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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 26권, 정조 12년 7월 19일 기묘 3번째기사 1788년 청 건륭(乾隆) 53년

장용영이 새로 정한 향군 절목을 올리다

장용영이 새로 정한 향군 절목(鄕軍節目)을 올렸다. 【절목에 아뢰기를 "경기 산골 백성들이 지탱하기 어려운 폐단이 두 가지가 있는데, 그 하나는 봄에 꿩사냥하는 것입니다. 공인(貢人)들이 여름철에 날마다 바칠 꿩을 미리 준비하기 위해 경기 감영과 사옹원(司饔院)의 공문(公文)을 받아 내어 엽치군(獵稚軍)을 떠나 보내면 그 엽치군은 처자를 거느리고 촌락(村落)을 출입하면서 상부의 명령을 빙자해 토색질을 하고 도둑질과 약탈까지 하므로 한 번 이들이 지나간 곳은 마치 재난을 만난 것과 같습니다. 우리 성상께서 백성들의 이러한 고통을 깊이 염려하시어 공물(貢物)로 바치는 꿩을 잡는 사냥꾼을 특명으로 혁파하시고, 여름철에 바치는 꿩을 다른 것으로 대신 바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멧돼지를 사냥하는 한 가지 일에 있어서는 서울의 군문(軍門)과 외방(外方)의 경기 고을에서 반드시 납향(臘享) 10일 전에 맞추어 봉진(封進)하고, 사냥하는 곳도 반드시 동쪽으로는 지평(砥平)·양근(楊根)·가평(加平)이고 서쪽으로는 장단(長湍)·마전(麻田)·적성(積城)이기 때문에 사냥꾼이 반드시 산골에 사는 백성들을 징발해서 멧돼지 사냥 몰이꾼[獵猪驅軍]이란 이름을 붙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농민들로서 환곡과 미납한 구실을 함께 바쳐야 할 때를 당하여 또 힘을 쓰는 괴로움을 당합니다. 그런데도 아전과 하인을 시켜 성화같이 독촉하며 처자를 대신 가두기까지 합니다. 몰이꾼으로 징발된 사람들은 한 산을 에워싸고 수십 일 동안 짐승을 찾아 두루 돌아다니면서 수색하므로 가산을 탕진하고 이리저리 떠도는 신세가 됩니다. 그렇게 1, 2년을 지나는 사이에 열 집에 아홉 집은 빈 집이 되어버리니, 그 폐단이 엽치군보다 자못 심합니다. 그러므로 작년 겨울에 도신(道臣)에게 특명을 내리시어, 각 해당 고을에 분부해 몰이꾼들에게 식량을 넉넉하게 주어 사냥하도록 하라 하시고, 이어 경기 감영으로 하여금 명년부터 시작해서 본도에서 멧돼지를 사냥해 바치는 것을 꿩으로 대신 바치게 하시고, 이 밖에 경군문(京軍門)이 사냥할 때의 몰이꾼을 그들로 하여금 분명히 강구하여 폐단을 개혁하도록 하셨습니다. 대체로 이 수어청(守禦廳)의 둔아병(屯牙兵)은 쌀이나 바치는 군사에 불과하니 다른 군대에 비하면 그 비중이 가벼운 정도뿐이 아닙니다. 더구나 그 3사(司) 15초(哨) 중에 중초(中哨)의 3초는 중간에 폐하였다가 다시 설치한 것이니, 또한 그다지 중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훈국(訓局)의 보병 중에 중부(中部)를 금영(禁營)에 이속(移屬)하고 병조의 기병(騎兵) 중에 몇 당(當)을 정초청(精抄廳)에 이속하는 것은 고례(古例)에서 방증(傍證)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둔(屯)이 산과의 거리가 가장 가까우니 이곳의 백성으로 이곳의 군사를 만들어 이곳의 식량을 먹으면서 이 역(役)에 응하게 하여, 한편으로는 산골 백성들이 겨울에 사냥하는 폐단을 없애고, 한편으로는 옛사람이 군사일을 쉴 때는 농사에 힘썼던 뜻을 따랐습니다. 수어청의 둔아병 3초를 몰이꾼으로 환정(換定)하고, 해청의 둔전(屯田)을 향둔(餉屯)과 상환하여, 아병의 신미(身米) 및 둔세(屯稅)의 부족분을 모두 급대(給代)하게 하였습니다. 급대할 수효를 아래에 개록(開錄)합니다. 1. 수어청 15초의 둔아병 중에서 매초마다 25명씩을 줄여 본영의 좌·우·후(後) 세 초로 만들었습니다. 대개 이 수어청의 둔전이 관동에도 있고 호서에도 있지만, 경기에 있는 것만을 가지고 말할 것 같으면 본영이 설치한 둔전이 네 고을에 있는데, 지평(砥平) 한 고을을 제외한 나머지 세 고을에는 원래 둔아병의 명색이 없기 때문에 편의에 따라 둔전을 설치하고서 군병을 적당하게 헤아려 환정(換定)하였습니다. 광주(廣州)에는 세 둔에서 줄인 둔아병이 도합 75명인데, 이들은 모두 노군(奴軍)입니다. 그리고 이 고을에는 수어청이 관할하는 군교(軍校) 이외에 다른 명색이 없으니 실로 환대(換代)하기가 어렵습니다. 위에서 말한 75명은 이천(利川)에 있는 해청(該廳)의 우부(右部) 아병을 변통해 정액(定額)한 뒤에 남긴 수와 줄인 수는 책으로 만들어 해청 및 경기 감영에 이에 따라 거행하도록 하였습니다. 1. 지금 이 군병 3초 안에서 1백 54명은 지평, 50명은 양근, 50명은 가평, 1백 27명은 파주에 있는데, 이들을 합하여 초를 만들고, 뽑힌 군정(軍丁)은 아무 고을의 보인(保人)이거나 한정(閑丁)을 막론하고 모두 수어청에서 줄인 둔아병의 수에 따라 환정(換定)하였습니다. 1. 수어청은 1백 25명을 1초로 하였는데, 본영은 1백 27명을 1초로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매 초마다 부족한 수를 합하면 6명이 되는데, 지평과 파주에서 각각 2명씩, 양근과 가평에서 각각 1명씩을 순영(巡營)의 기수보(旗手保) 등 가벼운 역(役)에 종사하는 사람으로 편의에 따라 수를 채우도록 하였습니다. 1. 축령산(祝靈山)의 몰이꾼은, 산 북쪽은 양근의 몰이꾼 50명과 지평 산북리(山北里)의 몰이꾼 27명을 통합해서 날짜를 배정하고, 산 남쪽은 지평 북면(北面)의 몰이꾼 1초가 전담해 거행하도록 하였습니다. 1. 둔병은 바로 몰이꾼이므로 신미(身米)와 연역(煙役)을 특별히 견감(蠲減)해 주고, 상번(上番)은 해마다 1초가 동짓달 초하루부터 입번(入番)해서 이듬해 정월 초하루에 하번(下番)하는 것을 해마다 상례(常例)로 돌아가며 거행하도록 하였습니다. 1. 둔전답(屯田畓)은, 수어청에 이속한 지평에 있는 전답 중에서 묵은 것을 제외하고는 한전(旱田)이 70결(結) 45부(負) 4속(束)이고, 수전(水田)이 22결 92부 2속인데, 해청이 조세를 거둘 때 1부에 각곡(各穀) 1두 5승씩을 받기 때문에 백성들이 경작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금년부터 매부 1두로 정하면 벼가 1백 52석이고, 각 밭곡식이 4백 69석이며, 본청이 사들인 도지(賭地)로 벼가 15석이고, 무술년에 호조가 도로 조세를 내기로 하고 이속한 본군 북면에 있는 전답 중에서 묵은 것을 제외한 실지의 전답 11결 89부 4속에서 받는 벼가 2백 47석인데 6두를 기준으로 작미(作米)하면 98석이 됩니다. 각 밭곡식 4백 69석 안에서 9석 4두를 본색(本色)으로 상납하고, 나머지를 작전(作錢)하면 6백 90냥이 되는데, 이를 상하창(上下倉)과 시장(柴場)의 세전(稅錢) 및 산직(山直)의 신전(身錢)과 합하면 9백 36냥쯤 됩니다. 양근에 있는 훈련 도감에 이속한 시장의 세전과 본 고을에 이속한 화세전(火稅錢)을 합하면 4백 57냥이며, 가평군에 이속한 각종 시장과 화전(火田)의 대전(代錢)이 2백 41냥이고, 모경(冒耕)한 전답세의 대전이 2백 28냥이고, 방동(坊洞)의 모경한 화전에 대해 세금을 덜어준 것 중에서 이속한 것 및 호조에 이속한 자수(自首)한 가경전(加耕田)의 대전이 도합 1백 38냥입니다. 이상의 돈과 곡식을 각자 해당 고을에서 받아들여 세밑에 맞추어 본영에 상납하게 하여 상번군(上番軍)의 양료(糧料) 및 자보전(資保錢)으로 쓰기로 하였습니다. 1. 축령산의 동쪽과 서쪽은 모두 큰 마을들인데, 화전(火田)을 만들고 나무 베는 것을 그냥 내버려두면 벌거숭이산이 되기 쉽습니다. 그 곳에 살고 있는 군병 중에서 산지기 한 사람씩을 정하여 화전과 벌목(伐木)을 금하게 하되, 매년 교체시키기로 하였습니다. 용문산(龍門山)은 사면이 모두 사냥할 수 있는 곳이므로 근처에 사는 군병 중에서 각각 산지기 한 명씩을 정하여 벌목을 금하고 초목을 보호하게 하기로 하였습니다. 1. 지평에 있는 내수사(內需司)의 시장(柴場)은 이미 이속하였습니다마는, 시장의 산지기 20명은 그대로 차임(差任)하여 거행하도록 하였습니다. 양근과 가평에 있는 시장에도 산지기를 정하여 벌목을 금하고 초목을 보호하게 하기로 하였습니다. 1. 지평과 가평에 있는 이속한 전답 가운데 조세를 면제하여 총액을 줄인 것을 본 고을에서 책자를 만들어 순영(巡營)에 보고하고 순영에서 이 책자에 의견을 붙여 호조로 이송(移送)하여 상고하도록 하였습니다. 1. 장단·마전·적성 등 고을의 사냥을 하는 곳에는 군대를 두어야 마땅하나, 세 고을의 경내에는 이미 둔전할 만한 곳이 없으므로, 그곳과 가까운 파주에 둔전을 설치해 군대를 두기로 하고, 외군(外軍) 3초 중에 2초는 동쪽 산골 세 고을에서, 1초는 파주의 동쪽과 서쪽에서 뽑아 정하도록 지금 이미 단속하였습니다. 파주 운천면(雲泉面)에 있는 방영(防營)의 둔전토(屯田土) 실수(實數) 30결 54부 6속인 것을 본영에 이속시켜 적당히 헤아려 세액 총수를 정하기로 하였습니다. 1. 방산(方山)과 현암(絃巖) 일대를 수호해서 벌목을 금지하고 산림을 기르는 것은 전과 같이 거행하여, 금령을 범하고서 나무를 베는 자가 있으면 본 고을에서 조율(照律)해서 중하게 다스리기로 하였습니다. 1. 서울과 지방의 5초의 초관(哨官)은 천주(薦主)가 있는 출신(出身) 세 사람과 천주가 없는 출신 두 사람을 본영에서 각별히 골라 의망(擬望)하여 서울이나 지방의 자리를 막론하고 2년씩 돌려가며 차임하기로 하였습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6책 26권 2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1면
  • 【분류】
    군사(軍事) / 재정(財政)

○壯勇營, 進《新定鄕軍節目》 【節目。 畿甸峽民難支之弊, 有二。 一, 則春間之獵雉也。 貢人輩爲備夏月日供之雉, 受出畿營及饔院公文, 發遣獵雉之軍, 而載率妻子, 出沒村閭, 憑藉討索, 偸竊奪掠, 一番輕過, 如値災荒。 惟我聖上, 深軫此民隱, 貢物獵雉之軍, 特命革罷, 夏月供上之雉, 仍令代封, 而至於臘猪一事, 京而軍門, 外而畿邑, 必也趁臘前十日封進, 而行獵之地, 必於東之砥、楊、加, 西之湍、麻、積等地, 故行獵之軍, 必發山峽居民, 名之曰獵猪驅軍, 而俱是農民, 方當糴逋幷納之際, 又被勞筋之苦。 乃使吏隷火督, 妻子替囚。 甚至環一山而遍行, 積屢旬而窮搜, 蕩析家産, 輾轉流離, 一年二年, 十室九空, 其爲弊, 殆有甚於雉軍。 故昨冬特命道臣, 分付各該邑, 優給驅軍糧資, 使之行獵, 仍令畿營, 自明年爲始, 本道臘猪, 以雉代封。 外此, 京軍門行獵驅軍, 使之劃卽革弊。 蓋此守禦廳屯牙兵, 不過是納米之軍, 視他軍伍, 不啻輕歇, 而況其三司十五哨中, 中哨、三哨, 則中廢而復設, 亦可知其無甚關係。 訓局步軍移屬中部於禁營, 兵曹騎兵移屬幾當於精抄廳, 此古例之可以傍援者。 且其該屯距山最近, 以此民而作此軍, 食此土而應此役, 一以替峽民冬行獵之弊, 一以寓古人兵寓農之意。 守禦屯牙兵三哨換定驅軍, 該廳屯田以餉屯相換, 而牙兵身米及屯稅不足者, 竝令給代。 給代數爻, 開錄于左。 一, 守禦廳十五屯牙兵, 每哨減額二十五名, 作爲本營左、右、後三哨。 蓋此守屯, 或在關東, 或在湖西, 以畿內言之, 本營設屯在於四邑, 而砥平一邑外其餘三邑, 元無屯牙兵名色, 故屯田從便設置, 軍兵推移換定。 廣州則三屯所減屯牙兵, 合爲七十五名, 而俱是奴軍。 且此該邑守禦廳所管軍校外, 無他名色, 實難換代。 上項七十五名, 則以利川所在該廳右部牙兵移額後, 存減之數, 成出冊子, 該廳及畿營, 依此擧行。 一, 今此軍兵三哨內, 一百五十四名砥平, 五十名楊根, 五十名加平, 一百二十七名坡州, 合爲作哨, 被抄軍丁, 則無論其郡保與閑丁, 皆以守禦屯牙兵減額者, 依數換定。 一, 守禦廳以一百二十五名爲一哨, 本營以一百二十七名爲一哨, 故每哨不足, 合爲六名。 以砥平、坡州各二名, 楊根、加平各一名, 以巡營旗手保等歇役, 從便充數。 一, 祝靈山驅軍, 則山之北, 以楊根軍五十名, 砥平 山北里軍二十七名, 通融排日, 山之南, 砥平北面軍一哨, 專當擧行。 一, 屯兵, 係是驅軍, 身米、烟役特爲蠲減, 上番則每年一哨, 至月初一日爲始入番, 翌年正月初一日下番, 歲以爲常, 輪回擧行。 一, 屯田土, 則砥平所在守禦廳移屬田土, 除陳荒外, 旱田爲七十結四十五負四朿, 水田爲二十二結九十二負二朿, 該廳收稅時, 每負捧各穀一斗五升, 故民不願耕。 自今每負定以一斗, 則租爲一百五十二石零, 田各穀爲四百六十九石零, 本廳買得賭地租爲十五石零, 本縣北面所在戊戌年戶曹還出稅移屬田土, 除陳荒外, 實田土十一結八十九負四朿, 租二百四十七石零, 依準折六斗作米, 爲九十八石零。 田各穀四百六十九石零內, 九石四斗本色上納, 其餘作錢, 則假令爲六百九十兩零, 合下倉柴場稅錢及山直身錢, 可爲九百三十六兩零。 楊根所在訓鍊都監移屬柴場稅錢、本官移屬火稅錢合四百五十七兩零, 加平郡移屬各樣柴場火田代錢二百四十一兩, 冒耕田土稅條代錢二百二十八兩零, 坊洞冒耕火田減稅中移屬者及戶曹移屬自首加耕田土代錢, 合一百三十八兩零。 以上錢穀, 各自該邑收捧, 趁歲前, 上納本營, 以爲上番軍糧料及資保錢。 一, 祝靈山東西, 皆大村, 或火或斧, 易致赭濯。 所居軍兵中, 各定山直一名, 禁火禁伐, 每年交遞。 龍門山四面, 皆可獵之處, 近處所居軍兵中, 各定山直一名, 禁養。 一, 砥平所在內需司柴場, 今已移屬, 柴場山直二十名, 仍差擧行。 楊根、加平所在柴場, 亦爲定山直禁養。 一, 砥平、加平所在移屬田土免稅減總者, 自該邑修成冊, 報巡營, 粘移戶曹憑考。 一, 長湍、麻田、積城等邑行獵之處, 宜有置軍之擧, 而三邑境內, 旣無可合屯田, 就其傍近坡州設屯置軍, 外軍三哨內, 二哨東峽三邑, 一哨坡州東西抄定, 今已團束, 而坡州 雲泉面防營屯田土, 實數爲三十結五十四負六朿, 移屬本營, 量宜定摠。 一, 方山一岡絃巖一洞守護禁養, 依前擧行, 如有犯斫者, 本官照律重勘。 一, 京外五哨哨官, 以有薦出身三人, 無薦出身二人, 自本營另擇擬望, 而京鄕窠間, 二年輪差擧行。】


  • 【태백산사고본】 26책 26권 2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1면
  • 【분류】
    군사(軍事) / 재정(財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