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관 성종인이 올린 ‘문견 별단’
소대(召對)가 있었다. 사행(使行)을 마치고 돌아온 서장관(書狀官) 성종인(成種仁)을 소견(召見)하였다. 종인이 ‘문견 별단(聞見別單)’을 올렸는데, 그 내용에,
"1. 저 지역의 농사 상황은 작년 여름과 가을이 바뀔 무렵에 오래 계속된 장마가 농사를 손상시킨 결과, 요양(遼陽) 이동 지방은 수확할 것이 전혀 없는 땅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바야흐로 관청에서 은(銀)을 내어 구제하고 있습니다. 심양(瀋陽)에서부터 산해관(山海關)까지는 요동(遼東)에 비해 약간 나은데 그래도 산해관 너머 지역보다는 못합니다. 울부짖으며 걸식하는 기민(飢民)들이 연경(燕京)에 이르기까지 줄을 잇고 있습니다. 지난 겨울의 모진 추위로 황성(皇城) 안에서 얼어죽은 자가 매우 많았습니다. 생각건대, 근본인 셈인 이 지역에 살 곳을 잃은 백성들이 많이 있는 것은, 비록 흉년으로 인한 기근 탓이라고는 하지만, 또한 구제 정책에 있어 적절한 방도를 취하지 못한 까닭인 듯도 합니다.
1. 금년 만수절(萬壽節)에는 이리오(伊犂烏)·노목제(魯木齊) 두 곳의 폐원(廢員) 2백 70여 명이 만수정(萬壽亭)과 경단(經壇)을 건립하여 축하하는 성의를 표하고자 하였으나, 황제께서 ‘이는 은혜를 노리고 하는 짓이다.’고 하여 특별히 지시를 내리어 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대체로, 종전에는 경사스런 전례(典禮)가 있게 될 경우, 어떤 일로 인하여 버림을 받은 사람들이 간혹 사사로이 정자를 짓고 단을 쌓은 까닭에 죄를 용서받고 등용되기까지 하였습니다. 황제께서는 그 폐해를 잘 알고 있는 까닭에 단연코 따르지 않으시고, 단지 왕공(王公)과 대신(大臣)들의 경사를 축하하려는 요청만을 허락하였습니다.
아계(阿桂)·화신(和珅)·복장안(福長安)·김간(金簡) 등이 경사를 축하하는 사무를 총관(總管)하는데, 황제께서는 비록 비용을 줄여 간단하게 치루라고 하였지만, 아랫사람들이 봉행(奉行)하는 것은 되도록 한껏 성대하게 치루려고 하였습니다. 안팎의 궁전(宮殿)과 크고 작은 의물(儀物)들을 모두 새로 마련하였으며, 연경에서부터 원명원(圓明園)에 이르기까지의 누대(樓臺)에는 금·구슬·비취로 장식을 하였고, 가산(假山)에도 사원(寺院)과 인물(人物)을 만들어 놓았는데 그 기괄(機括)을 움직이면 문창(門窓)들이 열렸다닫혔다 하고 인물들이 움직였습니다. 이런 것들을 마련하기 위한 자금은 무려 수만금이나 되는데, 관청 창고의 재물은 조금도 쓰지 않았고, 외방(外方)의 여러 성(省)들에서는 3품 이상의 대관(大官)들이 다들 진헌(進獻)을 하였으며, 수도에서는 각부(各部)와 원(院)의 당관(堂官)들이 쌀과 녹봉을 모두 희사하였습니다. 또 양회(兩淮)012) 의 염원(鹽院)에서 바친 4백만 금을 보조하여, 바야흐로 지금 남경(南京)에서 만들어서 기일에 맞춰 실어다 놓도록 하고 있다고 합니다.
1. 안남국(安南國)은 광서성(廣西省) 남쪽에 있는데, 바로 옛날의 교지(交趾)입니다. 안남의 동쪽에는 또 광남(廣南)이 있는데, 안남의 속국(屬國) 같았으나 신하로 섬기지는 않았습니다. 재작년에 광남 사람 완혜(阮惠)가 사람들을 규합(糾合)하여 안남을 공파(攻破)하고 그 임금을 살해한 후 스스로 임금이 되었습니다. 안남왕의 아들 여유기(黎維祈)는 그 어머니와 더불어 피난하여 바다를 건너 광서성에 가서 구원을 청하였습니다. 그 성(省)의 총독(摠督)인 복강안(福康安)이 이 일을 보고하자 황제께서 그 성의 장군(將軍)인 손사의(孫士毅)로 하여금 군사를 동원하여 토벌하게 하였는데, 하루도 채 안 되어 여성(黎城)을 수복하였습니다. 여성은 바로 안남국의 도성(都城)입니다. 완혜는 패하여 광남으로 달아났는데, 관병(官兵)들도 많은 손실을 입었습니다. 이에 여유기를 봉(封)하여 안남 국왕(安南國王)으로 삼았는데, 관병이 철수하자마자 완혜가 또다시 군사들을 모조리 이끌고 와서 도전을 하였습니다. 여유기는 겁을 먹고 달아나 민간(民間)에 숨었으며 여성은 함락되었습니다. 사의가 또 군사를 진격시키자 완혜는 크게 두려워서 사람을 보내 항복하겠다고 청하였으나, 복강안·손사의 등이 이를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완혜는 이름을 광평(光平)이라고 고치고 사로잡힌 관병에게 많은 자금을 주어서 보내는 한편, 자기의 친조카를 보내 강안에게 많은 선물을 주면서 표문(表文)을 가지고 서울로 올라가게 해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그러자 강안은, 광평이 진심으로 내부(內附)한다는 것을 조목조목 조정에 아뢰는 한편, 유기의 비겁하고 나약하여 제구실을 못하는 정상을 말하였습니다. 황제는 상주문(上奏文)을 받아보고 광평의 죄를 용서하는 동시에 그가 보내는 사신이 서울에 올라오는 것을 특별히 허락하였습니다. 이어 하지(下旨)하여 이르기를 ‘안남이 비록 바다 모퉁이에 외따로 위치하고 있기는 하나, 그 나라의 흥폐(興廢) 역시 운수에 관계된다. 여유기는 우유 부단하고 공무를 몰라라 하니, 이는 천심(天心)이 이미 여씨(黎氏)를 싫증내어 버린 셈이다. 짐(朕)은 서무(庶務)를 처리함에 있어 모두 하늘의 뜻에 따라 행하고 있는데, 완광평(阮光平)은 죄를 뉘우치고 정성을 바쳐 한 달 동안에 여러번 항복하겠다고 청해왔다. 그 정성스럽고 간절한 말이 진심에서 우러나왔을 뿐 아니라, 또 내년에는 자신이 서울에 와서 나의 장수(長壽)를 축하하고 또한 싸우다가 죽은 우리 나라의 장수와 군졸들을 위하여 단(壇)을 쌓고 제사를 올리겠노라고 말하였다. 이에 그가 조심스럽고 공순하다는 것을 더욱 알 수가 있다고 하겠다. 여유기는 이미 인장(印章)을 버리고 도망을 쳤으니, 자연히 다시는 나라를 세우게 할 도리가 없어진 셈이다. 그러니 곧장 관원을 보내 칙서를 가지고 가서 완광평을 봉하여 안남 국왕으로 삼으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광평은 감격해 마지 않으면서 그의 가신(家臣) 여섯 사람을 보내어, 한편으로는 공물을 바치고 한편으로는 봉전(封典)에 사례를 하면서 올해 3월 어느날에 자기 나라에서 길을 출발하여 8월에 상경(上京)할 것을 청하니, 황제가 크게 칭찬을 하고서 특별히 띠[帶]를 하사하였습니다. 또한 내각(內閣)으로 하여금 해당 국왕(國王)이 상경할 때 연도(沿途)의 관원들이 상견(相見)할 의주(儀註)를 의논하여 정하도록 하였고, 수도에 올라온 사신 여섯 사람에게도 다 물건을 후하게 주었으며, 매번 연회 반열에 참가하도록 허락하였습니다.
그 사람들은 비록 글을 알기는 하나, 생김새가 매우 잔약하고 용렬하였으며, 다들 광대가 입는 망포(蟒袍)를 착용하였는데, 해국(該國)의 옛 제도와는 크게 다르다고 합니다. 여유기는 나라를 잃은 뒤에 광서성에 내왕하였는데, 그의 무리들로서 따라온 자는 90호(戶)나 되었습니다. 황제께서 유기에게 4품의 벼슬을 주고 안정문(安定門) 밖에 집을 지어줬습니다. 장차 다들 연경에 데려다가 객관(客館)에 머물려두고 식량을 대준다고 하는데, 이것은 광평을 위하여 후환(後患)을 없애자는 의도에서 나온 일입니다. 대체로 안남의 내란은 광평 때문에 시작되었는데, 처음에 이미 군대를 동원하여 토죄(討罪)를 하고서는 곧이어 또 이것을 빼앗아 그에게 주었다는 것은, 죄있는 나라를 토벌하고 대가 끊어진 나라를 이어주는 도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연경 사람들 중에는 이 일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의견들이 현저히 있습니다.
1. 안남 국왕 완광평은 안남이 몹시 무더운 벽지에 위치해 있어 일찍이 책력(冊曆)을 하사받지 못하였다고 하여 정삭(正朔)을 내려보내 줄 것을 청하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여러해 계속된 전란 때문에 물력(物力)이 고갈되었으므로 더불어 시장 교역을 하게 해줄 것을 청하니, 황제께서 하지(下旨)하기를, ‘해국(該國)의 왕이 나라를 세우는 초창기에 천조(天朝)를 높이 받들어 능히 정삭(正朔) 받드는 것을 급선무로 삼는 데 대하여 매우 갸륵하고 기쁘게 생각한다. 다만, 조선(朝鮮)에서는 기한에 앞선 10월 초하루에 서울에 와서 헌서(憲書)를 정중히 받고 있는데, 지금 안남은 먼 남쪽에 있으므로 만약 조선의 예에 비추어 신하를 보내더라도 서울에 도착하면 벌써 춘정(春正)의 기한이 지나게 된다. 그러니 해부(該部)로 하여금 즉시 고종 55년의 시헌서(時憲書)를 가져다가 해성(該省)의 총독(摠督)에게 넘겨주어 진남관(鎭南關)에 가지고 가서 안남진(安南鎭)으로 하여금 해국(該國)의 왕에게 전달하게 하고, 해마다 조선에 반포해주는 수목(數目)에 비추어 시기에 맞춰 반포해 줌으로써 그 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지 않도록 하여 돌봐주는 뜻을 표하도록 하라. 안남과의 시장 교역에 대해서는, 본래 금지된 바이기는 하나 해국의 왕이 정성을 다하여 이미 우리 나라의 번방(藩邦)이 되었으니 그 경내의 백성들도 모두 나의 적자(赤子)이다. 전란을 겪은 뒤에 거리와 마을이 볼품없게 되었을 터이니, 해성(該省)의 독무(督撫)와 수구(水口) 등의 관준(關准)을 받아서 시장 교역을 하게 하라. 그럼으로써 짐(朕)의 만백성을 똑같이 사랑하는 지극한 뜻에 부응토록 하라.’고 하였습니다.
1. 파륵포(巴勒布)는 바로 서쪽 변경에 있는 번자(番子)로서 서장(西藏)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니, 곧 먼 황복(荒服)의 바깥 지역입니다. 파륵포 사람들이 서장에 가서 교역(交易)을 하면 서장 사람들이 대부분 그들을 얕잡아보고 박대하면서 거래를 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파륵포 사람들이 이를 분하게 여기어 군사를 이끌고 와서 서장을 침범하였습니다. 그러자 황제께서 서장의 장군으로 하여금 그들을 토벌하게 하였는데, 파륵포의 추장(酋長)은 싸우지 못하고 즉시 항복하였으며 이어 공물(貢物)을 바치면서 정성을 다하겠노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장군이 이를 허락하였으며, 작년 가을 두목(頭目) 두 사람과 종번(從番) 30명이 표문(表文)을 가지고 공물을 바치러 출발하여 12월에 연경에 도착하였습니다. 그 사람들은 눈이 움푹하고 수염이 꼬불꼬불하였으며 빨간 천으로 머리를 동였는데 생김새가 매우 괴이하였습니다. 황제께서는, 그들이 교화(敎化)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먼곳 사람으로서 처음으로 정성을 바쳤다 하여 매우 우대를 하였습니다. 관청에서 윗도리·바지·모자·신발을 주었는데, 두목 두 사람에게는 4품(品)의 정대(頂帶)를 주었고 종번 30명에게는 7품의 정대를 주면서 그들로 하여금 연회 반열에 참가하도록 하였습니다.
1. 작년 11월 17일에 황제의 딸이 화신(和珅)의 아들에게 하가(下嫁)하였습니다. 황제의 딸은 올해 나이가 17세이고 화신의 아들은 올해 나이가 18세였습니다. 분부가 있어 약혼(約婚)한 지는 이미 여러해 되었는데 작년 겨울에야 비로소 혼례를 치루었습니다. 융숭한 총애와 사치스러운 혼수는 전(前)의 부마(駙馬)인 복륭안(福隆安)의 혼사 때보다 열 배나 되었습니다. 혼인을 한 이튿날부터 물건들을 공주의 집으로 실어보냈는데 그 값을 대략 따져도 수백만 금이 넘었습니다. 27일에 황제의 딸이 시가로 가는데 대궐 창고의 은(銀)을 특별히 30만 금이나 주었고, 대관(大官)으로서 손에 여의주(如意珠)을 받들고 가마 앞에서 황제의 딸에게 절하면서 작별한 자도 그 수가 무려 수천 수백 명이나 되었습니다. 비록 수석(首席) 각로(閣老)로서 나이가 많고 벼슬이 높은 아계(阿桂) 같은 사람으로서도 이 자리에 빠질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1. 작년 11월 17일에 성(省)의 감생(監生)들이 황성(皇城)의 북위시(北圍試)에 함께 응시하였을 때 강소성(江蘇省) 오석현(吳錫縣)의 어떤 응시자가 시험장의 창군(鎗軍)과 내통하였다가 일이 발각되었습니다. 화신(和珅)이 응시자와 창군을 붙잡아다가 캐물어 죄상을 밝혀낸 뒤 이들 두 사람을 즉시 교형(絞刑)에 처하고, 주고관(主考官) 및 독렴관(督廉官)을 모두 파직시켰습니다. 창군이 구두 공술에서 고관(高官)들의 자제를 많이 끌어대었으나 이것은 덮어둔 채 따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대체로 과거 시험의 폐단은, 혹은 안면 관계에 끌리기도 하고 혹은 돈으로 뇌물질을 하여, 내정(內庭)에서 시험의 글제목을 내기만 하면 바깥 사람들이 이를 곧 알아내어 외부 사람들의 손을 빌리는 폐단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어지럽게 발생하는데, 아무리 법을 혹독하게 세워도 그 폐단이 근절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1. 같은 부(部) 안에서 만인(滿人)과 한인(漢人) 두 사람이 사무를 분담하여 다스리는데, 만인은 전곡(錢穀)과 갑병(甲兵)을 주관하고, 한인은 문서 처리나 회계 처리만을 맡기 때문에, 벼슬 품계는 같더라도 주객(主客)이 현격하게 다릅니다. 또한 군사와 백성으로 말하더라도 만인은 다들 부대에 소속되어 있으나 한인은 거의가 민호(民戶)로 되어 있습니다. 한인으로서 부대에 소속되기를 원한 자는 ‘녹기병(綠旗兵)’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모든 요역(徭役)에 관한 것도 군사들은 가볍고 백성들은 무거우며, 농지(農地)에 대한 조세 역시 군사들은 조[粟]를 납부하는데 백성들은 더러 은(銀)을 납부하고 있습니다. 진휼(賑恤)하는 정사에 있어서도, 군사들에게는 빠짐없이 두루 나누어주지만 백성들에게는 반드시 뽑아서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인과 한인, 군사와 백성들 사이에는 살찌고 여윈 정도의 차이가 판이하여 원한(怨恨)이 많이 일고 있습니다. 또 서울 안의 사람들은 벼슬아치가 아니면 장사치들이므로 농민들은 더욱 병들고 있습니다. 요즘에 와서는 경비(經費)가 또 대부분 상세(商稅)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전방(廛房)과 시사(市肆)에서마다 세금을 거두는 것이 매우 번다하기 때문에, 장사치들도 이익을 보지 못한다고 합니다.
1. 황제가 백성들을 진휼(賑恤)하는 정사에 정성을 쏟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일을 맡아보는 사람들이 대부분 중간에서 가리고 막는 실정입니다. 요동 지방에서 나누어 진휼할 때에도 봉성(鳳城)의 장수들은 단지 두 달 동안만 진휼 정책을 시행하고 나머지는 모두 자기 주머니에 넣고 말았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진휼하기 위한 은(銀)을 당전(唐錢)으로 바꾸어주는데 기민(飢民)이 1개월에 받은 것이 각기 50문(文)에 불과하였으나, 이를 호소할 길이 없어서 원성(怨聲)이 길에 가득하였습니다. 신이 눈으로 본 것은 이와 같았으나, 또 산해관(山海關)이나 삼화현(三和縣) 등 지역은 모두 행상(行商)들을 검열하는 장소인데 해당 지방관이 제때에 검열을 하지 않고서 일부러 꾸물거리며 지체시키는 까닭에, 행상배(行商輩)들이 객점(客店)에서 오래 묵으면서 비용을 쓰는 것이 매우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는 수 없이 짐바리에 따라 뇌물을 바치고 어서 떠나갈 궁리만을 하니, 그 폐해가 날로 더해가고 원망이 숱하게 일고 있습니다. 대체로 관장(官長)이라는 사람들은 염치라고는 전혀 없고 돈만을 추구하다 보니, 지현(知縣)은 지부(知府)에게 후하게 선물을 보내고 지부(知府)는 권세있는 관리를 잘 섬기어 위아래가 서로 어울려 부당하게 비호(庇護)를 해줍니다. 그러기 때문에 불법적인 일을 제멋대로 저지르지만 결국에는 요행히 빠져나가므로, 백성들이 곤궁해지는 것은 전적으로 여기에 기인하고 있습니다.
1. 모든 모임의 백관들에게는 다 따라다니는 사람이 있는데, 관청에 출근할 때에는 다들 물리쳐 버립니다. 비록 액정(掖庭)의 하인이나 서리(胥吏)들이라 하더라도 관청 뜰 안에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동서(東西)의 품반(品班)에는 단지 시위(侍衛)하는 사람들과 반열을 인솔하는 관원들만 질서있게 늘어서서, 떠드는 소리 없이 조용한 상태에서 일시에 행례(行禮)를 하는데 조금도 혼잡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황제가 행차할 때는 호위병의 수가 매우 적고 길을 인도하는 사람도 극히 간단합니다. 지나가는 길에는 단지 말발굽 소리만이 들리고 거리와 마을에서는 모여 구경하는 사람이 전혀 없으니 그 규모와 기강을 조금은 미루어 알 만합니다. 그런데 다만, 존비(尊卑)와 귀천(貴賤)의 명분이 분명하지 않은 까닭에, 비록 품계가 높은 고관(高官)일지라도 서리와 하인들 속에 뒤섞여 있어서 상하의 체모(體貌)라곤 전혀 없었습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9책 29권 57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112면
- 【분류】왕실(王室) / 외교(外交)
- [註 012]양회(兩淮) : 회남(淮南)·회서(淮西).
一, 彼地年事, 昨年夏秋之交, 久澇傷稼, 遼陽以東, 殆同赤地, 方自官散銀賙賑。 自瀋陽至山海關, 比遼東稍勝, 而猶遜於關外。 飢民之號丐者, 至燕京相續。 昨冬酷寒, 皇城內凍死者甚衆。 惟此根本之地, 多有失所之民者, 縱云飢饉之所致, 亦似接濟之乖方。
一, 今年萬壽節, 伊犂烏、魯木齊兩處廢員二百七十餘人等, 請建萬壽亭、經壇, 要伸祝釐之悃, 皇帝謂以設法邀恩, 特旨禁抑。 蓋從前遇有慶典, 坐事廢斥之輩, 或因私建亭壇, 至蒙滌用, 皇帝深知其弊, 斷然不從, 只許王公大臣稱慶之請。 阿桂、和珅、福長安、金簡等, 總理稱慶事務, 皇帝雖令節省, 而群下奉行務極侈大。 內外宮殿, 大小儀物, 無不新辦, 自燕京至圓明園, 樓臺飾以金珠翡翠, 假山亦設寺院, 人物動其機括, 則門窓開闔, 人物活動, 營辦之資, 無慮屢萬萬, 而一毫不費官帑, 外而列省三品以上大員, 俱有進獻; 內而各部院堂官, 悉捐米俸。 又以兩淮鹽院所納四百萬金助之, 方自南京營造, 及期輸致云。
一, 安南國在廣西省之南, 卽古之交趾也。 安南之東, 又有廣南, 殆若安南之屬國, 而亦不臣事。 再昨年, 廣南人阮惠糾合人衆, 攻破安南, 戕害其王而自立。 安南王之子黎維祈, 與其母逃難, 浮海至廣西省請援。 該省摠督福康安以聞, 皇帝命該省將軍孫士毅, 發兵討之, 未及一日, 收復黎城, 黎城卽安南都城也。 阮惠敗走廣南, 而官兵亦多折傷。 封黎維祈爲安南國王, 官兵纔撤回, 而阮惠復悉衆來戰, 維祈畏㤼走匿民間, 黎城失守。 士毅又進兵, 阮惠大懼, 遣人請降, 康安、士毅等却而不納。 阮惠改名光平, 將被擒官兵厚資以送, 遣其親姪, 厚遺康安, 懇請賫表進京。 康安條奏光平誠心內附, 且陳維祈怯懦不堪狀。 皇帝覽奏, 赦光平罪, 特許來使進京, 仍下旨曰: ‘安南雖僻處海隅, 然其國興廢, 亦關氣運。 黎維祈優柔廢弛, 是天心已厭棄黎氏。 朕辦理庶務, 無不順天而行, 阮光平悔罪投誠, 匝月之間, 屢勤乞降。 情詞肫切, 出於至誠, 且稱明年親自來京, 恭祝萬壽, 又爲陣亡天朝將士, 築壇奠祭, 尤見小心恭順。 黎維祈已棄印潛逃, 自無復令立國之理。 卽遣官賫勑, 封阮光平爲安南國王。’ 光平感激不已, 遣其家臣六人, 一修賞貢, 一謝封典, 請於今年三月日, 自該國起程, 趁八月上京, 皇帝大加褒美, 特賜帶。 又令內閣, 議定該國王上京時, 沿途官員相見儀註, 來使六人, 亦皆厚賜, 而每於宴班, 許令參坐。 其人雖解文字, 而貌甚孱劣, 俱着戲子蟒袍, 與該國舊制大異云。 黎維祈失國之後, 來住廣西省, 其徒屬之隨到者, 爲九十戶。 皇帝賜維祈四品爵, 治第於安定門外。 將幷致燕京, 而館穀之, 此出於爲光平, 絶後患之意, 蓋安南內訌, 厥由光平而始, 旣興師問罪, 旋又奪此與彼者, 殊非討有罪, 繼絶國之道。 故燕京之人, 顯有不平之論。
一, 安南國王阮光平以安南僻處炎荒, 未曾授時, 乞授正朔。 且以連年兵燹, 物力凋殘, 請與交市, 皇帝下旨曰: "該國王于締造之初, 崇奉天朝, 能以奉正朔爲急務, 深爲嘉慰。 但朝鮮先期赴京于十月朔, 祗領憲書, 今安南遠在南交, 若照朝鮮之例, 遣臣到京, 已踰春正之期。 令該部卽將五十五年時憲書, 發交該省摠督, 賫至鎭南關, 令安南鎭自轉交該國王, 每年着照頒發朝鮮數目, 屆期頒給, 毋庸該國遣使, 以示體恤。 至於安南交市, 本有所禁, 而該國王輸誠効悃, 已就藩封, 其境內黎元, 皆吾赤子。 兵燹之餘, 閭閻弊殘, 着該省督撫、水口等關准令交市, 以副朕同仁至意。" 云。
一, 巴勒布卽西邊番子, 而在於西藏之西, 乃荒服之外也。 巴人詣西藏市易, 藏人多鄙薄之, 不肯市易, 巴人恨之, 率衆來侵。 皇帝令西藏將軍討之, 巴酋不戰卽降, 仍請通貢自效, 將軍許之。 昨年秋遣頭目二人、從番三十名, 封表入貢, 十二月到京。 其人深目卷鬚, 紅布纏頭, 狀貌極怪。 皇帝以化外之人始爲輸誠, 甚優待之。 官給衣、袴、帽、靴, 頭目二人賜四品頂帶, 從番三十名賜七品頂帶, 使之隨參宴班。
一, 昨年十一月十七日, 皇女下嫁於和珅之子, 皇女今年十七, 和珅子今年十八。 有旨約婚, 已有年矣, 乃於昨冬, 始行婚禮。 寵愛之隆, 粧奩之侈, 十倍於前駙馬福隆安時。 自過婚翌日, 輦送器玩於主第者, 槪論其直, 殆過數百萬金。 二十七日, 皇女于歸, 特賜帑銀三十萬。 大官之手奉如意珠貝, 拜辭於皇女轎前者, 無慮屢千百, 雖以首閣老阿桂之年老位尊, 亦復不免云。
一, 昨年十一月十七日, 省監生同赴於皇城北圍試, 有江蘇 吳錫縣擧人, 與試圍鎗軍和應事覺, 和珅拿獲擧人及鎗軍, 盤詰得情, 二人卽斷絞罪, 主考及督廉官竝革職。 鎗軍口供, 亦多引高官子弟, 而此則置而不究云。 大抵科擧之弊, 或循情面, 或行銀貨, 內庭題目一出, 外人登時得知, 倩手外場之弊, 不勝紛紜。 雖用法甚酷, 而弊猶不止云。
一, 一部之內, 滿、漢二人分治事務, 滿人主錢穀、甲兵, 漢人惟簿書、期會, 爵秩雖同, 主客懸殊。 以兵民言之, 則滿人悉隷旗下, 漢人擧爲民戶。 漢人之願屬旗下者, 號以綠旗兵, 而凡干徭役, 兵輕民重, 田畝之稅, 兵則賦粟, 而民或賦銀。 賙賑之政, 兵則遍及, 而民必抄付。 以此, 滿、漢兵民之間, 腴瘠判異, 怨恨交加。 且國中之人, 非仕宦則行商販, 農民益病。 近日以來, 經用又多出於商稅, 逐廛隨肆, 征榷甚繁, 故商賈亦未免失利。
一, 皇帝於恤民之政, 非不懃懇, 而任事之臣, 率多壅閼。 遼東分賑時, 鳳城將只行兩朔賑政, 而餘皆歸於私橐。 且以賑銀, 換作唐錢, 飢民一月所受, 各不過五十文, 號訴無階, 怨聲載路。 臣所目擊者如此, 而且山海關、三和縣等處, 俱爲行商點閱之所, 該地方官不卽檢視, 故爲稽滯, 行商輩久留客店, 盤費浩多。 故不得已逐卜納賂, 以圖速發, 其弊日滋, 怨謗狼藉。 大抵爲官長者, 廉恥都喪, 貨利是趨, 知縣厚饋知府, 知府善事權要, 上下相蒙, 曲加庇護。 故恣行不法之事, 而畢竟倖逭, 生民困窮, 專由於此。
一, 凡於期會百官, 各有跟隨, 而坐殿時, 幷皆屛去。 雖掖隷胥吏之屬, 亦無一人在庭。 東西品班, 只有侍衛及押班官, 列立齊整, 寂然無譁, 一時行禮, 少不錯雜。 駕行時, 羽衛至少, 陪導極簡, 而行路之上, 惟聞蹄響, 街巷之間, 絶無聚觀, 其規模紀綱, 可以推知一端, 而但尊卑貴賤, 名分不明, 雖崇品高官, 混列於胥隷中, 全沒上下體貌。
- 【태백산사고본】 29책 29권 57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112면
- 【분류】왕실(王室) / 외교(外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