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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20권, 정조 9년 6월 17일 갑오 2번째기사 1785년 청 건륭(乾隆) 50년

북한 산성의 안찰 어사가 된 신기의 보고 서계

교리 신기(申耆)북한 산성(北漢山城)의 안찰 어사(按察御史)로 삼았다. 봉서(封書)에 이르기를,

"북한 산성은 곧 보루(保壘)의 중요한 곳이다. 총수(總帥)인 사람이 보수(補修)에 뜻이 없어 군기(軍器)·향곡(餉穀)·성첩(城堞) 등 여러 군무(軍務)를 포기(抛棄)하여 거의 모양을 이룰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조정에서 일찍이 신칙하는 일이 없었으니, 어찌 변란에 대한 방비를 바랄 수 있겠는가? 일전에 비록 수리(修理)하라는 명을 내렸으나 결단코 쓸모 없는 결과가 될 것을 알았으니, 조정에서 근본에 힘쓰는 정책(政策)은 의당 산성(山城)으로부터 해야 한다. 그 근만(勤慢)을 고과(考課)하도록 그대를 북한 산성 군기·향곡·성첩의 안찰 어사로 삼으니, 그대는 모름지기 곧 달려가 먼저 각문(各門)의 열쇠를 거두어 몰래 통하는 폐단을 엄중히 방지하고, 군기와 향곡을 점검(點檢)하고 돌아올 때에 성첩을 두루 살펴서 별단(別單)과 함께 등문(登聞)할 것이며, 성안의 민폐(民弊)와 승폐(僧弊)에 대해서도 마땅히 물어 보고 오라."

하였다. 신기가 서계(書啓)를 올리기를,

"향곡(餉穀)은 산성을 관리하는 4개 창고와 군영(軍營)에 유치(留置)한 3개 창고 및 상하 창고(上下倉庫)에 비축한 쌀을 유용(流用)한 것이 오래도록 고질적인 병폐(病弊)가 되었습니다. 강창(江倉)에서 무역한 것은 경기도(京畿道) 읍(邑)에 나누어주었는데, 그대로 산성에서 수납할 가을 환곡(還穀)으로 삼았으며, 산창(山倉)에서 대출한 곡물은 경청(京廳)에 수봉(收捧) 유치하게 하였는데, 결국 산성의 향곡(餉穀)으로 허록(虛錄)을 만들었으니, 해마다 향곡이 감손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인 것입니다. 호조와 선혜청에서 대출한 쌀은 상환(償還)한 지 이미 오래되었으나 아직도 대출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양서(兩西)096) 에 추가된 향곡은 신축년097) 에 떼어 주게 된 것이었으나 처음부터 한 포대(包袋)도 없었습니다. 금년에는 또 관성소(管城所)의 2백 석(石)에 불과한데, 쌀을 교역하여 다른 곡식으로 바꾸고, 시일(時日)이 오래 되었으나 아직도 채워 수봉하지 못한 것이 5천 97석이나 됩니다. 대출하는 쌀과 대출하지 않는 쌀을 절반(折半)으로 한다는 법의(法意)가 엄중함에도 이리저리 흩어져 마침내 더 대출된 것이 5백 7석이요, 금년에 더 대출된 것만도 3천 석입니다. 다만 현재의 급선무는 무역한 쌀을 독촉 수봉하고 허위(虛僞)의 장부를 갖고 있지 말고, 곡물을 옮기는 폐단을 영구히 막는 데에 달려있습니다. 하창(下倉)과 평창(平倉)에서 은(銀) 대신 보관하는 돈[錢]은 없는데, 3천 2백 24냥이 되는 것으로 허위로 기록되어 있고, 을유년098) ·정유년099) 에 특별히 비축한 돈 6천 냥의 경우는 모두 사사로운 대출(貸出)이 되었으며 남아 있는 것은 3백 71냥입니다.

군기(軍器)에 있어서 화포(火砲)는 모두 쇠로 만들어서 정환(釘環)이 혹 탈락(脫落)된 것이 있으나 규격(規格)에는 그다지 손상이 없고, 교자궁(校子弓)이 그 다음이요, 조총(鳥銃)과 환도(環刀)가 또 그 다음입니다. 조총은 파손된 것 외에 자잘한 정환(釘環)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며, 방아쇠가 순조롭지 못한 것은 장마 때의 습기 때문입니다. 환도의 피갑(皮匣)은 파손된 것이 많았고, 칼날은 그런대로 좋았습니다. 철식(鐵飾)은 거칠으나 온전하였으며 장전(長箭)·편전(片箭)의 원 수효는 흠결(欠缺)이 없었으나 치우(稚羽)는 거의 절반이나 손상되고 그을음으로 까매졌으며, 기치(旗幟)·취타(吹打) 등 기구(器具)는 파열(破裂)되어 대부분이 사용할 수 없었고, 동로(銅爐)·철정(鐵鼎) 등의 기구는 이지러지고 깨어졌으나 충분히 고칠 수 있었습니다. 대체로 군기(軍器)의 원 수효를 비록 한 번에 새롭게 보수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금년에 보수하고 명년에 보수하여 계속적으로 쉬지 않는다면 거의 변란(變亂)에 대한 방비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훈련 도감 창고에 소금 20섬은 구워서 1백 덩어리로 만들었는데 조각조각 부서졌습니다. 창고의 유치(留置)해 둔 장(檣)은 대개 변란에 대비하기 위한 것인데, 작년 봄에 중흥사(重興寺)에 남아 있는 장 10독[甕]과 세 유영(留營)에 남아 있는 장 53섬[石] 영(零)은 개색(改色)하여 중[僧]과 백성들에게 내어주고서 아직도 새로이 담그지 않았으니, 지금은 허위로 유치하고 있는 것으로 되었습니다. 새 영(營)의 군기(軍器)는 산성에 견주어서 대체로 약간 나으나, 역시 파손된 것이 없지 않았습니다.

성첩의 주위(周圍)는 백운봉(白雲峰)으로부터 오른쪽으로 돌아 영취봉(靈鷲峰)에 이르기까지는 산세가 높고 험준하여 본래 성을 쌓지 않았으나 백운봉영취봉 사이의 움푹 들어간 곳에는 두 건성(乾城)이 있고, 영취봉 산허리에서 비로소 성이 시작되어 북문(北門)에 이르렀는데 문루(門樓)는 갑오년의 재변(災變)을 치른 뒤에도 중건(重建)되지 않은 채 문의 자물쇠는 오랫 동안 잠겨져 있고, 홍예문(虹蜺門)은 아직도 완전합니다. 북문에서부터 솟아올라가 원효봉(元曉峰)을 이루었는데, 높고 뾰족하여 성이 끊어졌으며, 돌을 깎아 계단을 이루었습니다. 원효봉의 오른쪽은 단애(斷崖)로서 깎아지르듯이 내려갔고 곁에 층성(層城)을 끼고 있으며, 층성 아래에 암문(暗門)이 있습니다. 암문에서 돌아 내려가 평지(平地)를 이루었는데, 곧 북한 산성의 도수구(都水口)입니다. 양쪽 바위가 깎아 세운 듯하고, 좌우에 있는 성(城)의 모퉁이는 바위에 이르러 그쳤으며, 물은 그 사이로부터 나옵니다. 수구(水口)에서 대서문(大西門)으로 돌아 솟아올라 의상봉(義相峰)이 되었고, 의상봉에서 용출봉(龍出峰)·용혈봉(龍穴峰)·시루봉[甑峰]·나한봉(羅漢峰)·가사봉(袈裟峰)을 거쳐 문수봉(文殊峰)의 높고 깎아지른 곳에 이르러 성이 끊겼으며, 협곡(峽谷)을 지나간 곳에 성을 쌓았습니다. 의상봉용출봉 사이는 국령사(國靈寺)의 암문(暗門)이요, 시루봉나한봉 사이는 원각사(圓覺寺)의 암문(暗門)이며, 가사봉문수봉 사이는 가사 암문(袈裟暗門)이요, 문수봉 오른쪽에 문수봉의 암문이 있는데, 지금은 대남문(大南門)이 되었으며, 문선(門扇)100)대접철(大楪鐵)101) 은 탈락(脫落)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대남문 오른쪽은 보현봉(普賢峰)이요, 보현봉 아래에 대성문(大城門)이 있는데 경진년102) 에 영구히 폐쇄(閉鎖)한 뒤부터 문루(門樓)와 처마가 퇴락(頹落)하였습니다. 석가봉(釋迦峰)에 이르기 전에 암문 한 곳이 있고, 석가봉의 동쪽이 대동문(大東門)이 됩니다. 또 솟아올라 동장대(東將臺)가 되고, 용암봉(龍巖峰)만경봉(萬景峰)이 이어서 백운봉 왼쪽으로 연결이 됩니다. 동장대용암봉 사이에 암문이 있고, 만경봉백운봉 사이에 또 암문이 있습니다. 대체로 가사봉에서 용암봉까지 성첩(城堞)이 서로 연결되다가 용암봉의 중간층에서 그대로 성이 끊어지게 됩니다. 북서(北西)와 남동(南東)은 대략 이러하고 성첩의 형체는 백운봉에서 대성문에 이르기까지 간간이 무너진 곳이 많으나 개석(蓋石)은 그대로 덮여 있고, 성벽(城壁)의 회(灰)도 아직 남아 있습니다. 대성문에서 용암봉에 이르기까지는 개석이 기울어졌고 성벽의 회도 모두 떨어져 안팎 타첩(垜堞)이 거의 벌집과 같으며, 또 그 무너진 곳은 대성문 이남(以南)에 비해서 10배 이상이 됩니다. 그래서 그 까닭을 물었더니 신축년103) 무렵에 간간이 보수한 뒤에 지금까지 5년 동안에 애당초 한줌 흙이나 한 조각 돌의 역사(役事)가 없었고, 치첩(稚堞)의 무너진 곳에 대해서는 관할(管轄) 안의 승도(僧徒)가 감히 앉아서 보기만 할 수 없어 돌을 쌓아 가려서 임시 변통을 했습니다. 체성(體城)104) ·여성(女城)105) ·성랑(城廊)·문루(門樓)의 무너진 곳 및 성문의 철물(鐵物)이 탈락한 수효도 역시 별단(別單)에 기록하였습니다. 금성 탕지(金城湯池)106) 의 중요한 곳이 장차 쓸모 없이 될 터이니, 전란에 대한 대비를 위하여 마땅히 지금 고쳐 개혁하는 방법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신이 적간(摘奸)107) 하는 길에 성안 주민(住民) 및 각사(各寺)의 승도를 불러 성교(聖敎)를 선포하고 널리 병폐를 물으니, 성에 거주하는 백성들이 이르기를, ‘본성(本城)은 곡물이 생산되는 곳이 아닌데, 성안의 군량(軍糧)이 감축되면서부터 살기가 더욱 어려워져서 다른 곳으로 이사해 가서 그전의 5백 호가 지금은 2백 호에도 차지 못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거주할 사람을 모집하고 배양(培養)할 방법으로는 오직 별파진(別破陣) 아병(牙兵)의 포료(砲料)108) 를 더 창설(創設)하고, 성안 소임(所任)의 자리[窠]는 임진 절목(壬辰節目)에 의하여 본성(本城)의 원주민(原住民) 가운데에서 차출하여 채우는 일입니다. 산성을 수호(守護)하는 데에 있어서는 승려(僧侶)와 속인(俗人)이 똑같은데, 승군(僧軍)에게는 사료(射料)109) 와 포료(砲料) 각 15자리[窠]가 있으나, 민병(民兵)의 경우는 다만 사료(射料)만이 있을 뿐이니 당초 창설할 때부터 뒤섞여 있었던 것입니다.

또 생각건대, 신이 군기(軍器)를 검열할 때에 포구(砲具)의 쏘는 규식(規式)과 화약(火藥)과 탄환(彈丸)의 무게를 군교(軍校)들에게 두루 물었으나 모두 자세히 대답하지 못하였으니, 한갓 그 기구(器具)만이 있을 뿐 사용할 줄을 몰랐습니다. 지금 포(砲)를 쏘는 급료(給料)있는 군관을 새로이 정하고, 겸하여 포(砲)를 쏘는 방식을 강(講)하여, 두 기예(技藝) 가운데 우수한 자는 급료있는 군관을 더 설치하여 임명한다면 민정(民情)을 위로하는 일과 무비(武備)를 강구(講究)하여 밝히는 요결에 있어서 일거 양득이 된다고 하겠습니다."

하였다. 총융사(摠戎使) 이창운(李昌運)을 삭직(削職)하였으니, 어사(御史)의 서계로써 비변사(備邊司)에서 죄를 논하였으므로 그대로 따른 것이다.


  • 【태백산사고본】 20책 20권 10장 A면【국편영인본】 45책 530면
  • 【분류】
    인사(人事) / 군사(軍事)

  • [註 096]
    양서(兩西) : 평안도와 황해도.
  • [註 097]
    신축년 : 1781 정조 5년.
  • [註 098]
    을유년 : 1765 영조 41년.
  • [註 099]
    정유년 : 1777 정조 원년.
  • [註 100]
    문선(門扇) : 문짝.
  • [註 101]
    대접철(大楪鐵) : 가로로 엮어 놓은 큰 쇠붙이.
  • [註 102]
    경진년 : 1760 영조 36년.
  • [註 103]
    신축년 : 1781 정조 5년.
  • [註 104]
    체성(體城) : 몸체가되는 성.
  • [註 105]
    여성(女城) : 성바퀴.
  • [註 106]
    금성 탕지(金城湯池) : 쇠로 된 성(城)과 뜨거운 물이 담긴 못으로서 방비가 아주 견고한 성을 가리킴.
  • [註 107]
    적간(摘奸) : 비리(非理)를 적발함.
  • [註 108]
    포료(砲料) : 급료있는 포수(砲手) 군관(軍官).
  • [註 109]
    사료(射料) : 급료있는 사수(射手) 군관(軍官).

○以校理申耆北漢山城按察御史。 封書曰:

此城, 卽保障重地。 爲摠帥之人, 無意修擧, 軍器、餉穀、城堞諸戎務抛却, 殆不成樣。 然廟堂曾無提飭, 安望備陰雨也。 日前雖有修葺之命, 而決知歸於弁髦, 在朝家務本之政, 宜自山城。 考其勤慢, 以爾爲北漢山城軍器、餉穀、城堞按察御史, 爾須登時馳進, 先收各門鑰匙, 嚴防滯通之弊, 點閱軍器、餉穀。 復路時, 周視城堞, 具別單登聞。 城中民瘼僧弊, 亦宜詢問以來。

申耆進書啓:

餉穀, 則管城四庫、留營三倉、上下倉所儲米那移, 久爲痼瘼。 倉所留, 分授畿邑, 仍爲山城之秋糴, 山倉出貸之穀, 捧留於京廳, 遂作城餉之虛錄, 年年減損, 職由於此。 戶、惠廳貸米, 還報已久, 而尙以貸去懸注, 兩西添餉, 辛丑區劃, 初無一包。 今年又不過管城所二百石, 貿米改色, 年深歲久, 尙未充捧者, 爲五千九十七石, 折半分留, 法意嚴重, 而東來西去, 終歸加分者, 亦爲五百七石, 今年加分三千石。 第今急先之務, 惟在於督捧貿米, 毋擁虛簿, 永塞移穀之弊。 平倉所在銀代錢虛留, 爲三千二百二十四兩, 至於乙酉、丁酉別備錢六千兩, 盡歸私貸, 餘存三百七十一兩。 軍器則砲具全鐵, 打造釘環, 雖或脫落, 體制無甚缺傷, 校子弓次之, 鳥銃環刀又次之。 鳥銃破傷之外, 小小釘環, 或存或無, 而杵鐵不順者, 潦夏濕氣之故也。 環刀皮匣, 間多破傷, 而鋒刃僅可。 鐵开粗完, 長、片箭元數, 無欠缺, 雉羽幾半破傷, 烟煤從以黑暗。 旗幟、吹打之具裂破, 而多不合用。 銅爐、鐵鼎之器缺坼, 而足可改爲。 大抵軍器元數, 雖不得一新繕補, 而今年改修, 明年改修, 循環不已, 則庶可爲陰雨之備。 訓倉鹽二十石, 燔作百塊, 而片片破碎。 留庫之醬, 蓋爲待變, 昨年春重興寺遺在醬十甕, 三留營遺在醬五十三石零, 改色出給僧民, 而尙未新沈, 今爲虛留。 新營軍器, 比諸山城, 大體稍勝, 而亦不無破傷。 城堞周廻, 自白雲峰, 右轉至靈鷲峰, 山勢高峻, 自不築城, 而白雲靈鷲之間低凹處, 有二乾城, 自靈鷲腰始起城, 至北門。 門樓, 經甲午災後, 不重建, 而門鑰永鎖, 虹蜺尙完。 自北門而上, 爲元曉峰, 尖高城絶, 斲石爲梯。 元曉之右, 懸厓直下, 傍挾層城, 層城之下, 有暗門。 自暗門轉下, 而作平地, 卽北城都水口。 兩巖削立, 左右城角, 及巖而止, 水從其間出。 自水口轉大西門, 而上爲義相峰, 自義相, 歷龍出峰龍穴峰甑峰羅漢峰袈裟峰, 至文殊峰高絶處, 絶城, 過峽處築。 義相龍出之間, 爲國靈寺暗門, 甑峰羅漢之間, 爲圓覺寺暗門。 袈裟文殊之間, 爲袈裟暗門, 文殊之右, 有文殊暗門, 而今爲大南門, 門扇大揲鐵, 脫落已久。 大南門之右, 爲普賢峰, 普賢峰之下, 有大城門, 自夫庚辰永閉之後, 樓圮簷頹。 未及釋迦峰, 有暗門一所, 釋迦之東, 爲大東門。 又上而爲東將臺, 龍巖峰萬景峰, 乃接於白雲峰之左, 而將臺龍巖之間, 有暗門萬景白雲之間, 又有暗門, 蓋自袈裟峰龍巖峰, 城堞相連, 自龍巖中層, 仍爲絶城。 北西、南東, 大略如斯, 而城堞形體, 則自白雲峰, 至大城門, 間多有頹圮處, 而蓋石猶覆, 壁灰尙存。 自大城門龍巖峰, 則蓋石欹傾, 壁灰盡落, 內外垜堞, 殆若蜂房, 且其頹圮處, 比大城門以南, 不啻十倍。 詰其所以, 則辛丑年間間修補之後, 今爲五年, 初無撮土片石之役, 至於雉堞之頹圮處, 字內僧徒, 不敢坐視, 累石障蔽, 以爲姑息之計。 體城、女城、城廊、門樓頹圮處, 及城門鐵物脫落數爻, 亦爲開錄於別單。 金湯重地, 將屬於笆籬邊物, 其在陰雨之備, 宜有及今矯革之道。 臣於摘奸之路, 招致城內居民及各寺僧徒, 傳宣聖敎, 博詢弊瘼, 則城居人民等狀: "本城非生穀之地, 自夫城餉減縮之後, 生理益薄, 轉而之他, 昔之五百戶, 今不滿二百。" 到今募居培養之方, 唯是別破陣牙兵砲料加創事及城內所任窠, 依壬辰節目, 以本城元居人中塡差事也。 守護山城, 僧俗一也, 僧軍有射、砲料各十五窠, 民兵則只有射料, 當初創設, 未免斑駁。 且念臣之反閱軍器時, 砲具之射放規式, 藥丸輕重, 歷問軍校, 皆未詳對, 徒存其器, 莫知爲用。 今若新定放砲之料, 兼以砲式之講二技中優等者, 加設付料, 則慰悅民情之擧, 講明武備之要, 可謂一擧兩得。

削摠戎使李昌運職, 以御史書啓, 備局論罪。 從之。


  • 【태백산사고본】 20책 20권 10장 A면【국편영인본】 45책 530면
  • 【분류】
    인사(人事) / 군사(軍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