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제공이 윤시동의 상소문에 관해 변별하다
차대하였다. 우의정 채제공이 아뢰기를,
"신이 윤시동의 상소문 중의 말을 한 번 분명하게 변별해 보겠습니다. 시동이 칭한 무신·기사년의 남은 종자라는 말은 나라 사람의 절반을 기사·무신년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으려는 것입니다. 저 남인(南人)의 명색이 청남(淸南)·탁남(濁南)으로 갈라진 것은 숙묘(肅廟) 초년부터 비롯되었습니다. 그때 허적(許積)이 고명 대신(顧命大臣)으로 권세가 높고 대단하였기 때문에 이익을 즐기고 영예를 탐하는 무리들이 대부분 붙쫓았으니, 이들을 탁남이라 하였고, 문정공(文正公) 허목(許穆)은 허적이 국가를 해친다는 것을 알고서 면대해 배척하고 상소해 논박하여 고결한 풍채가 늠름하였으므로 당시에 조신(操身)하던 선비들이 한 목소리로 추대해 사모하였으니, 이들을 청남이라 하였습니다.
그 뒤에 허적의 서자 허견(許堅)이 역적 종친(宗親)과 결탁하여 반역을 도모한 일로 인하여 경신에 이르러 주륙(誅戮)당하였고 그 영향이 당류(黨類)에까지 미쳤으나, 청남 일파만은 화란 밖에서 초연하였습니다. 기사년에 미쳐 탁남의 잔여 세력이 다시 국정을 담당하여, 명분과 의리를 무용지물로 여겨 하지 못하는 짓이 없자, 이만원(李萬元)·이동표(李東標)·이후정(李后定) 같은 사람들이 모두 상소해 극력 논핵하며 죄받는 것을 오히려 영광으로 여겼습니다. 그러자 지방의 진선(進善) 정시한(丁時翰)과 서울의 판서 유하익(兪夏益) 등이 서로 뒤를 이어 상소하기도 하고 혹은 악을 공격하여 선을 돕기도 하였습니다.
신의 백종조(伯從祖) 채팽윤(蔡彭胤)으로 말하더라도 6년 동안 한 번도 조정에 서지 않았고, 고결한 언론이 뛰어났기 때문에 갑술 환국(甲戌換局) 초기에 맨 먼저 홍문록(弘文錄)에 실렸습니다. 이 밖에 고인이 된 충신 박태보(朴泰輔)의 상소문 끝에 이름이 열거된 사람도 그 수가 얼마인지 모릅니다. 이들은 모두 청남 중에서 드러난 사람들로 평소의 언론과 행동이 탁남 사람들과는 마치 물과 불이 서로 용납될 수 없는 것보다도 더 심하게 달랐습니다. 그런데 정국의 형세가 바뀐 뒤에 색목(色目)이 다른 편에서는 이들을 분리해 보려 하지 않고 통틀어 남인이라 지목하여 한결같이 명의(名義)에 죄를 지은 무리로 돌려 벼슬길을 막는 데 온갖 힘을 다하였습니다. 그러자 청남 사람들도 스스로 변명하거나 스스로 자랑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겨 문을 닫고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스스로 이와 같이 처신한 것은 괴이할 것이 없겠으나, 곧은 사람을 등용하고 굽은 사람을 버리는 국가의 정사로 말하면 어찌 앞으로 고상한 언론을 하는 선비들에게 한탄을 끼치지 않겠습니까. 무신년에 이르러 탁남의 자손들이 다시 태양을 볼 수 없게 될까 염려하여 군사를 일으켜 반역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나, 청남의 서론(緖論)을 들은 자로는 한 사람도 그 속에 들어간 자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청남·탁남의 시종의 대략입니다.
신이 생각건대 흉역(凶逆)스러움이 김일경·박필몽과 같다 하더라도 선대왕께서는 일찍이 평소 명색(名色)을 일경·필몽과 같이한 자라 하여 조정에 있는 신하를 구별하지 않고 한통으로 몰아버린 적이 없으셨고, 그 심사와 행적이 일경·필몽이 아닌 자를 살펴 등용해서 국정을 담당시켰습니다. 유사 이래로 역적 중에 하적(夏賊)157) 보다 더한 역적은 없는데도 우리 성상께서는 또 하적과 명색을 같이한 신하라 하여 마음에 의심을 품지 않으시고 성대히 등용하셔서 바야흐로 일대(一代)의 일을 마무리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어떤 사람이 갑이란 자를 혼칭(混稱)하여 하적의 종자라 하고, 을이란 자를 혼칭하여 김일경·박필몽의 종자라 한다면 김일경·박필몽·하적과 명색을 같이한 자들이 어찌 편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겠습니까. 그리고 조정의 형정(刑政) 또한 이처럼 분별없는 것을 어찌 용납해서야 되겠습니까.
지금 시동이 칭한 ‘기사·무신년의 종자’라는 말은 실로 당론(黨論)이 생긴 이래로 가장 심한 일망타진(一網打盡)의 계략이니, 국가에서 밝게 분변하고 통렬히 물리쳐야 마땅합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그 일만을 공격하고 그 사람은 공격하지 않으며, 그 사람만을 공격하고 그 당은 공격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일을 시동에게 요구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만약 요구할 만한 인간이 못 된다 하여 그대로 버려둔다면 이것은 나라 사람의 절반이 모두 악명(惡名)을 쓰는 것이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한 해가 다 가도록 깊숙이 박혀 있다 보니 자연히 기분이 울적하였는데, 지금 경의 말을 들으니 가슴이 시원해짐을 깨닫겠다. 다 같은 세신(世臣)이고 다 같은 사부(士夫)인데, 그 중에 불령(不逞)한 사람이 하나라도 있으면 온 색목과 온 가문의 벼슬길이 영원히 막히니, 실로 이는 옛사람에게는 없었던 바이다. 선대왕의 크고 넓으신 성덕이 지극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으되, 세상 일에 어려움이 많으므로 인해 그 일을 거행할 겨를이 없으셨다. 이 일은 진실로 나에게 물려주신 하나의 크고도 어려운 일이니, 오늘의 급무(急務)는 이 의리를 밝히는 데 있다. 그러나 먼저 규모를 바르게 하고서야 비로소 크고 넓은 치화(治化)를 논할 수 있을 것이니, 입시(入侍)한 모든 재신(宰臣)들은 이런 뜻을 아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였다. 제공이 또 아뢰기를,
"일을 맡은 신하는 논의를 임무로 삼는 삼사(三司)의 신하와는 체통이 각기 다릅니다. 무릇 전교가 내려올 때, 정원이 의견이 있으면 그 전교를 반납하기도 하고 혹은 계사(啓辭)를 올리기도 하는 것이 바로 옛 규례이고 아름다운 일이니, 누가 불가하다고 하겠습니까. 반납하거나 계사를 올렸어도 윤허를 받지 못하면 즉시 그 전교를 반포하여 삼사가 알게 하고 대신이 듣게 하는 것이 본시 당연한 도리입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혹 여러 날을 지체시켜 대신과 삼사가 까맣게 무슨 일이 있는지조차 모르게 하고 있으니, 이것은 몹시 타당하지 않습니다.
이달 초순 전조(銓曹)의 일로 말하더라도 이방(吏房)·병방(兵房)에게 세초(歲抄)를 가지고 입시(入侍)하라시는 명이 내린 뒤에 정원이 이조가 세초 문서를 끝내 대령하지 않는다는 사유로 계품(啓稟)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자기 직무에 관계된 일을 가지고 간하는 것은 혹 그럴 수도 있습니다마는, 문서로 말하면 바로 유사(有司)가 봉행할 일인데 성명(成命)이 내렸는데도 고집하면서 바치지 않았으니, 어찌 이런 사체가 있을 수 있습니까. 그때의 해당 전당(銓堂)에게 삭직(削職)하는 전형을 베푸는 것을 그만둘 수 없을 듯합니다."
하니, 따랐다.
- 【태백산사고본】 26책 26권 44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22면
- 【분류】왕실(王室) / 정론(政論) / 사법(司法)
- [註 157]하적(夏賊) : 김하재(金夏材).
○癸丑/次對。 右議政蔡濟恭奏曰: "臣以尹蓍東疏中語, 竊擬一番洞卞。 蓍東所稱戊巳餘種四字, 欲驅半國之人於己巳、戊申之臼也。 夫南人名色之分以淸、濁, 肇自肅廟初元。 伊時許積以顧命大臣, 權勢隆赫, 故嗜利貪榮之徒, 率多趨附, 是謂濁南。 文正公 許穆, 知其凶國害家, 面斥疏論, 淸裁澟然, 一時飭躬之士, 同聲推仰, 是謂淸南。 伊後積之庶孽子堅, 締結逆宗, 謀爲不軌, 至庚申誅戮, 及於黨與, 獨淸南一隊, 超然於禍網之外。 逮夫己巳, 濁南餘派, 又復當局, 弁髦名義, 無所不爲, 如李萬元、李東標、李后定, 皆抗疏極論, 以罪爲榮。 外而進善丁時翰, 內而判書兪夏益等, 或相繼陳章, 或激濁揚淸, 而以臣之伯從祖蔡彭胤言之, 六年之間, 一不立朝, 名論矯矯, 故甲戌改紀之初, 首先《瀛錄》。 其他列名於故忠臣朴泰輔疏下者, 又不知爲幾人。 此皆淸南之表著者, 而平日言論事爲, 與濁南不啻如水火之不相爲謀也。 局勢變易之後, 異已之徒, 不肯分而析之, 混以南人爲目, 一歸之得罪名義之科, 枳塞之猶恐不力, 爲淸南者, 亦恥其自誦自衒, 閉戶而無一言矣。 其自處無怪如此, 而以國家擧直錯枉之政言之, 豈不貽恨於後來尙論之士乎? 及至戊申, 爲濁南子孫者, 恐不能復見天日, 至於稱兵作逆之境, 而若其聞淸南緖論者, 無一人入於其中。 此乃淸南、濁南終始之槪也。 臣竊念凶如鏡、夢, 逆如鏡、夢, 而先大王未嘗以廷臣之平日名色, 同於鏡、夢, 混而棄之, 察其心跡之非鏡、夢者, 而擧而用之, 使之當局。 載籍以來, 逆莫逆於夏賊, 而我聖上, 又不以廷臣之同於夏賊, 而致疑於淵衷, 濟濟登庸, 方了一代之事。 今若有人混稱甲者曰夏賊之種, 混稱乙者曰鏡、夢之種云爾, 則其名色之同於鏡、夢、夏賊者, 其可安而受之, 而朝家刑政, 亦豈容若是之無分別乎? 今蓍東所稱之戊己種云云者, 實黨論以來第一網打之計, 在國家所當明卞而痛斥之者也。 古人曰: ‘攻其事, 無攻其人, 攻其人, 無攻其黨。’ 此等事, 雖不可責之於蓍東, 而若以不足責, 仍以置之, 則是半國之人, 皆受惡名, 天下寧有是耶?" 上曰: "終年深處, 自爾氣鬱, 今聞卿言, 儘覺豁然。 同是世臣, 同是士夫, 而一有不逞之人, 則全一色擧一門而永枳, 實是古人之所未有也。且先朝恢蕩之聖德, 非不至矣, 秪緣世故之多難, 猶有未遑於此擧。 是固遺大投艱之一件事也, 今日急務, 政在於明着此箇義理, 先正規模, 始可論恢蕩之治化。 入侍諸宰, 皆悉此意好矣。" 濟恭又曰: "有司之臣, 與三司論議之任, 體段各自不同矣。 凡有傳敎下者, 政院如有意見, 則或繳還或啓辭, 乃是古規也美事也, 夫誰曰不可? 繳還、啓辭, 而如未準許, 則卽爲頒布, 使三司知之, 大臣聞之, 自是當然之道。 近來或致數日淹延, 大臣、三司, 漠未知有何事。 此萬萬未安, 而以月初銓曹事言之, 吏、兵、房持歲抄入侍命下之後, 政院以吏曹歲抄文書之終不待令, 至有啓稟。 執藝以諫, 容或可也, 至於文書, 係是有司奉行之事, 成命之下, 堅執不納者, 寧有如許事體? 伊時當該銓堂, 施以削職之典, 恐不可已矣" 從之。
- 【태백산사고본】 26책 26권 44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22면
- 【분류】왕실(王室) / 정론(政論) / 사법(司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