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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 25권, 정조 12년 1월 23일 병술 3번째기사 1788년 청 건륭(乾隆) 53년

언로의 개방·과거의 개혁·재정의 충실·서원의 폐해·기강과 풍속의 진작 등을 논한 장령 오익환의 상소

장령 오익환(吳翼煥)이 상소하기를,

"언로(言路)가 막힌 것은 하루아침의 일이 아닙니다. 벼슬에 연연하는 마음이 많은데다 나서기를 꺼리는 풍습에 젖었으니, 말을 하지 않는다는 꾸짖음이 효과가 없는 것이 당연하고, 바른말을 하라고 하는 전교가 신뢰를 받지 못하는 것이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고질적인 폐단을 들어 그 한두 가지를 논하면 시론(時論)이 무너진 것이 첫째이고 견제당하는 것이 두 번째 문제입니다.

무엇을 일러 시론이 무너졌다고 하느냐 하면,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귀를 거스리는 말에 대한 노여움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으시고 비위를 거스린 데 대한 꾸짖음을 사람에게 내리신 적이 없으셨는데도, 신하들은 망령되이 스스로 의심하고 기가 꺾여 오직 구차하게 비위 맞추기만을 일삼습니다. 어쩌다가 기휘(忌諱)에 저촉되는 한 마디를 하면 친척은 망발(妄發)했다고 탓하고 조정은 일을 만든다고 하며 심지어 전조(銓曹)는 그를 다시 의망하지 않는 등 온 세상이 모두 그를 버린 사람으로 지목합니다. 진실로 충의(忠義)를 천성으로 타고 나서 기개(氣槪)와 절개(節介)가 세상에서 뛰어난 사람이 아니라면 모두 전하께 얼마 되지 않는 녹을 받아 자기 처자를 부양하려 들지 누가 경솔히 무익한 미친 말을 하여 시론에 버림받는 짓을 하려 하겠습니까.

무엇을 일러 대간이 견제당한다고 하느냐 하면, 옛날의 간신(諫臣)은 임금을 지척(指斥)하고 재상을 꾸짖으며, 임금이 물리쳐도 물러가지 않고 천자가 사과시켜도 사과하지 않았으니, 어찌 간신의 체통에 대한 조례(條例)를 정해 책으로 만든 일이 있었습니까. 그런데 지금은 대간이 한 마디만 저지당해도 즉시 피혐하고, 대신(大臣)이 물러난 뒤에는 품고 있는 생각을 진술하는 것마저 허락되지 않으며, 조금이라도 거스림이 있으면 생소(生疏)한 자라고 배척합니다. 그러나 생자(生者)는 기휘(忌諱)할 줄 모르고 소자(疏者)는 영합(迎合)할 줄 모르니, 간신은 생소하지 않을까가 오직 두려울 뿐인데 어찌 생소하다 하여 배척합니까? 이 때문에 안으로 시론을 두려워하고 밖으로 대체(臺體)에 구애되어 온 세상이 시대의 조류(潮流)에 따라 흘러가 종일 동안 시키는 대로 순종할 뿐이니, 실로 세상을 다스리는 아름다운 일이 아니라 나라를 망치는 더러운 풍속입니다.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들의 말에 임금된 자가 오직 내가 말을 하면 모든 사람이 감히 내 말을 어기지 않는 것을 낙으로 삼는다는 말이 있으니, 이 한 마디 말이 나라를 망치는 데 가깝지 않겠는가.’ 하셨고, 자사(子思)가 말하기를 ‘임금의 국사(國事)가 날로 잘못되고 있다. 임금이 말을 내고서 스스로 옳게 여기면 경대부(卿大夫)들이 감히 그 잘못을 바로잡지 못한다.’ 하였고,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안으로 법도를 지켜 바른길로 인도하는 세가(世家)와 보필하는 신하가 없으면 나라는 항상 망한다.’ 하였으니, 성인께서 전하신 경계는 그 이치가 반드시 징험(徵驗)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하의 말씀을 어기는 자가 누구이며 바로잡는 자가 누구입니까? 누가 법가이고 누가 필사입니까? 위망(危亡)의 징조가 여기에 있는데도 상하가 모두 습속에 젖어 으레 그런 것으로 여기는 것이 저와 같으니, 생각이 이에 미치매 진실로 한심합니다.

유약(柔弱)한 무리들이 함부로 임금의 생각을 헤아려 ‘임금은 오직 간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니 간하면 축출을 면치 못할 것이고, 임금은 오직 거스리지 않기를 바랄 뿐이니 거스리면 주벌(誅罰)을 면치 못할 것이다.’ 하여 돌려가며 서로 고하고 경계하는데도 그들을 알아듣도록 깨우칠 방법이 없습니다. 신이 일찍이 마음에 지극히 원통하여, 충직(忠直)한 사람을 신중히 골라 간쟁(諫諍)의 자리에 채우고, 시론(時論)을 개혁하여 대체(臺體)를 다 제거하며, 임금도 자신을 반성하고 정성을 미루어 허물을 들으면 반드시 기뻐하고, 구언(求言)의 전교를 번거롭게 여기지 말고 자꾸 내려 바른말을 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우리 나라는 팔도가 태평하여 백 년 동안 우환이 없었는데 어찌하여 난신 적자가 나오지 않는 해가 없는 것입니까. 지금 전하께서 난신 적자를 다스리시면서 매양 용서하는 마음으로 화근을 그냥 두시어 도리어 의심과 틈을 만드셨으니, 화를 기르고 환란을 남기는 것에 대해 사려를 철저히 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대간이 입궐해 아뢰고자 하면 정원은 패초를 청하고, 전계(傳啓)함에 미쳐서는 ‘윤허하지 않는다.’고 하시어, 일이 마치 예에 따라 처리되는 것 같아 하나의 형식이 되고 말았습니다. 전하께서 지극히 문명한 시대에 처하시고 태평의 형세를 타셨으니 사소한 일들까지 형식을 버리고 진실을 힘쓰셔야 합니다. 오늘의 일 중에 징토(懲討)보다 더 큰 것이 없는데, 이것까지 형식적으로 처리하는 데 불과하니, 나라에 위험이 없기를 바란들 어찌 되겠습니까. 신이 바라건대 전하께서 형벌을 사용할 때를 기다려 모든 적을 다 잡아다가 당률(當律)로 처단하고 다시 용서하지 않으시면 난(亂)의 뿌리가 영원히 끊어져서 나라에 남아 있는 근심이 없을 것입니다.

오늘날 국가에서 믿는 이가 누구입니까. 구경(九卿)이 자리를 채우고 백료(百僚)가 관직에 있으나, 그들의 행적을 가지고 찾아보면 실로 쓸 만한 인재가 없습니다. 인재가 없는 근심이 당장의 근심은 아니지만, 가령 국경에 분쟁이 생겨 진격의 북을 울리게 된다면 현재 반열(班列)에 있는 군관(軍官) 중에 누가 장군이 될 만한 자이며, 또 이웃 나라가 흔단을 만들어 꾸짖는 말이 이른다면 조정에 가득한 관원들 중에 누가 사신(使臣)이 될 만한 자입니까. 세상 운세가 형통하여 태평하고 성스럽고 밝으신 전하께서 임금의 자리에 계시니, 신이 근심하는 바와 같은 일은 절대로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치란(治亂)은 서로 갈마들고 안위(安危)는 일정하지 않은 것이니, 평소에 인재를 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변화에 대응할 수 있겠습니까.

대체로 인재를 구하는 도리는 오직 정성을 다하기를 힘쓸 뿐이고, 사람을 등용하는 방법은 반드시 적재(適材)를 적소(適所)에 쓰는 것을 귀하게 여깁니다. 정성을 다하지 않기 때문에 얻은 인재가 정미롭지 못하고, 적재를 적소에 쓰지 않기 때문에 임용된 자가 그 직에 맞지 않습니다. 과거로 선비를 취하는 것이 본래 상책(上策)이 아니지만, 기재(奇才)·석인(碩人)이 대개 이 과거를 말미암아 등용되었습니다. 지금 과장(科場)에서 시험하는 시(詩)·부(賦)·표(表)·책(策)으로는 가령 그 무리에서 뛰어난 자를 뽑는다 하더라도 반드시 모두 현재(賢才)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선비를 취하고 있으니, 구하기를 어찌 정성스레 하지 않으며 상고하기를 어찌 정미롭게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즉위하신 초기에는 과조(科條)를 엄하게 세워 선비들이 모두 가다듬고 힘썼으므로 과방(科榜)이 발표될 때마다 사람들의 마음을 승복시켰습니다. 그때 급제한 사람들의 문학이나 식견을 논할 것 같으면 모두 실재(實才)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오래되자 처음의 의도가 이어지지 못하였습니다. 한 달 걸러 보이는 순제(旬製)028) 는 대부분 집에 있으면서 지어 올린 것인데도 크게는 혹 외람되이 급분(給分)을 받기도 하고 작은 경우에는 도기(到記)가 찼다 하여 직부(直赴)를 허가하니, 비록 은혜를 미루어 넓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일은 실로 상도를 벗어났습니다. 3년마다 실시하는 대비(大比)는 시권(試券)의 수가 적은 경우에도 1만 장에 가까운데, 유사가 점수를 매기는 일은 며칠이면 끝나고, 상이 친림해서 선비를 시험하는 데는 탁방(坼榜)이 더욱 빨라, 우열을 따지지도 않고 시권마다 외(外) 자를 쓰고는 운명으로 돌립니다. 전하께서는 시관(試官)이 하는 대로 일임해 두고 검칙하지 않으시며 가령 잘못이 있을 경우에도 운명이라고 하십니다. 임금의 처지에서는 운명을 말해서는 안 되는데, 어찌 전적으로 운명에 가탁하여 인재의 진출을 막아서야 되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인재들을 뽑아 쓰심에 있어 그 사람의 그릇은 헤아리지 않고서 한 마디 말이 마음에 들면 유능하다 하며, 허실(虛實)을 따지지 않고 한 가지 일이 비위에 거스리면 허물로 삼아 충사(忠邪)를 살피지 않으십니다. 세록 고가(世祿故家)의 진신 자제(縉紳子弟)들은 문음(門蔭)으로 벼슬에 올라 모두 연한(年限)에 따라 승급(陞級)해서 마침내 고을을 다스리게 하지만, 과거에 급제한 사람은 도리어 순자(循資)029) 의 규정이 없으므로 진실로 문지(門地)가 망족(望族)이거나 현직(顯職)에 통망(通望)된 사람이거나 줄을 댈 길이 있는 사람이 아닌 경우는 모두 버려지고 다시 수용(收用)되지 않으니 설령 재주가 있다 하더라도 장차 어디에 쓰겠습니까.

신이 생각건대 붕당의 폐습은 본디 색목(色目)이 있으나, 말세의 다툼은 오직 편파(偏頗)에 있을 뿐이니, 오늘의 걱정은 색목에 있지 않습니다. 조정에서 일찍이 한쪽 편 사람만을 전용(專用)하므로 한쪽 편 사람 중에 또 완준(緩峻)의 구별이 생겼고, 한 가문(家門) 사람에게 위임하므로 한 가문 사람 중에 대소(大小)의 호칭이 일어나서 각각 도당(徒黨)을 나누어 서로 원수처럼 봅니다. 그러나 이 폐습을 제거하는 방법은 대공(大公)만한 것이 없습니다.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 각자 분수를 편안히 여긴다면 비록 색목이 있다 하더라도 누가 감히 당사(黨私)하겠습니까. 전하께서 뜻은 물정(物情)을 진정시키는데 두고, 정사는 당을 제거하기를 힘쓰셨으나, 당을 제거한다는 것이 도리어 억제(抑制)에 가깝고 물정을 진정시킨다는 것이 간혹 포용(包容)에 치우치셨습니다. 포용이 지극하다보니 호오(好惡)에 정성이 부족하여 반측(反側)의 흔단이 대부분 성은을 입은 존귀한 사람 사이에서 생겼고, 억제가 지나치다 보니 거조(擧措)가 이치에 어긋나서 당로(當路) 사이에 세리(勢利)의 다툼을 막을 수 없습니다. 만약 실효를 바란다면 어찌 근본으로 돌아가지 않으십니까.

공(公)만이 오직 사(私)를 없앨 수 있고 명(明)하여야 의혹되지 않는 것이니, 조리(條理)가 있는지 허위는 없는지를 종합해 따져, 의사(疑似)를 반드시 분변하시면 성의가 서로 미덥게 되어 헐뜯고 다투는 풍습이 없어질 것이며, 사정(邪正)이 각각 제 자리를 얻으면 현자(賢者)와 능자(能者)가 벼슬자리에 앉아 쟁탈(爭奪)의 풍속이 종식될 것입니다.

신이 듣건대 재물을 쓰는 데 도가 있으니 반드시 먼저 수입(收入)을 헤아리는 것이고, 재물을 저축하는 데 방법이 있으니 비용을 줄이는 것만한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변방에는 군량(軍糧)을 운송하는 일이 없고, 국중(國中)에는 버려둔 토지가 없어 재물을 생산하는 길이 실로 전보다 넓어졌는데도, 해마다 경비가 부족한 실정입니다. 국가의 지나친 경비가 본래 용병(冗兵)030) 에 있으므로 금위(禁衛)를 병조에 소속시키고 수어청과 총융청을 혁파하여 경군(京軍)에 소속시켜야 한다는 것을 전후의 조신(朝臣) 중에 말한 자가 진실로 많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또 장용위(壯勇衛)를 설치하셨으니, 그 요포(料布)를 계산한다면 어찌 적다고 하겠습니까. 안으로는 금군(禁軍)과 무예청(武藝廳)이 있고 밖으로는 오영(五營)의 장졸(將卒)이 있어, 빠진 곳 없이 빙 둘러 호위하여 방비가 매우 견고한데, 전하께서는 무엇 때문에 필요없는 이 장용위를 만들어서 경비를 지나치게 허비하는 길을 넓히십니까.

지금 친히 거둥하시어 선비들을 시험하실 적에 상을 내리심이 정도에 지나치십니다. 군포(軍布)와 대동미(大同米)가 백성들에게서 나오는 것이니, 친시(親試)에 상격을 비록 폐할 수는 없으나, 백성의 고혈을 어찌 허다한 곳에 써서야 되겠습니까. 근년 이래로 궁궐을 수리하고 지붕을 이는 일을 점진적으로 진행하므로 피해가 백성들에게 미치지는 않았으나, 궁액(宮掖) 사이에 도장(塗裝)이 일신되었고 거리에 재목과 석재(石材)가 아직까지 남아 있으니, 만약 전후의 경비를 계산한다면 노대(露臺)031) 보다 몇 갑절이 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이 몇 가지만을 들더라도 유를 미루어 증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일들을 날마다 없애기를 구한다면 작은 것이 쌓여 많아질 것이니 어찌 재정(財政)이 궁핍할 염려가 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영특하신 지혜로 아랫사람을 어거하시어 형벌과 은혜를 마음 내키는 대로 하시므로 공로를 보답함이 분수에 지나침이 많고 허물을 책망하심이 간혹 너무 잦은 데 가까우십니다. 나라에 경하(慶賀)스러운 일이 있을 때 도감(都監)을 설치하여 잠시 집사(執事)의 열에 끼었던 무리들이 갑자기 등급을 뛰어넘어 승진하는 상을 받으므로 드디어 공이 없는 무리들로 하여금 빨리 출세하는 길을 생각하게 하여, 과거에 출신한 자들이 좋은 관직과 높은 자급을 단걸음에 도모할 수 있고, 음사(蔭仕)로 출발한 자들이 육품 사송(六品詞訟)032) 을 단시일에 얻을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얻은 자는 공로를 바치는 데 힘쓰지 않고 얻지 못한 자는 스스로 격려하는 데 뜻이 없습니다.

전하께서 허물을 찾는 것이 너무 정미롭고 벌을 시행하는 것이 너무 잦아 잘못이 조금만 있어도 모두 추고해 체직하기 때문에 정원과 삼사(三司)가 거의 여관(旅館)과 일반이어서, 아침에 체직된 사람이 저녁에 잉임(仍任)되고 어제 파직된 사람이 오늘 서용(敍用)되어, 전교가 번거롭고 차제(差除)가 무상하십니다. 대신(大臣)의 거취(去就)는 일반 관료의 진퇴와 더욱 다른 것인데, 겨우 책면(策免)033) 하자마자 이내 중책을 맡겨 여전히 일을 보게 하는 것이 상습(常習)이 되었습니다. 진실로 신료들을 면려시켜 권선징악을 알게 하고자 하신다면 상벌을 신중히 하여 상과 벌이 그 공과 죄에 맞게 하셔야 합니다. 근래 고적(考績)에 세족(勢族)이나 시류(時流)034) 가 전책(殿責)에 드는 경우가 드무니,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폐습을 이를 미루어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간혹 그 성적이 폄척(貶斥)에 해당하여 물리침을 받은 자를 종당에는 그 고과표(考課表)를 다시 써서 올리는 경우가 있기까지 하였는데, 전하께서 그때 그를 도로 그 자리에 부직(付職)하신 것은 중도를 잃은 처사였습니다. 그러나 감사(監司)가 본래 정견(定見)도 없이 안일하게 일을 처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전하께서도 이미 그 사실을 아시고도 그에게 죄를 주지 않으셨으니 출척의 법이 밝아지지 않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청렴한 관리가 줄어들고 탐욕스런 풍습이 날로 성하여, 간혹 분수를 지켜 검약으로 몸을 가져 전택(田宅)을 늘리지 않는 자가 있으면 사람들은 오활하다고 비웃고 세상에서는 용렬하다고 칭합니다. 습속의 폐단이 끝내 여기까지 왔습니다. 탐욕하여도 벌이 없고 청렴하여도 권장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괴롭게 청렴을 하며 무엇을 꺼려 탐욕을 하지 않겠습니까.

외읍(外邑)의 조적(糶糴)은 백성과 국가를 위한 지선(至善)의 계책으로 본래 수한(水旱)에 대비해 궁핍을 구제하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노(吏奴)의 포부(逋負)035) 가 오랜 세월 동안 쌓여 적은 경우에도 1백 곡(斛)이고 많은 자는 1천 석이나 됩니다. 신임(新任) 수령이 비록 조사해 보고하기는 하지만, 감사는 단지 봉납(捧納)을 독촉하도록 허락할 뿐, 간도(奸盜)가 주벌(誅罰)된 적은 없습니다. 간도를 감싸 비호하는 것이 너무 지나치고 엄벌이 가해지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에 이미 포흠(逋欠)을 낸 자도 변상을 하지 않고, 포흠을 내는 자가 또 뒤를 이어, 빈 장부만 해마다 늘고 저축은 날로 줄어듭니다.

쌀 1백 석 이상과 벼 2백 석 이상을 포흠한 자는 주살(誅殺)을 면치 못하는 것이 마땅하니, 신의 생각에는 경중을 절충해 법으로 정하되, 금년에는 1천 석 이상 포흠한 자를 주살하고, 명년에는 9백 석 이상 포흠한 자를 주살하며, 또 그 다음 해에는 8백 석 이상 포흠한 자를 주살하여, 해마다 1백 석씩 낮추어 점차 상헌(常憲)으로 신명(申明)하여 6, 7년 동안 시행하면 쌀 1백 석 이상과 벼 2백 석 이상을 포흠한 자를 모두 주살할 수 있어 6, 7년이 지나지 않아 국중에는 포흠한 이노(吏奴)가 없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 선대왕(先大王)께서 감포(減布)의 규정을 정하실 때 첨정(簽丁)과 제역(除役)에 각각 분한(分限)을 두시어 연치(年齒)를 가감하신 것이 금령에 모두 실려 있습니다. 그러나 근래 기강과 법도가 점점 느슨해져서 폐단이 점점 자라나니, 크게 경장(更張)하는 것은 실로 경솔히 의논하기 어려우나, 약간 교정(矯正)하는 것은 진실로 그만둘 수 없습니다. 호(戶)는 많은데 액(額)이 적으면 놀고 지내는 사람들이 즐겨 모이고, 호는 적은데 액이 많으면 궁한 백성들이 도망해 흩어지니, 이는 고을의 대소가 다른데 액을 배정한 것이 공평하지 않은 폐단입니다. 반족(班族)임을 자칭하는 자들은 논할 것도 없고, 향리(鄕吏)와 체결하여 해마다 뇌물을 주고 역을 피하는 자를 각청 계방(各廳契房)이라 하고, 호강(豪强)에 의탁하여 가칭(假稱)해서 피하는 자를 묘직랑저(墓直廊底)라 하고, 서도(胥徒)에게 많은 돈을 주고서 교묘하게 판적(版籍)에서 빠지는 자를 누호(漏戶)라 하고, 향교(鄕校)나 서원(書院)을 빙자해서 공공연하게 면하기를 꾀하는 자를 속칭(俗稱) 봉족(奉足)이라 합니다.

이보다 심한 것은 서원의 위세가 대단히 높아 재임(齋任)이 그 고장에서 무단(武斷)하기 때문에 서원 주변에 사는 백성들의 호수(戶數)가 수백 호에 이르더라도 수재(守宰)가 감히 첨액(簽額)하지 못합니다. 신의 생각에는 각도 도신으로 하여금 판적(版籍)과 군안(軍案)을 조사해서 액이 많은 곳은 줄이고 적은 곳은 늘이되, 오직 호수에 따라 처리하게 하고, 판적법(版籍法)을 엄히 세워 역을 피해 숨은 자들을 찾아낸다면 시행하기가 매우 쉽고 효과도 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시노(寺奴)의 경우에 있어서는 그 폐단이 양민의 역에 비해 더욱 심합니다. 공안(貢案)에 실린 노비가 이름만 실려 있을 뿐 실지로는 없습니다. 죽은 자도 면제받을 수 없기 때문에 살아 있는 자가 그 몫까지 내야 하는 이중(二重)의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한번 노비로 불리게 되면 누구와도 혼인을 할 수 없고, 살아서나 죽어서나 호소할 곳이 없으니, 아, 불쌍하다 하겠습니다. 그러니 열읍(列邑)으로 하여금 이미 죽은 자의 수를 조사해 보고하게 하고, 그 보고에 따라 해사(該司)로 하여금 공안의 액(額)에서 다 삭제하게 한다면 재물은 잃지만 민심을 얻을 것이니 얻는 바가 많을 것입니다.

오늘날 나라의 기강이 해이해지고 풍속이 점점 어그러져서, 이민(吏民)은 관장(官長)을 깔보고 업신여겨 사원(私怨)이 조금만 있어도 없는 사실을 꾸며 무함하기를 꾀하며, 상천(常賤)은 사부(士夫)를 업신여겨 약간의 감정만 있어도 멋대로 망신을 주며, 액례(掖隷)의 경우는 방자함이 더욱 심하나, 사람들이 모두 용서하고 참습니다. 명성(明聖)하신 전하로서 어찌 일찍이 이런 무리를 용서하고 비호한 적이 있으셨겠습니까. 그런데도 심지어 궁중에서 왕명을 사칭해서 포청(捕廳)에 통부(通符)036) 를 요청하고, 원례(院隷)가 사감을 품고서 큰 거리에서 원융(元戎)에게 망신을 주기까지 한 것이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린 바이니, 식자(識者)들이 한심해하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태평한 때를 당한 지금에도 이미 유지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니 만약 위급한 경우가 닥친다면 반드시 더욱 난폭해지고 더욱 방자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난 봄 소요 때 원근이 들끓어 삽시간에 기호(畿湖)까지 들끓고 놀랐으되, 관장이 이민(吏民)을 진정시킬 수 없었고 사부가 종들을 통제할 수 없었으니, 토붕(土崩)의 조짐이 실로 여기에 있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은혜를 입혀 혹 태만해지거든 위엄으로 억제하고, 위엄을 보였으되 그치지 않거든 법으로 다스리고, 액례(額隷)를 조절하여 함부로 교활한 짓을 하는 근원을 끊으시고 장관에게 위임하여 생살(生殺)의 권한을 조금 주어 아문 사이에 풍기(風紀)가 다시 진작되고 조정 위에 체통이 더욱 높아지게 한다면 사방을 다스릴 수 있는 길이 아마 여기에 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삼가 생각건대 전하께서는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시고 익히신 학문이 고명하십니다. 그런데도 아직 도를 통하지 못하시고 풍속을 아름답게 변화시키지 못하신 것은 진실로 지혜가 사람들보다 뛰어나시어 신하들을 가볍게 대우하는 마음이 있고, 생각이 만기(萬機)에 두루 미쳐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삼간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총명을 믿으면 도리어 자만하게 되고, 정위(情僞)를 지나치게 살피면 억측을 하게 됩니다. 가르칠 수 있는 상대를 신하로 삼기 좋아하시어 기를 꺾고 윽박지르는 위엄이 간혹 간신(諫臣)에게까지 행해지고, 신하들을 싫어하고 박대하시어 업신여기는 뜻이 귀근(貴近)에까지 드러납니다. 그리고 또 승평(升平)의 운세(運勢)를 타시어 항상 조심하고 두려워하시는 생각이 부족하십니다.

현우(賢愚)를 함께 등용하시어 사람을 임용해서 다스림을 이룩하겠다는 뜻이 부족하시고, 고례(故例)와 상규(常規)만을 지키고 따르시어 편안할 때 앞으로 닥칠지도 모르는 위험을 생각하는 염려가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대관(大官)들은 오직 임금의 뜻을 받들어 따르기만을 힘쓰고, 관료들은 임금의 명에 달려가 순종하기만을 일삼아, 진퇴를 명하는 대로 하여 자신의 지조는 돌아보지 않고, 아첨이 풍습이 되어 충직(忠直)을 바치는 사람이 없습니다. 간혹 물러나서는 천정을 바라보며 앞날을 걱정하는 탄식을 하기도 하지만, 들어가면 듣기 좋은 말로 도리어 임금의 비위를 맞추는 풍습이 있습니다. 일찍이 잠을 이루지 못하고 한밤중에 일어나 생각해 보니 근심스럽고 분한 생각 가슴에 가득하였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슬기로운 총명으로 돌아보시어 국가를 위해 깊이 생각하소서. 그리하신다면 어찌 신이 하찮은 말이 채용되는 은혜를 입는 것뿐이겠습니까. 천근(淺近)한 말도 살피시는 성상의 밝음이 더욱 빛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여러 조목의 진술이 모두 근실하고 근거가 있으니 마땅히 유의하겠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5책 25권 10장 A면【국편영인본】 45책 686면
  • 【분류】
    정론(政論) / 인사(人事) / 재정(財政)

  • [註 028]
    순제(旬製) : 성균관에서 10일마다 거재 유생(居齋儒生)에게 보이는 시문(詩文) 시험.
  • [註 029]
    순자(循資) : 순서대로 승진함.
  • [註 030]
    용병(冗兵) : 필요하지 않은 군대.
  • [註 031]
    노대(露臺) : 한 문제(漢文帝)가 세우려던 대(臺). 문제가 이 대를 세우려 하다가, 경비가 1백 금(金)이 든다는 말을 듣고는 대의 건립을 그만두었다 함. 《사기(史記)》 문제기(文帝紀).
  • [註 032]
    육품 사송(六品詞訟) : 송사를 담당한 육품관.
  • [註 033]
    책면(策免) : 왕명(王命)으로 면직(免職)함.
  • [註 034]
    시류(時流) : 시대에 영합하는 무리.
  • [註 035]
    포부(逋負) : 포탈한 조세.
  • [註 036]
    통부(通符) : 의금부·형조·병조·한성부의 입직관(入直官)이나 포도청의 종사관(從事官)과 군관(軍官)에게 범인(犯人) 체포권(逮捕權)을 부여하는 증패(證牌).

○掌令吳翼煥上疏曰:

言路之壅閼, 非一朝一夕之故也。 得失之患, 旣膠于中; 忌諱之習, 又鑠其外。 不言之斥, 宜其罔效; 來諫之敎, 無怪不孚。 請擧痼弊, 論其一二, 時論壞之一也, 臺體掣之二也。 何謂時論壞之? 自殿下位宁以來, 逆耳之怒, 不見於色; 批鱗之誅, 不加於人, 而群臣皆妄自疑阻, 惟事苟容。 或有一言稍涉忌諱, 親戚咎其妄發, 朝廷謂之生事, 甚至銓曹, 不復檢擬, 擧世目爲棄人。 苟非忠義根性, 氣節超俗, 皆欲得殿下尺寸之祿, 爲自己妻兒之計, 夫孰肯輕發無益之狃言, 甘爲時論之所棄也? 何謂臺體掣之? 古之諫臣, 乘輿可斥, 宰相可叱。 人主麾之退, 可以不退; 天子使之謝, 可以不謝。 豈有體例? 牢成印板, 一辭見阻, 旋卽爲避嫌, 大臣旣退, 不許陳所懷, 小有違誤, 斥以生踈。 生者不識忌諱, 踈者不能迎合, 惟恐臺諫不生踈, 奈何以此斥之? 由是內畏時論, 外拘臺體, 擧世滔滔, 終日唯唯, 實非治世之美事, 卽似危邦之陋風。 孔子曰: "惟其言而莫予違也, 不幾於一言而喪邦乎?" 子思曰: "君之國事, 將日非矣。 君出言自以爲是, 而卿大夫莫敢矯其非。" 孟子曰: "入則無法家拂士者, 國恒亡。" 聖人垂戒, 其理必驗。 殿下之言, 違者誰歟, 矯者誰歟? 孰爲法家, 孰爲拂士? 危亡之兆, 將在於此, 而上下之間, 狃玩如彼, 言念及此, 良足寒心。 巽軟之徒, 妄揣上意以爲: "惟其不諫, 諫之則未必不黜; 惟其無忤, 忤之則未必不誅。" 轉相告戒, 無以曉解。 臣嘗思惟, 心切痛之。 謂宜愼擇忠讜, 以備諫諍。 爰革時論, 盡祛臺體。 反躬推誠, 聞過必喜。 不煩辭敎, 宜致讜言。 惟我國家, 八域昇平, 百年無虞, 夫何亂臣賊子, 乃反無歲不出。 今殿下鋤治之際, 每留根柢容貸之過, 反成疑隙, 長禍遺患, 慮無不到。 臺府闕啓, 則喉院請牌, 及其傳啓, 乃曰不允, 事若循例, 便成文具。 殿下處至文之時, 乘狃安之勢, 凡於小務細事, 去文懋實。 今事無大於懲討, 亦不過爲文具, 求國無危, 胡可得也? 臣願差待用刑, 悉取諸賊, 斷以當律, 不復假息, 則亂本永絶。 更無餘憂。 今日國家所悖者誰? 九卿備位, 百僚在官, 執跡求之, 實乏材用。 乏人之患, 不在目下, 而假如邊塵微驚。 桴皷小警, 則在列韎韋, 誰可將者? 又如隣邦搆釁, 嘖言交至, 則盈廷搢紳, 誰可使者? 雖世運亨泰, 聖明當陽, 臣所憂虞, 萬無此理, 然治亂相乘, 安危靡常, 才不素求, 何以應變? 夫求才之道, 惟務盡誠, 用人之術, 必貴適器。 不盡誠, 故所獲者不精, 不適器, 故所任者不稱。 科擧取士, 本非上策, 而奇才、碩人, 蓋由是進。 今夫科場所試, 詩、賦、表、策, 設令選其出群, 未必皆是賢才, 而以此取士, 求之安得不誠, 考之安得不精? 殿下卽位之初, 嚴立科規, 士皆淬勵, 科榜每出, 能服群心。 若論文識, 大抵實才, 歲月浸久, 權輿不承。 隔月旬製, 多是在家製進, 而大或濫預於給分, 小則許赴於到記, 恩雖推廣, 事實濫屑。 三年大比, 收券之數, 少亦近萬, 有司考校, 數日輒了, 親臨試士, 坼榜尤速, 無論精粗, 逐券書外, 歸之於數。 殿下一任所爲, 不加檢飭, 如其得失, 亦曰有命。 至如君上, 不宜言命, 安可全諉命數, 以沮人才? 殿下擢用衆才, 不量其器, 以一言稱愜爲能, 而不核虛實; 以一事違忤爲咎, 而不考忠邪。 世祿故家, 搢紳子弟, 進以門蔭, 竝得序陞, 不問才否, 終畀爲郡, 至若科第之人, 反無循資之規, 苟非地望通顯, 扳援有路, 卽皆棄置, 不復收錄, 設有才能, 將安所施? 臣謂求才, 則必盡其誠, 用人, 則必適其器。 臣竊惟朋黨之弊, 固有色目, 而末流之爭, 惟係偏私, 今日之患, 不在色目。 朝廷亦嘗專用一邊人矣。 一邊人中, 又生緩峻之別, 亦嘗委任一門人矣。 一門人中, 便起大小之號, 各分徒黨, 視若仇讎。 祛此之術, 莫如大公哲愚安分, 則雖有色目, 孰敢黨私? 殿下志在鎭物, 政懋祛黨, 祛黨反涉於抑制, 鎭物或偏於包容。 包容之極, 好惡欠誠, 而反側之釁, 多生於尊寵, 抑制之過, 擧措違理, 而勢利之爭, 莫遏於當路。 如望實效, 盍反本乎? 公惟絶私, 明乃不疑; 綜有條理, 核無虛僞。 疑似必辨, 則誠實相孚, 而傾軋之習絶矣。 邪正得所, 則賢能在位, 而爭奪之風息矣; 臣聞用財有道, 必先量入; 蓄財有術, 莫如省費。 今邊上絶飛輓之役, 域中少曠廢之土, 生財之路, 實廣於前, 而每歲經費, 輒患不足。 國家糜費, 本在冗兵, 禁衛之宜屬兵曹, 守摠之當罷京營, 前後朝臣, 固多言者。 今又設壯勇衛, 計其料布, 豈云少哉? 殿下內則有禁軍、武藝, 外則有五營將卒。 環衛不缺, 綢繆甚固, 乃爲此冗長之物, 以廣糜費之路歟? 今親臨試士, 賞賜過當。 軍布大同, 出自黎庶, 親試賞格, 雖不可廢, 生民膏血, 安用許多? 近歲以來, 修葺之役, 行之有漸, 害不及民, 而竊見宮掖之間, 塗墍一新, 街路之上, 材石猶存, 若計前後之所費, 不知幾倍於露臺。 擧此數者, 推類可驗。 凡若此者, 日求去之, 積少成多, 何患乏財? 殿下英智御下, 威惠從心, 酬勞多踰於涯分, 督過或涉於煩數。 凡有邦家慶賀, 都監營造, 暫與執事之列, 輒蒙超遷之賞, 遂使罔功之徒, 擧懷述化之道, 出身科第者, 右職高資, 跬步可圖, 發跡蔭路者, 六品詞訟, 時日可得。 得之者不勉於來效, 不得者無意於自勵。 今殿下求過太精, 施罰太數, 凡少差謬, 輒皆推遞, 喉院、三司, 殆同傳舍, 朝遞夕仍, 昨罷今敍, 辭敎徒煩, 差除無常。 大臣去就, 尤異庶僚, 進退纔經策免, 旋卽重畀, 而依舊視事, 習以爲常。 苟欲磨勵臣工, 使知勸懲, 誠宜審愼賞罰, 使當功罪。 近來考績, 勢族時流罕居, 殿責茹吐之弊, 推此足驗。 至或貶目見退, 末乃更書以進, 殿下之伊時還給, 固爲過中。 監司之本無定見, 居然可知。 且殿下旣已審知厥狀, 亦不加之以罪, 黜陟之法, 宜其不明。 由是廉吏衰少, 貪風日熾, 厥或持身拙約, 田宅不增, 人笑迂闊, 世稱庸劣。 習俗之弊, 一至於此。 貪則無罰, 廉亦無奬, 何苦而爲廉, 何憚而不貪? 外邑糶糴, 民國至計, 本備水旱, 以濟窮乏。 吏奴逋負, 歲月滋長, 少則百斛, 多者千石。 新任守宰, 雖或査報, 監司只許督捧, 而奸盜未嘗受誅。 容養太過, 威罰罕加。 是以, 已欠者旣不充面, 犯逋者又復接迹, 虛簿歲增, 積儲日銷。 米百石以上, 租二百石以上者, 自當不免於誅死, 臣謂折衷輕重, 定爲令甲。 今年誅千石以上者, 明年誅九百石以上者, 又明年誅八百石以上者, 歲降百數, 漸申常憲, 如此六七年, 米百石、租二百石以上者, 皆可誅也, 不過六七年, 國中可無逋吏矣。 惟我先大王, 特定減布之規, 簽丁、除役, 各有分限, 加年減齒, 俱著禁令。 挽近以來, 綱條漸弛, 弊端潛長, 大加更張, 實難輕議, 少爲矯捄, 誠不可已。 戶衆額少, 則游手樂聚, 戶寡額多, 則窮民逃散。 此邑殊大小, 而定額不均之弊也。 濫稱班族, 姑舍毋論, 締結吏鄕, 歲賂而避者, 謂之各廳契房。 投托豪强, 假稱而避者, 謂之墓直廊底。 厚資胥徒, 巧脫編籍, 是謂漏戶。 憑藉校院, 公共圖免, 俗稱奉足。 甚至書院勢尊, 齋任武斷, 院下居民, 雖累百戶, 守宰莫能簽額。 臣謂宜令各道道臣, 取考版籍、軍案, 損多益寡, 惟視戶數, 申嚴籍法, 搜括連藪, 行之甚易, 施必有效。 至於寺奴之弊, 視諸良役尤甚。 貢案奴婢, 有名無實。 亡者無望於許免, 存者重困於加徵, 一號奴婢, 莫與爲婚, 生死無告。 吁! 亦慼矣。 請令列邑, 査報物故之數, 因使該司, 悉除貢案之額, 失財得民, 所獲多矣。 今國綱解弛, 風俗漸乖, 吏民則輕侮官長, 而少挾私怨, 輒謀構陷, 常賤則侵凌士夫, 而或有微憾, 便肆詬辱。 至於掖隷, 橫恣尤甚, 而人皆假借而隱忍。 夫以殿下之明聖, 何嘗容護於此輩? 而甚至中禁矯命, 索通符於捕廳, 院隷挾憾, 辱元戎於通衢, 瞻聆所及, 識者寒心。 方當宴安, 旣無維持之勢, 苟有緩急, 必致畔渙之患。 所以前春騷屑, 遠近奔波, 晷刻之頃, 畿湖沸驚。 官長不能鎭其吏民, 士夫不能制其臧獲, 土崩之漸, 實在於此。 臣謂恩而或慢, 則制之以威, 威而不戢, 則申之以法, 操切掖隷, 以絶濫猾之源, 委任長吏, 少假生殺之權, 卽使衙門之間, 風稜復振, 朝廷之上, 體統益尊, 則綱紀四方, 其在斯歟! 伏惟殿下, 天姿聰睿, 聖學高明。 然猶道未交泰, 俗未於變。 誠以智出庶物, 有輕待群臣之心; 思周萬幾, 有兼知庶愼之意。 騁聰明, 則反涉於自用, 察情僞, 則有近於臆逆。 好臣所敎, 而摧折之威, 或加於違咈; 厭薄具僚, 而狎侮之旨, 或示於貴近。 且撫升平之運, 常欠兢業之慮。 竝進賢愚, 少任人致理之志; 循守故常, 無居安思危之念。 由是匡弼, 惟務於將順, 庶僚但事於趨走, 進退惟命, 不暇自顧於廉隅; 容悅成習, 罔敢或輸其忠直。 至或退則仰屋, 雖發危明之嘆; 入則譽樹, 反效希旨之恩。 抑嘗中夜思惟, 滿腔憂憤。 願回睿明, 爲國熟慮。 豈惟微臣, 獲蒙採蕘之恩; 抑亦聖明, 有光察邇之明。

批曰: "諸條敷陳, 皆甚勤據。 當留意。"


  • 【태백산사고본】 25책 25권 10장 A면【국편영인본】 45책 686면
  • 【분류】
    정론(政論) / 인사(人事) / 재정(財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