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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 30권, 정조 14년 5월 7일 정해 1번째기사 1790년 청 건륭(乾隆) 55년

좌의정 채제공이 관리들이 교자를 타는 비리에 대해 해결책을 건의하다

좌의정 채제공이 차자를 올리기를,

"국법에 문관의 당상으로 수령이 된 자가 아니면 교자를 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니 그 위계가 엄격하기 때문입니다. 또 교자를 타는 데도 여러가지 구분이 있으니, 덮개는 있으되 좌우의 휘장을 걷어올리는 것이 있고, 휘장은 없고 덮개만 있는 것이 있고, 덮개는 없으면서 밑바탕만 꾸민 것이 있고, 시속에서 말하는 부담기(負擔機)란 것이 있습니다. 위에서 말한 밑바탕만 꾸민 것은 비록 덮개가 있는 것과는 차이가 있으나 이미 두개의 채를 밖으로 나가게 하고 하인들이 그것을 들고 다니기 때문에 비록 승교(乘轎)라는 이름을 붙여도 또한 불가하지 않습니다만, 부담기로 말하면 그 만든 방법이 교자와 다르며 또 밖으로 나간 채가 없으니 단지 다리나 쉬게 하는데 불과합니다. 그런데 감사가 아뢴 것 중에 뒤섞여 거론된 것은 너무나 생각지 않은 것입니다. 대개 평안도의 수령은 무관이 절반은 차지하고 문관이 간혹 끼었으며, 당하관의 경우는 문관·음관을 막론하고 그 수가 많지 않습니다. 지금 직접 고발하여 파직시키는 것이 이처럼 계속되다가는 도로에 왕래하는 행차가 끊임없이 빈번하여 이조의 정사가 날마다 있게 될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 추측해보면 삼남(三南)과 관동(關東)의 수백 고을이 거의 모두가 당하관인 음관인데, 직접 고발하는 것이 차례로 이르게 된다면 모면할 자가 그 얼마나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중에 불량하고 법을 지키지 않는 자는 이로 인해 귀양가는 것이 실로 다행이 되겠지만, 그렇지 않은 자라면 또한 어찌 애석하지 않겠습니까. 수령을 교체하는 것이 서울에 앉아서 보기에는 한개의 종이쪽지에 성명을 써내는데 불과하여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관리가 문서를 뒤바꾸고 국곡(國穀)을 도둑질하는 것은 오직 이 기회를 타는 것입니다. 더구나 삼남은 본래 말을 세내는 것이 없는 관계로 신구 수령이 서로 교체될 때에는 그 인부의 삯과 함께 모두 민결(民結)에서 책출하여, 큰 고을은 1천여 냥에 이르고 작은 고을 역시 1천 냥에 가깝습니다. 가령 1년 내에 수령이 두 번 교체되면 백성들에게 거두는 것이 수천 냥이 되니, 불행히도 세 번 교체하게 되면 가난한 백성들에게 폐가 되는 것이 실로 어떠하겠습니까. 신은 교자를 탄 죄는 엄히 다스리지 않을 수 없지만 부담기를 탔다는 지적을 받은 경우 이미 차대(差代)한 사람은 비록 혜택이 미칠 수 없다 하더라도 앞으로 부임하는 사람은 특별히 관대히 용서하여 숱한 빈자리를 내는 문제가 없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역마를 탄 사람에 대해서는 비록 부담기를 탔어도 또한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성명께서 헤아려 채택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일전에 황해도의 수령이 교자를 타고 부담기를 탄 사건으로 인하여 해당 감사가 장계를 올려 논죄를 청하였다. 경들에게 초기(草記)하여 품의 조처하게 한 것은, 앞서 평안도의 수령을 처분할 때에 등급을 나누어 구분하라는 전교가 있었으니만큼 마음 속으로 경들의 회계(回啓) 역시 그러하리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급기야 초기를 보니 약간의 한계를 두기는 하였으나 부담기를 탄 사람 역시 파면시키는 가운데에 들어있었다. 그러므로 그때의 비답을 평안도의 전례에 의하여 조사(措辭)하려 하였는데, 고발 속에 들어있는 자는 모두 응당 형률을 곱절로 적용해야 할 자들이었다. 비록 전관(銓官)을 시켜 차대(差代)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늙고 병든 사람을 용납할 방도가 없을 것을 염려하여 다시 경들에게 잘 토의하여 품의 조처하게 하였던 것이니, 내 생각 역시 교자 타는 것을 금함에 있어 엄히 하지 않을 수 없으나 한계를 또한 두지 않을 수 없다고 본 데서 나왔기 때문이었다. 때마침 경의 차자를 보니 참으로 일리가 있다. 다시 우의정과 상의하여 하나로 결정지어 회계함으로써 조정의 영이 오래도록 시행되게 하고 여러 수령들 또한 준수하기 편리하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나라의 기강이 무너지고 사치를 숭상하는 풍속이 점차 성행함으로써 늙은 당하관이나 젊은 당하관을 논할 것 없이 일단 수령으로 제수되기만 하면 서로 경쟁이나 하듯 교자를 타고 좌우에 휘장을 드날리면서 큰 길로 마구 달리니, 이를 징계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규율을 엄히 정하여 오래도록 준수하게 해야 합니다. 덮개가 있는 교자를 탄 자는 좌우에 휘장이 있건 없건을 막론하고 율문을 상고하여 귀양보낼 것이며, 밑바탕만 있는 것을 탄 자도 또한 법을 어기고 함부로 탄 것에 속하므로 드러나는 족족 계문하여 논죄 파면해야 합니다. 늙고 병들거나 젊었어도 실지로 병이 있는 자로서 먼 길을 가야 할 경우에 있어서는 의당 곡진히 용서하는 길이 있어야 합니다. 채가 없는 부담기는 그 만듦새가 졸렬하여 원래 사치로울 것이 없으며, 비실대는 말이라도 혹시 도움을 받아야 할 경우에는 부담기를 타는 것을 허락함으로써 몸도 의지하고 다리도 쉬게 해야 할 것입니다. 봉명 사신의 행차에 병고가 있어 혹시라도 부담기를 탈 경우에는 개인의 말은 탈 수도 있지만 역마에다 짐을 싣는 것은 본디 조정의 금령이 있어 그 죄는 덮개가 있는 교자를 탄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규정을 만들어 공문으로 알려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0책 30권 38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135면
  • 【분류】
    정론(政論) / 사법(司法)

○丁亥/左議政蔡濟恭上箚曰:

國法非緋玉作宰者, 不許乘轎, 等威嚴耳。 第乘轎亦有多般分數, 有有屋而褰左右翼帳者, 有不帳而只有屋者, 有不屋而只下裝者, 有俗所謂負擔機者。 上所稱下裝, 雖與有屋差異, 旣令雙杠外出, 徒御擡擁, 則雖屬之乘轎, 亦未爲不可。 至於負擔機, 則制旣非轎, 又無杠出, 特不過歇脚, 而用道臣之混擧啓聞之中, 不思之甚也。 夫西路守令, 武人居半, 緋玉者間之, 至於堂下官, 勿論文蔭, 其數無多。 今以現告罷者, 若是相續, 道路之上, 來往如織, 銓部之政, 都目日出。 以臣推之, 三南與關東數百郡縣, 幾皆堂下蔭官, 其現告將次第以至, 則未知得免者幾人。 其中無良不法者, 因此行遣, 固爲可幸, 如不然者, 亦豈非可惜乎? 守令遞易, 在京視之, 不過一紙之書出姓名, 無甚爲難事, 若其官吏之換易簿書, 盜弄國穀, 惟此機是乘。 況三南本無雇馬, 新舊遞易與夫直, 皆令民結責出, 大邑至千餘金, 小邑亦近千數。 假令一年之內再易守, 則斂民當爲數千金, 不幸至三易, 則其爲弊於窮民, 顧何如也? 臣謂乘轎之罪, 不得不嚴勘, 而至於負擔機爲名者, 差代之人, 雖無可及, 方來之類, 特爲寬恕, 俾無許多作窠之患。 至於馹騎, 雖負擔機, 亦不可見原, 惟聖明裁擇。

批曰: "日前因海西守令乘轎及乘擔機事, 該道伯狀請論罪, 使卿等草記稟處者, 已有前此關西守令處分時, 區別分等之傳敎, 意謂卿等回啓亦然。 及見草記, 略有界限, 而擔機亦在罷官秩。 故伊時批旨欲依關西例措辭, 而入於現告者, 皆是應在加倍之律者。 雖令銓官差代, 猶以眞箇老且病者, 無容旋之方爲念, 又使卿等商確稟處。 予意亦出於轎禁, 則不可不嚴, 而界限亦不可不存故爾。 際見卿箚, 儘有意見, 更與右相相議, 指一回啓, 使朝令行之悠久, 諸倅遵亦便好可也。" 備邊司啓言: "國綱解弛, 侈風漸盛, 毋論老少, 堂下官之一除守令, 務勝乘轎, 左右翼帳, 橫馳大道, 其在懲勵之道, 嚴立科條, 永久遵行, 而乘有屋者, 毋論有翼帳、無翼帳, 考律定配, 乘下裝者, 亦係法外濫乘, 隨現啓聞論罷。 至於老病及年少有實病者, 長程驅馳, 宜有曲恕之道。 無杠機制樣踈劣, 初不爲侈, 馬或顚蹶, 賴此扶持, 宜令許乘, 俾得依身歇脚。 奉命使行有病故者, 如或乘擔機, 則私馬猶或可也, 而駄之驛馹, 自有朝禁, 其罪與乘轎有屋者一般。 請以此定式行會。" 允之。


  • 【태백산사고본】 30책 30권 38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135면
  • 【분류】
    정론(政論) / 사법(司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