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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 28권, 정조 13년 9월 19일 임인 1번째기사 1789년 청 건륭(乾隆) 54년

대신과 각신을 소견하니 전 승지 김이성의 견삭을 청하다

대신과 각신(閣臣)을 소견하였다. 영의정 김익이 아뢰기를,

"봉표(封標)의 일 체모가 이 얼마나 엄중한 것입니까. 그런데 전 승지 김이성(金履成)은 진토(眞土)를 찾아낸다는 핑계로 품지를 기다리지도 않은 채 표외(標外)의 이쪽저쪽을 맘대로 파보았습니다. 국가 체면에 관계된 바인 만큼 심상하게 문책해서는 안 되니, 견삭(譴削)을 시행하소서."

하니, 따랐다. 김익이 또 아뢰기를,

"신해년의 의궤(儀軌) 중에는, 길유궁(吉帷宮)은 배설을 하지 않았고, 재궁(梓宮)이 산릉(山陵)에 올라갈 때 지방(紙榜)을 정자각 내 동쪽에 이안(移安)하였습니다. 이번에도 이 예를 따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8책 28권 9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53면
  • 【분류】
    왕실(王室) / 사법(司法)

○壬寅/召見大臣、閣臣。 領議政金熤曰: "封標事體, 何等嚴重, 而前承旨金履成, 稱以求得眞土, 不待經稟, 標外東西, 任自穿視。 國體所關, 不可尋常論責, 請施譴削。" 從之。 曰: "辛亥儀軌中, 吉帷宮不爲排設, 梓宮上山陵時紙榜, 移安於丁字閣內東邊。 今可遵此例矣。"


  • 【태백산사고본】 28책 28권 9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53면
  • 【분류】
    왕실(王室) / 사법(司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