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진에서 후주까지의 지형과 장진보 설치에 대한 논의
함경 남도 병마 절도사 신응주(申應周)가 장계하기를,
"장진(長津)에서부터 후주(厚州)까지는 5백여 리(里)인데, 여러 산봉우리들이 좌우로 둘러 있어서 진실로 이른바 1만의 장정으로도 열 수 없는 지역입니다. 북쪽 지역은 추위가 일러 대강(大江)이 결빙(結氷)되면 하나의 평탄한 길이 됩니다. 만약에 사변(事變)이 있게 되면 연강(沿江) 요로(要路)의 제진(諸鎭)은 큰 경우는 4, 50호에 지나지 않고 작은 경우는 겨우 1, 20호인데, 모두가 구의(狗衣)와 승립(繩笠) 차림으로 매우 가난하여 거의 죽게 된 군졸들이 깊은 두메에 여기저기 산재(散在)해 있으니 어찌 그들에게 갑작스런 방비(防備)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대체로 본도(本道)의 지형은 철령(鐵嶺) 이북으로부터 서수라(西水羅)까지는 다만 한 가닥 길[路]이 있을 뿐이나 유독 이 장진(長津)만은 4면에 모두 길이 있어 북쪽으로는 삼수(三水)에 이르는 5백 리 길이요, 동쪽으로는 함흥(咸興)에 연결되어 3백 리 길이요, 서쪽으로는 강계(江界)에 접속(接續)되어 80리 길이요, 남쪽으로는 영원(寧遠)·낙림(樂林)과의 거리가 1백여 리 길이니, 실로 서북(西北)의 요충(要衝)입니다. 경내(境內)의 주민(住民)은 2천 4백여 가(家)요, 환곡(還穀)은 2만여 석입니다. 그런데 토지·인민·곡물은 모두 감영(監營)과 함흥(咸興)에서 관할하는 바이니, 이를 덜어내어 지급하고 방어사(防禦使)의 영(營)으로 승격시키면 저절로 웅진(雄鎭)·거부(巨府)가 될 것이며 설시(設始)하는 때에 별로 크게 낭비(浪費)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고을을 설치함에 있어 불편한 일이 있을 경우, 경기(京畿)의 영종진(永宗鎭)은 곧 첨사(僉使)가 방어사(防禦使)를 겸임하고 호구(戶口)·환곡(還穀)·전정(田政)·군정(軍丁)의 주관을 군읍(郡邑)의 경우처럼 하는데, 지금 만약 이를 본받아 한다면 물력(物力)을 더욱 줄일 수 있습니다. 만약에 전지(田地)와 백성은 함흥에 소속시키고 다만 첨사의 명호(名號)만을 승격시킬 뿐이라면 종전(從前)대로 별장(別將)을 본고을에 붙이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 관장(官長) 하나를 더 붙임은 한갓 폐단만을 만들 뿐입니다. 삼수군(三水郡)의 강구(江口)·신방(神方)·묘파(廟坡)·별해(別害) 등 4진(鎭)은 지형(地形)과 거리로 보아 장진(長津)에 속하는 것이 마땅하나 삼수군에서 이 4진을 잃으면 더욱 유지 보존될 수 없으니, 경솔히 논의하기 어렵습니다. 관찰사(觀察使) 신(臣) 이갑(李𡊠)도 신의 뜻과 조금도 다름이 없으니, 청컨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하였다.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장진보(長津堡)의 형편은 장본(狀本)에서 상세히 아뢰었습니다. 여러 산봉우리 사이에 연강(沿江)하여 들이 펼쳐있는데 길이는 수백 리가 넘고 넓이는 혹 십수 리(十數理)가 되며 겸하여 전토(田土)도 비옥(肥沃)하니 고을을 설치하자는 논의는 진실로 의견이 있습니다. 그런데 일찍이 무산(茂山)에 고을을 설치할 때에 먼저 변장(邊將)을 두고 뒤에 고을을 설치하였으니, 이는 곧 고(故) 상신(相臣) 남구만(南九萬)이 주장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주민 2천여 호는 대부분 토착인이 아니라 곧 부호(浮戶)나 유리하다가 모여든 자들이며 그 가운데 영원(寧遠)의 백성들은 이웃과 일족에게 침징하는 괴로움을 감당하지 못하고 도망쳐 우거(寓居)하게 된 자가 태반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세월이 오래 된 뒤에 본토(本土)를 생각하여 점차 철수하여 돌아간다면 앞서의 부성(富盛)함이 뒷날에 조잔(凋殘)하게 되지 않을지 어찌 알겠습니까? 지레 읍치(邑治)를 설치하였다가 만약 도로 폐지하게 된다면 조정(朝廷)의 명령이 사라지게 될 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첨사(僉使)가 방어사를 겸임하는 일도 갑자기 논의하기 어렵습니다. 방어사라 함은 다만 그 이름만을 취하는 것이 아니요, 곧 그 실상(實相)이 있어야 합니다. 작은 진보(鎭堡)를 방어사의 영으로 승격시키면 군물(軍物)의 준비와 교졸(校卒)의 접제(接濟)에 경비가 적지 않은데, 황폐(荒廢)한 곳을 개척하여 관부(官府)를 세울 때에 무엇으로 마련하겠습니까? 이미 방어사의 영을 설치하였으면 마땅히 절제(節制)를 받는 읍진(邑鎭)이 있어야 하는데 강구(江口) 등 4진을 떼어 주는 문제는 삼수군(三水郡)이 유지 보존될 길이 없어 지난(持難)하게 여기고 있으니 이것 또한 구애(拘碍)되는 한 가지 단서입니다. 강물이 결빙(結氷)된 뒤에는 평탄한 길과 다름이 없음은 진실로 장계(狀啓)의 내용과 같습니다. 그리고 삼수군과 갑산부(甲山府)가 교차되는 연강(沿江)의 아래 위에 방어사의 영을 설치할 만한 곳이 어찌 유독 장진(長津)뿐이겠습니까? 장진에 고을을 설치하는 문제는 지금 우선 그만두고 이어 변지 첨사(邊地僉使) 자리[窠]로 만들고 토지와 인민을 모두 떼어 붙여 줄 것입니다. 방어사의 겸임 문제에 있어서는 군병(軍兵)의 절제(節制)와 군물(軍物)의 준비 및 교졸(校卒)들의 접제 방법 등을 모두 도신(道臣)과 수신(帥臣)으로 하여금 마련하여 장문(狀聞)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북도 병마 절도사(北道兵馬節度使) 민의혁(閔義爀)이 장계에 이르기를,
"장파(長坡)의 진(鎭)을 설치할 터로서 적합한 곳은 모두 3곳이니, 관동(館洞)과 농사동(農事洞) 및 강구평(江口坪)입니다. 신이 장파 20여 리 안을 삽(鍤)을 들고 오르내리며 토질(土質)을 살펴본즉, 부토(腐土)의 두서너 치[才] 아래에는 추사(麤沙)가 있고 추사의 두서너 치 아래에는 다시 진토(眞土)가 있으며, 장파의 온 벌판은 곳곳이 모두 그러하였습니다. 혹은 장파평(長坡坪)에는 수포석(水泡石)으로 인하여 백성들이 살 수가 없다고들 하나, 이른바 수포석은 곧 추사(麤沙)이므로, 농사에 해롭지 않음은 이미 징험(徵驗)한 바 있습니다. 관동과 농사동은 물 긷는 길이 조금 멀므로 장파(長坡)로 정하는 것이 마땅하고 장파 안에서는 강구평에 정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대체로 무산(茂山)은 저들(청나라) 지역과 땅이 연결이 되어 육진(六鎭)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런데 두만강(豆滿江) 수백 리에 번호(蕃戶)가 가까이에 사는 일이 전혀 없고, 장파의 동쪽은 사냥하는 오랑캐도 이르지 않는 곳이므로 파수(把守)를 드물게 설치한 것도 역시 이러한 때문인 듯합니다. 요컨대, 무산의 서쪽 수백 리에는 한 곳의 관방(關防)도 없으니 장파에 진을 설치하는 것은 별로 말할 만한 폐단이 없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먼저 조그마한 진보(鎭堡)를 설치하고 새로이 입주(入住)한 백성에게 세역(稅役)을 견감(蠲減)하고 환곡(還穀)을 출납(出納)하다가 백성이 많아지고 토지가 개척(開拓)되기를 기다려서 고을을 설치하고, 진으로 승격시킴은 오직 전하의 처분에 달려 있습니다. 노은 동산(蘆隱東山)은 장파(長坡)와 천평(天坪) 사이에 있는데, 저들(청나라)과 우리 나라의 지형이 모두 눈 안에 들어옵니다. 화저 연대(火底烟臺)를 이곳에 설치하여 본부(本府) 남산(南山)의 봉대(烽臺)에 도달하게 하며, 장파 이상 강변(江邊)에 또 두세 곳의 파수(把守)를 설치하여 감시(監視)하도록 하는 것은 모두 설진(設鎭)한 뒤에 해야 할 일입니다. 허항령(虛項嶺) 길을 연전에 통행을 금하여 막아 버렸는데 비록 무슨 이유인지는 알 수 없으나 통행시키든 차단하든 그다지 관계가 없습니다. 지금 만약에 새 진을 창설한다면 진졸(鎭卒)을 갑자기 충정(充定)하기가 어렵고 군물(軍物)을 마련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니, 경성(鏡城)의 삼삼파(森森坡)와 명천(明川)의 재덕보(在德堡)는 곧 등한(等閑)한 곳이므로 폐지하여 합설(合設)하는 것이 아마도 무방할 듯합니다. 장파의 형편을 그림으로 그려서 올려보냅니다."
하였다.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장본(狀本)을 지도(地圖)와 참고하건대, 무산부(茂山府)로부터 장파(長坡)까지는 거리가 1백 15리인데, 90리 사이는 전토(田土)가 서로 연결되어 있고 민가(民家)가 매우 조밀(稠密)하며, 미처 개간(開墾)되지 못한 것은 다만 장파동(長坡洞) 직로(直路) 수십 리 뿐입니다. 강구평(江口坪)은 단지 6호(戶)뿐이니, 비록 먼저 조그마한 진보(鎭堡)를 설치하는 데 합당하다 하더라도 도보에 역시 관장(官長)이 있어야 하는데 체통에 어찌 6호의 백성을 거느리고 권관(權管)의 칭호(稱號)를 사용할 수가 있겠습니까? 진보를 설치하는 데 대한 한 가지 조항은 아직 경솔히 논의하기가 어려우니 먼저 무산(茂山)으로 하여금 한 개의 창고를 이곳에 설치하여 곡물(穀物)을 비축하고 환곡을 출납(出納)하게 하면 백성들은 반드시 점차 모이게 될 것입니다. 적어도 민호(民戶)의 수효가 2, 30이 되기를 기다려서 그런 연후에 비로소 진보를 설치하여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삼삼파(森森坡)와 재덕보(在德堡)를 혁파하고 합설(合說)하는 문제는 비록 진보를 설치한 뒤의 일이나 거리가 수백 리 뿐만이 아니므로 진졸(鎭卒)을 강제로 옮기는 일도 결단코 행할 수 없는 일이요, 허항령(虛項嶺) 길에 대해서는 진영(鎭營)을 설치하여 막을 필요가 없습니다. 장파에 창고를 설치하는 일의 편부(便否)에 대해서는 다시 장문(狀聞)하도록 하소서."
하니, 또 원임 대신(原任大臣)들에게 문의하도록 명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0책 20권 17장 B면【국편영인본】 45책 533면
- 【분류】군사(軍事) / 행정(行政) / 재정(財政)
○咸鏡南道兵馬節度使申應周狀啓言:
自長津至厚州五百餘里, 重峰疊嶂, 左右縈廻, 眞所謂萬夫莫開之地。 此地寒早, 大江成氷, 則作一坦途。 脫有事變, 沿江要路諸鎭, 大不過四五十戶, 小僅一二十戶, 而盡是狗衣、繩笠, 至貧濱死之卒, 落落散在於深山絶峽之中, 何望其倉卒防遏乎? 蓋本道地形, 自鐵嶺以北, 至西水羅, 只是一條路, 而獨此長津, 四面俱有路, 北抵三水五百里, 東連咸興三百里, 西接江界八十里, 南距寧遠、樂林百餘里, 實爲西北關捩。 境內居民, 爲二千四百餘家, 還穀爲二萬餘石, 而土地、人民、穀物, 皆監營與咸興之所管割而與之, 陞爲防營, 則自可爲雄鎭巨府, 設始之際, 別無大段冗費。 如其設邑, 有所難便, 則京畿之永宗, 乃僉使防禦使, 而戶口、糶糴、田政、軍丁主管, 如郡邑。 今若倣此爲之, 則尤省物力。 若地屬咸興, 民屬咸興, 而只陞僉使之號而已, 則不過依前別將, 附庸於本官矣。 添一官長, 徒作弊端。 三水之江口、神方、廟坡、別害四鎭, 地形道里, 宜屬長津。 三水之失此四鎭, 尤無以支保, 有難輕議。 觀察使臣李𡊠, 與臣意, 小無異同。 請令廟堂稟處。
備邊司啓言: "長津堡形便, 悉陳於狀本, 而重嶺複岡之間, 沿江開野, 長過數百里, 廣或十數里, 兼以田土沃饒, 設邑之議, 誠有意見, 而曾於茂山設邑時, 先置邊將, 後乃設邑, 此是故相臣南九萬主張者, 而若其居民二千餘戶, 擧非土著之人, 乃是浮戶流集者, 而其中寧遠之民, 不勝徵隣侵族之苦, 逃寓過半云。 歲久懷土, 漸至捲還, 則安知前之富盛, 不爲後之凋殘乎? 徑設邑治, 倘至還爲革罷, 則朝令之銷刻, 不可不慮。 且以僉使兼帶防禦, 亦難遽議。 防禦云者, 不但取其名, 乃爲有其實也。 以小鎭陞防營, 軍物之措備, 校卒之接濟, 糜費不些, 當此披草萊、立官府之時, 何以區劃乎? 旣設防營, 當有受節制之邑鎭, 而江口等四鎭, 以三水之無路支保, 有所持難, 則此亦拘掣之一端。 江流成氷之後, 無異坦途, 誠如狀辭, 而三、甲之交浴江上下, 可設防營之處, 奚獨長津而止哉? 該邑一款, 今姑置之, 仍作邊地窠僉使, 土地、人民, 幷爲劃付。 至於兼防禦, 則亢係軍兵節制, 軍物措備, 校卒接濟之策, 幷令道、帥臣, 區劃狀聞。" 允之。 北道兵馬節度使閔義爀狀啓言:
長坡之可合鎭基者, 凡三處, 曰館洞, 曰農事洞, 曰江口坪。 臣於長坡二十餘里之內, 操鍤上下, 審視土品, 則腐土數寸之下, 卽有麄沙, 麄沙數寸之下, 復有眞土。 長坡一坪, 在在皆然。 或以爲長坡坪水泡石, 民不可居, 而所謂泡石, 卽是麄沙, 不害於農, 已有可驗之跡。 館洞、農事洞, 汲路稍遠, 當以長坡爲定, 長坡之內, 當以江口坪爲定。 大抵茂山之與彼地接壤, 與六鎭無異, 而豆滿江數百里, 絶無蕃戶逼居之事, 長坡以東, 獵胡亦所不至, 把守之稀設, 似亦以此要之, 茂山西數百里, 無一關防, 長坡設鎭, 別無可言之弊。 臣意, 則先設小堡, 新入之民, 蠲役減稅, 分糶斂釋, 待其民殷土闢, 設邑陞鎭, 唯在處分。 盧隱東山, 在長坡、天坪之間, 彼我地形, 擧在眼中。 設置火底烟臺於此, 達于本府南山之烽, 長坡以上江邊, 又置數三把守, 使之詗察, 俱係設鎭後, 不可已之事。 虛項嶺路, 年前禁塞, 雖未知緣何而通塞, 無甚關係。 今若創設新鎭, 鎭卒猝難充定, 軍物未易辦備, 則鏡城之森森坡, 明川之在德堡, 便屬等閑, 革罷合設, 恐似無妨。 長坡形便, 圖畫上送。
備邊司啓言: "以狀本參諸地圖, 則自茂山府距長坡, 爲一百十五里, 而九十里間, 則田陌相連, 民家甚稠, 未及開墾者, 只是長坡洞直路數十里而已。 江口坪, 只是六戶, 則雖合先設小堡, 而堡亦有官長, 體樣豈可率六戶之民, 而稱權管之號乎? 設堡一款, 姑難輕議, 先令茂山, 置一倉厫於此地, 儲穀糶糴, 則人民必當漸聚。 少待民戶之爲數三十, 然後始置鎭堡未晩。 森森坡、在德堡, 革罷合設, 雖係設堡後事, 程途不啻數百里, 則鎭卒之勒遷, 決是行不得之端, 至於虛項嶺路, 不必設營而防之。 長坡設倉便否, 更令論理狀聞。" 又命問議原任大臣。
- 【태백산사고본】 20책 20권 17장 B면【국편영인본】 45책 53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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