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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 20권, 정조 9년 7월 14일 신유 4번째기사 1785년 청 건륭(乾隆) 50년

장진의 고을 설치와 장파의 창고 설치에 대한 논의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장진(長津)에 고을을 설치하는 문제와 장파(長坡)에 창고를 설치하는 일의 편부에 대해서 원임 대신들에게 문의하니, 영돈녕부사 정존겸(鄭存謙)은 말하기를, ‘고을을 설치하는 문제는 일이 거창하여 시작을 신중히 해야 합니다. 무산(茂山)은 비록 토지가 비옥하고 백성들이 모여 있었지만 먼저 변장(邊將)을 두어 여러 해 지난 뒤에서야 비로소 고을을 설치하였습니다. 장진에 진보(鎭堡)를 설치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므로 고을을 설치하는 일을 갑자기 논의할 수 없으니 오직 신중히 처리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장파는 땅이 황폐한 데다가 민호(民戶)도 영성(零星)한데 창고를 설치하는 일은 다만 폐단만 증가시킬 뿐이니 내버려 두는 것이 옳습니다.’라고 하였고, 판중추부사 서명선(徐命善)은 말하기를, ‘신이 지난 겨울에, 장진은 우선 첨사(僉使)로 승격시키고 장파는 경솔히 논의하기 어렵다고 아뢴 바 있었으니 별반 다른 의견이 없습니다.’라고 하였으며, 판중추부사 이휘지(李徽之)는 말하기를, ‘장진을 이미 첨사로 승격시켰으니, 오직 사람을 가리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고을을 설치하고 창고를 설치하는 논의는 내버려 두더라도 무방합니다. 장파에 창고를 설치하는 문제는 지역이 변경(邊境)이요, 일이 창시하는 것에 관계되어 실로 갑자기 논의하기 어려우니, 내버려 두는 것이 옳겠습니다.’라고 하였고, 판중추부사 이복원(李福源)은 말하기를, ‘군병은 진보에 속하고 백성은 고을에 속합니다. 장진에서 함흥(咸興)까지는 거리가 아주 멀어서 백성들의 질고(疾苦)를 관(官)에서 알 수 없습니다. 지금은 이미 별장(別將)을 이력(履歷)이 있는 첨사(僉使)로 승격시켰으니, 가려서 보내는 방도는 전일에 견줄 바가 아닙니다. 군병과 백성을 모두 첨사에게 소속시켜도 백성과 고을이 동떨어지게 멀게 되는 폐단이 없을 것입니다. 정제(定制)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또 다시 고친다면 사면(事面)이 매우 잡스러운 데다가 관방(關防)도 반드시 더 엄중(嚴重)하지 못할 것입니다. 북관(北關)은 토지가 넓고 백성은 드물어 풍년에는 곡물(穀物)을 흙처럼 사용하여 비축(備蓄)할 줄을 모르다가 한 번 흉년을 맞이하면 오로지 남도(南道)의 곡물만을 바랄 뿐입니다. 만약 연해(沿海) 및 두메에 많은 창고를 설치하고 풍년에 곡물을 무역(貿易)하여 비축하고 사임(社任)과 이임(里任)들로 하여금 환곡을 맡아서 관리하게 한다면 의당 수재(水災)·한재(旱災)의 대비가 될 것입니다. 장파에 비록 보(堡)를 설치하지 않더라도 창고를 설치하자는 논의는 아마도 허가하여야 할 듯합니다."라고 하였으며, 판중추부사 김익(金熤)은 말하기를, ‘장진(長津)을 중진(重鎭)으로 승격시키고 첨사를 두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고을을 설치한다면 실효(實效)의 유무를 강구(講究)하지 않고 한갓 칭호(稱號)의 높낮이만 취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민정(民情)이 고을 설치를 원하고 진보(鎭堡)의 설치는 원하지 않고 있음이 참으로 도신(道臣)과 수신(帥臣)이 아뢴 바와 같다면 우선 민정에 의하여 시행할 것입니다. 장파(長坡)는 새로이 입주(入住)한 백성이 5, 6호에 지나지 않는다 하니, 먼저 창고를 설치하고 적곡(糴穀)을 받아들이기를 기다린다는 것은 아마도 너무나 조급한 계책인 듯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장진의 백성들이 고을 설치를 원하고 진보의 설치를 원하지 않음은 토병(土兵)이란 이름을 기피(忌避)하려는 데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그런데 토지와 인민을 모두 맡겨 주었고, 창고와 옥송(獄訟)도 역시 주장(主張)하도록 하였으니, 모든 규모가 고을과 다름이 없습니다. 또 묵고 황폐한 땅을 개척하여 비로소 진을 설치하고 다음에 고을을 설치함은 본도(本道)에 있어서도 무산(茂山)의 전례가 있으니, 진을 먼저 설치하고 그 편부에 대하여 분명히 안 뒤에 고을을 설치한 때문입니다. 지금 장진의 경우도 마땅히 다름이 없이, 종전대로 변지 첨사(邊地僉使)를 특별히 가려서 내려보내되 그 성과를 기다려서 읍치(邑治)를 설치하는 것이 아마도 사의(事宜)에 합당할 듯합니다. 장파에 창고를 설치하는 문제도 역시 장대(張大)한 일이므로 우선 수신(帥臣)의 요청에 의하여 침역(侵役)·정세(定稅)하지 말며, 이어서 부근의 창곡(倉穀)에서 식량(食糧)과 종자(種子)를 지급하여 안주(安住)해 나갈 수 있는 방도를 삼도록 하며, 땅이 개간(開墾)되고 백성들이 많아지기를 기다려서 혹은 창고를 설치하거나 혹은 진보를 설치하는 것이 진실로 온당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 대신(大臣)들의 논의가 이와 같이 서로가 같지 않으니 감히 마음대로 변경할 수 없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장진에 고을을 설치하는 문제는 경(卿) 등의 의논이 진실로 의견이 있다. 민정(民情)이 비록 진보의 설치를 원하지 않고 고을을 설치하는 것을 원한다고 하더라도 진보를 설치한 지 1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또 고을을 설치하도록 한다면 조정에서 원대(遠大)함을 경영하고 시작을 도모하는 체통이 아니니, 다시 앞일을 살펴보아 승격시켜 읍치(邑治)를 만들되, 무산의 전례(前例)가 참으로 좋다. 그런데 듣건대 그 지역은 거의 수백 리에 달하고 민호(民戶)는 누천(累千) 호에 밑돌지 않는다 하니 관방(關防)이나 토지와 인민에 있어 삼수군(三水郡)갑산부(甲山府)에 비교하여 도리어 나은 점이 있다. 이는 변장(邊將)의 명칭이 있으나 수령(守令)의 직책을 겸하고 있으니, 군정(軍政)과 전부(田賦)·환곡(還穀)의 삼정(三政)은 한결같이 해당 진보(鎭堡)에 위임하여 전념하여 주관(主管)하게 하는 것이 역시 타당할 듯하다. 그러나 새로이 창설하는 곳이므로 백성들이 원하지 않는 일을 해당 진보에서 진실로 좋은 방편(方便)에 따를 수만 있다면 공가(公家)나 사가(私家)에 효과가 반드시 많아 도움이 될 것이다. 이러한 뜻으로 도신과 수신에게 행회(行會)하여 이에 의하여 거행하게 하되, 그 형지(形止)와 조처한 사목(事目)을 모름지기 곧 조목별로 열거(列擧)하여 장문(狀聞)하도록 하라. 장파에 창고를 설치하는 문제는 경 등의 말이 역시 매우 타당하니, 계문(啓聞)한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0책 20권 19장 A면【국편영인본】 45책 533면
  • 【분류】
    행정(行政) / 재정(財政)

○備邊司啓言: "長津設邑、長坡設倉便否, 議于原任大臣。 則領敦寧府事鄭存謙以爲: ‘設邑事巨, 貴在愼始。 雖以茂山之土沃民聚, 先置邊將, 積有年所, 始乃設邑。 長津設鎭屬耳, 不宜遽議其設邑, 惟當審愼處之。 長坡, 地旣荒絶, 戶亦零星, 倉厫設置, 只增弊端, 置之爲宜。’ 判中樞府事徐命善以爲: ‘臣於昨冬, 以長津則姑陞僉使, 長坡則有難輕議, 有所仰陳。 別無他見。’ 判中樞府事李徽之以爲: ‘長津旣陞僉使, 惟在於擇人。 設邑與設倉之議, 置之無妨。 長坡設倉, 地是邊境, 事係創始, 實難遽議, 置之爲宜。’ 判中樞府事李福源以爲: ‘軍屬於鎭, 民屬於邑。 長津之距咸興絶遠, 民之疾苦, 官不得知。 今則旣陞別將爲履歷, 僉使擇送之道, 非前日比。 軍與民, 皆屬僉使, 亦無民邑隔遠之弊矣。 定制未幾, 又復改易, 事面旣極屑越, 關防未必增重。 北關土廣民稀, 豐年則用穀如土, 不知儲蓄, 一遇歉荒, 專仰南穀。 若於沿海及深峽, 多置倉舍, 豊年貿穀儲峙, 使社任里任輩, 典守糶糴, 則宜爲水旱之備。 長坡雖不設堡, 設倉之議, 恐在當許。’ 判中樞府事金熤以爲: ‘長津陞爲重鎭, 建置僉使, 未幾設邑, 不究實效之有無, 徒取稱號之高下耶? 惟是民情之願邑不願鎭, 儘如道、帥臣所陳, 姑且依民情施行, 長坡新接之民, 不過五六戶云, 先設庫舍, 以待捧糴, 恐涉太早計。’ 云矣。 長津民人之願邑不願鎭, 不過厭避土兵之名而已, 而土地人民, 旣已竝付倉厫, 獄訟亦令主張。 規模凡百, 無異邑治, 且開陳荒之地, 始置鎭次設邑, 在本道, 亦有茂山之例, 先之以鎭, 明知其便當, 然後設邑故也。 今於長津, 宜無異同, 依前以邊地僉使, 另擇下送, 待其成效, 設爲邑治, 恐合事宜。 長坡設倉, 亦涉張大, 姑令依帥臣所請, 勿侵役、勿定稅, 仍以附近倉穀, 給糧給種, 以爲奠居成就之方, 而待其地闢民多, 或設倉、或設堡, 誠爲穩當, 而諸大臣之議, 如是參差, 不敢擅便。" 敎曰: "長津設邑事, 卿等之議, 儘有意見。 民情雖曰不願設鎭, 願設邑治, 設鎭未過周歲, 又令設邑, 甚非朝家經遠謀始之體, 更觀前頭, 陞作邑治, 如茂山已例固好, 而聞其地方, 殆至數百里, 民戶不下累千, 關防也、土地也、人民也, 視反有勝焉。 是有邊將之名, 兼守令之責, 軍、田、糴三政, 一委該鎭, 使之專意主管, 亦似得宜。 係是新創之地, 凡係民所不願之事, 自該鎭, 苟能從長方便, 則以公以私, 成效必多裨益。 以此意, 行會道、帥臣處, 使之依此擧行, 形止與措置事目, 須卽條列狀聞。 長坡設倉事, 卿等言亦甚便當, 依啓聞施行。"


  • 【태백산사고본】 20책 20권 19장 A면【국편영인본】 45책 533면
  • 【분류】
    행정(行政) / 재정(財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