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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 27권, 정조 13년 윤5월 22일 정미 4번째기사 1789년 청 건륭(乾隆) 54년

균역법과 과거의 폐해·윤시동의 서용·군액의 폐해에 관한 장령 조성규의 상소

장령 조성규(趙星逵)가 상소하기를,

"근래 홍수와 가뭄이 해마다 계속되어 1년 내내 손에 못이 박히도록 일해도 과다한 세금을 충당할 수 없고 논농사·밭농사·습지 농사에 애써 부지런히 해도 아침 밥 저녁 죽마저 해결할 수 없습니다. 남의 전지를 빌려서 경작하는 자는 세(貰)를 내고 나면 남는 것이 없고 품팔이를 업으로 삼는 자는 신역(身役)을 내기에도 부족합니다. 게다가 한 몸으로 세 역(役)을 하는 자들이 매우 많은데, 관리들의 횡포로 끝도 없이 해를 입고 있으니 어찌 근심할 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대체로 균역법(均役法)이 시행된 뒤로 고을 수령들이 공인(工人)·상인(商人) 및 사기(沙器)나 옹기(甕器)를 만드는 마을에서 징수하는 세금에는 모두 정해진 액수가 있는데, 또 허다한 명색을 새로 만들어내어 수탈하는 묘책으로 삼고 있습니까. 이에 수령을 골라서 임명하라는 전교를 날마다 연석(筵席)에서 내리시지만 구차히 머리수나 채우는 정사는 그런 무리를 임명하는 데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더구나 우리 전하께서 정주(政注) 때마다 의망(擬望)된 자를 바꾸라는 거조가 없지 않으셨으니, 이것이 비록 정선하겠다는 성의(聖意)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다시 의망되는 사람이 바뀌기 이전의 사람보다 훌륭하리라는 것을 어찌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장관(長官)이 가르치는 것이라고는 단지 문장을 정기적으로 시험하는 것뿐이니 이것이 어찌 옛날에 인재를 기르던 방도라 하겠습니까. 가르치기를 정당한 도리로써 하지 않고 취하기를 정당한 방법으로 하지 않아, 그 덕의 대소는 묻지 않고 문벌의 고하만을 물으며, 그 재주가 맞는지의 여부는 논하지 않고 그 선음(先蔭)의 유무만을 논하니, 관직에는 어진 사람을 세우고 일에는 유능한 사람을 앉힌다는 도리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 중에 과거로 사람을 뽑는 것으로 말하면, 명경과(明經科)의 경우 빨리 외우는 것을 공으로 여기고 제술(製述)의 경우 성운(聲韻)이 잘 맞는 것을 기이한 것으로 여기며, 전강(殿講)으로 말하면 한 경(經)을 자원해 외우게 하고는 주석까지 아울러 제외시켜 주고서 이로써 합격시키니, 이는 은총이 과람한 데 가까운 것으로 인재를 선발하는 도가 되기에는 부족할 듯합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하루에 세 가지로 자신을 반성한 증자(曾子)의 심법(心法)과 네 가지에 아직 능하지 못하다고 하신 공자(孔子)의 뜻으로 조정이 편안하지 못할 경우이면 반드시 ‘나의 회탕(恢蕩)의 정치가 확립되지 않아서인가.’ 반성하시고, 근신(近臣)들이 총애를 믿고 함부로 굴 경우이면 반드시 ‘나의 단속이 엄격하지 못해서인가.’ 반성하시고, 신하들이 연약하여 거스리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 풍속이 될 경우에는 반드시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나의 아량이 넓지 못해인가.’ 반성하시고, 궁실이 너무 아름다운 경우이면 반드시 ‘검소를 숭상하는 나의 덕이 닦여지지 않아서인가.’ 반성하소서.

재물 하나를 쓰는 데에도 그것이 우리 백성들의 피와 땀에서 나온 것임을 생각하시고, 기뻐하거나 미워하는 사이에도 그것이 좋아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한쪽으로 치우친 데서 나온 것임을 생각하시며, 일을 당해서는 반드시 총명하다고 스스로 뽐내는 것을 경계하시고, 정사에 임해서는 매양 대체(大體)를 굳게 지키기만을 생각하소서. 상벌이 공평하지 않으면 어찌 봉삼(奉三)의 도019) 를 몸소 실천했다고 하겠으며, 비가 오고 햇볕이 나는 것이 순조롭지 않으면 어찌 치중(致中)의 학020) 을 마음으로 터득했다고 하겠습니까. 어느 때 어느 곳이고 스스로 반성하지 않음이 없도록 하소서. 언어 동작의 사이나 사람을 쓰고 일을 처리하는 사이에 이르기까지 이런 마음으로 헤아려 처리하신다면 명령을 내림에 듣는 사람들이 모두 의심하지 않을 것이며, 어진 자를 등용하고 간사한 자를 물리침에 사람들의 뜻이 모두 복종하여, 조정의 백관이나 만백성들이 모두 감히 바르게 행동하지 않는 자가 없을 것입니다.

아, 중신(重臣) 윤시동(尹蓍東)이 죄가 있느냐 없느냐를 전하께서 남김없이 통찰하시고서 이미 서용(敍用)하셨는데 무엇 때문에 근자에 공격하는 수고를 그칠 줄 모른단 말입니까. 허다한 언관(言官) 중에 중신을 변호하거나 중신을 공격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는데, 유독 한쪽편 사람들만이 서로 계속해 일어나고 있습니다. 저들은 비록 온 나라의 공론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신은 당사(黨私)의 마음에서 그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근래 백성들이 생업을 잃어 간사한 거짓이 날로 더해져서 팔도의 판적(版籍)에는 실호(實戶)가 이미 줄었고 고을들의 군액(軍額)에는 허부(虛簿)가 태반이어서 이웃과 친척들에게 침징(侵徵)하는 환란을 초래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이웃과 친척들도 지탱해 보전할 수 없어 역시 고향을 떠나 이리저리 떠돌고 있으니 장차 백성이 하나도 남지 않는 데 이르고야 말 것입니다. 그러니 백성들에게 보오법(保伍法)을 실시하게 하는 것만한 것이 없습니다. 만약 고향을 떠나는 일이 있을 경우, 아무 고을 아무 마을의 아무 신역(身役)을 진 아무 이름의 사람이 아무 고을로 거처를 옮긴다는 내용으로 본 고을에 보고하면 고을에서 공문을 만들어주어 빙거(憑據)해 믿을 수 있는 자료로 삼게 하고, 만약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사람이 이곳에 살기를 원할 경우, 보오(保伍)의 우두머리가 그의 공문을 상고해 관에 보고해서 살도록 허락하되, 3년까지는 그 신역과 포흠(逋欠)을 그가 전에 살던 고을에서 공문을 보내어 징수해 가게 하고 3년이 지나면 그가 현재 살고 있는 고을에서 징수하게 하며, 만약 공문이 없는데도 살도록 허가한 것이 적간(摘奸) 때 발견될 경우, 담당자를 논죄(論罪)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백성들이 도망해 흩어지는 염려가 없을 것입니다.

도성(都城)에서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세 군문(軍門)뿐인데도 군졸의 태반이 도성 2, 30리 밖에 흩어져 살고 있으니 만약 급한 일이 생겨 성문이 모두 닫히는 날이면 비록 달려 들어와서 호위하려 하여도 어찌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성 밖에 사는 군졸들을 이사시켜 성안에 살게 함으로써 명령하는 즉시 출동할 수 있게 한다면 어찌 만전의 계책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말에 매우 근거가 있으니 여러 조항에 권면한 것들을 깊이 생각하겠다. 덧붙여 진술한 일은, 봄에 내린 금령(禁令)과 그대가 이른바 온화한 비답이란 것은 모두 때에 따라 걸맞게 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니 이것이 시끄러움을 종식시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말미에 진술한 두 건(件)의 일은 하나는 백성을 속박하는 데 가까우니 아마도 받아들여 시행하기 어려울 것 같고, 하나는 성 밖이 그리 먼 곳은 아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7책 27권 31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39면
  • 【분류】
    왕실(王室) / 정론(政論) / 인사(人事) / 군사(軍事) / 재정(財政) / 농업(農業)

  • [註 019]
    봉삼(奉三)의 도 : 세 가지 무사(無私)를 받들어 따르는 도. 사사로이 덮음이 없는 하늘의 도와 사사로이 실음이 없는 땅의 도와 사사로이 비춤이 없는 일월의 도를 본받아 임금도 지극히 공평하고 사사로움이 없는 마음으로 천하를 다스려야 한다는 말. 《예기(禮記)》 공자간거(孔子間居).
  • [註 020]
    치중(致中)의 학 : 중화(中和)를 지극히 하여 천지가 제 위치에 서고 만물이 저절로 생육(生育)되게 하는 학문. 《중용(中庸)》 1장.

○掌令趙星逵上疏曰:

近來水旱連仍, 一年腁胝不能充, 箕會斗斂, 三農勤苦, 不能謀朝飱夕粥。 借耕他田者, 償稅無餘, 賃傭爲業者, 身役不足。 加以一身而三役者甚多, 官吏豪橫, 受害無窮, 豈非可憂哉? 蓋自均役之後, 列邑守令, 征稅工、商、陶冶、沙器、甕器之村, 皆有常稅, 又創設許多名色, 以爲徵斂之妙逕。 守令擇差之敎, 日下於筵席, 苟充之政, 不出於自中。 況我殿下每當政注, 不無改望之擧, 此雖出於精擇之聖意, 然更擬之人, 安保其賢於見改之人乎? 長官之所敎, 只是課試文章而已, 是豈古昔育才之道乎? 敎之不以其道, 取之不以其方, 不問其德之大小, 而問其門閥之高下; 不論其才之稱否, 而論其先蔭之有無, 則惡在其建官惟賢, 位事惟能之道哉? 其中科擧取人, 明經者以捷誦爲功, 製述者以聲韻爲奇, 以言乎殿講則使之一經自願, 竝與註釋而除之。 以此賜第, 恐或近於恩數之濫觴, 而不足爲甄拔人才之道矣。 伏願殿下, 以曾子日三省之心法, 夫子四未能之意, 朝著不寧, 則必曰吾恢蕩之政未立歟; 近隷怙寵, 則必曰吾操切之方不嚴歟; 軟熟成風, 則必曰吾虛受之量不廣歟; 宮室太美, 則必曰吾尙儉之德不修歟? 以至一財一用之費, 思其爲吾民之膏血; 或喜或怒之間, 念其爲好惡之偏係, 當事而必戒聰明之自衒, 臨政而每思大體之凝持。 賞罰失平, 則豈可曰躬行於奉三之道乎, 雨暘或愆, 則豈可曰心得於致中之學乎? 無處而不自反, 無時而不自省, 以至言語動作之間, 用人處事之際, 以是裁之, 則發號施令, 而群聽不疑, 進賢退邪, 而衆志咸服, 朝廷百官萬民, 無敢不出於正矣。 噫! 重臣尹蓍東之有罪無罪, 惟殿下洞燭無餘, 旣已甄敍, 則夫何近日攻討之苦, 不知止耶? 許多言地之中, 無一人扶重臣, 攻重臣者, 獨一邊之人, 相繼而起。 彼雖自以爲擧國共公之論, 而臣則曰出於黨私而然也。 年來生民失業, 奸僞日滋, 八路版籍, 實戶旣尠, 列邑軍額, 虛簿太半, 以致有隣族侵徵之患。 所謂隣族不能支保, 亦至流亡, 將至於民無孑遺而後已, 莫如使斯民, 爲保伍之法。 如有離鄕之事, 則以某邑某里, 某役某名之身, 移接于某邑之意, 呈于本官, 則成給公文, 俾爲憑信之資。 如有來處不知人, 願爲之僦居, 則保伍之長, 考其公文, 告官許接, 以三年爲限, 其身役與逋物, 自故土移文徵捧。 過三年則身在官徵捧。 若無公文而許接者, 現發於摘奸, 任掌論罪, 則民無逃散之患矣。 輦轂可恃者, 惟三營門, 而軍卒太半居外, 星散於二三十里之地。 脫有緩急, 城門俱閉之日, 雖欲入赴扈衛, 其可得乎? 移其在外之軍, 使居城內, 以爲朝令朝發之地, 則豈不爲萬全之策哉?

批曰: "言甚根據, 諸條陳勉當體念, 而附陳事, 春間禁令與爾所謂溫批, 俱出隨時適可之意, 此非息鬧而何? 尾陳兩件事, 一則近於縶維民, 恐難於容措, 一則城外非遠地。"


  • 【태백산사고본】 27책 27권 31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39면
  • 【분류】
    왕실(王室) / 정론(政論) / 인사(人事) / 군사(軍事) / 재정(財政) / 농업(農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