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성위 박명원이 의열 영빈궁의 묘호에 관해 상소하자 이를 논의·확정하다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이 상소하기를,
"삼가 우리 나라의 고사를 살펴보건대, 궁(宮)·원(園) 및 묘(廟)에 각각 칭호가 있어 서로 통용하지 않은 것은 대개 체모(體貌)를 존중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의열 영빈궁(義烈映嬪宮)158) 에 있어서만은 의열이란 두 글자의 칭호를 안의 궁(宮)과 밖의 묘(墓)에 통칭하고 있으니, 사리로 헤아려 보아도 구차하고 전례(典禮)로 상고해 보아도 의거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근래의 일로 말하더라도 온희 정빈(溫僖靖嬪)159) 의 궁을 연호(延祜)라 하고, 원(園)을 수길(綏吉)이라 하여 칭호를 각기 달리하였으니, 증거로 삼을 수 있는 전례(前例)가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조정에 하문하시어 그 궁과 묘의 칭호를 의논해 정하는 것이 사리에 맞을 듯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시호를 그대로 궁과 묘의 칭호로 사용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경의 말은 바로 나의 생각과 같다. 이것은 전례(典禮)에 관계된 일이므로 해조로 하여금 대신과 의논해서 품처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상이 대신들에게 유지(諭旨)하기를,
"경들은 금성위 박명원이 청한 일을 들었는가? 일전에 도위(都尉)가 입시했을 적에 말을 주고받은 일이 있었는데, 대개 시호를 그대로 궁과 묘의 칭호로 사용한 것은 우리 나라에 드물게 있는 일이었다. 무술년에 이 일을 가지고 백관들에게 수의(收議)했을 적에 김종수(金鍾秀) 혼자만이 다른 의견을 제기하였는데, 그의 생각은 대개 ‘궁과 묘에 같은 칭호를 사용한 것은, 선대왕께서 시호를 내리신 성의가 이미 우연한 것이 아니었고, 비록 원(園)으로 봉(封)해주라는 유명(遺命)이 계셨지만 오로지 시호 두 글자로써 원으로 봉하는 본의(本意)를 삼으셨고 보면 칭호를 고치는 것은 의리에 있어서도 옳지 않고 마음에 있어서도 차마할 수 없기 때문이다.’는 것이었다. 그가 건의한 뜻이 오로지 여기에 있었기 때문에 궁과 묘에 시호를 그대로 칭호로 삼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두 글자의 뜻을 생각할 때마다 내 마음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두려워지는데, 지금에 미쳐 칭호를 고치는 것이 실로 예에 합당한지 모르겠다."
하니, 좌의정 이성원 등이 아뢰기를,
"신들의 소견은 도위의 상소문 내용과 다름이 없습니다."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대신들과 의논하였더니, 좌의정 이성원과 우의정 채제공은 ‘궁호(宮號)에다 시호를 그대로 옮겨 사용하는 것은 의거할 만한 전례가 없을 뿐만 아니라 막중한 전례(典禮)로 헤아려 보아도 어떻다 하겠습니까. 도위의 소청(疏請)이 자못 합당하니 상께서 재결하소서.’ 하였습니다."
하니, 대신들의 의논대로 하라고 명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칭호를 고칠 때의 일의 체통은 궁이나 원과는 매우 다름이 있으니, 대신과 문임(文任)들만이 모여 의논해서 아뢰라."
하고, 또 전교하기를,
"도위가 올린 상소문의 본의가 다만 통칭하는 것을 혐의쩍게 여긴 데 있을 뿐이 아니었으니, 고치기를 의논하는 것이 진실로 마땅하다. 그러나 고치기로 의논한 뒤에라도 묘호와 궁호를 공용(共用)했던 것이 대체로 의리에 어긋남이 없고 내포된 뜻이 있었다는 것을 모두 자세히 알도록 하라."
하였다. 의열궁의 묘호를 선희(宣禧)로 의논해 정하였다. 의열궁의 칭호를 처음 정할 때에 대개 임오년의 일로 인하여 상이 매양 애통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도위가 상소해 청할 때에도 이 때문에 감히 분명하게 말하지 못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6책 26권 46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23면
- 【분류】정론(政論) / 왕실(王室)
謹按國朝故事, 宮、園及廟, 各有稱號, 不相通用者, 蓋尊其體貌也。 至若義烈映嬪宮二字之號, 通稱於內宮外墓者, 揆以事面, 有所苟簡, 考之典禮, 亦無可據。 雖以近事言之, 溫僖靖嬪宮曰延祜, 園曰綏吉, 稱號各異, 已例可徵。 伏願俯詢在廷, 議定其宮墓之號, 恐合事宜:
批曰: "謚號之不當仍稱於宮墓, 卿言政合予意。 係是典禮間事, 許令該曹, 議大臣稟處。 上諭大臣等曰: "卿等聞錦城尉 朴明源所請之事乎? 日前都尉入侍時, 有所酬酢, 而蓋謚號之仍稱宮墓, 國朝尠有之事。 戊戌以此收議於百官, 而金鍾秀獨爲立異。 其意蓋以爲: ‘宮墓同號, 先朝賜謚之聖意, 旣非偶然, 而雖有封園之遺命, 然專以謚號二字, 爲封園之本意, 則於義有所不可, 於心有所不忍故耳。’ 其所建白, 意專在此, 而宮墓之仍稱謚號, 迄至于今。 每想二字意義, 予心不覺惕如。 及今改號, 未知實合禮典否?" 左議政李性源等言: "臣等之見, 與都尉疏語, 無異同矣。" 禮曹啓言: "議于大臣, 則左議政李性源、右議政蔡濟恭以爲: ‘宮號之移用謚號, 非但無可據之例, 揆以莫重典禮, 亦涉如何。 都尉疏請, 儘爲合當。 請上裁。’" 命依議。 又敎曰: "改號時事體, 煞與宮園有異, 只大臣、文任, 會議以啓。" 又敎曰: "都尉疏本意, 不但在於嫌其通稱, 則改議固宜, 而改議之後, 墓號、宮號之同用, 大體於義無違, 而有寓此意, 竝令知悉。" 議定義烈宮墓號曰宣禧。 義烈宮號之初定也, 蓋因壬午事, 上每含哀茹痛。 都尉之疏, 請以是而不敢明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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