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금으로 받은 무명포와 곡식의 저장법·조운의 정사에 관해 논의하다
차대하였다. 이에 앞서 연신(筵臣)이 평안 감영 창고에 저축하고 있는 면포(綿布)가 유명무실하다고 아뢰었으므로 사정(査正)하라고 명한 바 있었다. 이 때에 이르러 좌의정 이성원이 아뢰기를,
"관서에서는 무명의 길이 10척을 한 필이라고 하니, 이것은 모두 창고지기들의 농간으로 인한 것입니다. 우상은 세 등급으로 나누어 보고하라는 뜻으로 본도에 알리자고 하지만, 신의 생각에는 세 등급으로 나눌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현재 창고 속에 있는 것 중에서 새[升]나 자수가, 남겨두었다가 뒤에 쓸 만한 것들은 보관하고, 그 밖에 쓸 만하지 못한 것들은 구별해서 책자에 기록해 보고하여 서울의 관청에서 가져다 쓰기를 기다리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또 이후로는 해마다 받아들이는 새 무명에는 필마다 몇 등·몇 년도산·몇 자라는 도장을 찍어 후일의 참고에 대비하게 할 것으로 엄하게 규칙을 세우고, 연도가 오래되어 팔 수 없는 것들은 도신으로 하여금 편의에 따라 처분하게 하소서. 그리고 해마다 5만 냥 중에서 3분의 1이나 4분의 1에 한하여 무명으로 대신 받고, 그 나머지는 본색(本色)과 현금으로 보관하였다가 매 연말에 무명으로 받은 것이 얼마이고 돈으로 보관한 것이 얼마라는 것을 낱낱이 본사(本司)에 보고하도록 하여 관리할 수 있는 자료로 삼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른바 척수가 짧은 베는 수십 년 전부터 내려온 물건이어서 지금에 와서 조사해 내어 소급해 처벌한다는 것은 사세로 보아 방법이 없다. 비록 경들의 말에 따라 편리한 대로 등급을 나누어 처리하게 한다 해도 이번의 이 거조는 바로 크게 정리하는 것이니 이른바 잡된 항목의 명색을 어찌 감히 다시 거론하겠는가. 이후로는 서울 본사(本司)에서 가져다가 쓸 때와 적간(摘奸)할 때에 만약 척수가 차지 않거나 표지가 없는 것이 있을 경우 당해 도백(道伯)을 장오율(贓汚律)로 다스릴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해부(該府)의 장고(掌故)에 기재하라."
하였다. 호조 판서 서유린(徐有隣)과 선혜청 당상 이재간이 아뢰기를,
"곡식을 저축해야 하는 도에 먼저 돈이 있는지의 여부를 묻고서 백방으로 강구해 보았으나 끝내 좋은 계책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만약 관서의 좁쌀 얼마를 떼어다가 곡식을 사들인 양의 다소를 보아 균역청에 이관해 기록하고 관례에 따라 반을 환곡으로 나누어주고서 단지 모곡(耗穀)만을 취하고, 균역청의 돈을 3도에 나누어주어 한결같이 각각 그 도의 전례에 따라 좋은 쪽으로 곡식을 사들여 저축하게 한다면, 관서 창고에는 저축이 줄어들 염려가 없고 다른 도의 곡부(穀簿)에는 곡식을 사들일 길이 생길 것입니다."
하고, 우의정 채제공이 아뢰기를,
"관서의 좁쌀은 정공(正供)에 관계된 것으로서 세곡(稅穀) 중의 일부를 본도에 떼어놓은 것이니 호조 이외에는 급여할 수 없는 것이 규례입니다. 그런데도 근년 이래로 각 아문(衙門)에서 요청해 가져다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3도에서 곡식을 사들여 저축하는 것이 비록 백성들을 위한 데서 나온 것이지만 관서의 좁쌀은 요청하는 대로 급여해서는 곤란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곡식을 저축하는 방법은 대체로 백성들의 식량을 위해서이고 겸하여 다음 해를 위해서이다. 그리고 본사(本司)의 기유년 등록(謄錄)을 열람해 보건대 그 때에도 풍년이 들어 미리 뜻밖에 생길 수요(需要)를 강구해 두었기 때문에 임진·계사년에 이르러 순전히 그 덕으로 살 수 있었다. 그러므로 며칠 전의 차대에서 특별히 경들에게 조치하여 품처하도록 명했던 것이다. 대체로 곡식을 가지고 곡식을 늘리는 것은 이것을 옮겨다가 저것과 바꾸는 데 불과하니 이미 더 늘어나는 효과는 없고 한갓 모아놓기만 한다는 한탄만이 있을 것이다. 어렵게 여기는 우상의 말이 매우 의견이 있다. 오늘 관서의 잡다한 항목의 무명을 발매(發賣)하는 한 건(件)을 결정해 주었으니 그들이 힘써 일하기를 기다려 속히 서둘러 곡식을 모으라. 그리고 곡식 값을 먼저 추이(推移)하는 방도에 대해서는 오직 경들이 유사(有司)의 신하들과 방편을 상의하는 데 달렸을 뿐이다. 그러나 이로 인해 혹 백성들에게 폐단을 끼침이 있을 듯하지만, 이 문제라면 연전에 신칙했던 전교를 경들도 반드시 기억하고 있을 것이니 모두 살펴 신칙하도록 하라."
하였다. 유린이 아뢰기를,
"영남 세 조창(漕倉)에서 조선(漕船)이 올라올 때 안흥(安興)에서 점검하는 규정은 벌써부터 있어왔지만 법성진(法聖鎭)에서 점검하는 것은 어느 때부터 시작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점검을 받기 위해 항구로 들어갈 때 도리어 위험에 부딪힐 염려가 있고 검열할 때 지체되기 쉬우니 지금부터는 안흥 이외의 점검은 모두 혁파해야 하겠습니다. 비록 안흥의 경우로 말하더라도 반드시 모든 조선이 본진의 선소(船所)에 일제히 정박하기를 기다려 점검하기 때문에 그 선소를 출입하는 데 매양 어려움이 많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후로는 영남·호남을 막론하고 각 조창의 조선이 안흥 앞바다 포구에 도착한 뒤에는 수우후(水虞候)가 배를 타고 나아가서 규례대로 점검하게 해야겠습니다. 그러면 법을 준수하고 폐단을 제거하는 도가 어그러지지 않고 함께 행해질 것입니다."
하니, 따랐다. 유린이 아뢰기를,
"법성·군산(群山)은 도차사원(都差使員)의 칭호만으로는 조창의 폐단을 바로잡는 방도가 되기에 부족하니, 법성은 반드시 진량(陳良) 한 면(面)을 이관해 받고, 군산은 반드시 북면(北面) 한 면을 이관해 받고, 또 성당(聖堂)을 읍진(邑鎭)에 이속(移屬)한 뒤에야 영구히 폐단이 없어질 것이라고 합니다. 두 진이 비록 일반이라고는 하지만 조창의 폐단은 법성이 더욱 심하니 더욱 심한 곳부터 땅을 분할해 맡게 하는 것이 사리에 합당할 듯합니다. 군산은 조창의 폐단이 조금 나을 뿐만이 아니라 옥구(沃溝)는 영광(靈光)에 비해서 고을의 크고 작음에 큰 차이가 있으니 덮어놓고 떼어내는 것은 곤란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조운(漕運)의 정사가 얼마나 중대한 일인가. 땅을 떼어 이속(移屬)시키기 전에 영(營)과 진(鎭)들을 서로 비교해서 반드시 동등하게 만들어야 할 것이다. 영광군 진량 한 면을 법성에 주어 그대로 독진(獨鎭)으로 만들고 첨사(僉使)를 변지 이력(邊地履歷)의 자리로 삼으라. 군산의 경우도 당초에는 법성의 예를 따르려고 생각했으나 이미 여러 사람의 의견에 이견이 있으니 땅을 떼어주는 문제는 실로 경솔히 의논하기 곤란하다. 변지 이력의 자리로 삼는 문제는 참작해 결정함이 있어야 하겠지만 독진으로 삼는 것은 법성과 일반이다. 여러 사람의 의논도 이미 같으니 두 진을 모두 변지 이력의 자리로 만들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7책 27권 30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38면
- 【분류】왕실(王室) / 군사(軍事) / 재정(財政) / 교통(交通)
○丁未/次對。 先是, 筵臣以箕營庫儲綿布, 有名無實, 奏命査正。 至是, 左議政李性源白曰: "關西木綿十尺長, 稱以一匹, 莫非庫色輩偸弄之致。 右相以分三等報來之意, 知委本道, 而臣意則似不必分三等。 卽今庫在中, 升尺之可留作後用者置之, 其外不堪用者, 區別修成冊報來, 以待京司取用。 此後每年新木綿, 則疋疋踏某等某年尺數, 以備後考, 嚴立科條, 年久不堪發賣之類, 令道臣從便區處。 且於每年, 就五萬兩中, 或限三分一, 或限四分一作木綿, 其餘則以本色、純錢留置, 每年終以作綿幾許, 留錢幾許, 枚報本司, 以爲句管之地爲便。" 上曰: "所謂尺短之布, 係是數十年前流來之物, 則到今査出追勘, 其勢末由。 依卿等言, 從便分等區處, 而今番此擧, 卽大釐正也。 所謂雜項名色, 豈敢更稱? 此後京司取用及摘奸之行, 若有不準尺無標識者, 當該道伯, 施贓汙之律, 仍載該府掌故。" 戶曹判書徐有隣、惠廳堂上李在簡曰: "儲穀之道, 先問錢貨有無, 而終沒好策。 今若劃得關西小米幾許石, 視貿穀石數多少, 移錄均廳, 依例半分, 只取耗條, 以均廳錢散給三道, 一從各其道已例, 從長貿儲, 則關西庫儲無減縮之患, 他道穀簿有貿取之路矣。" 右議政蔡濟恭曰: "關西小米, 係是惟正, 稅穀之除留本道者, 則度支外, 例不得許施, 而近年以來, 各衙門請得取用者多。 三道貿儲, 雖出爲民, 關西小米, 恐難許施矣。" 上曰: "儲穀之方, 蓋爲民食, 兼爲嗣歲。 且閱本司己酉年《謄錄》, 伊時亦以年事登熟, 預講不虞之需, 及至壬癸, 賴以全活。 日前次對, 特命卿等措劃稟處矣。 大抵以穀生穀, 不過移此易彼, 旣無加益之效, 徒有攅那之歎, 而右相持難之言, 甚有意見。 今日以關西雜項木綿發賣一款, 有所決給者, 待其拮据, 從速鳩穀, 至於穀價先推移之方, 惟在卿等與有司之臣, 相議方便。 或有因此, 貽弊於民, 則年前飭敎, 卿等亦必記有, 竝須察飭。" 有隣曰: "嶺南三漕倉漕船上來時, 旣有安興點檢, 則法聖鎭點檢, 未知創於何時, 而入港之際, 反涉危險, 點閱之時, 易致逗遛。自今安興外點檢, 竝爲革罷。 雖以安興言之, 必待齊泊於本鎭船所, 故其所出入, 每多艱辛云。 此後則無論嶺湖南, 各倉漕船, 到安興前洋浦口後, 水虞候乘船出去, 如例點檢, 則遵法除弊之道, 可以竝行不悖矣。" 從之。 有隣曰: "法聖、羣山都差使員稱號, 不足爲漕倉矯弊之道。 法聖則必得陳良一面, 羣山則必得北面一面, 又以聖堂移屬邑鎭, 然後可以永久無弊云, 而兩鎭雖曰一般, 漕弊則法聖尤甚, 先從尤甚處, 割地分掌, 恐合事宜。 羣山則非但漕弊之差勝, 沃溝比靈光, 大小逈異, 有難遽然割出。" 上曰: "漕轉之政, 何等至重? 割地移屬之前, 營鎭相較, 必當一般。 靈光郡 陳良一面, 付之法聖, 仍作獨鎭, 僉使用邊地履歷。 至於羣山, 初意亦欲依法聖例, 僉議旣有異同, 割地固難輕議。 履歷宜有酌定, 獨鎭則一也。 僉議旣同, 兩鎭幷作邊地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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