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림 장 최정봉의 병사에 관한 상언에 대해 병조에서 살펴 아뢰다
우림 장(羽林將) 최정봉(崔挺鳳)이 상언(上言)해 병사(兵事)를 논하니, 상이 병조로 하여금 그를 불러 물어보고서 논계하라 하였다. 병조가 아뢰기를,
"최정봉을 불러 자세히 물어보았습니다. 그가 상언한 여러 조항에 제1조는 성을 지키는 여러 절목(節目)인데, 그의 ‘5타(垜)건 10타건, 1천 치(稚)건 1백 치건 간에 몇 사람에게 분담(分擔)시킬 수 있으니 형편을 헤아려 기계를 설치한다.’는 것이 말은 근리한 것 같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병가(兵家)의 여러 설을 주워 모은 것으로 난잡하여 조리가 없으며, ‘흥인문(興仁門)부터 남산까지 밖에는 해자(垓子)를 파고 안에는 우마장(牛馬場)을 마련한다.’는 것도 사리에 맞지 않습니다. 도성(都城)은 산에 의지해 성을 쌓았으니, 성밖에는 평평한 곳이라 하더라도 지형의 높낮이가 고르지 않아 해자를 설치하기가 어렵고, 성안에는 성에 가까운 곳까지 모두 민가(民家)인데 어떻게 우마장을 마련할 수 있습니까. 그 다음은 오군문(五軍門)이 사면을 나누어 지키는 방책인데, 분배(分排)한 바가 엉성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삼문(三門) 밖까지 8강(江)의 백성들이 나누어 지키게 한다고 한 것은 더더욱 말이 안됩니다. 성안 백성은 혹시 성에 의지해 지킬 수도 있겠으나, 성밖 백성들에게는 이미 방어할 성이 없는데 어떻게 나누어 지킨다는 말입니까. 아무 수령(守令)이 와서 아무 지정된 곳을 지킨다는 것은 이는 임시해서 구분해 정할 일이므로 미리 헤아릴 수 없습니다.
제2조는 총군(摠軍)의 액수(額數)를 지켜 적을 제압하고 승리하는 일인데, ‘큰 나라는 3군(軍)이고 작은 나라는 1군이다. 1군이 바로 1만 5천 5백 인인데 우리 나라는 서울에 기르는 군사가 5천여 명에 불과하다.’ 하였습니다. 옛날에 병법(兵法)을 논한 자가 병사를 농사 속에 붙여두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 하였으니, 허다한 농민이 언제 모두 도성 안에 와서 있을 때가 있었습니까. 그가 인용한 제(齊)나라, 한(韓)나라 등의 설은 더욱 맞지 않습니다. 제나라, 한나라 군사는 온 나라 안에 있는 군사를 들어 말한 것이지 어찌 모두 다 도성 안에 와 있다는 것을 말한 것이겠습니까. 군사를 기르는 데 필요한 예산에 대해서는 저도 마련해 낼 계책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곧 장례원(掌隷院), 귀후서(歸厚署)를 혁파하여 그 관사(官司)의 이례(吏隷)들에게 주던 요포(料布)로 군사 예산에 충당하고자 하였으니, 실로 한 번 웃을 가치조차 없습니다. 또 각 군영(軍營)과 고을의 군향환모(軍餉還耗)를 양군문(兩軍門)103) 에 상납하여 요포에 충당하고자 한다 하였습니다. 영(營)과 진(鎭)의 환모(還耗)는 해마다 회록(會錄)해서 흉년을 대비하는 밑천으로 삼고 있으며 장사(壯士)들의 급료를 전적으로 이에 의지하고 있는만큼 어떻게 경영(京營)에 이납(移納)할 수가 있겠습니까. 국가에서 오군문을 설치한 데에는 각기 뜻이 있는데, 지금 향군(鄕軍)을 다 혁파하여 모두 경군(京軍)으로 삼는다면 이는 당초 설치한 본의가 아닙니다.
제3조는 남북으로 적을 막는 일인데, 그의 말에 ‘남북 양로(兩路)에 열 개의 관(關)이나 혹은 다섯 개의 관을 설치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가령 적의 침입이 있더라도 한 관이 격파됨에 또 한 관이 있어 모두 열 개의 관이 격파된 뒤에야 비로소 도성에 당도할 수 있으니, 이것이 만전(萬全)의 계책이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관을 설치할 곳에 대해 물었더니, 그가 이른바 조령(鳥嶺)·죽령(竹嶺)·통령(洞嶺)·철령(鐵嶺)을 한 곳도 직접 보지 못했고 다만 다른 사람들이 전하는 말만을 들었을 뿐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저가 어찌 감히 보지도 못한 일을 가지고서 함부로 지존(至尊) 앞에 진달(陳達)한단 말입니까. 강줄기의 배가 건널 수 있는 곳에 철삭(鐵索)을 설치한다는 등의 말도 옛사람들의 설을 답습한 데 불과하고, 또 그가 금갑 도영(金甲島營)의 영장(營將)으로 나아갈 때 본수(本帥)와 만나 상의하였다고 하였으나, 처음부터 한 가지 일도 수리 거행한 자취가 없으니, 언행이 일치하지 않고 한갓 능력만 과시하는 자입니다. 그리고 또 구관(舊官)에서 군기(軍器)를 수리 개선한 것을 언급하여 마치 찬양하듯이 하였으니 외람됨이 심합니다.
제4조는 세 계책의 총론으로 별로 신기한 의논이 없고 단지 위 세 조항을 부연해 말한 데 불과합니다.
제5조는 무비(武備)에 관한 총론으로 17단락으로 나누었는데, 제1단(段)은 시민(市民) 및 각사(各司)의 이속(吏屬)을 모두 군적(軍籍)에 편입시켜 요포(料布)는 주지 말고 다만 조련(操鍊)에만 참여시킨다는 것이고, 제2단은 승호법(陞戶法)104) 을 없앤다는 것이고, 제3단은 각청(各廳)에 요사(料射)105) 를 혁파한다는 것이고, 제4단은 경영(京營)과 외영(外營)에 입직군(入直軍)을 다시 정한다는 것이고, 제5단은 예차 금군(豫差禁軍)106) 에게 일체로 반록(頒祿)할 데 대한 일이고, 제6단은 금군의 겸대(兼帶)를 없앤다는 것이고, 제7단은 각영의 잡색(雜色)을 줄여 원군(元軍)을 늘린다는 것이고, 제8단은 홀기(忽記) 익히는 것을 한결같이 간편하게 정하여 중외 각영에 반포한다는 것이고, 제9단은 군문(軍門)에서 홀기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자를 여러 번진(藩鎭)으로 나누어 보내어 교련시킨다는 것이고, 제10단은 5영에서 철차(鐵車)를 많이 만든다는 것이고, 제11단은 궁노(弓弩)를 많이 만든다는 것이고, 제12단은 성을 지키는 기계는 반드시 척법(戚法)107) 에 따라 만든다는 것이고, 제13단은 목창(木槍)·목전(木箭)·편곤(鞭棍)을 없앤다는 것이고, 제14단은 검(劍)·창(槍) 등 여러 병기에 외식(外飾)을 금하고 날을 세운다는 것이고, 제15단은 궁시(弓矢)는 무디고 무른 것을 버리고 단단하고 예리한 것을 취한다는 것이고, 제16단은 유기편(柳騎片)108) 을 원시(原試)의 규정으로 영정(永定)한다는 것이고, 제17단은 내용에 힘쓰고 형식을 버린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이 자질구레하여 별로 취할 만한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저가 스스로 40여 년 동안 품은 뜻을 펴지 못했다 하여 마치 평소에 품은 경륜을 드러낼 길이 없었던 듯이 말하였습니다. 가령 저가 참으로 경륜의 뜻이 있었다면 재작년 조참(朝參) 때 시위(侍衛)했던 금군들이 품은 뜻을 글로 써서 올리지 않은 자가 없었는데, 저는 어찌하여 그때에는 한 마디도 진달하지 않다가 지금에 와서야 상언(上言)한단 말입니까. 또 그의 신수(身手)의 내력도 별로 말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지식으로 말하면 저로 하여금 이 상언한 것을 읽으라 하면 겨우 문세(文勢)를 통할 뿐이고, 기예로 말하면 나이가 70이 넘어 힘이 이미 쇠하였습니다. 이런 외람한 무리를 만약 엄하게 징벌하지 않으면 상언해 요행을 바라는 무리가 연이어 일어날 것이니, 최정봉이 띠고 있는 금군의 직임을 파면하시고 해조로 하여금 조율해 엄히 처단하게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사람은 비록 미천하지만 말은 말이다. 말이 쓸 만하지 않으면 버리면 되지 죄줄 필요까지야 있겠는가. 거론하지 말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5책 25권 43장 A면【국편영인본】 45책 703면
- 【분류】군사(軍事)
- [註 103]양군문(兩軍門) : 훈련 도감과 어영청.
- [註 104]
승호법(陞戶法) : 공사천(公私賤)에 속하는 자들을 양민(良民)으로 승적시키는 법.- [註 105]
요사(料射) : 급료를 주기 위해 실시하는 무예 시험.- [註 106]
예차 금군(豫差禁軍) : 금군 이외에 미리 뽑아 두는 예비 금군(豫備禁軍).- [註 107]
척법(戚法) : 명(明)나라 장수 척계광(戚繼光)이 지은 《기효신서(紀效新書)》에 실려 있는 법을 가리킴.- [註 108]
유기편(柳騎片) : 유는 유엽전(柳葉箭), 기는 기사(騎射), 편은 편전(片箭)을 이름. 이는 모두 무과(武科)를 보일 때 시험하는 무예(武藝)임.○羽林將崔挺鳳上言論兵事。 上令兵曹, 招問論啓。 兵曹啓言:
"招致挺鳳詳問。 則上言諸條, 第一條, 守城諸節。 其曰: ‘五垜十垜、千雉百雉, 可分幾人, 量置機械。’ 言若有理, 實則掇拾兵家諸說, 雜而無倫。 自興仁門及于南山外設垓子內, 備牛馬場云者, 不成事理。 都城依山爲城, 雖城外平衍處, 高下不均, 旣難設垓, 城內附近處, 俱是民家, 則豈可備牛馬場乎? 其次, 卽五軍門四面分守之策, 其所分排, 不但踈略, 至於三門外, 八江之民, 各自分守云者, 尤不成說。 城內之民, 或可以依城自守, 城外之民, 旣無防限, 則將何以分守乎? 至若某守令之來守某信地, 此係臨時區劃, 不可預度矣。 第二條, 守摠軍制事, 則大國三軍, 小國一軍, 而一軍, 卽一萬五千五百人, 我國都下養兵, 不過五千餘數云, 而古之論兵者, 莫過於寓兵於農, 許多農民, 何嘗盡在於都城之內乎? 其所引齊國、韓國之說, 尤不襯着。 齊、韓之兵, 擧一國而言, 何嘗盡在於都城之內乎? 至於養兵之需, 渠亦辦出無計。 乃以掌隷院、歸厚署, 一二罷司之吏隷料布, 欲充其數, 誠不滿一笑。 又欲以各營邑軍餉還耗, 上納於兩軍門, 以充料布云, 而營鎭還耗, 逐年會錄, 以作備荒之資, 將士支放, 專賴於此, 則亦何可移納於京營乎? 且國家之設置五軍門, 各有意義, 今若悉罷鄕軍, 竝置京軍, 此非當初設置之本意。 第三條南北禦敵事, 其言南北兩路, 當置十關或五關。 如有緩急, 纔破一關, 又有一關, 竝破十關, 然後方到都城, 此爲萬全之策云, 而問其當置之處, 則所謂烏竹、洞鐵, 一不目見, 只聞他人之傳說爲對。 渠何敢以所不見之事, 妄陳於至尊之前乎? 至於沿江船渡處, 設置鐵索等說, 不過蹈襲古人之說, 且其出鎭金甲時, 稱以面議于本帥云, 而初無一事修擧之跡, 則言實不同, 徒欲衒能。 又言及舊官, 軍器修改, 有若褒嘉者然, 猥越莫甚。 第四條, 三策摠言, 別無神奇之論, 不過上三條之敷衍說去者。 第五條, 武備摠說事, 則分爲十七段, 而其第一段, 乃是市民及各司吏屬, 皆編軍籍, 不給料布, 只參操鍊。 第二段, 除陞戶法。 第三段, 罷各廳料射。 第四段, 更定內外入直。 第五段, 預差禁軍, 一體頒祿。 第六段, 禁軍除其兼帶。 第七段, 減各營雜色, 而增元軍。 第八段, 習操笏記, 一體刊定, 頒布中外各營。 第九段, 軍門熟諳笏記者, 分送諸藩而敎鍊。 第十段, 五營多作鐵車。 第十一段, 多作弓弩。 第十二段, 守城器械, 必用戚法。 第十三段, 除木槍、木箭、鞭棍。 第十四段, 劍、槍衆器, 禁外飾, 而礪鋩刃。 第十五段, 弓矢除鈍脆, 而取堅利, 第十六段, 柳騎片, 永定原試規。 第十七段, 務實去文。 其言零零瑣瑣, 不但別無可取, 自以爲四十餘年有志未伸, 有若素抱經綸, 無路自暴者然。 假令渠眞有經綸之志, 再昨年朝參時, 侍衛禁旅, 莫不書進所懷, 渠獨何不於此時, 一言陳白, 今乃投呈上言乎? 且其身手來歷, 別無可言。 識解則使渠讀其上言, 謹通文勢, 技藝則年過七十, 膂力旣愆。 此等猥濫之類, 若不嚴懲, 則上言希望之類, 將見接跡而起。 請崔挺鳳所帶禁軍之任, 汰去。 令該曹照律嚴處。
敎曰: "人雖卑微, 言則言也。 不可用, 則置之可也, 何必從而罪之。 其寢之。"
- 【태백산사고본】 25책 25권 43장 A면【국편영인본】 45책 703면
- 【분류】군사(軍事)
- [註 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