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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 26권, 정조 12년 10월 29일 정사 1번째기사 1788년 청 건륭(乾隆) 53년

대신, 비변사 당상, 북도 감사를 지냈던 자들과 북도의 폐단에 관해 논의하다

대신, 비변사 당상과 일찍이 북도 감사를 지낸 사람들을 불러 접견하였다. 상이 영의정 김치인 등에게 이르기를,

"박상춘(朴尙春)이 상소로 북도의 폐단에 대해 진술한 것이 자못 의견이 있으니, 경들은 모름지기 조목마다 품의(稟議)해 처리하라."

하였다. 치인이 아뢰기를,

"박상춘의 상소에 8개 조항이 있는데, 그 하나는 북도 백성들은 오로지 검소만을 숭상하여 솜 대신 갈꽃을 넣어 입고 풀뿌리를 캐 먹었으나, 이(利)의 구멍이 점점 열리면서부터 사치가 풍조를 이루어 넓은 옷과 긴 소매가 달린 옷을 입고 다시는 쟁기를 잡지 않으며, 술을 빚고 음식을 장만하여 오로지 곡식 허비하기만을 일삼으니, 사치에 가까운 것들을 일체 통렬히 금지하여 본업(本業)으로 돌아가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북관의 풍속은 가장 질박하고 검소하여 옷은 짐승 가죽을 입고 음식은 나물을 먹곤 하여 일상 생활이나 음식에 있어 아름다운 풍속이 있었으나, 이(利)의 구멍이 한 번 열리면서부터 농삿일 하는 것을 졸렬한 계획으로 여기고 곡식 허비하는 것을 의기(義氣)로 여기게 되었으니, 오늘날 구황(救荒)의 방도와 후일 곡식을 넉넉하게 하는 요체(要體)는 이런 풍속을 크게 변화시키는 것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침에 명령해서 저녁에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반드시 대소 민서(民庶)로 하여금 모두 사치가 부끄러운 일이고 검소가 귀한 것임을 알게 한 뒤에야 비로소 마치 물이 스며들 듯이 감화되어 명령하지 않아도 스스로 행할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뜻으로 도신과 어사에게 엄히 신칙하여, 구호곡을 나누어주거나 위유(慰諭)할 때 마음을 다해 깨우쳐주어 각자 스스로 감격하게 하고, 그 중에 불량(不良)하여 명을 따르지 않는 자는 적발해 엄히 다스릴 뜻으로 분부하심이 좋겠습니다."

하고, 좌의정 이성원이 아뢰기를,

"상소에서 논한 것이 북도 백성들의 폐습(弊習)을 정확히 지적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짧은 기간에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오직 감영과 고을에서 점차 감화시켜 크게 변화하도록 하기에 달렸을 뿐입니다. 어사가 바야흐로 위유(慰諭)하기 위해 떠나려 하니 영상이 아뢴 바에 따라 먼저 이로써 분부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우의정 채제공이 아뢰기를,

"사치를 버리고 검소로 들어가게 하는 것은 바로 교화 중의 한 가지 일입니다. 그러나 교화가 미치지 않는 곳에는 법금(法禁)으로 보충해야 합니다. 백성들의 풍속이 사치를 부끄럽게 여기고 검소를 귀하게 여길 줄 알게 하는 것은 오직 도신과 수령들이 어떻게 인도하느냐에 달렸을 뿐이니, 이런 뜻으로 엄히 신칙하는 것을 그만둘 수 없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북도의 풍속이 본디부터 순후하다고 일컬어졌기에 나는 아직도 옛스러운 운치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 상소의 말을 보니 한심스럽기 그지없다. 대체로 검소를 등지고 사치를 하며 질박을 버리고 화려함으로 치닫는 것은 모두 교화가 행해지지 않고 백성들을 잘못 다스렸기 때문이다. 바로잡아 격려하는 거조가 없을 수 없으니, 먼저 도백과 고을 원들로 하여금 글이나 말로 성심을 다해 권유하도록 해서, 먼 곳에 사는 백성들로 하여금 이렇게 하는 것이 옳고 이렇게 하지 않는 것이 부끄러움이 된다는 것을 알게 하여 점차 감화시켜 본업으로 돌아가는 효과가 있게 하라. 그러면 어찌 참으로 아름답지 않겠는가."

하였다. 치인이 아뢰기를,

"그 중 하나는, 산을 일군 화전(火田)에 구실을 매기는 것과 호미로 일군 협기전(挾起田)141) 에 대한 징세(徵稅)가 점점 높아지고 있으니, 양외전(量外田)에 지나치게 거두는 조세를 참작해 줄여 가난한 백성들을 도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화전세(火田稅)를 너무 지나치게 거두는 것도 진실로 백성들이 지탱하기 어려운 일이거니와, 협기전에 대해 징세하는 것은 더욱더 심한 고통입니다. 대체로 화전은 묵히고 일구는 것이 일정하지 않은데, 고을에서는 비총(比摠)에 따라 조세를 강징(强徵)하고, 아전들은 더 착취하여 자신의 이익으로 삼기 위해 화전의 소재지는 따지지 않고 멀리서 짐작으로 구실을 매깁니다. 이른바 호미로 일구는 농사란 공지(空地)를 호미로 일구어 한 되 곡식이나 한 말 곡식의 수확을 바라는 데 불과한 것인데, 또 여기에 강제로 조세를 내게 합니다. 도신과 어사에게 엄히 신칙하여 한결같이 현재 경작하고 있는 화전의 예에 따라 구실을 매기고, 비록 1파(把)·1속(束)이라도 만약 백징(白徵)한 것이 있으면 일일이 낸 자를 찾아서 되돌려주게 하소서. 그리고 백징한 것이 적으면 아전과 향임(鄕任)을 징계해 다스리고, 백징한 것이 많으면 장계(狀啓)로 아뢰어 논죄하게 할 것이며, 호미로 일군 협기전에 대한 조세는 일체 혁파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고, 성원이 아뢰기를,

"화전세를 멀리서 짐작으로 매기는 폐단은 본도만이 그런 것이 아니지만, 본도에는 산골이 많기 때문에 더욱 심합니다. 호미로 일군 협기전은 본래 징세 대상이 아닌데 이처럼 마구 징수하니 불쌍하기 그지없습니다. 혁파하는 것을 결단코 그만둘 수 없습니다."

하고, 제공이 아뢰기를,

"화전에 대해 반드시 비총(比摠)을 높이고자 하는 것은 본래 탐관 오리들의 일입니다. 풍흉(豊凶)을 따지지 않고 비총대로 백징(白徵)하는 자를 도신이 자세히 살펴 고과(考課)를 엄격히 한다면 거의 두려워 꺼리는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원세(元稅)가 분명하지 않아 백성들이 심한 고통을 받고 있는 것만도 오히려 가련한데, 하물며 양외(量外)의 조세이겠는가. 이번 명령이 내린 뒤에도 이를 범하는 수령이 있으면 도신은 즉시 장계로 보고하고, 염민율(斂民律)로 다스리라. 만약 사실을 숨기고서 보고하지 않거나 덮어두고 살피지 않았다가 암행 어사에게 발견되면 도신도 함께 논죄할 것이다. 이런 폐단이 어찌 북도에만 그러하겠는가. 여러 도의 산골 고을에도 그렇지 않은 곳이 없을 것이니, 묘당에서 북도와 여러 도에 한결같이 엄히 신칙하고, 이어 이 비지(批旨)를 암행 어사가 가지고 가는 사목(事目)에 첨가해 기재하고, 호미로 일군 협기전에 대한 징세도 더욱 빨리 혁파하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도 한결같이 행회(行會)하도록 하라."

하였다. 치인이 아뢰기를,

"그 중 하나는 지정된 양 이외에 사사로이 환곡을 나누어주고서 모곡(耗穀)을 받으며, 중간에서 환곡의 이자를 지나치게 받아들여 남는 것을 착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사로이 나누어주는 데 대한 금령은 본디부터 엄격했습니다마는, 중간에서 환곡의 이자를 지나치게 받아들인다는 것은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먼저 도신으로 하여금 엄격하게 사실을 조사해서 의견을 붙여 보고하게 한 뒤에 품처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고, 성원이 아뢰기를,

"본도 잉곡(剩穀)의 폐단이 갈수록 더욱 깊어지니 한 번 징계한 뒤에야 앞으로의 효과를 다짐할 수 있습니다. 먼저 도신으로 하여금 자세히 조사해서 장계로 아뢰게 하소서."

하고, 제공이 아뢰기를,

"본도의 잉곡 명색은 진실로 영원히 혁파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마는 북도 고을들의 사정을 듣건대 간섭하여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점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멀리에서 헤아릴 수 없으니 도신으로 하여금 장계로 아뢰게 한 뒤에 품처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잉곡의 명색이 이미 상소문에 올랐고 또 연석(筵席)에서 거론되었는데, 듣고도 그대로 버려둔다면 그렇게 하도록 가르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수령이 직접 법을 범하는데 아전과 향임(鄕任)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아, 곤란을 받는 자도 저 백성들이고 고통을 겪는 자도 저 백성들이니, 이 폐단을 개혁하지 않는다면 어찌 조정에 백성을 편안하게 보호하는 정사가 있다고 하겠는가. 그러나 잘못된 관습이 곧 항식(恒式)이 되어버려 쓰인 바가 반드시 다 사용(私用)으로 들어가지만은 않았을 것이니, 따로 대충(代充)해 주어 돌려 쓰도록 하는 것도 한 가지 방도일 듯하다. 그러니 묘당으로 하여금 도신에게 엄히 신칙하여 백성들에게서 징렴(徵斂)하고 있는 명색을 한결같이 조목조목 자세히 따져 장계하고, 이어 폐단을 구제할 방책에 대한 의견을 붙여 보고할 것으로 수령들에게 분부하게 하라.

백성들에게 징렴하는 것이 이 뿐만이 아니니 영세한 진(鎭)·보(堡)의 변장(邊將)들이 토병(土兵)을 괴롭히는 것도 미루어 알 수 있다. 합설(合設)에 대한 논의는 이미 오래 전부터 있었으니, 비록 단기간에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을 다해 생각한다면 반드시 채용할 만한 실마리가 생길 것이다. 몇 포대의 늠황(廩況)으로는 청렴한 관원을 기를 수 없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매양 병합을 하지 않는다면 봉록이라도 더 주어야 된다고 하였다. 원수(元帥)를 장진 부사(長津府使)로 내보낸 것이 어찌 아무 일없이 편안히 지내게 하기 위한 것이겠는가. 한사(寒事)142) 가 조금 풀리기를 기다려 즉시 형편과 사정을 두루 살펴 의견을 갖추어 장계로 아뢰게 하였으니, 그의 장계가 올라온 뒤에 품처하도록 하라.

내가 매양 본도의 변방 고을 수령의 일에 대해서 한 번 물어보고서 정식(程式)을 정하고자 하였으나 끝내 하지 못하였다. 이전의 전관(銓官)들은 그래도 도량이 넓고 마음이 공정한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간혹 관직을 위해 사람을 선택하는 효과가 있었으나, 근래에는 이와 정반대이다. 세력과 문벌 좋은 똑똑한 무변(武弁)이 북도 변방 고을로 차임되어 가는 것을 경들은 과연 보았는가? 이재(吏才)가 비록 문벌과 관계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장래를 생각하고 자신의 명예를 돌아보는 것이 반드시 연한(年限)이 거의 다 된 고단(孤單)한 한족(寒族)보다는 낫다.

이후로는 북도 변방 수령 중 무신을 임명하는 자리에는 특별히 사람을 골라 차임하여 반드시 기한을 채우도록 하고, 여러 차례의 고과(考課)에서 최(最)를 차지하고 한 번도 폄제(貶題)된 일이 없으면 곧바로 방어사(防禦史)로 승진시킬 것을 정식으로 삼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어찌 아무아무 갈래를 거쳐 보낸 뒤에야만 비로소 골라 보냈다고 할 수 있겠는가. 고과에서 성적이 계속 상등이고 기한을 채운 사람만을 승진시켜 의망(擬望)하는 것이 어떻겠는지를 경들이 전관(銓官)과 무장(武將)에게 물어 의견을 갖추어 사리를 논술해서 초기(草記)하라."

하였다. 치인이 아뢰기를,

"그 중 하나는, 연해 어전(魚箭)이 있는 마을에서 명절 때 당집에 바치기 위해 소를 잡으므로 많은 소들이 거의 다 없어졌기 때문에 돈이 부족한 자는 다시 소를 장만할 방법이 없으니 거듭 도축 금지(屠畜禁止)를 밝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소의 도살을 금지하는 것을 연전의 행회(行會)에서 얼마나 엄격히 하였습니까. 더구나 본도에서 매매하는 물건 중에는 소가 대부분이고, 땅이 또 돌이 많고 메말라 다른 곳에 비해 소를 갑절이나 부려야 하는데, 도살 금지령이 싹 사라져버렸으니 진실로 한심합니다. 도신으로 하여금 거듭 법금(法禁)을 엄히 밝혀 오래되어도 느슨해지는 일이 없게 하여 소가 번식되는 효과가 있게 하소서."

하고, 성원이 아뢰기를,

"법금이 본래 엄격하니 감영과 고을에서 금령을 살펴 행하기에 달렸을 뿐입니다."

하고, 제공이 아뢰기를,

"외방에 우금(牛禁)이 싹 사라져버린 것은 참으로 한심스럽습니다. 도신에게 엄히 신칙하여 금령을 범하는 폐단이 없도록 하소서."

하니,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치인이 아뢰기를,

"그 중 하나는, 철점(鐵店)의 점세(店稅)와 장인(匠人)의 부역이 너무 중하여 호미와 보습 만드는 일이 거의 폐지되고 있으니 철점의 점세를 면제해서 농기구가 넉넉해지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장인의 부역과 철점의 점세가 비록 통행하는 고을의 규정이기는 하지만, 점세가 높고 부역이 과중한 것은 오로지 관용(官用)을 넉넉하게 쓰려는 데서 연유한 것입니다. 오늘의 수령은 옛날 전준(田畯)143) 의 직임까지 겸하였는데, 점세와 부역으로 인해 쟁기 만드는 일을 폐지하게 되었다면 어찌 남이 들을까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도신으로 하여금 직접 자세히 조사해서 존속시킬 만한 것은 존속시키고, 감면할 만한 것은 감면하고, 혁파할 만한 것은 혁파하여 하나하나 시정한 뒤에 장계로 아뢰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고, 성원이 아뢰기를,

"장인의 부역과 철점의 세금은 진실로 모두 폐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 과중한 것은 통렬히 줄여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제공이 아뢰기를,

"무역과 점세가 과중함으로 인하여 쟁기 만드는 것을 폐하는 데까지 이르렀다면 도신으로 하여금 참작해 존속할 것은 존속시키고 감면할 것은 감면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치인이 아뢰기를,

"그 중 하나는, 관청의 부역이 잦아 농기(農期)를 놓치니, 반드시 농한기(農閑期)에 부역시켜서 시기를 놓쳐 농사를 망치는 일이 없게 해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경기(京畿)의 응당 치루어야 할 신역(身役)에 있어서도 반드시 신역미(身役米)를 내는 것으로 회감(會減)하였고 한 백성도 함부로 부역시킨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국가의 역사(役事)로서 조정에 보고한 것이 아닌 경우에는 감히 멋대로 부역시키지 말고, 설령 공해(公廨)를 수리하기 위해 백성을 사역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반드시 순영(巡營)에 보고하고 아전들을 엄중히 단속하여 농간을 부리는 폐단이 없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고, 제공이 아뢰기를,

"비록 백성을 부리지 않을 수 없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어찌 아전들로 하여금 중간에서 농간을 부리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역사를 일으킬 경우에는 타당한 사유를 논해 도신에게 보고해서 허제(許題)를 받은 뒤에 백성을 부리되, 여러 날 끌지 말라는 뜻으로 정식(定式)을 삼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록 감영에 보고해서 허제를 받았다 하더라도 꼭 부담해야 할 부역은 1년에 3일을 넘지 않으니, 3일 이상의 부역은 묘당에 보고한 뒤에야 그 시행을 허가할 것이다. 이와 같이 법식을 정한 뒤에도 법을 범하는 자는 멋대로 백성을 동원한 죄로 다스리겠다는 뜻으로 엄히 신칙해 분부하라."

하였다. 치인이 아뢰기를,

"그 중 하나는, 균역청의 염세(鹽稅) 이외에 또 토지세·도로세·시장세(柴場稅)가 있기 때문에 소금이 금처럼 귀하니, 알맞게 헤아려 염세를 낮추고 가는 곳마다 소금을 굽게 하여 점차 소금값이 흙값 같이 되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균역청 염세 이외의 토지세·도로세·시장세 등은 다른 도에는 없는 명색인데, 그 중에서도 시장세는 더욱 무리하니 먼저 혁파하소서. 그리고 그 밖의 두 세금도 도신으로 하여금 존속할 것인지 혁파할 것인지를 잘 헤아려 장계로 아뢰게 한 뒤에 품처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치인이 아뢰기를,

"그 중 하나는, 은광·금광에서 패망한 무리와 조세를 포탈하고 부역을 피하기 위해 도망한 건장한 자들이 떼를 지어 때때로 약탈을 자행하여 촌락에 분란을 일으키는데, 이러한 자들을 도적과 같은 죄로 다스려 본토(本土)로 쇄환(刷還)해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은광과 금점(金店)의 폐단에 대해서는 연전에 신칙하는 전교를 여러 도에 일제히 내려보냈으니, 소 가운데 운운한 것은 아마 예전의 은광과 금점을 두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흉년을 구제하는 정사에는 불량배를 엄히 단속하는 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으니, 신역을 피하고 조세를 포탈하고서 도망온 자들까지 함께 각기 그 지방관과 이사(里社)가 잡아 관부(官府)에 바쳐 도적질한 죄로 다스리고, 관부에서도 때때로 염탐하여 본토로 쇄환하거나 특별히 살곳을 주어 정착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고, 성원이 아뢰기를,

"어사가 현재 도내에 있으니 단속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은광과 금점의 개설(開設)을 반드시 엄중히 막고자 하는 것은 바로 백성을 위한 나의 고심이다. 그런데 말하는 자들은 간혹 지리(地利)를 묻어둘 필요가 없다고 하지만, 이는 이치에 맞는 말이 아니다. 동(銅)을 구하려면 일본 동이 있고 은을 구하려면 중국 은이 있으니, 무엇 때문에 반드시 땅속의 광물을 남김없이 파낸 뒤에야 비로소 우리 나라가 부유해진다고 하겠는가. 근년 이래로 그 일을 담당한 신하가 어렴풋이나마 조정의 본의를 알고서 은광이나 금점에 관한 일을 감히 연석에서 제기하지는 못했으나 아무 곳에 동이 나고 아무 곳에 은이 생산된다는 말을 들으면 조사한다는 핑계로 번번이 사람을 차견(差遣)하였고, 외방의 감영이나 고을에서도 모두 이렇게 하고 있기 때문에 박상춘(朴尙春)이 이렇게 상소하여 논한 것이다. 또 상소의 말로 보면 이미 개설한 곳을 이른 것이 아니고, 앞으로 개설하는 곳의 폐단이 그러리라는 것이니, 그 말이 옳다.

이제부터는 규정을 엄격히 세워, 품의를 거쳐 반포한 조령(朝令)이 없는데도 서울의 유사(有司)와 외방의 감영이나 고을에서 모리배의 말을 듣고서 간색(看色)한다는 핑계로 차사(差使)를 보내면, 유사의 신하와 해당 도신은 곧 제서유위율(制書有違律)로 다스리고, 금지하지 않았거나 본인이 직접 법을 범한 수령은 감영으로 잡아다가 무거운 쪽으로 결장(決杖)하여 3년 동안 금고(禁錮)하고, 당해 차인(差人)은 한 차례 엄히 형벌하여 귀양보내고, 계사(計士)·영비(營裨)도 같은 죄로 다스릴 것이다. 그리고 관의 허가가 있는 곳이건 없는 곳이건을 막론하고 이런 곳에 머물러 있는 무뢰배들은 각기 당해 토포영(討捕營)으로 하여금 곧장 도적을 다스리는 형벌로 처벌하게 하고 앞장선 자는 충군(充軍)하는 것으로 규정을 정해 시행할 것이니, 의금부·호조·형조 및 순영(巡營)·토포영에서는 이것을 게시하여 법령이 반포되는 시한까지 기다렸다가 보낼 만한 곳에 적간(摘奸)하는 사람을 보내도록 하라. 묘당은 이런 내용으로 특별히 본도와 여러 도에 엄히 신칙하여 실효가 있게 하라."

하고, 상이 또 이르기를,

"교화가 행해지지 않는 것은 수령들이 정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진실로 성심으로 권면하고 신칙하여 교화가 차츰차츰 스며들게 한다면 당장은 성과가 보이지 않지만 시일을 두고 보면 백성들이 본분으로 돌아가는 효과가 있는 것을 넉넉히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이 내용도 아울러 도백과 어사에게 신칙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6책 26권 21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11면
  • 【분류】
    사법(司法) / 왕실(王室) / 상업(商業) / 농업(農業) / 재정(財政) / 구휼(救恤) / 광업(鑛業)

  • [註 141]
    협기전(挾起田) : 토지 대장에 오르지 않은 개인적으로 개간한 땅.
  • [註 142]
    한사(寒事) : 동계 방어(冬季防禦).
  • [註 143]
    전준(田畯) : 권농관(勸農官).

○丁巳/召見大臣、備堂及曾經北伯人。 上謂領議政金致仁等曰: "朴尙春疏陳北路弊瘼, 頗有意見。 卿等須逐條稟處。" 致仁曰: "朴尙春疏, 其條有八。 其一, 北民全尙儉嗇, 衣蘆啖草, 而利竇漸開, 奢麗成習, 衣廣袖長, 不復執耒, 甕釀盤饍, 專事糜穀, 近於奢汰者, 一切痛禁, 使之歸本事也。 北關之俗, 最質儉, 衣則服皮, 食則咬菜, 有日用飮食之美風, 而利竇一開, 以服田爲拙謀, 糜穀爲義氣, 目下救荒之道, 日後裕食之要, 無出於丕變此俗。 然此非可以朝令夕除也, 必也使大小民庶, 咸知奢之可恥, 儉之可貴, 然後始可如水漸漬, 不令自行。 以此意, 嚴飭道臣、御史, 凡於分賑或慰諭之時, 悉心曉譬, 俾各激感, 而其中頑不承敎者, 摘發嚴繩之意, 分付宜矣。" 左議政李性源曰: "疏論, 切中北民之弊, 而此非猝乍矯捄者。 惟在營邑, 漸摩丕變。 御史方作慰諭行, 依領相所奏, 先以此分付好矣。" 右議政蔡濟恭曰: "祛奢就儉, 此是敎化中一事。 然敎化之所不及, 以法禁補之。 使民俗知奢可羞, 儉可貴者, 惟在道臣、守令導率之如何。 以此嚴飭, 恐不可已。" 上曰: "北俗素稱淳厚, 意謂尙有古雅, 觀此疏辭, 豈勝寒心? 大抵反儉爲奢, 捨質趨華, 莫非敎化不行, 字牧失宜故耳。 不可無董勵之擧, 先令道伯、邑宰, 以文以言, 誠心勸諭, 使遐土知如此爲是, 不如此爲恥, 漸磨浸潰, 優有反本之效, 則豈不誠休哉?" 致仁曰: "其一, 山墾火田之執卜, 鋤農挾起之徵稅, 轉至增加, 酌減量外田濫稅, 以資貧民事也。 火稅太濫, 固是小民難支之端, 而挾起徵稅, 尤爲切肌之苦。 大抵火田, 陳起無常, 官以比摠責徵, 吏以加括自利, 不問其處, 遙執其卜。 所謂鋤農, 不過隙地鋤治, 僥倖升斗之收, 而又從而勒稅之。 嚴飭道臣、御史, 一從時起執卜, 雖把、束, 如有白徵, 一一推給。 小則懲治吏、鄕, 大則狀聞論罪。 鋤農挾起之稅, 一切革罷爲宜。" 性源曰: "火稅遙執之弊, 不獨本道爲然, 而本道峽多之故, 爲尤甚。 若鋤農, 本非可以徵稅, 而如是勒徵, 極爲事矜, 革罷, 斷不可已。" 濟恭曰: "火田必欲高摠, 自是貪官事。 不問豊歉, 比摠白徵者, 道臣詳察, 嚴其殿最, 則庶有畏憚之效。" 上曰: "元稅之囫圇, 爲民切瘼, 猶以爲悶, 況量外之稅乎? 自今令下之後, 守令犯者, 道臣隨卽狀聞, 施以歛民之律。 匿不以聞, 矇未覺察, 現發於暗行御史, 幷與道伯論罪。 此弊豈獨北道爲然? 諸道山郡, 必當無邑不然。 自廟堂北道及諸道, 一竝嚴飭, 仍以此條批旨, 添載於暗行御史賫去事目, 至於鋤農挾起之稅, 尤合亟革, 一體行會也。" 致仁曰: "其一, 科外私分之取耗, 從中濫捧之割剩也。 私分之禁, 本自至嚴, 從中濫捧, 尤極可駭。 先令道臣, 嚴加査實, 論理登聞後稟處宜矣。" 性源曰: "本道剩穀之弊, 去而益深, 一番懲創, 然後可責來效。 先令道臣, 詳査狀聞。" 濟恭曰: "本道剩穀名色, 固當永革, 而聞北邑事勢, 亦有掣肘者云。 此則不可遙度, 令道臣, 詳細狀聞後稟處, 似好矣。" 上曰: "剩穀名色, 旣登於疏章, 又發於筵席。 聞而任置, 何異敎使爲之乎? 自守令身犯, 吏、鄕何言? 唉彼受困者, 惟小民, 喫苦者, 惟小民。 不革此弊, 其可曰朝廷有懷保之政乎? 然其謬習, 便成恒式, 所用未必盡是, 私用則別劃充代, 俾得旋容, 亦或一道。 第令廟堂, 嚴飭道臣, 一從歛民名色, 詳細條陳, 仍以救弊之策, 附陳意見事, 分付守令。 歛民不但如此, 殘鎭薄堡之邊將, 侵虐土卒, 尤可推知。 合設之議, 其來已久, 雖非猝乍間決定者, 苟能悉心商度, 必當有採施之端。 且況數包廩, 決難養廉, 朝廷每以爲不合幷, 則宜加給云耳。 長津府使, 自元戎出補, 豈令徒然便處? 待寒事稍解, 須卽遍察形便事情, 具意見狀聞後稟處。 每於本道邊倅事, 欲一詢問定式而未果。 在前銓官, 猶多恢公之人, 故間有爲官擇人之效, 近來反是, 了了武弁。 有勢閥者之差送北邊者, 卿等果見之乎? 吏才雖不關於勢閥, 而其愼前程顧身名, 必勝於迫年限至單寒之類。 此後本道邊地守令武臣窠, 別樣擇差, 必令準瓜, 而屢考居最間無貶題, 則直陞防禦者, 爲式似好, 而自某某岐出送, 方可謂擇差乎? 連上準瓜, 陞擬一款, 亦果何如, 卿等問于銓官、武將, 仍具意見, 論理草記。" 致仁曰: "其一, 沿海漁箭里社歲時之屠殺牛畜, 千百殆盡, 價寡者無以辦得, 申明屠禁事也。 屠牛之禁, 年前行會, 何等申嚴, 而況本道開市之需, 牛畜爲多, 地又磽确, 倍用牛力, 屠禁之蕩然, 誠亦寒心。 令道臣, 申嚴法禁, 持久勿弛, 俾有牛畜蕃息之效。" 性源曰: "法禁本嚴, 只在營邑, 按而行之。" 濟恭曰: "外方牛禁之蕩然, 良可寒心。 嚴飭道臣, 俾無犯禁之弊。" 可之。 致仁曰: "其一, 鐵店店稅及匠役過重, 鋤犂垂廢, 免其鐵稅, 以足器用事也。 匠役店稅, 雖曰通行之邑規, 層高過重, 專由取足於官用。 今之守宰, 實兼古田畯之職, 因其稅役, 廢其犂鋤, 豈可聞於人乎? 令道臣, 親執詳査, 可存者存之, 可減耉減之, 可革者革之, 一一釐正後狀聞宜矣" 性源曰: "匠店之稅, 固不可一切廢之, 而其中過重處, 痛加省減好矣。" 濟恭曰: "匠役店稅, 若因過重, 至廢鋤犂, 則令道臣, 量宜存減好矣。" 可之。 致仁曰: "其一, 官役或煩, 農作愆期, 必於農隙, 無使役民失時廢業事也。 雖於畿輔應行之役, 亦必會減役米, 未嘗一民之輕用, 則除非國役之登聞朝廷者, 毋敢擅便, 設有公廨修理等不得不使民處, 必報巡營, 嚴束吏輩, 俾無作奸之弊宜矣。" 濟恭曰: "雖或有不得不使民處, 豈可使吏輩, 弄手其間乎? 凡有動作, 論報道臣, 得許題然後, 始爲使民, 而亦無拖多日之意定式, 恐宜矣。" 上曰: "雖報營受題, 不得不應有之役, 歲不過三日。 過三日以上役, 報廟堂, 然後許施。 如是定式後, 犯者以擅發民丁律, 嚴飭分付。" 致仁曰: "其一, 醎鹽均廳稅外, 又有土稅、路稅、柴稅, 故其貴如金, 量宜薄稅, 令隨處煮海, 漸致與土同價事也。 均廳鹽稅外, 土稅、路稅、柴稅等, 他道所無之名色, 而其中柴稅, 尤無義, 爲先革罷。 其他兩稅, 令道臣, 商量存罷狀聞後, 稟處宜矣。" 可之。 致仁曰: "其一, 銀礦、金穴之敗徒, 逃租避役之健兒, 成群如林, 時肆攘奪, 作挐村閭者, 與盜同罪, 刷還本土事也。 礦店之弊, 年前飭敎, 遍下諸道, 則疏中云云, 似是舊礦舊店之謂, 而荒年之政, 莫先於嚴戢暴子弟, 竝與避役逃租之類, 各其地方官, 各其里社, 捉納官府, 施以行盜之律, 亦自官府, 時時詗察, 或刷還本土, 或別般奠接宜矣。" 性源曰: "御史, 方在道內, 亦令禁戢宜矣。" 上曰: "開礦、設店之必欲嚴防, 卽予爲民苦心。 議者或曰地利不必藏塞云, 而此非達論。 求銅則有銅, 求銀則有銀, 何必地無遺利, 然後方可謂富吾國乎? 近年以來, 有司之臣, 猜得朝家本意, 礦店一事, 雖不敢發於筵席, 若聞某處産銅, 某處出銀, 則稱以看審, 輒遣差人, 外方營邑, 亦皆知是, 故有此朴尙春之疏論。 且以疏語觀之, 非已設之謂, 卽將設處爲弊之乃爾, 其言是矣。 自今, 嚴立科條, 無朝令之經稟頒示, 而京而有司, 外而營邑, 甘聽牟利之說, 假稱看色, 發送差使者, 有司之臣及該道臣, 直施制書有違律, 不禁自犯之守令, 拿致營門, 從重決杖, 禁錮三年, 該差人嚴刑一次定配, 計士、營裨同律。 無賴輩之無論因官令無官令, 逗留於此等處者, 令各該討捕營, 直施治盜之刑, 首唱人充軍事, 定式施行。 禁府、戶刑曹及巡營、討捕營, 以此揭板, 稍俟頒令之限, 別遣摘奸於可送處。 此意自廟堂, 拔例嚴飭本道及諸道, 俾有實效。" 上又曰: "敎化之不行, 字牧失宜故耳。 苟能誠心勸飭, 漸磨浸漬, 日計月計之雖不足, 退以歲計, 優覺有反本之效, 豈不休哉! 竝以此意, 申飭于道伯、御史。"


  • 【태백산사고본】 26책 26권 21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11면
  • 【분류】
    사법(司法) / 왕실(王室) / 상업(商業) / 농업(農業) / 재정(財政) / 구휼(救恤) / 광업(鑛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