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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 27권, 정조 13년 4월 1일 정해 1번째기사 1789년 청 건륭(乾隆) 54년

환곡의 폐단을 논한 분 병조 참지 박효삼의 상소

소대하였다. 분 병조 참지 박효삼(朴孝參)이 상소하기를,

"지방 고을에서는 대체로 환곡(還穀)이 백성들의 고질적인 폐단이 되고 있습니다마는 그 중에서도 가장 심한 곳이 거창(居昌)·함양(咸陽)·산청(山淸)·안의(安義)·삼가(三嘉)입니다. 이 다섯 고을은 각각 곡식의 총수가 거의 10만 석에 이르지만, 세 영(營)의 곡식이 절반을 차지하고 또 빈 쭉정이가 3분의 2나 됩니다. 받아들인 실곡(實穀)은 모두 아전들의 절취와 농간으로 들어가고, 이 밖에 백성들에게 나누어주는 곡식은 순전히 빈 쭉정이이므로 백성들 중에는 아예 버리고 빈손으로 돌아가는 사람도 더러 있습니다. 빈 쭉정이만 있는 벼 한 섬의 값이 6, 7푼전[分錢]에 불과하기 때문에 관원과 아전들이 앞다투어 사서 그대로 창고에 쌓아두었다가 가을이 되어 환곡을 받아들일 때에 미쳐서는 전에 사서 쌓아두었던 빈 쭉정이들을 이미 받아들인 것으로 문서에 올리고서, 새로이 받아들일 실곡은 돈으로 대신 받아들입니다.

환곡을 받아들일 때면 한 말의 곡식도 마련하기 어려운 실정인데도 장차(將差)들이 마을들을 두루 수색하기 때문에 쌀독이 이미 바닥이 나서 추위와 굶주림에 신음하는 남녀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계속되고, 부자·형제 같은 지친(至親) 사이에도 은정(恩情)이 상하고 한 마을의 친족 사이에도 원한이 쌓이기까지 하였으니, 이 모두가 조적(糶糴)의 소치입니다. 그리고 근년 이래로 본 고을들로 하여금 작전(作錢)해서 곡식이 적은 연해(沿海)의 고을들로 보내도록 하고 있는데, 빈 쭉정이여서 시장에 내다 팔 수가 없기 때문에 경내의 형편이 조금 넉넉한 자들을 골라내어 혹은 1백 석, 혹은 5, 60석씩 배당시켜 한 섬에 1냥으로 값을 정해서 엄하게 독려하여 강제로 받아내고 있습니다. 돈이 귀한 이때를 당하여 배정된 돈을 다 바칠 방법이 없기 때문에 더러는 마소를 팔기도 하고 더러는 전장(田庄)을 팔기도 하므로 점차 가산(家産)이 탕진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로써 볼 것 같으면 빈부를 막론하고 함께 그 재앙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이 폐해를 영원히 제거하고자 한다면 빈 쭉정이 3석을 실곡 1석으로 환산해서 가을에 받아들일 때에 미쳐 곧바로 정밀하게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이 양이 비록 4, 5만 석에 불과하지만 백성들의 고통을 제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고나서 또 곡식의 총수(摠數)를 정하되 큰 고을에는 8만 석, 중간 고을에는 5만 석, 작은 고을에는 3만 석으로 하소서. 원회 부곡(元會付穀)으로 말하면 절반을 환곡으로 나누어주고 절반은 창고에 보관해 두는 것이니 감영의 곡식에 비해 갑절이나 더 많습니다. 감영의 곡식은 원래 다 나누어주는 것이므로 고을마다에 감영곡을 1만 석씩으로 한정하면 71고을에서 받아들이는 모곡(耗穀)이 7만 1천 석이 될 것이니 이는 매우 풍부한 양입니다. 병사영(兵使營)과 통제사영(統制使營)의 곡식도 알맞게 헤아려 한정하되, 매 고을마다 4, 5천 석씩을 두면 충분할 것입니다.

이렇게 제도를 정한 뒤에 원회 부곡의 모곡은 봄을 기다려 작전(作錢)해서 호조에 바쳐 경비에 보충하고, 세 영의 곡식에서 나온 모곡은 당해 영으로 보내어 용도에 따라 쓰게 하소서. 그리고 모곡을 작전하는 데는 산읍(山邑)이나 연읍(沿邑)을 막론하고 통틀어 발매(發賣)하게 하고, 편벽되이 남겨 두는 곳이 있어 백성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게 하소서. 그렇게 한다면 이런 태평한 세상을 만나 어찌 이리저리 떠도는 백성이 있겠습니까."

하고, 이어 거창 부사 원택진(元宅鎭)과 전 함양 부사 이득준(李得駿)의 탐혹(貪酷)한 정상을 논하고, 또 각 고을의 아전들을 액수(額數)를 정하여 정선(精選)할 것을 언급하였다. 비답하기를,

"오늘날의 급한 일로는 백성들을 안정시켜 보호하는 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으니, 진실로 안정시켜 보호하고자 하면 먼저 탐관(貪官)을 징계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대체로 관리들이 법을 두려워하지 않아 청렴하다는 명성이 들리지 않으니, 이것이 내가 항상 매우 개탄스럽게 여기는 바이다. 이러한 즈음에 너의 상소를 보았다. 거창 부사 원택진과 전 함양 부사 이득준의 일이 과연 너의 말대로라면 팽아(烹阿)의 형전(刑典)011) 을 이런 무리에게 시행하지 않고 어디에다 쓰겠는가.

그래서 도백(道伯)과 그 당시의 어사(御史)를 불러 물어 보았더니 모두 도리어 ‘법을 두려워하고 진휼(賑恤)을 잘하여 잘 다스린다는 명성이 있다.’고 말하였다. 이에 두 말이 모순됨을 면치 못하니 밝게 사실을 조사해서 죄를 처단하지 않을 수 없다. 원택진이득준은 우선 해부(該府)로 하여금 잡아다가 반복해 엄히 신문하여 기어이 실토를 받도록 하겠다. 그리고 당시의 도백으로 하여금 규례에 상관말고 자세히 조사해서 장계로 아뢰게 하되, 만약 소루함이 있을 때에는 다시 따로 어사를 보내어 조사시킬 것이다. 진술한 곡식의 총수와 아전의 정원에 대한 일은 묘당으로 하여금 품의해 처리하게 하겠다. 너는 소원한 사람으로서 이렇게 상소하는 일을 하였으니 그 마음이 가상하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7책 27권 17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32면
  • 【분류】
    왕실(王室) / 사법(司法) / 구휼(救恤) / 금융-화폐(貨幣) / 물가-물가(物價)

  • [註 011]
    팽아(烹阿)의 형전(刑典) : 거짓을 꾸며 임금에게 잘 보이려는 신하를 엄한 형벌로 다스리는 것. 전국 시대(戰國時代) 제 위왕(齊威王)이, 왕의 좌우에게 뇌물을 주어 왕 앞에서 자신을 칭찬해 주도록 청한 아 대부(阿大夫)를 팽형(烹刑)에 처한 고사에서 나온 말. 《자치통감(資治通鑑)》 주기(周紀) 열왕(烈王) 6년.

○丁亥朔/召對。 分兵曹參知朴孝參上疏曰:

外邑還穀之爲民瘼最甚者, 居昌咸陽山淸安義三嘉是已。 五邑穀摠, 殆至十萬, 而三營之穀居其半, 空殼之數, 三之二也。 所捧實穀, 皆入吏屬之偸弄, 其外分給, 全是空殼, 民或投棄, 空手歸家, 而一石租之直, 不過六七分錢。 故官與吏, 爭相貿取, 仍留庫中。 及至秋糴, 以其貿置之空殼, 屬之已捧, 至於新捧之實穀, 以錢代徵。 還糴之際, 斗粟難辦, 將差遍搜里閭, 而甕儲已罄。 飢男寒女, 號哭相續, 甚至於父子兄弟之親, 恩情或傷, 鄕里族屬之間, 讎冤輒生, 此莫非糶糴之致。 且近年以來, 使本邑作錢, 移送沿邑穀少處, 而空穀無以發賣於場市, 故抄出境內之稍饒者, 或給百石, 或給五六十石, 每石定以一兩零錢, 嚴督勒徵。 當此錢荒之時, 末由備納, 或捐牛馬, 或賣田庄, 漸致蕩敗。 以此觀之, 勿論貧富, 竝受其殃。 若欲永祛此害, 以虛殼三石, 換作實穀一石, 及其秋糴, 一直精捧, 則此雖四五萬石, 而生民之疾苦可祛也。 又定其穀摠, 大邑八萬石, 中邑五萬石, 小邑三萬石。 至若元會穀, 則折半分留, 比營穀加倍, 而監營穀, 則自是盡分者也。 每邑限以一萬石, 則七十一州之耗條, 爲七萬一千石, 此甚豊厚也。 兵統營之穀, 量宜定限, 每邑置以四五千石足矣。 如是定制, 然後元會耗, 則待春作錢, 納于地部, 以補經費, 三營穀則歸于該營, 以爲需用。 且耗條作錢, 勿論山沿, 通同發賣, 不爲偏留, 以貽民害, 則當此昇平之世, 豈有流離之氓乎?

仍及居昌府使元宅鎭咸陽前府使李得駿貪酷與各邑官吏, 定額精抄之意。 批曰: "目下急務, 莫先於懷保。 苟欲懷保, 先從懲貪始。 大抵吏不畏法, 廉聲莫聞, 此常所切慨者, 際見爾疏。 居昌元宅鎭咸陽前倅李得駿事, 果如爾言, 烹之典, 不施於此輩而何爲? 召問道伯及伊時繡衣, 皆反以畏法善賑, 有治聲爲言。 於是乎兩說, 未免矛盾, 不可無明覈勘罪。 元宅鎭李得駿先令該府拿來, 反復嚴問, 期於輸情。 仍令時道伯, 拔例詳査狀聞, 若有踈漏, 更當別遣繡衣按査。 所陳穀摠吏額事, 令廟堂稟處。 爾以踈蹤, 有此疏擧, 其心可嘉矣。"


  • 【태백산사고본】 27책 27권 17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32면
  • 【분류】
    왕실(王室) / 사법(司法) / 구휼(救恤) / 금융-화폐(貨幣) / 물가-물가(物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