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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 29권, 정조 14년 3월 19일 기해 2번째기사 1790년 청 건륭(乾隆) 55년

한인 아병을 한려로 고치고 하교하다

단풍정(丹楓亭)에 나아가 명(明)나라 사람들의 자손을 불러들여 접견하고 한인(漢人) 아병(牙兵)을 한려(漢旅)로 고쳤다. 하교하기를,

"한인(漢人)으로서 우리 나라에 배귀(陪歸)한 사람들을 세자 시절의 효종께서 궁궐 부근에 살 수 있게 하라고 명하였고, 보위(寶位)에 오른 뒤에는 내수사(內需司)에 소속시켜 식구의 수를 따지어 양식을 주었다. 이어 또 훈국(訓局)의 아병색(牙兵色)에 편입시켜 고기잡이로 생계를 꾸려나가게 하였으니, 이것이 한인 아병을 설치하게 된 전말이다.

당시에는 그들이 방랑하다 우거(寓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살아갈 대책이 아득하였고, 게다가 세상이 격변한 초기라 쉬쉬하며 숨겨야 할 일이 많았다. 그러므로 그들이 이만한 정도로도 만족스레 여겼을 뿐 아니라, 사람들이 그들을 대하는 것도 감히 함부로 홀대하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요즘에 이르러서는 설시(設施)한 지 이미 오래되고 풍습 또한 예전같지 아니하여, 그들이 스스로 감수하는 바나 사람들이 그들을 업신여기는 것이 그야말로 극도에 이르렀다고 할 만하다. 심지어는 무술(武術)을 열시(閱視)하는 교장(敎場)에서 그들을 가왜초(假倭哨)로 삼기도 하고 있다. 그들은 중국 관리들의 후예로서 이처럼 지극히 천하고 비루한 노릇을 하고 있으니, 이 말을 들음에 너무도 유감스럽고 애석하다. 그들을 위하여 기어코 진자리에서 벗어나 마른자리로 옮겨가게 할 방도를 별도로 강구하고 겸하여 곤경으로부터 구제하여 좀더 좋은 환경으로 옮겨가는 길을 열어주고자 하였는데, 일이 제도를 변개(變改)하는 일에 관계되므로 머뭇거리며 주저해온 지가 오래되었다.

오늘은 바로 황단 망배례(皇壇望拜禮)를 행하는 날이다. 그런데 명(明)나라를 받들던 생각과 멸망해버린 나라에 대한 감회를 조금이라도 펼 길이 없다. 번거로움과 힘든 점을 꺼리지 않고서 밤늦도록 이 일을 갖고서 명나라 사람들의 자손들에게 반복하여 물어보았다. 이 일을 바로잡는 일을 어찌 날을 넘기겠는가. 이미 ‘한인(漢人)’이라고 하고 또 ‘아병(牙兵)’이라고 일컫고 있으니, 이것부터 즉시 바로잡지 않아서는 안 되겠다. 이제부터는 ‘아병’이라는 명칭을 없애도록 하라.

이와 관련하여 전부터 마음속에 늘 잊지 못하고 있으면서도 아직껏 규정으로 정하지 못한 것이 있다. 황단의 의품(儀品)이 갈수록 차츰 완비되는 것은 도덕으로 보거나 사리로 보거나 어긋남이 없고 의혹스러움이 없는 일이다. 그런데 처음에는 새로 창제하는 것이 많았고 수직(守直)하는 절목(節目)도 중관(中官)이 주관하였으며, 나중에는 수복(守僕)을 증가시켰고 다시 문을 지키는 부장(部將)을 증가시키어, 공사(公私) 문적(文蹟)에 모두 구애되는 바가 없었다. 유독 수직하는 관원(官員)에 대해서만 외정(外廷)이 몰라라 하는 것은 아무래도 흠사(欠事)라고 하겠다. 지금은 군병(軍兵)에 편입시키는 제도를 없앴으니 귀속(歸屬)시킬데 대한 방도를 생각해야 한다.

황단의 수직은 명(明)나라 사람의 자손 중에서 세 자리를 정하여 ‘수직관(守直官)’이라 일컫고 병조로 하여금 의망(擬望)하여 차출하게 하라. 아병(牙兵)들은 ‘한려(漢旅)’라고 부르고 정원수는 30명으로 정하여 훈국(訓局)에 소속시키되, 이들을 지휘하는 체계는 용호영(龍虎營)의 금려(禁旅)나 진무영(鎭撫營)의 의려(義旅)·장려(壯旅)의 제도를 적용하라. 또 번(番)을 서고 역(役)을 지는 것은, 훈국의 국출신(局出身)과 금위영(禁衛營)의 별기대(別騎隊)의 예를 적용하도록 하고, 제향(祭享) 때에 신탑(神榻)을 받들고 제찬(祭饌)을 마련하고 거두는 일 등은 충의위(忠義衛)를 대신하여 거행하게 하라. 이 자리에서 수직관으로 천전(遷轉)시키고 수직관의 임기가 차면 그 자리에 따라 한 자급씩을 올려주도록 하라.

별도로 수용(收用)하는 방도에 있어서는, 인품과 재주가 어떤가에 달린 것이지만, 이밖에 군교(軍校)의 축에 끼일 수 없고 곤궁하여 살 길이 어려운 자들은 훈국의 마병(馬兵)이나 보병(步兵) 가운데 약간 깨끗한 자리에 자원(自願)에 따라 소속시키도록 하라. 그러면 양편이 다 적합하게 될 것이다. 병조 판서로 하여금 묘당(廟堂)에 의논하여 사목(事目)을 만들어내서 훈국에 분부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충성스러운 사람을 녹용(錄用)하고 절의있는 사람을 장려하는 일을 반드시 후손에게까지 미치게 하는 것은 곧 그들을 부추겨 세워주면서 장려하고자 하는 것이니, 도움되는 바가 매우 클 것이다. 더구나 황조(皇朝)에 대하여 절의를 지킨 사람들에 대해서는 추후 장려하고 수록(收錄)하는 일을 더욱 어찌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충신의 자손들을 황단의 제사 반열에 참가하도록 한 일에서, 선조(先朝)의 성의(聖意)를 우러러 알 수 있다.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 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 문충공(文忠公) 김상용(金尙容), 능원 대군(綾原大君), 충경공(忠景公) 김수익(金壽翼), 문충공(文忠公) 조한영(曺漢英), 충정공(忠貞公) 윤집(尹集)·김덕함(金德諴), 충렬공(忠烈公) 홍명구(洪命耉)·황일호(黃一皓)·오달제(吳達濟), 충장공(忠壯公) 허완(許完), 충목공(忠穆公) 이시직(李時稷), 충정공(忠正公) 홍익한(洪翼漢), 충민공(忠愍公) 임경업(林慶業), 충간공(忠簡公) 윤계(尹棨), 의열공(義烈公) 홍명형(洪命亨), 충장공(忠壯公) 민영(閔栐)·이의배(李義培), 충장공(忠章公) 이흘(李忔), 요동백(遼東伯) 김응하(金應河), 증 승지 조정익(趙廷翼), 증 참판 이돈서(李惇叙)와 같은 사람에게는 포장(褒奬)하고 녹용(錄用)하는 은전이 갖추어졌다고 할 수 있고, 충현공(忠顯公) 이돈오(李惇五)의 후손에 대해서는 이미 승전(承傳)이 있어 전조(銓曹)에 신칙을 하였는데, 유독 충민공(忠愍公) 송도남(宋圖南)의 손자, 상원군(祥原君) 이세령(李世寧)의 손자, 정희공(貞僖公) 임유후(任有後)의 손자, 증 승지 김홍익(金弘翼)의 손자 등 다섯 집의 사람들은 모두 관직이 없다. 이 어찌 흠사(欠事)가 아니겠는가. 해조로 하여금 초사(初仕)에 차차 수용(收用)을 하게 하라.

그 가운데 늙어 머리가 허옇게 센 사람이 있는데 진작 수용을 하지 않은 것은, 조정의 본의가 막히고 시행되지 못했기 때문이니, 전조에 신칙을 하라. 증 대사헌 신만(申曼)민숙공(愍肅公) 김언(金琂)의 집안에는 아직 나이가 찬 적장손(嫡長孫)이 없고, 오늘 불러서 접견을 한 사람은 그의 서손(庶孫)이었다. 적서(嫡庶)를 따지지 말고, 전당(銓堂)으로 하여금 불러서 만나보고 수용할 방도에 대하여 사리를 따지어 초기(草記)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충현공(忠顯公) 집안에는 4대(代)에 정문(旌門)이 8개나 되니, 그 누가 감탄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증 참판 민성(閔垶) 집안에는 정문이 12개나 되니 더욱 우뚝한 바이다. 한 집안에서 한꺼번에 절의를 위해 죽은 사람이 12명이나 되니, 이러한 절의에 대하여 어찌 그저 정문을 세우고 추증(追贈)을 하는 데 그칠 수 있겠는가. 특별히 나타내주는 조치를 이러한 집안에 하지 아니하고 어디에 하겠는가. 지금에야 그것을 깨닫고 보니 나의 고루함이 매우 한스럽다. 증 참판 민재에게는 정경(正卿)을 가증(加贈)하고 시호를 줄 것이며 이어 자손을 수록(收錄)하는 특전(特典)을 베풀도록 하라. 또 정희공 임유후의 집은 가난해서 아직 시호(諡號)를 맞이하지 못하였으니, 해조로 하여금 연수(宴需)를 도와주도록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9책 29권 49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108면
  • 【분류】
    왕실(王室) / 인사(人事) / 군사(軍事) / 외교(外交)

○御丹楓亭, 召見皇朝人子孫, 改漢人牙兵爲旅, 敎曰: "漢人之陪歸東土者, 孝廟朝命使之寄接於宮底, 及登寶位, 屬之內需司, 計口給糧。 旋又編管訓局牙兵色, 漁業資生, 此漢人牙兵設置之顚末也。 在其時則流寓屬耳, 聊活無策, 加之以滄桑初改, 秘諱又甚。 不惟渠輩得此爲足, 人之待之, 亦不敢慢忽。 以至近日設施已久, 而風習不如古, 渠所自甘, 人之侮之, 可謂無餘地。 甚至閱武敎場, 或作假倭哨。 渠輩以中朝薦紳士夫之遺裔, 爲此至賤極鄙之役, 聞此豈勝歎惜? 爲渠輩必欲另求脫濕就燥之方, 兼開拯坑遷喬之路, 而事係變制, 趑趄者久矣。 今日卽皇壇望拜禮日也。 尊之思, 下泉之感, 無地可以少伸。 不憚煩勞, 竟夕以此事反復詢問於皇朝人子孫, 其所矯捄, 豈或踰日? 旣曰漢人, 又稱牙兵, 不可不先卽釐正, 自今牙兵之名革罷。 因此而有嘗所耿耿, 未遑定式者。 皇壇儀品, 轉益寢備, 爲不悖不惑之擧, 而在初多草創, 守直之節, 中官掌之, 後增守僕, 更增門部將, 公私文蹟, 皆無所拘。 獨守直官員, 外廷不知, 終是欠事。 今則編兵之制旣罷, 歸屬之方宜念。 皇壇守直, 以皇朝人子孫中, 定爲三窠, 稱號守直官, 令兵曹擬望差出。 牙兵等稱號旅, 仍定三十額, 屬于訓局, 節制挨次, 用龍虎營之禁旅, 鎭撫營之義旅、壯旅。 立番供役, 用訓局之局出身、禁營之別騎隊, 祭享時奉神榻, 設饌撤饌等事, 以代忠義之擧行。 以此岐遷, 轉於守直官, 守直官定瓜限, 則因其窠加一資。 至於別般收用之道, 在於人與才, 而外此不堪於校列, 窮無資生者, 如訓局馬步軍中稍潔岐, 從願許屬, 亦不害爲兩便。 令兵判就議廟堂, 成出事目, 分付訓局。" 又敎曰: "錄忠奬節, 必及於遺裔, 卽欲扶植而砥礪, 所補甚大。 況盡節於皇朝之人, 其所追奬而收錄, 尤豈歇後乎? 忠臣子孫之許使參班於皇壇行禮, 有以仰先朝聖意, 如文正公 宋時烈文正公 金尙憲文忠公 金尙容綾原大君忠景公 金壽翼文忠公 曺漢英忠貞公 尹集金德諴忠烈公 洪命耉黃一皓吳達濟忠壯公 許完忠穆公 李時稷忠正公 洪翼漢忠愍公 林慶業忠簡公 尹棨義烈公 洪命亨忠壯公 閔栐李義培忠章公 李忔、遼東伯金應河、贈承旨趙廷翼、贈參判李惇叙褒奬之擧、收錄之典, 足云備矣。 忠顯公 李惇五後孫, 旣有承傳, 申飭銓曹。 獨忠愍公 宋圖南孫、祥原君 世寧孫、貞僖公 任有後孫、贈承旨金弘翼孫, 五家人俱無官職, 豈非欠事? 令該曹初仕, 次次收用。 其中有老白髮者, 趁不收用, 朝家本意, 未免閼而不行, 申飭銓曹。 贈大司憲申曼愍肅公 金琂家, 姑無年滿嫡長, 而今日召見, 卽庶孫。 無論嫡庶, 令銓堂招見收用之方, 論理草記。" 又敎曰: "忠顯公家, 四世八旌, 人孰不咨嗟, 而贈參判閔垶家, 十二旌門, 尤所卓然。 一室之幷時立慬, 爲十二人, 似此節義, 豈止於旌贈而已? 表異之擧, 不施於此家而何爲? 今始覺悟, 甚恨固陋。 贈參判閔垶加贈正卿宣諡, 仍施收錄之典。 又以貞僖公 任有後家貧, 未延諡, 命該曹助宴需。"


  • 【태백산사고본】 29책 29권 49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108면
  • 【분류】
    왕실(王室) / 인사(人事) / 군사(軍事) / 외교(外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