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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 24권, 정조 11년 7월 4일 기사 2번째기사 1787년 청 건륭(乾隆) 52년

비변사가 함경도 관찰사 정민시가 그 도의 편의사정을 장계한 내용을 보고하다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함경도 관찰사 정민시(鄭民始)가 장계(狀啓)하여, 그 도의 편의사정(便宜事情)을 조목조목 아뢰었습니다. 그 하나는 ‘장진(長津) 땅 1백여 리는 모두 경작할 만하고 살 만한 땅이지만 지금의 사세(事勢)를 생각하면, 고을을 설치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 네 가지가 있습니다. 폭원(幅員)이 4백여 리를 넘고 백성이 3천 호에 가까워서 온갖 거행할 것이 모두 수령(守令)의 일인데 이미 향리(鄕吏)가 없고 또 형률이 없으니, 구차하고 장애가 되는 꼬투리를 이루 거론하기 어렵습니다. 이것이 첫째입니다. 지금 거주하는 백성은 반이 사방에서 흘러 들어온 무리이니, 수령을 두어 형률로 제제하여 처치하지 않으면 악습(惡習)이 점점 늘어나 장차 폐지(弊地)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둘째입니다. 살옥(殺獄)의 검험(檢驗)을 함흥(咸興)에 청하면 왕복하는 데에 5, 6일이 걸리고 다시 다른 고을에 청하면 이미 열흘이나 보름이 지나 버리니, 검험을 행하여도 어떻게 믿겠습니까? 이것이 셋째입니다. 본진(本鎭)은 서북 통로에 있는데 산골짜기 사이에 지름길이 매우 많아서 무뢰한 무리가 그 곳에 관부(官府)가 없고 금방(禁防)이 없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니, 지금 진수(鎭守)하는 방도에 비어(備禦)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넷째입니다. 예전부터 유식한 자의 의논은 아닌게아니라 용관(冗官)을 태거(汰去)하고 주현(州縣)을 아우르는 것을 급무(急務)로 삼았으니, 이미 땅을 개척하고 강역을 넓힐 방책이 없는 데다가 도리어 진(鎭)을 높여서 읍(邑)을 만들려는 의논이 있었습니다. 얼른 보면 누가 시무(時務)를 모르는 것이라 하지 않겠습니까마는, 옛사람이 설시(設施)한 것을 생각하면 또한 한 가지가 아니어서, 혹 지세(地勢)가 요충(要衝)이라 하여 예전에 폐기하였던 것을 이제 수치(修治)하기도 하고, 상판(商販)하는 도회(都會)라 하여 모여 사는 데에 따라 읍(邑)을 만들기도 하고, 백성을 옮겨서 성지(城池)를 충실하게 하기도 하고, 백성을 따라서 부치(府治)를 옮기기도 하였으니, 그 귀추를 요약하면 마땅한 것을 관찰하고 사정을 따랐을 뿐입니다.’ 한 것입니다.

이제 이 도신(道臣)의 네 가지 논의는 산천의 험이(險夷)한 형세를 반복하여 살피고 읍진(邑鎭)의 경중(輕重)한 형세를 참작하여 크고 작은 것을 다 아뢰고 사리를 논한 것이 매우 상세하며 비난하는 자의 의논까지도 조목조목 설파(說破)하였으니, 뒷날에 효과를 거둔다면 무산(茂山)을 조처한 것만 못할는지 어찌 알겠습니까? 이 기회에 시행하도록 윤허하되 온갖 경기(經紀)를 조목조목 벌여 적어서 장문(狀聞)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그 하나는 ‘삼수부(三水府)는 만산(萬山) 가운데에 있는데 읍치(邑治)가 한구석에 치우쳐 있으므로 길이 멀어서 민간의 고통을 살필 수 없습니다. 적병(敵兵)이 압록강(鴨綠江)에서 곧바로 후치(厚峙)로 향하면 갑산(甲山) 한 성(城)은 있으나 마나일 것이고, 장진강(長津江)에서 곧바로 함흥(咸興)으로 향하면 자작(自作)·어면(魚面)을 지나서야 비로소 알아서 이미 미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제 어면에 옮겨 설치한다면 호령이 온 경내에 행해질 것입니다. 읍치를 옮기고 나면 어면·자작은 절로 폐지되어야 할 것이므로 그 토졸(土卒)을 그 읍에 붙이고, 신방(神方)강구(江口)·묘파(廟坡) 두 보(堡) 사이에 끼어 있어서 그리 관계가 없으므로 신방을 폐지하여 두 보에 나누어 붙이고, 소농(小農)은 더욱이 매우 피잔(疲殘)하므로 나란(羅暖)신갈파[新加乙坡] 사이에 이 작은 보가 없더라도 이해(利害)가 없을 것입니다.’ 한 것입니다.

진장(鎭將)의 수를 줄이는 것과 어면에 읍치를 옮기는 것은 조금만 변통하면 조금은 유익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 고장의 생리(生理)는 오로지 담비·인삼의 득실(得失)에 따라 그 민식(民食)의 풍겸(豊歉)이 달라지고 부치(府治)가 치우쳐 있거나 진보(鎭堡)가 두루 벌여 있는 것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그 부치를 이 곳에 처음 설치한 것은 반드시 어면이 한 고을의 가운데라는 것을 몰라서가 아닐 것인데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한 데에는 반드시 뜻이 있을 것이니, 이것은 충분히 상의한 뒤에 진보도 함께 좋을 대로 변통하는 것이 참으로 사의(事宜)에 맞겠습니다. 그 하나는 ‘북관(北關)의 곡부(穀簿)에는 하곡(夏穀)이 많고 추곡(秋穀)은 겨우 세(稅)를 내는 데에 충당할 뿐이므로 백성이 먹은 것은 사시에 밀보리인데 교제창(交濟倉)의 각곡(各穀) 12만 8천여 석을 정곡(正穀)으로 바꾸는 것은 너무 지나치니, 남관(南關)의 예(例)에 따라 반은 정곡으로 바꾸어 구치(久置)하고 반은 산재(散在)하게 하소서.’ 한 것입니다.

교제창의 곡물을 정곡으로 바꾸어 해창(海倉)에 나누어 두되 3분의 2를 유치(留置)하고 3분의 1을 분산(分散)하는 법을 정한 것은 대개 연전에 진사(賑使)가 돌아와 아룀에 따라 뒷날 두 도가 서로 구제할 때에 대비한 것인데, 시행한 지 오래지 않아서 문득 변통할 것을 의논하면 명을 내렸다가 곧 거두는 혐의가 있을 뿐더러 예비하는 좋은 계책이 아닐 듯합니다마는, 장계의 사연을 반복하여 살펴보면 민정(民情)·사세(事勢)가 결코 그대로 행할 수 없는 정사이니, 내년부터 비롯하여 8만 석은 원절목(元節目)대로 정곡으로 구제하고 4만 8천 석은 전대로 산치(散置)하여 편의에 따라 조적(糶糴)하게 하는 것이 참으로 사의에 맞겠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이제 읍을 설치하고 나면 만전한 방책을 강구해야 할 것이니, 소견이 있으면 다시 사리를 논하여 장문(狀聞)하라고 분부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4책 24권 4장 A면【국편영인본】 45책 658면
  • 【분류】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사법(司法) / 재정(財政) / 농업(農業)

○備邊司啓言: "咸鏡道觀察使鄭民始狀啓, 條陳本道便宜事情。 其一, 長津之地百餘里, 無非可耕可居之地, 顧今事勢, 不可不設邑者有四。 幅員餘四百里, 人民近三千戶, 凡百擧行, 無非守令之事, 而旣無吏鄕, 又無刑律, 苟簡掣礙之端, 有難盡擧, 一也。 時居民人, 半是四處流入之類, 若不設守宰, 制置刑律, 則惡習漸長, 將成弊地, 二也。 殺獄檢驗, 請於咸興, 則往返爲五六日, 更請他邑, 則已過旬望, 行檢何以憑信乎? 三也。 本鎭處於西北之衝, 而山蹊之間, 徑路甚多, 無賴之輩, 幸其無官府、無禁防, 目下鎭守之方, 宜有備禦四也。 從古有識之論, 未嘗不以汰冗官, 竝州縣爲急務, 則旣無拓地恢垣之策, 反有陞鎭作邑之議。 驟而觀之, 孰不曰不識時務, 而第念古人設施, 亦非一端, 或以地勢之要衝, 而昔廢今修, 或以商販之都會, 而因聚成邑, 或徙民, 而實其城池, 或從民, 而移其府治, 要其歸, 則相其宜、順其情而已云。 今此道臣四條之論, 反復乎山川險夷之形, 參互以邑鎭輕重之勢, 巨細畢陳, 論理甚悉, 竝與難之者之議, 而逐條卞破, 日後收效, 安知不如茂山之爲哉? 趁今許施, 凡百經紀, 使之條列狀聞爲宜。 其一, 三水府處萬山之中, 而邑治僻在一隅, 道里隔絶, 民間之疾苦莫察。 若使敵兵, 自鴨綠江直向厚峙, 則甲山一城, 不足有無, 自長津江直向咸興, 則過自作魚面, 而後始知之, 已無及矣。 今若移設於魚面, 則號令可行於一境。 邑治旣移, 則魚面自作, 自在當罷, 以其土卒, 付之該邑。 神方間於江口廟坡兩堡之間, 無甚關係, 革罷神方, 而分屬兩堡, 小農則尤甚疲殘, 羅暖新加乙坡之間, 雖無此小堡, 似無利害云。 鎭將之減數, 魚面之移邑, 固可謂少變通, 則少有益。 然本土生理, 專以貂蔘得失, 判其民食豐歉, 不在於府治之僻處, 鎭堡之遍列而已。 該府之始設於此地者, 未必不知魚面之爲一邑之中, 而捨彼取此, 必有意焉。 此則必須十分商確, 然後竝與鎭堡, 從長變通, 實合事宜。 其一, 北關穀簿, 夏穀居多, 秋穀僅充於應稅, 民之所食, 四時兩麥, 而交濟各穀, 十二萬八千餘石, 換爲正穀太過, 依南關例, 請折半換正穀久置, 折半散在云矣。 交濟穀之換作正穀, 分置海倉, 定爲二留一分之法者, 蓋因年前賑使之回奏, 以備日後兩道之互濟, 行之未久, 遽議變通, 不但銷刻之爲嫌, 恐非備豫之良策, 而策以狀辭, 反復考之, 則民情、事勢, 決是行不得之政, 自明年爲始, 八萬石依元節目, 以正穀久置四萬八千石, 依前散置, 以爲從便糶糴之地, 實合事宜。" 敎曰: "今旣設邑, 則宜講萬全之策, 如有所見, 更爲論理狀聞事, 分付。"


  • 【태백산사고본】 24책 24권 4장 A면【국편영인본】 45책 658면
  • 【분류】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사법(司法) / 재정(財政) / 농업(農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