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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23권, 정조 11년 4월 2일 기해 4번째기사 1787년 청 건륭(乾隆) 52년

지방관의 처벌에 관한 호남 암행 어사 심진현의 서계

호남 암행 어사 심진현(沈晉賢)이 복명(復命)하였는데 서계(書啓)를 올려, 담양 전 부사(潭陽前府使) 홍배호(洪配浩)·전주 전 판관(全州前判官) 이의기(李宜耆)·운봉 현감(雲峰縣監) 한광적(韓光迪)·고산 현감(高山縣監) 이의일(李義逸)은 위법(違法)을 다스리지 않은 죄이고, 좌도 수군 절도사 허임(許任)은 송금(松禁)을 단속하지 못한 잘못이 있다는 것으로써 허임홍배호, 이의기는 잡아다 심문하여 정죄(定罪)하고, 한광적이의일은 파출(罷黜)하게 하였다. 그 별단(別單)에 이르기를,

"조창(漕倉)의 폐단 가운데 실로 개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대개 군산(群山)성당(聖塘) 두 창고에 소속된 여러 고을 절반은 산골짜기여서 조창에서 혹 수백 리가 떨어져 있으니 쌀을 실어다가 바칠 형세가 만무하여 으레 모두 돈으로 방납(防納)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방납하는 즈음에 갖가지 폐단이 다 생기게 되니 본읍(本邑)의 경우로 말한다면 호수(戶首)가 받아들이는 때에 주구(誅求)함이 갖추 이르게 되며 감관(監官)과 색리(色吏)가 영납(領納)하는 길에 쓸데없는 비용이 절반이나 됩니다. 이른바 노비(路費)나 태가(駄價) 등 각종 명색은 모두 민결(民結) 가운데서 더 징수하게 되니 통괄하여 계산하면 민간의 2석(石)의 값으로는 조창에 1석을 바치기도 오히려 부족합니다. 조창으로 말한다면 서울과 시골의 모리배(牟利輩)가 미포(米包)를 무역하는 데 힘을 써서 창고 아래에다 쌓아 두었다가 각 고을에서 납세할 때가 되면 차원(差員)에게 청탁하여 감관·색리와 부동(符同)하여 시가(市價)를 조종함으로써 값이 오르도록 힘써서 1석의 값에 시가(時價)의 반 배를 더한 연후에야 비로소 받아들이는 것을 허락합니다. 이어서 무역해 둔 곡식은 정조(精粗)를 따지지 않고 수효를 채워 실어와서 이익은 부자 장삿꾼에게로 돌아가고 피해는 가난한 백성에게로 돌아가니 널리 방법을 강구하여 바로잡는 바탕을 삼는 것이 마땅합니다.

인재(人才)의 경우에는 호남의 습속이 부경(浮競)함에 있어서 호서보다 더 심하고 박실(樸實)함에 있어서는 영남에 비해 아주 못하여 학문을 숭상하는 집안의 후손들이 부지런히 힘쓰는 것은 과구(科臼)131) 에 불과하며 향곡(鄕曲)의 준재(俊才)들이 성취하는 것은 모두 술수(術數)뿐입니다. 비록 더러 두세 명의 자호(自好)하는 선비가 그 사이에 끼어 있다 하더라도 신의 어리석은 견해로 어떻게 잠깐 말하는 모양을 보고 능히 분별할 수가 있겠습니까? 실로 성상께서 어진 인재를 급구(急求)하시는 지극한 뜻을 우러러 본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효열(孝烈)의 경우에는 남원부(南原府)의 유학(幼學) 정조문(鄭朝文)의 처 이씨(李氏)가 집 뒤 시내 옆에서 쑥을 캐는데 이웃에 사는 상한(常漢) 권만세(權萬世)란 자가 갑자기 달려들어 손을 잡고 강간을 하려고 하자 이씨가 죽기를 각오하고 반항하면서 사기(辭氣)가 더욱 사납게 되자 권만세가 그녀의 정조를 빼앗을 수 없음을 알고는 몸을 돌려 멀리 도망했습니다. 이씨가 분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와 손도끼로 오른쪽 팔을 자르고 또 목을 베려고 했는데 마침 다른 사람의 구원을 받고 중지되어 거의 죽으려다가 살아났으니, 마땅히 정려(旌閭)하고 포상해야 합니다. 순천부(順天府)의 무부(巫夫) 추절창(秋節昌)이란 자가 병이 위급해졌는데, 그의 아내 무녀인 안녀(安女)가 스스로 식도(食刀)를 가지고 몰래 외양간으로 들어가 치마 끈으로 왼쪽 허벅지 아래위를 묶고는 허벅지 살을 베어내어 그 어머니로 하여금 삶아서 그 물을 추절창의 입에 부어 넣게 하고 이어서 또 목욕하고 하늘에 빌자, 추절창이 그대로 다시 살아났습니다. 미천한 사람으로 이런 뛰어난 행실이 있는 것에 대해서는 족히 가상(嘉尙)하게 여길 만하니 급복(給復)하여 숭장(崇奬)하는 것이 실로 여론에 합당합니다. 민폐(民幣)의 경우에는 순창(淳昌) 사승(寺僧)의 지폐(紙弊)에 대해서 작년 연석(筵席)에서 아뢴 후에도 다시 전과 같으니 청컨대 빨리 삼군문(三軍門)에서 종이를 무역하는 폐단을 없애게 하소서."

하였는데, 대신(大臣)과 예조 당상(禮曹堂上)이 복주(覆奏)한 조선(漕船)에 대한 폐단은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자세히 조사하여 보고하게 하고, 순창 사승(寺僧)의 폐단은 삼군문에 납부하는 종이를 영원히 혁파하고 군문(軍門)으로 하여금 원가(元價)로 무역해 쓰도록 하며, 열녀 남원 이씨에게는 정려하고, 순천 안녀(安女)에게는 급복하게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3책 23권 36장 B면【국편영인본】 45책 641면
  • 【분류】
    행정(行政) / 인사(人事) / 사법(司法) / 군사(軍事) / 재정(財政) / 교통(交通)

  • [註 131]
    과구(科臼) : 과거 시험 공부.

○湖南暗行御史沈晋賢復命, 進書啓論潭陽前府使洪配浩全州前判官李宜耆雲峰縣監韓光迪高山縣監李義逸, 不治違法之罪、左道水軍節度使許任松禁不飭之失, 配浩宜耆拿問定罪。 光迪義逸罷黜。 別單曰:

漕倉之弊, 實有不可不釐革者。 蓋羣山聖塘兩倉所屬列邑, 半是山峽, 距漕倉或過數百里, 則萬無載米往納之勢, 例皆以錢防納, 而防納之際, 百弊俱生, 以言乎本邑, 則戶首收捧之時, 誅求備至, 監色領納之路, 浮費居半。 所謂路費、駄價種種名色, 皆自民結中加徵, 統以計之, 民間二石之價, 猶不足於漕倉一石之納。 以漕倉言之, 京鄕牟利之輩, 務貿米包, 積置於倉底矣, 及至各邑納稅之時, 請囑差員, 符同監色, 操縱市價, 務令翔聳, 一石之價, 加時直半倍, 然後始許捧納。 仍以貿置之穀, 不計精麤, 充數裝載, 則利歸富賈, 害及殘民, 博採講究, 以爲矯捄之地宜矣。 人才則湖南之俗, 浮競有甚於湖西, 樸實大遜於嶺南, 詩禮後裔所勤孜者, 不過科臼, 鄕曲俊才所成就者, 皆是術數。 雖或有數三自好之士, 處於其間, 以臣矇駿之見, 其何能辨別於造次言貌之間乎? 實無以仰體聖上急賢求才之至意。 孝烈, 則南原府幼學鄭朝文李氏, 採艾於家後溪澗之側, 隣居常漢權萬世者, 突入執手, 將欲强刦, 則李氏拚死相抗, 辭氣愈厲, 萬世知不可奪, 回身遠去。 李氏憤恨歸家, 手斧斫右腕, 又欲斫項, 適爲人救而止, 幾殊僅甦, 宜旌閭褒賞。 順天府巫夫秋節昌者, 病脹危急, 其妻巫女女, 自引食刀, 隱入於廐中, 以裳纓, 束結左股上下, 割出股肉, 使其母烹之, 取水灌節昌之口, 仍又沐浴禱天, 節昌仍以回甦。 賤人之有此異行, 足可嘉尙, 給復崇奬, 實合輿論。 民弊, 則淳昌寺僧紙弊, 昨年筵達後, 仍復如前。 請亟罷三軍門貿紙之弊。

大臣、禮堂覆奏漕船之弊, 令道臣, 詳覈以聞。 淳昌寺僧之弊, 永革三軍門所納之紙, 令軍門, 以元價貿用。 烈女南原 李氏旌閭、順天 女給復。"


  • 【태백산사고본】 23책 23권 36장 B면【국편영인본】 45책 641면
  • 【분류】
    행정(行政) / 인사(人事) / 사법(司法) / 군사(軍事) / 재정(財政) / 교통(交通)