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진을 제주에 위리 안치하도록 명하고 추국을 파하다
김우진을 제주(濟州)에다 위리 안치(圍籬安置)하도록 명하고 추국을 파하였다. 하교하기를,
"김우진의 죄악으로 옥문을 살아서 나가서야 되겠는가? 그가 원상(院相)의 아들이란 이유로써 병신년277) 이후로 조정에서 모든 것을 묻지 않고 체용한 것이 어떠하였는가? 그의 아비는 영의정이 되었고 그는 측근에 오랫동안 있었으니, 관작이 높고도 융성했으며 은총을 흡족하게 받았다. 그런데 갑자기 넋을 잃은 것처럼 스스로 임금을 끊었다가 결국 위아래가 버리는 데에 이르고 말았다. 그에게 조금이라도 이성이 있었다면 어찌 머리를 돌려 연연한 마음이 없겠으며 또한 가슴 가득히 황공해 하는 빛이 없겠는가? 참으로 천지에 용납할 수 없을 것처럼 하고 가슴이 내려앉은 것처럼 애통해 하며 머리를 땅에 처박고 처분을 내리기를 청하여 죽음을 구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감히 조정에서 날뛰고 온 세상을 기만하면서 처음부터 죄를 짓지 않은 것처럼 여기고 암암리에 습지(濕地)를 벗어난 것을 다행으로 여기었으나 조정에서는 여전히 대수롭지 않게 놔두었다. 또 궁연에서 환하게 깨우치고 많은 참작을 하여 구덩이에서 꺼내 좋은 자리를 주고 용사(龍蛇)278) 같은 것을 어린아이처럼 보살펴 주었으니, 그도 사람이므로 더욱더 눈물을 흘리며 허물을 반성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교화하기 어려운 이리 같은 성질이 점차 스스로 원수처럼 대하는 죄과로 돌아갔으니, 어찌 통분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여전히 허물을 감싸주는 뜻을 생각하여 사판에서 삭제하는 벌만 가볍게 시행하였으니, 그가 이처럼 극도로 조정을 저버린 것으로 볼 때 조정이 그를 보호해준 것이 지극하였다고 하겠다. 이번에 고변의 글이 나왔을 때 그의 이름이 그 가운데 먼저 들어 있었는데, 국문에 그의 내막이 숱하게 드러났다. 그의 처지로써 이 옥사에 들어갔으리라고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혼사를 권하였는지의 여부는 막론하더라도 이 일로 서로 수작하면서 예사로 들은 체 처음부터 자취를 세워 증거를 만들지 않았고 또 사람에게 스스로 해명하지도 않았으니, 그의 심보는 길가는 사람도 아는 바이다. 또 포도청의 문안을 보니, 종실(宗室)이 독약을 먹은 원인이 바로 그의 인척의 집과 연관되었는데, 그가 생전에 ‘김씨의 집안 일이 발생하면 내가 죽을 것이다.’고 하였으며, 심지어는 ‘아무개가 살면 나도 살고 아무개가 죽으면 나도 죽을 것이다.’고 말하였다. 그 말을 송낙휴가 직접 듣고 와서 고하였으니, 비록 그가 참여한 바가 없더라도 죄의 유무를 따질 것도 없이 그에게는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더구나 구선복과 대질한 공초가 나오자 역모를 한창 할 때에 그의 아우가 날마다 왕래하면서 사람을 내쫓고 소근거렸다는 것이 드러났으니, 설사 그가 또 참여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유사의 법으로 볼 때 어떻게 모면할 수 있겠는가? 그의 공초 가운데 ‘후일을 생각한 꾀였는데, 이른바 후일이란 불량한 무리들이 뜻을 달성할 때이다.’고 하였으니, 그에게 죄의 단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지경에 이르면 비록 살려내려고 해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원상(院相)의 아들이니, 참으로 역적 허견(許堅)처럼 몸소 범한 바가 없다면 어찌 차마 형벌을 주어 그의 아비로 하여금 생명을 보존하지 못하게 하겠는가? 또 문안을 자세히 열람해 보건대, 그 증거는 비록 고변의 글에 있으나 그 자취는 죄다 탄로났다고 할 수 없으니, 그의 한 가닥 목숨을 살려 주어도 형벌을 잘못 적용한 데에 이르지는 않을 것이다. 조정에서 원상에게는 반검(盤劍)의 법을 시행하지 않고자 이미 확고히 정해진 바가 있다. 죄인 김우진을 제주목(濟州牧) 대정현(大靜縣)에다 위리 안치하라."
하고, 선전관을 명하여 표신(標信)279) 을 가지고 의금부로 가서 옥에서 김우진을 꺼내 귀양지로 압송하라고 하였다. 또 금부 도사를 불러 구이겸을 압송하여 과천현(果川縣)에 가두어 두었다가 법의 집행을 기다리게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2책 22권 66장 B면【국편영인본】 45책 613면
- 【분류】사법(司法) / 변란(變亂)
- [註 277]병신년 : 1776 정조 즉위년.
- [註 278]
용사(龍蛇) : 반란을 도모한 자.- [註 279]
표신(標信) : 궁문(宮門)의 개폐(開閉), 야간의 통행이 금지된 시간 중의 통행 허가, 군국(軍國)의 긴급한 일에 관한 지시, 관원 군사 등의 소집의 증명으로 쓰는 표.○命金宇鎭圍籬安置于濟州牧, 罷推鞫。 敎曰: "以金宇鎭之罪惡, 尙可生出獄門乎? 渠以院相之子, 丙申以後, 朝家之所以剪拂而滌用之者, 果何如也? 其父則進秉勻軸, 渠則長置近密, 爵位尊且隆也, 恩寵優而渥也。 忽若喪魄, 自絶于天, 竟至於上下之所擯棄。 渠有一分彝性, 則豈無回首戀結之忱, 亦豈無滿心惶駭之色? 固當跼天蹙地, 崩隕痛迫, 泥首乞命, 求死之不暇, 而不惟反是, 乃敢翺翔朝端, 厚瞞一世, 自以爲初無干犯, 陰幸其暗中脫濕, 而朝家猶置之不屑之科。 又於宮筵, 洞諭而昭昕之, 積費許多商量, 坑坎而袵席之, 龍蛇而赤子之。 渠亦人耳, 尤宜泣血追愆, 而無奈難化者, 狠性駸駸然自歸於讎視之科, 寧不痛哉? 然猶深軫含垢之意, 薄施削版之典, 渠之負朝家至於此極, 而朝家之保渠, 可謂至矣盡矣。 今因急書之出, 而渠之名先入其中, 囊木就鞫, 情節狼籍。 以渠地, 而入此獄, 是豈意慮之所嘗及者乎? 婚事之勸與不勸, 姑無論。 旣以本事, 互相酬酢, 聽之若尋常, 初不立跡作證, 又不向人自明, 渠之心腸, 路人所知。 且見捕廳文案, 近宗之服毒根因, 直接於渠之姻家, 而其生前之言以爲: ‘金家事出, 吾當死矣。’ 至曰: ‘某生則吾生, 某死則吾死。’ 宋樂休躬聞而來告, 則雖使渠無所與知, 情犯有無, 不必較論, 在渠辭死而已。 且況善復面質之招出, 而渠弟之逐日來往, 屛人唼囁, 乃在逆謀方張之時, 藉使渠, 又不聞知, 收司之典, 烏得免乎? 渠供中: ‘顧瞻他日之計’, 所謂他日, 卽群不逞得志之時云云, 在渠可謂斷案。 到此雖欲求生於罔赦, 誠末如何矣。 然而渠旣院相之子也, 苟無賊堅之躬犯, 寧忍置辟, 使渠父, 不得保性命乎? 且細閱文案, 其證則雖在於急書, 其跡則未可謂盡綻。 貸其一線之喘, 似不至失刑。 朝家於院相, 不欲直施盤劍, 已有牢定者。 罪人金宇鎭, 濟州牧 大靜縣圍籬安置。" 仍命宣傳官持標信至王府, 出宇鎭于獄, 押送配所。 又召諭禁府都事, 押具以謙, 囚于果川縣, 以待用法。
- 【태백산사고본】 22책 22권 66장 B면【국편영인본】 45책 613면
- 【분류】사법(司法) / 변란(變亂)
- [註 2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