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정조실록 29권, 정조 14년 3월 3일 계미 1번째기사 1790년 청 건륭(乾隆) 55년

영중추부사 김치인의 졸기

영중추부사 김치인(金致仁)이 졸하였다.

치인의 자(字)는 공서(公恕)이며,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의 아들이다. 영종(英宗) 무진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양전(兩銓)을 거친 후 영의정에 이르렀고, 치사(致仕)를 하고서 봉조하(奉朝賀)로 있었다. 병신년에 승습 주청사(承襲奏請使)로 연경(燕京)에 갔었고, 병오년에는 치사(致仕)를 한 것이 취소되고 수규(首揆)009) 에 임명되었다. 해임(解任)되고 나서 또 다시 치사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주도 면밀하고 과감한 성격이었으며, 국가의 전고(典故)에 대하여 잘 알았다. 스스로 옳다고 믿기를 좋아하였고, 대체(大體)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지 못하였다. 재로(在魯)영종 초기에 탕평책(蕩平策)을 극력 주장하다가 크게 사류(士類)들에게 비난을 받았는데, 치인이 조정에 올라서고부터는 자못 사류들과의 사이에서 주선을 해주어, 세상 사람들은 ‘아버지의 허물을 덮어주었다.’고들 말하였다. 이때에 와서 졸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70세가 넘는 원로 대신으로서 조정에 40여 년 동안이나 있었고, 재상으로 있은 지도 20년이 넘었다. 사적(事蹟)의 본말은, 모든 사람들이 다들 아는 바이며, 묘당 일에 성의를 다한 점에 있어서는, 선조(先朝)께서 인정을 하셨고 나 역시 칭찬하고 감탄하였었다. 지금 갑자기 서거하였다는 소식을 들으니, 무척 슬프고 애석하다. 조문(吊問)하고 치제(致祭)하고 부의(賻儀)하는 것을 규례를 살피어 거행할 것이며, 녹봉(祿俸)은 3년에 한하여 그대로 지급토록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9책 29권 34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100면
  • 【분류】
    왕실(王室) / 인물(人物)

  • [註 009]
    수규(首揆) : 영의정의 별칭.

○癸未/領中樞府事金致仁卒。 致仁公恕, 領議政在魯子。 英宗戊辰文科, 歷兩銓, 至領議政, 致仕奉朝賀。 丙申以承襲奏請使, 丙午落致仕, 拜首揆。 旣免, 乞復致仕, 不許。 綜密剛果, 諳練國家典故。 喜自用, 未達大體。 在魯英宗初年, 力主蕩平, 大爲士類所譏斥。 及致仁登朝, 頗與士類周旋, 世謂之蓋愆。 至是卒。 敎曰: "以耆耋大臣, 立朝四十餘年, 秉軸亦過卄載。 事蹟本末, 卽輿人之所誦, 而殫心於廟務, 先朝許之, 予亦稱歎。 今聞奄逝, 殊甚嗟惜。 弔祭致賻, 按例擧行, 祿俸限三年仍給。"


  • 【태백산사고본】 29책 29권 34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100면
  • 【분류】
    왕실(王室) / 인물(人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