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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 23권, 정조 11년 4월 8일 을사 2번째기사 1787년 청 건륭(乾隆) 52년

호남의 지역 사정에 관한 호서 암행 어사 심환지의 서계

호서 암행 어사 심환지(沈煥之)가 복명(復命)하고 서계(書啓)를 올려 병사(兵使) 구세적(具世勣)·부여 현감(扶餘縣監) 윤득우(尹得愚)·공주 판관(公州判官) 서직수(徐直修)·비인 현감(庇仁縣監) 이운빈(李運彬)·연기 현감(燕岐縣監) 최숙(崔熽)·전의 현감(全義縣監) 황윤석(黃胤錫)의 잘 다스리지 못한 형상을 논핵하여 구세적·윤득우·서직수는 잡아다 심문하여 죄를 주고, 이운빈·최숙·황윤석은 파출(罷黜)하게 하였다. 그 별단(別單)에 이르기를,

"진정(賑政)에 대한 일을 여러 고을에 물었더니, 굶주리는 사람을 뽑을 처음에 대개 너무 많이 뽑는 폐단이 있었으나 뽑을 때에 누락된 자는 없었으며, 지급한 곡물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키를 사용해 곡식을 까불었으며 염장(鹽醬)과 어곽(魚藿) 역시 모두 기일 전에 준비하여 혹 고깃국을 쓰기도 하여 모두 힘을 다하기를 마치 승부를 다투듯이 하였으니, 대저 어찌 여러 장리(長吏)들이 현명하여 한결같은 정성으로 백성을 돌본다 한들 이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오직 조정에서 견세(蠲稅)·감역(減役) 등의 백성을 돌보는 정사를 극도로 하지 않음이 없었고, 전후의 윤음(綸音)이 측달 명백하여 비록 우부 우부(愚夫愚婦)라도 한번 들으면 모두 성상의 뜻을 마땅히 받들어 지켜야 할 줄을 알아서였습니다.

그러므로 여러 고을에서 진정(賑政)을 하는 자들이 대개 분수에 지나치게 했고 잘하지 못한 곳은 한두 고을뿐이었습니다. 신이 들렀던 곳을 통틀어 논하자면 금년의 민정(民情)은 역시 한 도(道)의 안에서 징험할 수가 있었습니다. 대저 도로에서 살펴보니 땅을 버리고 유리(流離)하는 자가 없고 시장에서 보면 가족을 이끌고 걸식하는 자가 없으며 봉리(封里)의 마을에도 괴로워하거나 원망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며, 외딴 산야(山野)의 궁벽한 곳에서도 밭을 태워 경종(耕種)하는 절차를 어기지 않았으니, 비록 상세(常歲)로써 비교하더라도 또한 이보다 낫지는 않을 것입니다. 지금 국가의 걱정은 진휼하는 일이 혹 태만할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로 창고의 곡식이 점점 소모되는 데 달려 있습니다. 신이 가다가 보령(保寧) 경계에 이르러서 듣건대, 오서산(烏棲山) 가운데 사인(士人) 정혁신(鄭赫臣)이란 자가 있는데, 가난하게 50년을 살면서 글을 읽고 도를 배우면서 다른 사람들과 교유를 하지 않는다고 하기에 신이 몰래 가서 보고는 이어서 유숙하면서 그가 지닌 바를 알아보았더니, 《중용(中庸)》《대학(大學)》을 많이 읽었는데 나이가 70세에 가까웠습니다. 초가집 6, 7간(間)에서 아들은 농사를 짓고 며느리는 김을 매어 먹고 살면서 산 밖에서 구하는 바가 없었습니다. 이런 사람을 감히 갑작스럽게 경명 행수(經明行修)라고 할 수는 없겠으나, 역시 가난을 견디는 결신(潔身)의 선비라고는 할 수 있으므로 감히 아뢰는 바입니다.

효열(孝烈)로써 정포(旌褒)하기에 합당한 자는 청주(淸州)의 고(故) 사인(士人) 변익하(卞益夏)가 효자로서 이름이 있었는데, 그가 죽자 문순공(文純公) 신(臣) 권상하(權尙夏)가 그 명정에 쓰기를 효자라 하였고, 보령(保寧)의 고 사인 김광찬(金光纘)도 역시 효자로서 이름이 있어서 고 판서 신(臣) 윤봉구(尹鳳九)의 만사(輓詞)에 말하기를, ‘마땅히 채방(採訪)되어 궁궐에 알려져 즉석에서 정려에 큰 글자가 빛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정산(定山)의 고(故) 사인(士人) 한규(韓逵)선조(宣祖) 때 사부(師傅) 한윤명(韓胤明)의 후손인데, 한규가 양세(兩世)의 효행으로써 이름이 본고장에 알려져 있고 사적(事蹟)은 유생들의 정문(呈文)에 자세히 기재되어 있습니다. 이 세 사람은 모두 포창·칭찬하는 은전이 있어야 할 듯합니다."

하니, 예조에서 복주(覆奏)하여 변익하김광찬에게는 정려를 내리고 한규에게는 급복(給復)하였다. 하교하기를,

"호남의 어사(御史)가 돌아와 서계(書啓)한 가운데 인재를 찾아내는 한 조항이 누락되었다. 본도는 지역(地域)이 넓은 고장인데, 어찌 한 사람의 충신(忠信)한 인재가 없겠는가? 어사가 지나치게 자세하고 조심하여 천거한 자가 없는 듯하니 매우 개탄스러웠다. 지금 호서 어사의 서계(書啓)를 보고 또 연주(筵奏)한 것을 들으니, 그 사람의 나이가 70세에 임박하도록 몸을 깨끗이 하고 경서를 깊이 연구하였으며 아들은 논을 갈고 며느리는 김을 매어 먹고 살면서 산 밖에서 구하는 바가 없다고 하였다. 이런 사람을 어찌 끝까지 산중에서 늙도록 하겠는가? 보령의 사인 정혁신(鄭赫臣)을 초사(初仕)에 조용(調用)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3책 23권 42장 B면【국편영인본】 45책 644면
  • 【분류】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 군사-군역(軍役) / 농업(農業) / 풍속(風俗)

○湖西暗行御史沈煥之復命, 進書啓論兵使具世勣扶餘縣監尹得愚公州判官徐直修庇仁縣監李運彬燕岐縣監崔熽全義縣監黃胤錫不治狀。 世勣得愚直修拿問勘罪, 運彬胤錫罷黜。 別單曰:

賑政事, 問于諸邑, 抄飢之始, 蓋或有濫抄之弊, 而亦無當抄, 而見漏者, 至於所給穀物, 必皆用箕颺殼, 鹽醬、魚藿, 亦皆先期準備, 或有用肉羹者, 莫不殫力, 若較勝者然, 夫豈諸長吏之賢一, 誠恤民, 有能至此哉? 洪惟朝家於蠲稅、減役等恤民之政, 靡不用其極, 而前後絲綸, 惻怛明白, 雖愚夫愚婦, 一聞皆知聖意之所當奉遵。 是以諸邑之爲賑政者, 蓋有過於分數, 而其不能者, 蓋一二邑耳。 以臣所歷之處, 通論今歲民情, 則亦可以驗一道之內矣。 夫察於道路, 而無棄土流離者, 觀於場市, 而無挈家呼乞者, 封里之聚, 而未聞愁苦怨咨之聲, 山野之僻, 而不違燒畬耕種之節, 雖以常歲較之, 亦不過是。 今則國家之憂, 不在於賑事之或慢, 而實在於倉穀之漸耗矣。 臣行到保寧界, 聞烏棲山中, 有士人鄭赫臣者, 窮居五十年, 讀書學道, 不與人交遊, 臣潛跡往見之, 仍留宿扣其所存, 則多讀《庸》《學》, 年近七十。 茅屋六七間, 子耕婦耘以爲食, 無所求於山外。 似此等人, 未敢遽謂經明行修, 而猶可謂之固窮潔身之士, 敢此登聞。 孝烈之可合旌褒者, 淸州故士人卞益夏, 以孝名。 其歿也, 文純公權尙夏, 題其旌曰孝子。 保寧故士人金光纉, 亦以孝名, 故判書臣尹鳳九輓詞有曰: "應知採訪重宸聞, 佇看閭旌大字煌。" 定山故士人韓逵, 宣廟朝師傅韓胤明之後孫也。 以兩世孝行, 名于本鄕, 而事蹟昭載儒生呈文中。 似此三人, 俱宜有褒美之典。

禮曹覆奏, 卞益夏金光纉旌閭, 韓逵給復。 敎曰: "湖南繡衣之回, 書啓漏却人才搜訪一款。 以本道幅員之廣, 豈無一人忠信? 而繡衣之過於審愼, 無所薦似, 甚以爲慨歎。 今見湖西御史書啓, 且聞筵奏, 其人年迫七旬, 潔身窮經, 子耕婦耘以爲食, 山外無所求云。 似此之人, 豈可終老山中? 保寧士人鄭赫臣, 初仕調用。"


  • 【태백산사고본】 23책 23권 42장 B면【국편영인본】 45책 644면
  • 【분류】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 군사-군역(軍役) / 농업(農業) / 풍속(風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