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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 30권, 정조 14년 7월 11일 기축 7번째기사 1790년 청 건륭(乾隆) 55년

흥양현 삼도에 딴 나라배가 표류하여 오다

흥양현(興陽縣) 삼도(三島)에 딴 나라배가 표류하여 왔다. 배의 길이는 60척이고 넓이는 16척 5치이며 높이는 6척인데, 소나무를 썼고, 쇠못을 쳤다. 돛대는 2개인데 앞의 것은 43척이고 뒤의 것은 62척으로써 전나무를 사용하였다. 배 안에는 쌀·조·콩·팥·보리·밀·목면·파초를 실었고, 배 안의 사람은 7명인데 충영랑부(沖永良部) 홍희의부촌(鴻喜義富村)이명천(伊名川)·전평(前平)·희자부(喜者富)묘포촌(畒布村)신옥(神屋), 국두촌(國頭村)고보(高甫), 출화촌(出花村)중정(仲正)·선보(先甫)였다. 말은 통하지 않았으나 이명천이란 자가 약간 문자를 알아 글로 쓰기를 "유구국(琉球國) 중산왕(中山王)의 사람으로 장사차 본국 산원(山原) 땅으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서 14일만에 이 지방에 와 닿았다." 하였다. 그 사람들은 속에 홑저고리와 홑바지를 입었는데 바지는 면포로 만들었고 저고리는 모시도 아니고 갈포도 아니었다. 그 이름을 물으니 간질사(干叱絲)라 하였고, 그것을 채취하고 다루며 직조하는 방법을 물으니 그들은 손짓으로 형용하면서 대답하였다. 대개 나무껍질을 가지고 가늘게 짠 것인데 마치 우리 나라의 누런 모시와 유사하였다. 곱기는 그보다 낫고 질기기는 그만 못하였다. 겉에는 홑두루마기를 입었는데 그 길이는 정강이에 닿았고, 소매는 넓으면서 짧으며, 옷깃은 둥글면서 좁았다. 푸른색과 흰색의 간질사를 섞어서 짰으며 띠 역시 그러하였다. 혹은 순청색과 순흑색의 띠를 두겹으로 두르기도 하였다.

모습은 우리 나라 사람과 비슷한데 머리털은 복판을 깎고 둘레에만 약간 남겨 그것을 거두어 한 곳에 쪽진 것이 마치 우리 나라 사람들의 상투와 같았다. 머리털에 기름을 발라 광택이 나고, 비녀가 있는데 은으로 만들기도 하고 주석으로 만들기도 하였다. 머리에 쓰는 갓은 작고 풀로 짜서 만들었는데 북관(北關) 사람들이 쓰는 승립(繩笠)과 같았다. 발에는 버선을 신지 않고 신만 한켤레 신었는데 풀로 만들었고 밑창을 짜기는 했으나 좌우의 운두는 없으며 앞에 고리가 달려 두 발가락이 겨우 들어가게 되어 있다. 갓과 신은 항상 쓰거나 신지는 않았다. 관장(官長)을 보면 일어서서 양손을 마주잡고 무수히 머리를 조아렸으며, 관장이 묻는 말이 있으면 절을 하고 평상시에도 반드시 꿇어앉았다.

밥을 지어 먹을 때에는 종지로 솥의 밥을 떠서 먹는데 혹은 두 종지에 그치기도 하고 혹은 세 종지에 그치기도 하였다. 반찬은 호박과 된장을 먹었으며 닭고기·물고기·기름·초를 줬더니 역시 잘 먹었다. 배 안에는 몇 권의 책자가 있었는데 모두 파손되고 더렵혀져서 알아볼 수 없었으며 혹은 잘고 가는 초서로 갈기기도 하였다. 그 중에 판독할 수 있는 것은 《대판회도(大坡繪圖)》·《대일본연대기(大日本年代記)》였으며, 돈은 2천 4백 74잎이 있는데 ‘관영통보(寬永通寶)’라고 새겨져 있었다. 이것은 대개 왜국의 돈인데 그들은 유구국의 돈이라고 하였다. 일본 글자를 써보이니 머리를 흔들면서 대답하지 못하였고 청나라 글자를 써보여도 손을 내저었다. 어느 길로 가려고 하느냐고 물으니 바닷길로 가겠다고 하였다. 《윤도(輪圖)》를 주자 그들 7명의 얼굴에는 기뻐하는 기색을 보이면서 손으로 동남쪽을 가리키며 ‘배를 타고 묘·진·사방으로 가겠다.[船上歸卯辰巳]’는 글자를 썼다.

전라도 관찰사 윤시동(尹蓍東)이 계문하기를,

"그 사람들이 머리를 쪽진 것이나 의복제도가 대체로 왜인과 비슷하고 돈도 왜국의 돈이니 혹시 유구국이 왜국에 복속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는데, 상이 입을 것과 먹을 것을 많이 주고 그들의 자원에 따라 보내주라고 명하였다.

전라좌도 수군 절도사 이건수(李健秀)가 장계를 올려 지방관이 그들 실태를 잘못 조사하였다고 논박하니, 상이 이르기를,

"말이 통하지 않아 글로 써서 수작하였는데 이것을 도리어 죄로 삼는가. 으레 표류인이 이르기만 하면 지방관의 죄를 들추어내는데, 이것이 곧 병사와 수사의 버릇으로 되었다. 이후부터는 이렇게 하지 말고 되도록이면 온당하게 처리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0책 30권 80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156면
  • 【분류】
    외교(外交) / 호구(戶口)

興陽縣 三島有異國船漂到, 船長六十尺, 廣十六尺五寸, 高六尺, 用松釘以鐵, 帆桅二, 前四十三尺, 後六十二尺, 用檜。 船中載米粟、大小二豆、大小二麥、木綿、蕉。 船中人口七, 曰沖永良部 鴻喜義富村伊名川, 曰前平, 曰喜者富, 曰畝布村神屋, 曰國頭村高甫, 曰出花村仲正, 曰先甫。 言路不可通, 而伊名川者, 粗解文字, 書曰: "琉球國 中山王之人, 販貿往本國山原地, 遇辰風, 凡十有四日, 泊此地方。" 云。 其人裏着單襦、單袴, 袴以綿布, 襦非枲非葛, 問其名, 曰干叱絲, 問其採治織造之方, 其人以手摸狀以答之, 蓋木皮而細織者, 類我國黃苧布, 嫩美過之, 堅靭不及也。 表以單周衣, 其長及脛, 袖闊而短, 領圓而狹。 以干叱絲靑白二色交織之, 帶亦如之。 又或以純靑純黑之帶, 重繚之。 形貌近於我國人, 而頭髮削其當中處, 留邊周若干, 結爲䯻, 似我國上頭。 蠟脂塗髮, 使光澤, 有簪或銀或錫。 笠小而織草爲之, 似北關人繩笠。 足不襪, 只鞵一緉, 以草爲之, 織其底, 左右無繫, 前有彄劣, 容二指。 笠與鞵, 不常常着也。 見官長則起立, 合手叩頭無數, 官長有問則拜。 無事時必跪坐, 炊飯熟, 以鍾取於鼎而喫, 或二鍾而止, 或三鍾而止。 饌用南瓜滓醬, 給鷄魚油醋亦能食。 船中帶數帙書, 破弊漫汚不可記, 或畫以細瑣亂草, 其可辨者曰《大板繪圖》、曰《大日本年代記》, 有錢二千四百七十四枚, 窾曰寬永通寶, 蓋錢也, 而稱謂琉球本國錢也。 書日本字以示, 搖頭不答, 書大字, 揮手而點。 問欲從何路, 曰願從水路歸。 與之《輪圖》, 七人喜動顔色, 手指東南, 書船上歸卯辰巳六字。 全羅道觀察使尹蓍東以聞曰: "其人頭髺衣制, 大抵與倭人相似, 所齎錢貨, 又是錢, 其或琉球服屬於歟?" 上命厚給衣食, 從其願遣之。 時, 全羅左道水軍節度使李健秀狀啓, 論地方官問情有失, 上曰: "言語不通, 以文字酬酢, 反以此爲罪? 大抵漂人一到, 吹覓地方官之罪, 卽兵水使伎倆。 後無敢如是, 務從穩當。"


  • 【태백산사고본】 30책 30권 80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156면
  • 【분류】
    외교(外交) / 호구(戶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