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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24권, 정조 11년 12월 20일 계축 2번째기사 1787년 청 건륭(乾隆) 52년

장령 유광천이 청렴한 관리의 등용 등을 들어 오늘날의 폐단을 없애기를 상소

장령(掌令) 유광천(柳匡天)이 상소하기를,

"오늘날 바로잡을 급선무가 되는 것은 첫째 관제(官制)를 변통하여 사람을 쓰는 공도(公道)를 넓히는 것이고, 둘째 적폐(糴弊)를 쇄신하여 백성의 심한 곤궁을 푸는 것이고, 셋째 청렴한 관리를 장려하여 써서 탐오(貪汚)한 풍습을 없애는 것이고, 넷째 호남(湖南)의 조선(漕船)은 바꾸어 지토선(地土船)을 쓰는 것입니다. 대저 아조(我朝)의 정제(定制)는 과거(科擧)로 사람을 뽑는다고는 하나 실은 세 가지로 사람을 쓰니, 문(文)·음(蔭)·무(武)가 이것입니다. 한 번 외임(外任)이 중시된 뒤로부터 음로(蔭路)가 점점 넓어졌는데, 외관(外官)으로 말하면 무과(武窠)가 문과(文窠)보다 훨씬 많습니다. 아! 정사(政事)는 학교를 일으키고 무예(武藝)를 익히고 재부(財賦)를 다스리는 것보다 큰 것이 없습니다. 문관(文官)은 학교를 일으키는 일을 맡고 무신(武臣)은 무비(武備)를 닦는 일을 맡고 음관(蔭官)은 재부를 다스리는 일을 맡는데, 인재의 장단은 기용(器用)이 고르지 않는 것과 같아서 무신이 반드시 문교(文敎)에 어두운 것은 아니고 음관이 반드시 무비에 허술한 것은 아니나, 국가에서 뽑아 쓰는 도리로서는 편중하여 고르지 않은 한탄이 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대저 벼슬자리의 임기는 음관이 가장 길고 문관이 가장 짧은데, 이 때문에 떠나는 시기가 닷새 동안 경조윤(京兆尹)337) 을 지내는 것처럼 짧아서, 가는 곳을 여행 중의 여관처럼 여기니, 고을이 어떻게 고을다우며 백성이 어떻게 백성답겠습니까?

윤차(輪次)의 제도를 행하면 음관이 떠난 고을에는 반드시 뒤를 잇는 걱정이 있고 무관이 가는 고을에는 반드시 장래의 근심이 있어서 앞뒤를 돌아보고 오리(汚吏)가 징계되고 두려워할 바가 있어서 옛버릇을 고치고 새로워지기를 꾀할 것이므로, 탐오한 풍습이 점점 없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고제(古制)는 외임이 가볍고 내직(內職)이 중하여 낭서(郞署)·반관(泮官)은 으레 삼사(三司)를 갈아서 주는 벼슬자리가 되므로 이름이 시종(侍從) 줄에 있는 자는 벼슬과 녹봉이 없는 날이 없고, 옥당(玉堂)이 외보(外補)되면 수령(守令)이 되고, 대신(臺臣)이 외천(外遷)하면 찰방(察訪)이 되고, 승륙(陞六)한 처음에 통청(通淸)하지 못하면 아침에 전적(典籍)이었다가 저녁에 현감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내직이 가볍고 외임이 중하여 삼사에 출입한 신하가 혹 한 해가 다하도록 직함 하나도 띠지 못하기도 하고 한 해를 넘겨도 작은 녹(菉)도 받지 못하기도 하여 땔 것과 먹을 것을 사지 못하는 근심을 면하지 못하고 춥고 배고픈 근심이 많으며, 외과(外窠)가 한 자리 나면 온 세상이 미친 듯이 연줄을 따라 구걸하여도 얻는 자가 오히려 드물어서 도사 봉조하(都事奉朝賀)라는 속담이 생기고, 한 번 버려지면 수십 년이 지나도 다시 쓰일 기약이 없습니다. 선조(先朝)에서 고(故) 중신(重臣) 이익보(李益輔)가 변통에 뜻을 두었으나 저지당하여 이루지 못하였고, 고 상신(相臣) 이사관(李思觀)이 이 논의를 힘껏 주장하였으나 권흉(權凶)이 용사(用事)하므로 막혀서 행해지지 않았으니, 매우 아깝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음과인 영하읍(營下邑)과 무과인 방어사(防禦使)와 문과인 세 부윤(府尹) 및 동래(東萊)·수원(水原)을 제외하고 그 나머지 외지(外地)의 수령은 문·무로 교체(交遞)하고 내지(內地)의 수령은 모두 문·음·무로 환차(換差)하고, 1백여 무과 가운데에서 10여 과를 덜어 내고 2백에 가까운 음과 가운데에서 20여 과를 덜어 내어 문과로 정하되 문참하(文參下)인 찰방 15과를 모두 올려서 부직(付職)하는 참상(參上)의 과로 하면 이것이 이른바 조금 변통하는 것인데, 교체하여 크게 변통하는 것은 혹 시행하지 못하더라도 추이(推移)하여 조금 변통하는 것은 결코 그만둘 수 없을 것입니다. 도사(都事)로 말하면, 예전에 외대(外臺)라 칭하였는데 한 번 재상(災傷)이 폐지된 뒤부터는 문득 용관(冗官)이 되고 점점 문관의 졸직(卒職)이 되었습니다. 선조(先朝) 계사년338) 에 과연 시종을 차출하여 보낼 것을 정식(定式)하였으나, 이때 낭서에 대한 구처(區處)가 없다 하여 대신(大臣)이 연중(筵中)에서 아뢰어 한두 도정(都政)에 행하고는 곧 또 폐지하였습니다.

이제부터 영구히 시종과(侍從窠)로 만들고 이미 획정(劃定)한 늠봉(廩俸)도 도로 고규(古規)를 회복하여 반드시 문식(文識)과 지망(地望)이 있는 사람으로 시종 가운데에서 가려 차출하여 명나라의 독학 어사(督學御史)처럼 해영(該營)에 가서 머무르게 하면 이것은 진작(振作)하는 방도에 크게 보탬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깊은 폐단은 적폐(糴弊)만한 것이 없는데, 첫째는 이포(吏逋)를 거짓 치부(置簿)하는 것이고, 둘째는 나이(那移)339) ·번작(反作)340) 에 따른 거짓 유저(留儲)이고, 셋째는 입본전환(立本錢還)341) 이 가장 큰 폐단입니다. 적곡(糴穀)을 받아들일 때에 빈 껍데기 곡식으로 미봉(彌縫)하고 봉고(封庫)하는 날에 규례에 따라 받아들인 것으로 거짓 기록하고 적곡을 나누어 줄 때에 섬을 채우지 않는 흠결(欠缺)은 모두 이포로 인한 농간인데, 백성은 정곡(精穀)을 내게 되고 아전은 창고 안의 좀벌레가 됩니다. 각 고을에서 따로 이노고(吏奴庫)를 두고 이노의 환곡은 여기에 거두어들여서 흩어 주어 민고(民庫)와 섞이지 않게 하면 아전이 농간할 수 있는 길이 없어질 것이고, 이포는 아전에게서 거두고 촌민(村民)을 침탈(侵奪)하지 말라는 뜻으로 금조(禁條)를 더욱 엄하게 하면 죄 없이 당하는 원통한 일을 풀 수 있을 것입니다. 나이·번작의 폐단은 서북(西北)이 치우치게 심합니다. 그 곡식의 명색이 많기 때문에 절미(折米)하는 규례가 있는데, 귀한 곡식은 중간에서 훔쳐내고 천한 곡식은 피폐한 백성에게 나뉘어 줍니다. 전환입본의 폐단은 삼남(三南)이 더욱 심합니다. 곤궁한 봄에 곡식이 귀하여 쌀 값이 뛰면 짐짓 백성을 위하여 더 나누어 준다고 핑계하고 창고에 남겨 둔 것 가운데에서 값이 비싼 것을 돈으로 만들어 두 냥씩을 민간에 나누어 주고 가을이 되면 한 섬씩 바쳐야 하는 것으로 하고 남는 것은 죄다 자기를 살찌우는 데로 돌립니다. 이 폐단을 고치지 않으면 백성을 보전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청컨대 묘당(廟堂)을 시켜 각도에 엄하게 관문(關文)을 보내어 알려서 범한 자는 장문(狀聞)하고 논죄(論罪)하게 하여 반드시 적폐를 쇄신하게 하소서. 아! 탐오를 징계하는 방도로서 무엇이 청렴을 장려하는 것보다 낫겠습니까? 지금 관리인 자에는 능리(能吏)가 있고 혹리(酷吏)가 있고 또 이른바 세리(勢吏)라는 것이 있으나 통틀어 말하면 탐리(貪吏)라는 것에 지나지 않는데, 옛말에 ‘한 탐리를 주벌(誅罰)하는 것이 한 염리(廉吏)를 장려하는 것만 못하다.’ 하였습니다. 묘당을 시켜 빨리 청백리(淸白吏)를 뽑는 일을 거행하게 하고 이어서 전조(銓曹)에 신칙(申飭)하여 청렴한 사람을 채용하게 하면 탐오한 풍습이 절로 없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호남의 세미(稅米)를 조운(漕運)하는 배를 바꾸어 지토선을 써야 하는 까닭은 이렇습니다. 경강(京江)의 배는 모두 여러 궁가(宮家)에서 관장하는 것이거나 호세가(豪勢家)에서 부리는 것이므로 공세(公稅)를 빙자하여 관장(官長)을 위협하여 정량 이외에 함부로 더 받아서 그 폐단이 매우 심하고, 고가(雇價)를 탐내어 지나치게 수천 석을 싣습니다. 배를 뛰우는 처음부터 범하여 유용한 것이 이미 많아서 마침내 미봉할 수 없게 되면 꼭 죽을 처지에서 살 길을 찾아서 그 배를 부수고 맙니다. 파선(破船)은 거의 다 짐짓 부순 것인데 짐짓 부수는 것은 경강의 배에서 말미암습니다. 이것이 실로 지토선을 써야 할 명확한 증거입니다. 호남의 열읍(列邑) 가운데에서 나주(羅州)·순천(順天)·강진(康津) 같은 포구(浦口)에 각각 조창(漕倉)을 설치하고 조선(漕船)을 만들어 두고서 경강의 배를 삯내어 싣는 것을 폐지하면 짐짓 부수는 걱정을 없앨 수 있을 것입니다. 청컨대 묘당을 시켜 좋은 방책에 따라 변통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네가 종적이 소원한 사람으로서 문득 아뢰어 논열(論列)한 것이 있으니, 매우 아름답다. 네 가지 일은 조금 기다려서 이 뒤 빈연(賓筵)에서 먼저 묘당을 시켜 편리하고 완전한 방책을 미리 강구하게 하겠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4책 24권 47장 B면【국편영인본】 45책 680면
  • 【분류】
    정론(政論) / 인사(人事) / 교통(交通) / 재정(財政)

  • [註 337]
    경조윤(京兆尹) : 한성 판윤(漢城判尹).
  • [註 338]
    계사년 : 1773 영조 48년.
  • [註 339]
    나이(那移) : 곡물(穀物)을 유용(流用)하는 것.
  • [註 340]
    번작(反作) : 이속(吏屬)이 관곡(官穀)을 사사로이 써 버리고 그것을 메우기 위하여 온갖 못된 짓을 자행(恣行)하는 일.
  • [註 341]
    입본전환(立本錢還) : 밑천을 세워 돈을 나누어 주고 곡식으로 되받아 들이는 것.

○掌令柳匡天上疏曰:

爲今日矯捄之急先務, 一曰變通官制, 以恢用人之公道也。 二曰振刷糴弊, 以解生民之倒懸也。 三曰奬用廉吏, 以祛貪汚之風也。 四曰湖南漕船, 改用地土船也。 夫我朝定制, 雖云以科取人, 實則用之以三岐, 文、蔭、武是已。 一自外重之後, 蔭路寢廣, 以外官言之, 武窠倍於文窠, 蔭窠倍於武窠。 噫! 爲政莫大於興學校、講武藝、治財賦。 文官責其學校之興, 武臣責其武備之修, 蔭官責其財賦之治, 而人才長短, 如器用之不齊, 武非必昧於文敎, 蔭非必踈於武備, 而在朝家甄用之道, 不宜有偏重不均之歎。 夫作吏瓜限, 蔭官最久, 文官最短, 以故去時便同五日京兆, 歸處看作逆旅傳舍, 邑何以爲邑? 民何以爲民乎? 若行輪次之制, 則蔭去之邑, 必有嗣後之虞, 武歸之州, 必多方來之憂, 瞻前顧後, 汚吏有所懲畏; 革舊圖新, 貪風可以漸去。 古制, 外輕內重, 郞署、泮官, 例作三司遞付之窠, 名忝從班者, 無日無官, 無月無祿, 玉堂外補, 而爲守宰, 臺臣外遷, 而爲察訪, 陞六初未通淸, 朝典籍而暮縣監。 今也則內輕外重, 出入三司之臣, 或終年而未帶一銜, 或閱歲而未沾寸祿, 不免桂玉之愁, 率多凍餒之憂, 外窠一出, 擧世如狂, 鑽刺剌求乞, 得者猶罕, 都事奉朝賀, 便成俚諺, 一斥數十年, 甄復無期。 先朝故重臣李益輔, 有意變通, 而見沮未遂, 故相臣李思觀, 力主是論, 權凶用事, 閼而不行, 重可惜也。 臣意, 則除却蔭之營下邑, 武之防禦使, 文之三府尹及東萊水原, 其餘則外地守令, 文武交遞, 內地守令, 一幷文蔭武換差, 百餘武窠中, 除出十餘窠, 近二百蔭窠中, 除出二十餘窠, 定爲文窠, 而文參下察訪十五窠, 竝爲陞付參上之窠, 則是所謂少變通也, 交遞大變通, 雖或未施, 推移少變通, 斷不可已也。 至若都事, 古稱外臺, 一自災傷革罷之後, 便成冗官, 謾歸文官之卒職。 先朝癸巳, 果以侍從差遣事定式矣。 時以郞署之無區處, 大臣筵白, 行之一二都政, 旋又廢却。 繼自今永作侍從窠, 而已劃廩俸, 還復古規, 必以有文識、地望之人, 從班中擇差, 使之往留該營, 如皇朝之督學御史, 則是大有補振作之方矣。 今日痼瘼, 無如糴弊。 一則吏逋之虛簿也, 二則那移、反作之虛留也, 三則立本錢還之最爲巨瘼也。 捧糴時, 空殼穀之彌縫, 封庫日因例納之, 虛錄分糴時, 不完石之欠缺, 無非吏逋之弄幻, 民被精穀之供, 而吏作倉中之蠧。 若令各邑, 別設吏奴庫, 吏奴之還, 斂散於此, 不混民庫, 則吏無容奸之路, 而吏逋徵於吏、勿侵村民之意, 申嚴禁條, 則可紓無辜之冤矣。 那移、反作之弊, 西北偏劇。 以其穀名繁, 而有折米之規也。 穀之貴者, 從中偸者, 派及殘氓, 錢還立本之弊, 三南滋甚。 窮春穀貴, 米價高踴, 故托以爲民加分, 而留庫中高價作錢, 派及二兩零於民間, 以爲待秋一石之當納, 而餘剩盡歸肥己。 不革此弊, 民其難保。 請令廟堂, 嚴關諸道, 犯者狀聞論罪, 以期糴弊之振刷焉。 噫! 懲貪之道, 孰先於奬廉乎? 今之爲吏者, 有能吏焉, 有酷吏焉, 又有所謂勢吏焉, 摠以論之, 不過曰貪吏。 古語曰: "誅一貪吏, 不如奬一廉吏。" 令廟堂, 亟擧淸白吏之選, 仍飭銓曹, 採用廉白之人, 則貪風自可祛矣。 若夫湖南漕稅之改用地土船, 何也。 京江船, 摠是諸宮家所管, 豪勢家所使, 凭藉公稅, 嚇喝官長, 斛上濫捧, 其弊已劇, 貪其雇價, 濫載數千石。 發船之初, 犯手旣多, 終至莫可彌縫, 則死中求生, 破其船而已。 破船之例, 故破, 而故破由於京江船也。 此實爲地土船可用之明證。 湖南列邑中, 若於羅州順天康津等浦口, 各設漕倉, 造置漕船, 革罷京江之雇載, 則故破之患, 庶可除矣。 請令廟堂, 從長變通焉。

批曰: "爾以踈逖之蹤, 輒有陳列, 極可嘉也。 四件事, 差待此後賓筵, 先令廟堂, 預講便完之策焉。"


  • 【태백산사고본】 24책 24권 47장 B면【국편영인본】 45책 680면
  • 【분류】
    정론(政論) / 인사(人事) / 교통(交通) / 재정(財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