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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 20권, 정조 9년 12월 6일 신사 1번째기사 1785년 청 건륭(乾隆) 50년

장진진 절목

차대(次對)하였다. 장진책 별장(長津柵別將)을 올려서 장진진 첨사(長津鎭僉使)로 삼았다. 【절목(節目) 1. 장진(長津)의 토지와 인민을 이미 첨사(僉使)에게 소속되게 하였는데, 남쪽은 중령(中嶺) 황초령(黃草嶺) 위에서부터 북쪽으로 삼수(三水)의 설관(雪關)까지 2백 리가 되고, 동쪽은 부전령(赴戰嶺)에서부터 서쪽으로 강계(江界)의 설한령(雪寒嶺) 위까지 1백 리가 되니, 이로써 장진진(長津鎭) 사방의 경계로 삼는다. 1. 과거 별장(別將) 때에는 본래 전패(殿牌)를 봉안(奉安)한 일이 없었는데, 지금의 경우 다른 읍진(邑鎭)의 예에 의하여 객사(客舍)에 봉안한다. 1. 이미 첨사로 승격시켰으니 일의 체통이 그전과는 다르다. 장진책(長津柵)의 책(柵)자를 진(鎭)자로 고친다. 1. 경내(境內)의 전결(田結)과 속전(續田)은 1백 73결(結) 69부(負) 7속(束)인데, 법전(法典)에 의하여 마포(麻布)를 세(稅)로 거두고, 모두 회록(會錄)한다. 1. 군정(軍政)·전부(田賦)·환곡(還穀)의 삼정(三政)은 이미 본진(本鎭)에 소속시켜 전념(專念)하여 주관하도록 하였으니, 검험(檢驗) 및 용형(用刑)과 중옥(重獄) 외의 송결(訟決)은 모두 수령(守令)의 예에 의하여 시행한다. 1. 본진 각창(各倉)에 있는 환곡과 영·부(營府)의 각곡(各穀)은 합하여 2만 5천 2백 36석이요, 절미(折米)는 곧 7천 6백 7석인데 절미 각곡에서 6천 석을 한정하여 아주 본진에 떼어 주어 환곡으로 삼도록 하고, 나머지 수 1천 6백석 영(零)은 본부(本府)로 이전(移轉)한다. 1. 토지(土地)는 비록 본진에 속하였으나 속전(續田)으로서 본래 미·태(米太)의 세납(稅納)이 없고 다만 속포(續布)만을 수봉(收捧)하는데, 그 가운데 5동(同)을 떼어 주어 다른 진(鎭)의 예에 의하여 급료(給料)의 수용으로 삼는다. 1. 사방에서 유입(流入)하는 백성을 갑자기 단속(團束)함으로써 소란을 일으켜 사방으로 흩어지는 폐단을 초래해서는 안 될 것이니, 군액(軍額)으로 보군(步軍) 4초(哨)를 우선 마련 작정(酌定)하여 점차 충정(充定)하는 바탕을 삼도록 한다. 1. 장교(將校)로는 중군(中軍)·천총(千摠)·파총(把摠) 각 1원, 초관(哨官) 4원, 기패관(旗牌官) 10원, 지구관(知彀官) 2원, 기고관(旗鼓官)·군기 감관(軍器監官) 각 1원, 병방 군관(兵房軍官) 2원을 군액으로 정하되, 기수 초관(旗手哨官)·당보 초관(塘報哨官) 각 1원은 기고관과 기패관으로서 겸하여 임명하고, 중군은 향무(鄕武)를 막론하고 반드시 위력(威力)이 있고 변경(邊境)의 사무를 익히 아는 자를 가려서 차출한다. 1. 본진은 서북 양도(西北兩道)의 경계에 자리를 잡고 있어 3곳의 영애(嶺隘)와 한 길의 장강(長江)은 실로 등한(等閑)한 관방(關防)이 아니니, 관북(關北) 성진(城津)의 예에 의하여 독진(獨鎭)의 방수장(防守將)으로 시행하되 연강(沿江)에 있는 삼수(三水)의 서쪽 6진(鎭)은 비록 전속 관할(專屬管轄)할 수 없으나, 시급한 변경 정세(情勢)에 있어서는 모두 주진(主鎭)의 예에 의하여 즉시 빨리 보고하며, 그 나머지 일이 있고 없음에 대해서도 늘 월말(月末)에 역시 보고한다. 당상 첨사(堂上僉使)는 공문(公文)을 보내고, 당하 첨사(堂下僉使)는 단첩(單牒)을 보내며, 만호(萬戶)와 권관(權管)은 서목(書目)을 갖추어 첩정(牒呈)한다. 1. 아병(牙兵)은 곧 이·노(吏奴)로서 대(隊)를 편성하되 신설(新設)한 초기에 갑자기 배치하기가 어려우니 이 문제는 우선 진속(鎭屬)이 모양을 이루기를 기다려서 다시 논의하여 마련한다. 1. 이미 변경의 중진(重鎭)으로 삼았으니 성 쌓는 문제는 조금도 늦출 수 없는데, 들어갈 물력(物力)을 실로 갑자기 마련하기가 어려우니 재물이 넉넉하고 백성이 많아지기를 조금 기다려서 경영(經營)하는 바탕을 삼도록 한다. 1. 이미 성첩(城堞)이 없으니 성정군(城丁軍)을 우선 사용할 만한 곳이 없으나 성을 쌓고 못을 파는 일은 실로 조만간(早晩間) 그만둘 수 없는 일이다. 향무(鄕武)를 막론하고 모두 대오(隊伍)를 편성하되 삼수(三水) 갑산(甲山)의 것에 의하여 예로 삼는다. 1. 본진의 군기(軍器)와 각종 기구(器具)의 원 수량은 매우 적어 1초군(哨軍)이 사용할 것으로도 못되니, 도내 다른 읍진(邑鎭)의 여유 있는 곳에서 자진(自進)하여 병영(兵營)과 상의하여 그 떼어 줄 수량을 본사(本司)에 보고한 뒤에 시행하도록 한다. 1. 본진에 이미 관방(關防)을 설치하였으니 별해진(別害鎭) 경계에서 황초령(黃草嶺) 및 연강(沿江) 위아래까지 파수군(把守軍)을 육진(六鎭) 각보(各堡)의 예에 의하여 1장(將) 2졸(卒)씩 설치하여 파수(把守)한다. 중령(中嶺)에서 함흥부(咸興府)까지는 파발군(擺撥軍)을 죽 배치하여 공문(公文)의 거래(去來)를 제때에 전보(傳報)하도록 한다. 1. 토지 인민 및 군정(軍政)·전부(田賦)·환곡(還穀)의 삼정(三政)이 이미 본진에 소속되었으니 영·부(營府)에서 정한 바의 가솔(假率) 봉무사(烽武士)와 중령(中嶺)의 가솔 등 각종 군역(軍役)을 모두 면제(免除)해 주어 부(府)와 진(鎭)에 첩역(疊役)하는 일이 없게 하여 안주(安住)하며 생활할 수 있게 한다. 1. 본진을 이미 첨사(僉使)로 승격시켰으니 노비(奴婢)가 없을 수 없는데, 달리 변통할 길이 없다. 본진 가까운 고을에 있는 시노비(寺奴婢) 가운데 노비 각 6구(口)를 떼어 지급한다. 1. 독진(獨鎭)의 방수장(防守將)으로 시행하였으니, 순영(巡營)과 병영(兵營)에 뵈올 때의 좌차(座次)는 성진(城津)의 예에 의하여 시행한다. 1. 습속(習俗)에 죽기를 작정하고 진졸(鎭卒)을 기피하는 것은 그것이 토병(土兵)이란 명칭이 있어 사람들이 모두 천하게 보기 때문이다. 장교(將校)와 군졸(軍卒)을 본도에서 봉군(烽軍)을 봉무사(烽武士)로 고쳐 부르는 예에 의하여 방수(防守)란 명칭으로 바꾸어 그 명호(名號)를 조금 달리하는 뜻을 보인다.】


  • 【태백산사고본】 20책 20권 39장 A면【국편영인본】 45책 544면
  • 【분류】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재정(財政) / 군사(軍事)

○辛巳/次對。 陞長津柵別將, 爲長津鎭僉使。 【節目: 一, 長津之士地、人民, 已爲劃屬僉使, 南自中嶺、黃草嶺上, 北至三水 雪關爲二百里, 東自赴戰嶺, 西至江界 雪典嶺上, 爲一百里, 以此爲長津鎭四方之界。 一, 在前別將時, 元無殿牌奉安之事, 今則依他邑鎭例, 奉安客舍。 一, 旣陞僉使則事, 面有異。 長津柵之柵字改以鎭字。 一, 境內田結續田, 爲一百七十三結六十九負七束, 法典以麻布收稅, 幷爲會錄。 一, 軍、田、糴三政, 旣屬本鎭, 使之專意主管, 則撿驗及用刑、重嶽外訟決, 一依守令例施行。 一, 本鎭各倉所在還穀, 管府各穀, 合二萬五千二百三十六石, 折米乃爲七千六百七石, 折米各穀限六千石, 永劃本鎭, 以爲糶糴之地, 而餘數一千六百石零, 移轉本府。 一, 土地, 雖屬本鎭, 而旣是續田, 元無米太稅納, 只捧續布, 取其中劃付五同, 以爲依他鎭例給料之需。 一, 四處流入之民, 不可猝地拘束, 以致騷擾渙散之弊, 軍額以步軍四哨, 姑爲磨鍊酌定, 以爲次次塡充之地。 一, 將校, 則中軍、千摠、把摠各一員、哨官四員、旗牌官十員、知彀官二員、旗皷官、軍器監官各一員、兵房軍官二員定額, 而旗手哨官、塘報哨官各一員、則旗皷、旗牌官兼差, 中軍毋論鄕武, 必以有風力、熟諳邊務者, 擇差。 一, 本鎭處於西北兩道之界, 三處嶺阨, 一路長江, 實非等閑關防, 依北關城津例, 以獨鎭防守將施行, 而沿江所在三水西六鎭, 雖不得專屬管轄, 至於時急邊情, 一依主鎭例, 登時馳報, 其餘有無事, 每朔末, 亦爲修報, 而堂上僉使則文移, 堂下僉使則單牒, 萬戶、權管, 則具書目牒呈。 一, 牙兵, 乃吏、奴作隊, 而新設之初, 猝難排置, 此一款姑待鎭屬之成樣, 更議磨鍊。 一, 旣爲邊地重鎭, 則纂族一款, 不容少緩, 而所入物力, 實難猝辦, 稍待財裕民殷, 以爲經紀之地。 一, 旣無城堞, 則城丁軍, 姑無可用之地, 而築城鑿池, 實是早晩間不可已之事。 毋論鄕武, 一倂編伍, 依三、甲爲例。 一, 本鎭軍器、各樣什物, 元數甚少, 不滿一哨軍所用, 道內他邑鎭有裕處, 自遣兵營, 商量其移劃之數爻, 報本司後許施。 一, 本鎭旣設關防, 則自別害鎭境, 至黃草嶺底, 沿江上下把守軍, 依六鎭各堡例, 一將二卒式設置把守。 自中嶺至咸興府, 則列置撥軍, 以爲公文去來, 及時傳報之地。 一, 土地人民及軍、田、糴三政, 旣屬本鎭, 則營府所定假率烽武士、中嶺假率等, 各色軍役, 一倂免給, 俾無府鎭疊役, 以爲安集奠居之地。 一, 本鎭旣陞僉使, 則不可無奴婢, 而他無變通之道。 本鎭傍近邑所在寺奴婢中, 奴婢各六口劃給。 一, 以獨鎭防守將施行, 則巡、兵營現謁時, 座次依城津例施行。 一, 習俗之抵死諱避鎭卒者, 以其有土兵之稱, 而人皆賤之之故也。 校卒依本道烽軍之改稱烽武士例, 換以防守之名, 以示稍異其號之意。】


  • 【태백산사고본】 20책 20권 39장 A면【국편영인본】 45책 544면
  • 【분류】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재정(財政) / 군사(軍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