 받은 것인데, 전문 1통을 따로 올립니다. 황은에 사례하는 표문은 모두 전례대로 황지가 내렸습니다. 4일에 일행이 북경을 떠났습니다."
하였는데, 회유하기를,
"듣건대 경 등의 일행이 무사히 돌아온다 하고 자문을 올려 요청한 것도 또한 뜻대로 되었다고 하니, 공사간에 천만 다행이다. 부사의 아들은 이번 과거에 급제하였으니 더욱 기쁜 일이다. 경 등의 복명은 언제 있겠는가? 날짜를 정하여 장계로 보고하라. 황제의 은혜는 갈수록 깊어지니 우리 나라의 도리상 역시 범연히 지나칠 수 없다. 동지사의 행차는 경 등이 돌아온 후 당장 출발시켜야 하겠다. 경 등이 압록강을 건넌 후 자문을 먼저 역관에게 부쳐 파발을 달려 올려보냄으로써 즉시 회답 자문을 정서할 수 있게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지금 진하사(進賀使)가 먼저 보낸 장계를 보니, 은혜를 받은 것 외에도 자문으로 주청한 것을 즉시 그에 맞추어 시행할 수 있도록 소원대로 허락해주었다. 우리 나라의 도리상 그 은혜에 감사하는 조처를 소홀히 할 수 없다. 회답 자문은 이미 압록강을 건넌 후 먼저 올려보내도록 하였으니, 동지사의 배표(拜表) 일자를 10일 이후로 앞당겨 길일을 택하여 정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1책 31권 24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173면
- 【분류】외교(外交)
臣等由口外取路, 直向熱河, 他餘任譯及幕屬, 領率方物雇車, 一行人馬, 由山海關, 直向燕京。 六月二十八日到瀋陽, 七月初二日到白旗堡, 初四日到新店, 捨大黑山大路, 徑取白臺子路, 過廣寧地界及義州府城。 初七日出口外, 初九日到朝陽縣, 十二日到建昌縣, 閣老和珅送軍機章京, 促臣行曰: "若在四百里內, 兼程疾馳, 可趁十五日。 大慶宴禮在十六日, 必及其前。" 臣等自建昌縣, 晝夜行, 十五日申時達熱河。 臣等陪表咨, 向禮部, 滿侍郞鐵保曰: "各國使臣, 皆親呈表文於御前, 本國使臣, 亦於明日宴禮, 親呈。" 鐵保引臣等, 先奉萬壽進賀表文, 入殿庭。 和珅以爲, 表文姑待皇旨親呈, 只使臣等先入。 鐵保還傳表文於通官, 引臣等, 立殿陛下。 閣老和珅、福長安、王杰等, 左右侍立, 皇上御沈香榻上, 後倚沈香屛, 下布黃氍毹。 和珅出傳皇旨, 使臣等進前, 臣等進跪。 皇帝問: "國王平安乎?" 臣等對曰: "賴皇上洪恩, 平安矣。" 皇帝問曰: "國王有斯男之慶乎?" 臣等對曰: "今年元正, 頒降福字宸翰, 國王感戴銘鏤, 日夕攅祝, 果於六月十八日擧男矣。" 皇帝笑曰: "然乎? 是誠大喜大喜的事也。" 又問臣等姓名爵秩, 和珅手指歷對。 臣等仍就宴班, 班位則諸王、貝勒、閣部大臣坐東序, 重行西向北上, 蒙古四十八部王、回回ㆍ安南國王、朝鮮ㆍ安南ㆍ緬甸ㆍ南掌使臣、臺灣生番坐西序, 重行東向北上。 作樂設戲於殿前三層閣, 皆迓慶祝壽之辭。 宣饌凡三度, 第一、第三, 分給御卓所排餠肉, 第二, 各具一盤, 而卯時始宴, 未時止宴。 始宴後, 和珅取萬壽聖節進賀表、元子宮誕降後移咨, 數回奉覽, 奉進御前。 良久, 還傳鐵保曰: "已經御覽, 他餘表咨, 自行在, 禮部受來, 移送留京禮部。" 又以表咨示安南國王阮光平曰: "字畫整齊, 紙品精潔。 朝鮮事大之節, 敬謹如此, 可作他藩之法。" 十七日, 臣等赴宴班, 班位宴儀, 一如昨宴。 十八日, 臣等又赴宴, 皇帝曰: "宴畢後, 朕當回鑾。 爾等先詣京都以待。" 十九日, 臣等又赴宴班。 二十日, 因禮部指揮, 臣等與安南國王及諸國使臣, 偕謁文廟。 文廟, 乾隆初新建, 壯麗一如燕京太學。 臣等留熱河凡五日, 臣等及從官從人, 皆自內務府供饋, 各國同然。 二十一日, 禮部備送大車十三輛, 一行分乘, 幷載行具而發。 翌日入古北口, 二十五日到皇京。 二十六日往圓明園, 待皇駕, 三十日皇帝始旋。 臣等到行宮東門外二里地袛迎, 和珅進輦傍奏曰: "這是朝鮮使, 這是安南使。" 歷數各國, 皇帝顧而笑。 八月初一日, 臣等進參慶豐園宴班, 黎明入闕, 內踰重門, 到慶豐園前溪, 有四隻小船。 諸王、貝勒、閣部大臣、回回、安南王及各國使臣分乘, 過藏舟閣、金鰲ㆍ玉蝀橋, 行幾三里, 到天香齋前下船。 由觀戱殿西夾門, 赴宴班, 戲閣規制及班位宴儀, 與熱河同。 惟蒙古諸王, 自熱河徑歸本部。 初二日, 臣等黎明入闕內, 待開宴。 禮部郞中來, 引臣等, 入勤政殿庭, 卽正大光明殿之東, 慶豐園之西也。 皇帝御降眞香榻上, 後倚《無逸》屛, 卽御筆。 諸王、貝勒立殿內御座東而西向, 閣部大臣立御座西而東向, 回回、安南國王、各省督撫, 立殿陛下西向, 臣等及安南、緬甸、南掌使臣, 立殿陛下東向。 文武應遷官, 各於殿陛下, 跪告踐歷門閥, 武臣抨弓一次後乃告。 內閣吏兵部諸臣, 跪御榻前, 隨皇旨仰奏。 移時而罷, 皇帝御肩輿詣戲殿, 諸臣退至昨日乘船處, 溯溪詣戲殿前, 仍入宴班。 阿桂以皇旨, 牽白麈一雙, 示各國使臣, 其形馬首牛身, 尾角如鹿, 夏至解角, 茸已長尺餘, 盛京將軍所貢。 宴撤後, 又因皇旨, 閣老阿桂、和珅、福康安、福長安、安南國王及朝鮮ㆍ安南ㆍ緬甸ㆍ南掌使副使, 竝賜遊福海。 臣百亨退歸館所, 臣等與阿桂等, 分乘二船, 不向金鰲ㆍ玉蝀橋, 直溯東南溪, 泛福海, 下船於迎薰亭前。 和珅引臣等縱觀, 中官又因皇旨, 分給淸茶、西果、蘋果、蒲萄、桃檎等果品。 酉時始歸館次, 原別賞賜, 已自內務府, 送置御前。 初七、初八日, 連値齋戒, 不設宴。 初九日, 皇帝幸萬壽山, 臣等袛迎於西苑闕外。 皇帝先召安南國王下旨, 數轉顧謂臣等曰: "各國使臣, 竝隨駕後。" 臣等隨之, 歷勤政殿, 到昆明池邊, 朱漆龍舟已泊岸。 船上爲二層樓, 船頭建金龍黃旗一雙。 皇帝先御上層, 阿桂、和珅、福康安、福長安、回回ㆍ安南國王及各國使臣登下層窓外楹內。 行船時, 左右梢工皆唱櫂歌。 中官因皇旨, 頒給香茶、珍果, 和珅承皇旨, 召臣等進前, 指延壽寺北麓曰: "此萬壽山。" 指昆明池西岡曰: "此玉泉山。" 指萬壽ㆍ玉泉之西北峰巒曰: "此香山也。" 舟到延壽寺前, 皇帝命諸臣下船縱覽。 中官數十人各持茶果, 踰阜陟階之時, 輒賜之。 西山內外, 殿閣甚多。 觀訖, 由闕北門出。 初十日, 臣等赴宴班。 十二日, 皇帝還京都, 臣等袛送于闕外大市街, 仍入城內南館。 自圓明園至西安門內夾道, 左右綵棚綿亘, 飾以金碧錦繡。 十三日曉, 臣等率正官三十員, 詣太和殿庭, 班于右翼九品品級山之榜, 參萬壽賀儀。 正官還歸館所, 臣等由左翼門出, 至寧壽宮之東設戲所參班。 戲殿規制及班位宴儀, 一如圓明園。 十五日申時, 皇帝親祭夕月壇, 還宮。 以秋分日也。 臣等到阜成門外光恒街, 袛迎袛送後, 轉向圓明園。 十六日, 皇帝旋蹕圓明園, 臣等又爲袛迎。 十七日, 萬壽進賀表文及謝恩方物表文, 皆旨下。 進賀表文皇旨曰: "覽王奏賀, 知道了。 本年朕八旬壽辰, 該國王先期物呈進, 經降旨賞收, 幷準作爲次年萬壽正貢, 今復具表稱賀, 進貢方物。 本毋庸收受, 但又令齎回, 非所以申該國王慶祝之忱, 着仍行賞收。 該部知道欽此" 云云。 謝恩表文皇旨曰: "覽王奏謝, 知道了。 所有隨表方物, 不必收受。 該部欽此" 云云。 臣等初擬呈文禮部, 竝請收受, 禮部尙書、侍郞等以爲: "年前皇帝旣有此後謝恩方物永爲停進之諭, 今番不必收受之皇旨, 係是特恩, 陪臣何敢呈文?" 云, 故仍爲停止。 十八日, 皇帝又召見武臣陞遷官于勤政殿, 臣等進參。 二十日, 入參正大光明殿宴禮。 宴卓皆重行, 東西相向。 諸王、貝勒、蒙古王、回回ㆍ安南國王, 班于殿內寶座東; 衍聖公、文武一品、滿 漢大臣, 班于寶座西; 各省督撫、圖勒布特土司, 班于殿庭東; 臣等及安南ㆍ緬甸ㆍ南掌各國使臣、臺灣生番, 班于殿庭西。 樂用中和韶樂及平章之樂, 進茶進酒皆作樂。 殿庭設花文氍毹, 爲萬國呈伎所, 先設布褲伎, 連接各國伎。 皇帝賜酒諸王、大臣時, 侍衛大臣和珅, 因皇旨, 召臣仁點、臣浩修陞殿內, 立寶座西級下。 皇帝召衍聖公賜酒, 次召臣等, 進跪御椅前, 皇帝手執玉杯, 香醞親授。 臣等起而受, 跪飮後, 還宴班。 少頃, 皇帝又召臣等及臣百亨, 進跪寶座前, 皇帝曰: "爾等以朕言, 歸問國王平安。" 又曰: "朕自見爾國王得世子之咨, 朕心大以爲喜。" 臣等扣頭。 和珅引還原班。 封典之前, 皇帝先稱世子, 左右侍衛大臣, 莫不動色。 撤宴後, 內務府官引臣等, 至殿庭西黃幄下頒賞, 留圓明園。 二十日, 臣等及從官盤供, 亦依熱河例, 自內務府備送。 是日午後, 一行撤入城內南館, 進賀方物, 輸納太和殿前御庫, 謝恩方物, 依前例, 權付於南館隣居信實人, 所餘補物, 各庫郞吏、通官、大使等處, 依例分給。 九月初一日, 禮部言於臣等曰: "各國使臣, 旣經前月二十日正大光明殿宴筵, 故今番無上下馬宴。 安南國王及從臣, 已於前月二十四日離發, 緬甸大臣, 亦於今日離發。 貴國使行及南掌使臣, 當於初四日離發。" 初二日, 禮部送回咨十二度、元子宮誕降後移咨。 皇旨曰: "軍機大臣太學士管理禮部事務王杰奉旨, 着照該國王所請。 欽此" 云云。 卽七月十六日熱河宴筵御覽時面奏得旨者, 全本一通, 別爲謄上, 謝恩表文, 竝循例旨下。 初四日, 一行自燕離發。
回諭曰: "聞卿等一行穩旋, 咨文奏請亦如意, 公私萬幸。 副使之子, 闡名於此榜, 尤可喜也。 卿等復命, 當在何間? 指日狀聞。 皇帝恩數, 愈往愈摯, 則我國道理, 亦不可泛忽。 冬至使行, 卿等回還後, 卽當發送。 卿等渡江後, 咨文先付譯官, 騎撥上送, 以爲趁卽精寫回咨之地。" 又敎曰: "今觀進賀使先來狀本, 恩數之外, 奏請於咨文者, 果卽準施, 俾許其如願。 在我國道理, 謝恩之擧, 不容泛忽。 回咨已令渡江後先爲上送, 冬至使行拜表日字, 以旬後進定擇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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