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임과 원임 대신, 약원의 여러 신하들을 소견하여 유궁의 지문에 관해 논하다
시임과 원임 대신, 약원(藥院)의 여러 신하들을 소견하였다. 판중추부사 서명선이 어제 슬퍼하시는 정도가 너무 지나쳤던 일로 누누이 진계를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곡읍이 정도에 지나쳤던 것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된 것이다. 처음 생각에는 5일 간격으로 전배(展拜)를 할 계획이었는데, 격기(膈氣)가 이러한데다 경들의 청이 또 이와 같으니, 닷새마다 하려던 계획을 미루어 열흘에 한 번씩 해야겠다. 나의 안타까운 심정이야 어찌 말로 다할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이어 여러 대신들에게 묻기를,
"유궁(幽宮)의 지문(誌文)을 이제 친히 지으려고 하는데, 드러내어 천명하는 도에 대해 내 마땅히 힘과 성의를 다할 것이다. 그러나 차마 말할 수 없고 차마 쓸 수 없는 일 때문에 슬픔을 누르고 참아가며 피눈물을 떨구면서 써나가 한 글자를 쓸 때마다 한 번씩 눈물을 떨군다 하더라도 오히려 표현이 부족한 말이 될 것이다. 그러니 평범한 문자로 보아 넘겨 전례대로 지장(誌狀)에 편입을 하게 된다면, 차마 널리 드러내지 못한다는 뜻에 어긋나는 면이 있게 되는데, 경들의 견해는 어떠한가?"
하니, 명선이 아뢰기를,
"지문을 친히 찬술하시는 일은 실로 무궁하신 효심에서 나온 일입니다. 더구나 친히 지으시는 문자는 사체가 지극히 중하니 만큼, 열성(列聖)의 지장에 편입하는 것은 순차적인 일입니다."
하고, 영의정 김익이 아뢰기를,
"문자의 체제에는 미사(微辭)가 있고 완사(婉辭)가 있습니다. 바라건대 지으실 적에 한결 더 신중을 기하소서."
하고, 우의정 채제공이 아뢰기를,
"28년이 지난 후에야 영우원의 문자가 이제 비로소 있게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성상께서 몸소 찬술을 하시니 그 체모의 중함이 마땅히 어떻겠습니까. 다만 신은 이 글을 몸소 지은신다는 얘기를 들은 후부터 삼가 마음 속에 생각되는 바가 있었습니다. 우리 성상께서 지금 처하신 입장은 실로 천고의 제왕(帝王)에 일찍이 유례가 없었으니, 반복하여 생각하면서 눈물을 몰래 떨구곤 하였습니다. 일단 몸소 지으실 바에는 오직 당시의 사실에 대해 상세하게 서술해야 되는데, 그러다보면 한 편 가운데에 사실은 그렇지가 않았음을 밝히는 것도 있어야겠고, 예덕(睿德)을 드러내어야 되는 것도 있을 것입니다. 영상이 아뢴 바 ‘미사(微辭)·완사(婉辭)’의 견해는 비록 적절한 것이기는 하나, 내용을 엮을 무렵에는, 신이 사죄(死罪)를 범하며 말씀드리자면, 필시 지극히 난처한 경우와 지극히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으리라 삼가 여깁니다. 이러한 글을 외간에 반포하게 된다면 사리상 실로 미안한 점이 있으니, 글을 완성하고 나서는 가까운 신하에게 보이고 그대로 어제(御製)에 싣도록 하고 안에서 글씨를 새겨 수도(隧道)에 봉안하는 것이 지당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상의 의견이야말로 마땅한 의리라고 할 수 있겠다. 의리에 맞는 말을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여러 대신들은 다시 소견을 진달하라."
하였다. 좌의정 이재협이 아뢰기를,
"우상이 아뢴 바는 원칙을 고수하는 의논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이미 드러내어 알리려는 성모(聖慕)에서 나왔는데 도리어 그 문자를 숨기고자 하는 것은 중외의 의혹을 초래할 것입니다."
하니, 제공이 아뢰기를,
"신이 아뢴 바도 숨기자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만일 반시(頒示)를 하려거든 별도로 하나의 적절한 문자를 지어서 의리를 밝히는 것은 가능한 일입니다만, 지문(誌文)의 사체는 이것과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더군다나 지극히 난처하고 지극히 말하기 곤란한 부분에 이르러서는, 비록 한껏 은미하고 완곡하게 표현을 한다 치더라도 그것을 보는 자들이 저절로 그 말 밖의 뜻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신이 굳이 반시하여 내걸 필요는 없다고 말을 하였는데, 구구한 견해가 실은 까닭이 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경이 말한 바는 실로 감탄할 만하다."
하였다. 제공이 아뢰기를,
"그 당시 흉악한 무리들의 꾀가 못하는 짓이 없었는데, 사실에 입각하여 곧게 쓰다보면, ‘참(讒)’ 자가 아니고서는 형용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참’ 자를 가하는 것이 이 자들에게는 비록 가벼운 처벌이 되더라도, 또한 어찌 지극히 말하기 곤란한 데로 귀결되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극히 말하기 곤란하다.’는 말은 곧 위로 선조(先朝)를 핍박(逼迫)하게 되는 것을 이르는가?"
하자, 제공이 아뢰기를,
"신이 감히 말하지 못할 점이 있었으므로 ‘지극히 말하기 곤란한 부분[至難言之地]’이라고 말을 하였습니다만, 이 다섯 글자의 본 뜻은 성상의 말씀과 같습니다."
하였다. 재협이 아뢰기를,
"영상 또한 ‘미완(微婉)’이라는 두 글자를 진달하였는데, 오늘날 군신 상하가 언제 선조(先朝)에 대해 논의를 한 적이 있습니까. 우상이 한 말은, 소견이 없지 않을 듯하나, 또한 이와 같이 말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하니, 제공이 아뢰기를,
"오늘날 군신 상하가 언제 선조에 대해 의논한 적이 있었느냐는 점에 대해 신이 어찌 알지 못하겠습니까. 다만 신의 변변찮은 생각에는 필시 외간에 말들이 있게 될 것이니, 아무래도 처음에 신중히 하는 것만 못하다고 여깁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제는 나의 생각이 정해졌다."
하였다. 김익이 아뢰기를,
"신이 운관(雲觀) 감생(監生)의 말을 들으니, 중성(中星)과 경루(更漏)를 측후하여 바로잡은 지가 거의 50년이나 되어서 지금은 성차(星次)가 점점 이동하여 거의 1도(度)나 어긋나고 경루 또한 이로 인해 진퇴(進退)의 차이가 없지 않다고 합니다. 이번 천원(遷園)하는 대례를 당하여, 시각을 정하는 일이 실로 더없이 중대하니, 경루와 일영(日影)을 불가불 이때에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근본을 미루어보면 중성을 추산하여 그 전차(躔次)와 도수(度數)를 정하는 데에 있는데, 만약 의기(儀器)가 없으면 측후를 근거할 데가 없으니, 먼저 지평의(地平儀)와 상한의(象限儀) 양의(兩儀) 및 새로운 법의 해시계[日影]를 주조하여 측후를 바로잡을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그러나 해감의 관생배들이 추산의 학술에 능한 자가 매우 드무니, 역상의 제법에 정통하다고 알려진 김영(金泳)이라는 자를 본감에 소속시켜 이 일에 함께 참여하도록 한다면, 실효가 없지 않을 듯합니다."
하니, 따랐다.
《누주통의(漏籌通義)》047) 구본에 기재된 각 절기의 중성(中星)은 바로 갑자(甲子) 해인 영묘(英廟) 20년 항성(恒星)이 적도(赤道)를 경위(經緯)하는 도수였다. 이미 40여 년이나 지났기 때문에 항성의 본래 운행이 반 도(度)가 차이났다. 이에 금상 8년 갑진(甲辰) 해에 항성의 적도를 경위하는 도를 경도(京都)의 북극(北極) 높이 37도 39분 15초에 의거하여 각 절후의 각 시각 중성을 추산하여, 이를 책으로 만들어 《누주통의》와 더불어 인행하였던 것이다.
- 【태백산사고본】 28책 28권 5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51면
- 【분류】왕실(王室) / 과학(科學) / 출판(出版)
- [註 047]《누주통의(漏籌通義)》 : 조선 정조 때에 김영(金泳)이 편찬한 천문서로서, 정조(正祖) 7년에 관상감에 명하여 편찬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권1 상위고(象緯考).
○甲戌/召見時原任大臣、藥院諸臣。 判中樞府事徐命善, 以昨日哀疚之過節, 縷縷陳戒, 上曰: "哭泣過節, 予亦不知然而然矣。 初意則以間五日展拜爲計, 膈氣旣如此, 卿等之請又如此, 五日之計, 拖至十日。 予懷耿耿, 何可盡言?" 仍詢諸大臣曰: "幽宮之誌, 今將親撰。 所以揄揚而闡明之道, 予當竭力盡誠, 以不忍言不忍書之事, 抑哀忍痛, 泣血撰次, 一字一涕, 猶屬歇後語, 則看作尋常文字, 循例編入於誌狀, 有非不忍廣示之意。 卿等之見如何?" 命善曰: "誌文親撰, 實出於無窮之孝思, 而況御製文字, 事體至重, 則編入於列聖誌狀, 自是次第事矣。" 領議政金熤曰: "文字體段, 有微辭焉, 有婉辭焉。 惟願撰次之際, 益加審愼。" 右議政蔡濟恭曰: "二十八年之後, 永祐園文字, 今始有之。 況聖上親製, 則其事體之至重, 當如何也? 第臣自聞親製此文, 竊有所商量于中者。 我聖上今日所處之地, 實千古帝王之所未有者, 反復思之, 涕淚暗滋。 旣已親製, 則惟當致詳於當時事實, 一篇之中, 明其不然者當有之, 揄揚睿德者亦有之。 領相微婉之奏, 雖甚得宜, 遣辭之際, 臣愚死罪, 竊以爲必不無至難處之境, 至難言之地。 以是而頒示外間, 則事理實有未安, 篇完之後, 或示近臣, 仍載御製, 自內刊刻, 祗奉隧道, 恐爲至當矣。" 上曰: "右相之意, 便亦一副當義理。 義理之言, 能無從乎? 諸大臣更陳所見。" 左議政李在協曰: "右相所奏, 不可謂守經之論。 旣出於揄揚之聖慕, 而反欲秘諱其文字, 則易致中外之疑惑矣。" 濟恭曰: "臣之所奏, 亦非秘諱之意也。 如欲頒示, 則別製一副當文字, 以昭義理則可也, 而誌文事體, 與此有異。 況至難處之境, 至難言之地, 雖極意微婉, 見之者, 自當有解其言外之旨。 臣之以不必頒揭爲言者, 區區之見, 實有在矣。" 上曰: "卿言, 實感歎矣。" 濟恭曰: "其時凶徒之謀, 無所不至, 據實直書之際, 非讒字, 無以形容, 而加讒字於此輩, 雖歇勘, 亦豈不歸於至難言之地乎?" 上曰: "至難言之地云云, 卽上逼於先朝之謂乎?" 濟恭曰: "臣有所不敢言, 故曰以至難言之地, 而這五字本意, 果如聖敎矣。" 在協曰: "領相亦以微婉二字仰奏, 而今日君臣上下, 曷嘗議到於先朝乎? 右相之言, 似或不爲無見, 而亦不必如是爲說矣。" 濟恭曰: "今日君臣上下之曷嘗議到, 先朝臣豈不知? 而臣之淺慮, 實恐外間, 必有辭說, 終不如愼之於始矣。" 上曰: "今則予之商量定矣。" 熤曰: "臣聞雲觀監生言, 中星、更漏之測候釐正, 殆近五十年。 今則星次漸移, 幾至一度之差, 更漏亦因此而不無進退之差。 當此遷園大禮, 定時一事, 實爲莫重。 更漏與日影, 不可不及今釐正, 而推其本則在於推步中星, 以定其躔次、度數, 而若無儀器, 則測候無憑, 先鑄地平、象限兩儀及新法日影, 以爲測候釐正之地, 而該監官生輩, 嫺於推步之學者絶罕, 有金泳者, 精於曆家諸法。 使之入屬本監, 與聞此事, 恐不無實效矣。" 從之。 舊本《漏籌通義》所載各節氣中星, 卽英廟二十年甲子恒星赤道經緯度也。 已過四十餘年, 恒星本行過半度, 乃以上之八年甲辰恒星赤道經緯度, 依京都北極高三十七度三十九分一十五秒, 推步各節候之各時刻中星, 編爲書, 與《漏籌通義》印行。
- 【태백산사고본】 28책 28권 5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51면
- 【분류】왕실(王室) / 과학(科學) / 출판(出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