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실록 27권, 정조 13년 2월 9일 병신 1번째기사
1789년 청 건륭(乾隆) 54년
전 판서 김용겸의 졸기
전 판서 김용겸(金用謙)이 죽었다. 용겸은 자가 제대(濟大)이다. 문충공(文忠公) 김수항(金壽恒)의 손자로 음사(蔭仕)로 발탁되어 정경(正卿)까지 되었다. 도량이 커서 작은 일에 구애되지 않고 옛것을 좋아하였으며 예학(禮學)에 조예가 깊었다. 또 행실과 품격이 매우 높아 우뚝한 고가(古家)의 유로(遺老)가 되었으므로 상도 매양 그를 예우하여 음관으로 대우하지 않았다. 연석에 오르면 담론이 성실하고 숨기고 기피하는 말이 없었다. 송덕상(宋德相)이 부름을 받고 올라오자 온 조정이 그를 유현(儒賢)으로 대우하였으나, 용겸은 상에게 아뢰기를,
"덕상은 학식도 없는데 전하께서 무엇 때문에 그를 부르셨습니까."
하니, 그 말을 들은 자들이 옳게 여겼었다. 이때에 이르러 죽자 전교하기를,
"고가의 사람으로 나이가 80여 세에 이르렀는데, 언제나 서연에서 책을 끼고 있던 일을 생각하여 적지 않은 은총을 베풀었었다. 그런데 지금 죽었다는 말을 들으니 매우 슬프다. 정해진 부의 이외에 더 주도록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7책 27권 8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27면
- 【분류】왕실(王室) / 인물(人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