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국영 상계군 이담 등의 역적됨을 왕대비가 빈청에 언문으로 승정원에 전하다
왕대비께서 빈청에 언문(諺文)으로 하교하기를,
"아녀자가 조정의 정사에 간여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나라가 망하려는 때를 당하여 성상이 위태롭고 나라가 위험한 것을 눈으로 직접 보고도 별것 아닌 작은 혐의를 지킨 채 끝내 한 마디 말도 하지 않는다면 종사(宗社)의 죄인이 될 뿐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선대왕의 영령이 어떻게 생각하시겠는가?
미망인(未亡人)이 병신년245) 이후로 고질을 앓다가 근년에 와서는 날로 더욱 심해져서 조석 사이에 죽을 염려가 있었으나, 진실로 성상의 독실한 효성에 감격하여 종사를 위해 모진 목숨을 보존해 왔다. 그런데 지금 한 번도 평소 가슴에 쌓인 것을 말하지 않았다가 하루아침에 죽어버릴 경우 내가 눈을 감지 못할 한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진실로 열성조와 선대왕을 돌아가 뵈일 면목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부득이 이렇게 언문의 전교를 내리게 되니, 이 일은 오로지 종사를 위하고 성상을 보호하여 대의(大義)를 밝히려는 데에서 나온 것이니, 깊이 살펴 보도록 하라. 병신년과 정유년246) 이후로 괴변이 거듭 발생하였는데, 기해년247) 에 이르러 홍국영(洪國榮)과 같은 흉악한 역적이 또 나와 감히 불측한 마음을 품었다. 그리하여 주상의 나이 30이 채 차지도 않았는데 감히 왕자를 둘 대계(大計)를 저지하고 상계군(常溪君) 〈담(湛)을〉 완풍군(完豊君)으로 삼아 가동궁(假東宮)이라고 일컬으면서 흉악한 의논을 마음대로 퍼뜨렸다. 주상이 그의 죄악을 통촉하고 그 즉시 쫓아내자, 흉악한 모의가 더욱 급해져서 밤마다 그의 집에 상계군을 맞이하여 놓고 널리 재화를 풀어 무식한 무리들과 체결하였으므로 잠깐 사이에 변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미망인이 할수없이 언문의 전교를 반포하여 왕자를 두는 도리를 조정에 유시하였는데, 이후로 홍국영이 흉악한 꾀를 부리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늘에는 두 개의 해가 없는 법이고 나라에는 두 임금이 없는 법이니, 진실로 조금이라도 사람의 마음이 있는 자라면 누군들 이를 모르겠는가? 하늘이 돈독히 도우시고 오르내리는 선왕의 영령들께서 도우셔서 임인년248) 에 원자가 탄생하였는데, 이는 실로 종사의 무궁한 경사로써 태산과 반석과 같은 나라의 형세를 믿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천만 뜻밖에 5월에 원자가 죽는 변고를 만나 성상이 다시 더욱 위태로워졌으나 그래도 조금은 기대할 수 있는 소지가 있었는데, 또 9월에 상의 변고를 당하였다. 궁빈(宮嬪) 하나가 죽었다고 해서 반드시 이처럼 놀라고 마음 아파할 것은 없지만, 나라에 관계됨이 매우 중하기 때문이다. 두 차례 상의 변고에 온갖 병증세가 나타났으므로 처음부터 이상하게 여기었는데 필경에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이를 생각하면 가슴이 막히고 담이 떨려 일시라도 세상에 살 마음이 없었다. 나와 같은 병으로 연명하여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속미음(粟米飮)을 마셨기 때문인데 이것까지 들지 않고 날짜를 표시해 놓고서 죄다 봉해서 놔두었다. 비록 미음을 든다고 대전(大殿)에 말하기는 하였으나 지금의 병세는 실로 부지하기 어렵다.
그러다가 영의정이 20년 가까이 폐기되었다가 등용되어 다시 의정부에 나온다는 말을 들었다. 그가 선왕께서 〈자신을〉 다시 살려주신 은혜에 보답하고 지금 주상의 권고하는 뜻에 보답하는 것은 바로 나라의 형세를 부지하고 의리를 밝히어 종사를 안정시키고 성상을 보호하는 데에 있으므로 이를 바라고 있었는데 아직까지도 듣지 못하였다. 대체로 국사는 전적으로 영의정에게 위임하는데 더구나 요즈음 조정에 있는 사람들과 다른데 말할 것이 있겠는가? 오늘날 조정에 있는 자들에 있어서는, 기해년에 말하지 못한 것을 때늦었다고 말할 수 있는데 지금 거듭 간택할 때에도 한 마디 말도 없었다. 오늘날 조정의 신하들이 모두 대대로 녹을 먹은 신하들이고 또한 너나없이 나라의 은혜를 후하게 입었는데도 불구하고 대신 이하 나라를 위해 대의를 밝힌 사람이 하나도 없으니, 이것이 앞으로 어떻게 되겠는가?
이때에 상계군이 불의에 죽었으므로 비록 그에게 무슨 아는 것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방안에서 죽어 걱정이 조금 풀린 것 같지만 대의가 펴지지 못하고 윤강이 없어진 것은 진실로 그의 생사에 차이가 없다. 이러고도 나라를 보존할 수 있겠는가? 전후의 흉악한 계교가 매우 낭자하여 흔적이 죄다 탄로났었으나, 주상의 지극한 인자함이 뭇 왕들보다 훨씬 뛰어나 아끼고 돈독히 지내어 매사를 비호하고 가는 곳마다 숨겨 주어 말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언문의 하교를 이미 누차 정서하여 늘 반포하려고 하였으나 대전(大殿)이 간곡히 만류한 바람에 지금까지 참아왔다만, 만약 언문의 전교를 끝내 반포하지 못할 경우 이 세상에 살 뜻이 없을 것이다. 미망인이 들어보니, 명성 대비(明聖大妃)께서는 사가의 어버이의 일로 차대의 처소인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통곡하셨고 인원 성후(仁元聖后)께서는 선왕조 임신년249) 에 수라를 물리고 왕위를 사양한 일로 선화문에 나가서 백관들에게 하교하셨다고 한다. 오늘날 위태롭고 다급한 나라의 형세를 두 대비 때와 비교해 볼 때 어찌 문에 나가서 통곡하고 말 정도이겠는가? 미망인의 말을 비록 들을 것이 없지만 그 마음은 종사를 위해 성상을 돕고 나라의 형세를 튼튼히 하는 것이다. 미망인이 실낱 같은 한 가닥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어찌 차마 모른 채 앉아서 보고 있겠는가? 봉해둔 탕약을 지금 모두 되돌려 보내고 수라를 물린 뒤 겨우 정신을 수습하여 언문의 하교를 대충대충 썼다만 목이 메어 다 말하지 못하니, 자세히 보고 이 뜻을 안팎의 사람들로 하여금 잘 알게 하라."
하였다. 또 언문의 전교를 내리기를,
"이 언문의 전교는 대신만 보아서는 아니 된다. 누구를 막론하고 임금의 원수와 나라의 역적을 토벌하는 자가 있으면 나의 병이 곧 나을 수 있을 것이니, 이 뜻을 승정원에 전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2책 22권 51장 A면【국편영인본】 45책 605면
- 【분류】왕실(王室) / 사법(司法) / 변란(變亂)
- [註 245]병신년 : 1776 정조 즉위년.
- [註 246]
정유년 : 1777 정조 원년.- [註 247]
○王大妃下諺敎于賓廳曰: "女君之干與朝政, 非美事也。 然而當宗國將亡之時, 目見聖躬之孤危, 國勢之岌嶪, 若守區區小嫌, 終無一言, 則非但爲宗社之罪人。 先大王在天之靈, 將以爲何如也? 未亡人自丙申以後, 貞疾沈痼, 年來日益澟綴, 有朝夕之慮, 而實感聖孝之篤至, 爲宗社保全頑命。 今不一展素蘊, 一朝溘然, 則予之不瞑之恨, 固勿言, 實無歸拜列聖朝曁先大王之顔, 故不得已下此諺敎。 惟玆之擧, 專出於爲宗社、保聖躬, 以明大義也。 其深察焉。 丙丁以後, 變怪層出。 至于己亥, 凶逆如國榮者又出, 敢懷叵測之心。 主上春秋未滿三十, 而乃敢沮遏儲嗣之大計, 以常溪君爲完豐, 稱以假東宮, 肆發凶論。 主上燭其罪惡, 卽爲屛黜, 凶謀益急, 夜夜邀致常溪於渠家, 廣布財貨, 締結無識之類, 變在呼吸, 故未亡人不獲已布示諺敎, 以廣儲嗣之道, 曉諭朝廷。 從玆以後, 國瑩凶謀, 遂不得售。 天無二日, 國無二君。 苟有一分人心者, 孰不知之? 皇天篤佑, 陟降陰隲, 歲在壬寅, 元良誕降, 實是宗社無彊之慶, 而恃國勢以泰山磐石。 千萬夢寐之外, 遭五月之變, 聖躬益復孤危, 而猶有一分企待之地, 又見九月變喪。 一宮嬪之喪, 未必驚痛至此, 而爲宗國關係甚重, 而兩次喪變, 症勢凡百, 自初怪底, 畢竟至於此境。 思之則臆塞膽顫, 無一時生世之念。 以予之病, 延命扶持者, 惟在粟米飮, 而此亦不進, 標其日字, 盡爲封置。 雖以進御, 爲言於大殿, 而目下病勢, 實難支保。 聞領相起廢於近二十年之後, 復登廊廟。 其所以報先朝再生之恩, 酬當宁眷注之意, 政在於扶國勢、明義理, 以安宗社, 以保聖躬, 竊以是望焉, 尙此無聞。 蓋國事專責於元輔, 況與近日在朝之人有異, 至若近日在朝者, 則己亥之所不能言, 尙可謂之以晩時, 而此時重卜, 亦無一言。 今日朝廷, 無非世祿之臣, 亦莫不厚被國恩, 而自大臣以下, 無一人爲宗國明大義, 此將奈何? 此際, 常溪君, 不意致死, 雖未知渠有何知, 而臥死牖下, 憂虞雖似少紓, 大義之未伸, 倫綱之蔑如, 固無間於生死也。 如此而國可以保存乎? 前後凶計, 極其狼藉, 形跡畢露, 而主上之至仁至慈, 卓越百王, 愛惜而敦睦之, 每事庇覆, 隨處藏匿, 使不得言。 故諺敎正書, 已至累次, 每欲傳示, 而以大殿之懇挽, 至今忍耐, 而若使諺敎, 終未頒示, 則將無意此世矣。 未亡人聞之, 明聖大妃, 以私親之事, 尙臨於次對處所熙政堂而痛哭, 仁元聖后, 於先朝壬申, 以却膳辭位之事, 臨御宣化門, 下敎於百僚。 今日國勢之危且急者, 比之兩大妃殿時, 奚特痛哭臨門而已乎? 未亡人之言, 雖不足聽聞, 其心則爲宗社、扶聖躬、固國勢也。 未亡人一縷未絶之前, 豈忍冥然坐視乎? 封置湯劑, 今皆還下, 常膳退却, 僅收精神, 諺敎草草書本, 而哽咽不能盡布。 其詳覽之, 將此意使中外知悉。" 又下諺敎曰: "此諺敎, 匪大臣之所可獨見。 勿論誰某, 有能討君讎國賊者, 則予病庶可卽瘳。 此意傳于政院。"
- 【태백산사고본】 22책 22권 51장 A면【국편영인본】 45책 605면
- 【분류】왕실(王室) / 사법(司法) / 변란(變亂)
- [註 2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