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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26권, 정조 12년 10월 5일 계사 1번째기사 1788년 청 건륭(乾隆) 53년

북도 인민을 위유하는 윤음을 내리다

대신과 비변사 당상·한성부 판윤·경기 관찰사·위유 어사(慰諭御史)를 불러 보고서 북도 민인(民人)을 위유하는 윤음(綸音)을 내렸다. 이르기를,

"아래와 같이 말하노라. 아, 너희 북방의 백성들아. 농삿일도 이미 끝나고 한 해도 저물어가니, 이는 바로 마을에서는 술마시는 모임을 열고서 즐거운 시절을 노래하고 음악을 연주하며[鼓山樞] 서로 화답할 때인데, 어찌하여 이렇듯 뿔뿔이 헤어지는 곤궁을 만났단 말인가. 관(關) 이북 천여 리에 들에는 남아 있는 볏단이 없고 집안에는 묵은 양곡이 없어 몇 천 몇 만의 생명이 마치 도탄에 빠진 것처럼 절규하고 있다는 도신·평사(評事)의 장계가 번갈아 올라오니, 한밤중의 잠자리가 하루라도 편안할 겨를이 있었겠는가.

내가 농정서(農政書)를 보건대, 가뭄이 드는 해에는 밭곡식을 심어야 하고 비가 많은 해에는 논곡식을 심어야 한다. 때문에 들에서는 농사를 그르치더라도 산골의 뙈기밭에서는 수확을 하고, 이곳에는 흉년이 들더라도 저곳에는 풍년이 든다. 그러므로 농사에 주도 면밀한 자는 흉년이 죽일 수 없다고 한 것이다. 이는 모든 도가 함께 그렇게 하는 바인데, 유독 본도만이 한 번 장마를 만나면 모든 곡식이 다 병들어, 빈자(貧者)나 부자나 곤궁함이 똑같고 공가나 개인이나 재정이 모두 고갈된다. 게다가 산과 바다가 막혀 물화(物貨)를 교역(交易)할 길조차 없기 때문에 가령 상자 속에 필요 이상의 베가 있고 마당에 필요 이상의 곡식이 쌓여 있다 하더라도 교역할 수가 없어 팔장만 끼고 기다릴 뿐이다. 이는 또 여러 도에는 없는 일이고 오직 본도만이 그러할 뿐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른바 초실(稍實)이니 지차(之次)니 우심(尤甚)이니 하는 것은 억지로 명색을 붙인 것일 뿐 그 실제에 있어서는 마찬가지이다. 북관(北官)의 흉년이 남관보다 심하고, 경흥(慶興) 등 여러 고을은 또 북관 중에서도 흉년이 가장 심하여, 한창 가을인데도 유랑하는 자가 있고 겨울도 되기 전에 부황(浮黃)이 나는 자가 있으니, 북도에서 전해오는 말을 기다리지 않고도 그곳의 형편과 백성들의 실정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아, 금년 여름의 비가 어느 도엔들 없었겠는가마는 기호(畿湖)와 영남은 한결같이 풍년이 들었고, 관동과 양서(兩西)도 흉년은 면하였으니, 가령 본도가 호남·영남만은 못하더라도 관동과 양서 정도만 되었다면 어찌 풍년의 즐거움을 함께 누려 북도를 염려하는 근심을 조금은 늦출 수 있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하늘이 매양 고루 풍년을 주지 않아 살아갈 방도가 아득하다. 그 탓이 실로 나에게 있는 것인데, 백성들이 무슨 죄인가.

그러므로 나는 규장각 직각(直閣) 정대용(鄭大容)을 북관 위유 어사로 삼아 그 곳에 가서 대소 민서(民庶)를 위무(慰撫)하고 감영(監營)에 머물러 있으면서 진휼 정사를 펴라고 명하였으니, 너희들은 이 사람에게 의탁하고 내가 멀리 있다고 하지 말라. 아, 사람을 감동시키는 데 있어 말은 근본이 아닌데, 지금 깊은 구중 궁궐과 먼 천 리 밖에서 몇 줄의 문자에 의지하여 너희들을 위로하고 너희들을 정착시키고자 할 뿐이니 진실로 소략(疎略)하다 하겠다. 그러나 마음을 털어놓는 것이 말이고 말을 문자로 쓴 것이 글이니, 글로 선포하는 데에는 마음에 느낀 바가 있어서이다. 내가 비록 부덕하지만 너희들의 부모가 되었으니 마음이 달려가는 곳에 어찌 절로 상통하여 감응하는 신묘함이 없겠는가.

구제해 살리는 구체적 방안에 대한 계획을 어사를 면대해 일러 주었고, 감면해 주는 정사도 특별히 우대하는 법을 따르게 하였고, 그곳에서 바치는 어복(御服)·어공(御供)에 들어가는 물건들도 그곳에 비축하여 두고서 특별히 진휼하는 물자로 쓰게 하였다. 그리고 다시 내탕전(內帑錢) 2천 꿰미와 면포(綿布) 1백 필과 호초(胡椒) 30두를 어사 편에 보내어 따로 곡물과 교역해서 영송(迎送)할 때 죽을 끓여 먹이도록 하였다. 아, 너희 북도의 백성들은 너희들을 품어 보호하고자 하는 나의 고심(苦心)을 알아서 잠시 동안만 각기 집에서 안정하고 각기 생업(生業)을 지키라. 내년 봄을 기다려 농삿일에 부지런히 힘을 쏟아 때를 놓치지 않는다면 하늘은 지극히 인자하시어 반드시 소원을 들어줄 것이니, 밀·보리가 풍년이 들 것은 정해진 이치이다. 아, 너희 북도 백성들은 나의 말을 분명히 듣고 떠들썩하게 동요하지 말라.

너희들의 주림이 나의 주림이고 너희들의 배부름이 나의 배부름이며 너희들의 곤궁이 나의 곤궁이고 너희들의 편안함이 나의 편안함이다. 내가 너희들과 휴척(休戚)을 함께 하는데 너희들이 비록 나의 마음으로 너희들의 마음을 삼지 않고자 하나 되겠는가. 촛불을 밝히고서 간절히 당부하는 글을 쓰는 것은 오로지 진정에서 나온 것이다. 아, 북도의 백성들아."

하였다. 우의정 채제공에게 명하여 윤음을 읽게 하고서, 상이 이르기를,

"지난날 선왕께서 말이 민사(民事)에 미치면 눈물이 절로 흐른다는 전교가 계셨으니, 선왕께서 50년 동안 백성을 사랑해 구휼하신 뒤를 이은 내가 비록 이 전교를 범연히 보고자 하나 될 수 있겠는가. 윤음 가운데 너희들의 주림이 나의 주림과 같고 너희들의 추움이 나의 추움과 같다고 한 것이 바로 나의 진심이다."

하니, 제공이 아뢰기를,

"우리 성상께서는 일국의 정사를 처리하시는 속에서도 밤낮으로 근심하고 괴로워하셨습니다. 어제 듣건대, 여러 신하들이 공퇴(公退)한 뒤에 다시 북도의 별부료(別付料)들을 불러 접견하시어 밤중까지 침수들지 않으셨다 하니 진실로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나는 힘을 수고롭히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마음을 수고롭히는 것이 가장 어렵다. 가령 백성들이 편안히 정착하고 조정에 서로 불화(不和)하는 풍습이 없어진다면 내가 비록 힘을 수고롭히더라도 무슨 손해가 있겠는가. 더구나 엊그제가 바로 종묘 대제일(宗廟大祭日)이었음에랴. 선왕께서는 80세가 넘은 보령(寶齡)에도 제사를 지내기 전에는 침수에 드신 적이 없었는데, 내가 어찌 편안히 잘 수 있었겠는가."

하고, 상이 어사 정대용에게 이르기를,

"북관에 조세를 감면해주는 절목을 편의에 따라 알맞게 조종하여, 환곡의 3분의 1이나 절반을 연기하여 바치도록 한 것에 대해서도 백성들이 마련하기 어려운 형편이면 참작해 감해 주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6책 26권 18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9면
  • 【분류】
    왕실(王室) / 정론(政論) / 구휼(救恤) / 재정(財政)

    ○癸巳/召見大臣、備邊司堂上、漢城府判尹、京畿觀察使、慰諭御史, 下慰諭北道民人綸音。

    若曰, 咨爾北方之人, 役車其休, 歲亦暮止, 此政村酒社鼓山樞互答之日, 而胡罹此仳㒧顚連之苦也? 關以北千餘里, 野無遺秉, 居無宿糧, 幾千萬生靈, 嗷嗷然如在水火, 道臣評事之啓, 交聞迭奏, 乙丙之枕, 遑可一日安乎? 予觀農政之書, 旱宜田種, 澇宜水穀。 失之野而收之峽, 歉於此而登於彼, 故曰周乎農者, 凶年不能殺。 斯乃諸路之所同然, 而獨本道則一遇恒雨, 百穀俱痒, 貧富惟均, 公私遍竭。 重以山海兩阻, 貿遷無路, 假令箱有餘布, 場有餘蓄, 化居不得, 束手以俟, 此又諸路之所未有, 而惟本道爲然也。 然則今之所謂稍實也, 之次也, 尤甚也, 特强以名之耳, 其實一也。 北關之歉, 甚於南關, 慶興諸邑, 又北關之最, 方秋而流亡者有之, 未冬而浮黃者有之, 蓋不待北來之言, 而地勢民情, 可推知也。 嗚呼! 今夏之雨, 何道無之, 而畿湖嶺南, 一是豐登, 關東兩西, 亦旣免歉, 使本道雖遜於湖嶺, 可方於東西, 則豈不同享有年之樂, 少寬北顧之憂, 而造化每惜全功, 接濟茫無涯畔。 咎實在予, 民則何罪? 玆予命以奎章閣直閣鄭大容, 爲北關慰諭御史, 往撫大小民庶, 留管賑政, 爾尙是依, 無予云遐。 嗚呼! 言語之於感人, 末也。 今以九重之邃, 千里之遠, 乃欲憑數行文字, 慰諭爾奠接爾, 誠踈矣。 然敷心之謂言, 敷言之謂文, 文之所宣, 心有所感。 予雖否德, 爲爾父母, 心之所往, 亦豈無自然通應之(竗)〔妙〕 也? 賙活之具, 面授規畫, 蠲免之政, 另循優典, 御服御供之需, 留作別賑, 更以內帑錢二千緍、綿布一百疋、胡椒三十斗, 付御史齎送, 別貿穀物, 俾辦粥飯, 饋之於餞迓之際。 咨爾北民, 知予懷保之苦心, 少須臾各安其堵, 各守其業。 容俟東作, 服力田畝, 且勤且勸, 無失其時, 則上天至仁, 有願必從, 來牟之告熟, 理之常也。 咨爾北民, 明聽無譁。 爾饑若予饑, 爾飽若予飽, 爾困若予困, 爾安若予安。 予以爾, 與共休咎, 爾等縱不欲以予心爲心, 得乎? 呼燭申申, 亶由腔赤。 咨爾北方之人。

    命右議政蔡濟恭, 讀奏綸音。 上曰: "昔在先朝, 有語及民事, 涕自然下之敎。 承先朝五十年字恤之餘, 予雖欲泛看, 得乎? 綸音中爾饑猶饑, 爾寒猶寒, 卽予實心也。" 濟恭曰: "我聖上萬幾之中, 夙宵憂勤。 昨伏聞諸臣公退之後, 復召見北路別付料, 以至夜分不寐, 誠甚悶慮。" 上曰: "予則勞力不難, 惟勞心最難。 使生民奠安, 朝廷無傾軋之習, 則予雖勞力, 何害之有! 況再昨是大享日也。 先朝寶齡, 已躋八旬, 而將事之前, 未嘗就睡。 予豈可安寢乎?" 上謂御史鄭大容曰: "北關蠲減之節, 須便宜闊狹, 還穀之三分一及折半停退者, 民力若難辦, 則量宜裁減。"


    • 【태백산사고본】 26책 26권 18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9면
    • 【분류】
      왕실(王室) / 정론(政論) / 구휼(救恤) / 재정(財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