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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 19권, 정조 9년 3월 23일 임신 3번째기사 1785년 청 건륭(乾隆) 50년

선전관 이윤춘이 지리산의 수상한 도당들에 대해 상언하다

선전관(宣傳官) 이윤춘(李潤春)이 비밀리에 아뢰기를,

"신이 산에 들어가 여러 가지로 염탐하여보니, 지리산은 구불구불한 줄기가 넓고, 골짜기들이 깊은데, 이른바 천왕봉(天王峰)·반야봉(盤若峰)의 두 봉우리가 가장 높은 곳인데 동쪽과 서쪽에서 마주보고 서서 서로 거리가 1백여 리가 되며, 그 사이에 취령(鷲嶺)이 있고, 취령에서 동쪽으로 천왕봉에 이르기까지도 또한 6,70리가 됩니다. 이 봉우리 근처가 바로 문광겸(文光謙)이 말한바 신선이 산다는 선원(仙苑)인데, 먼저 이곳에서부터 지방관 하동 부사(河東府使) 장현좌(張鉉佐)와 거의 다 샅샅이 뒤져 빠진 곳이 없었고, 산의 동북쪽 바깥지역은 도신(道臣)과 의논하여 또 진주 영장(晉州營將)으로 하여금 두루 살펴보게 하였으나, 이른바 선원과 역적 도당들의 형적은 아직도 찾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삼가 생각하건대, 문양해가 이미 깊은 벽지에 살았고, 전후하여 이웃에 있는 절간들과 연락하여 서로 통하지 않았을 리가 없으니, 아마 혹시 승도(僧徒)들 중에서 많이 있을 것 같았기 때문에, 절간에 대하여 더욱 비밀리에 탐색하기를 더 하였습니다. 취령 아래 칠불암(七佛菴)문양해가 살던 하천 산당(荷川山堂)과 서쪽으로 10리 떨어져 있고, 또 그 문귀에 달린 현판에는 동국제일선원(東國第一禪苑)이라고 썼으며, 그안에는 아자형(亞字型)으로 된 승방(僧房)이 있었는데, 대사(大師)라고 일컬었는데, 하루종일 벽을 향하여 말을 하지 않고 앉아 있는 사람이 9명이 있었으며 그들의 거의 다 아침에 모였다가 저물녘에 흩어지는 무리들이었습니다. 그 땅이 이미 하천(荷川)에 서로 가깝고 이름이 또한 우연히 선원(仙苑)과 합치되기 때문에 혹시라도 그 가운데에 단서가 있을 것 같았으므로, 이러한 무리들의 행동 거지를 먼저 비밀리에 탐색하게 하고, 신은 또 그곳에 몰래 가서 이틀 밤을 자면서 여러가지로 탐문하였으나 끝내 의심할만한 단서가 없었습니다.

지금 하천(荷川)의 동쪽 10리쯤에 있는 쌍계사(雙磎寺)의 중 상화(尙華)에게서 문양해가 쓴 수찰(手札) 3장을 수색하여 얻었는데, 보통 한가할 때 왕복한 편지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캐어 물었더니, 처음에는 알지 못한다고 하다가 막상 서찰(書札)을 내보이니 비로소 서로 안다고 말하였습니다. 어리석은 우매한 무리들이 죄에 연루되는 것에 겁을 먹고 아는 것도 모른다고 하는 것은 그다지 괴이한 일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가 말한 가운데 서찰을 가지고 왕래한 사람은 곧 학이(鶴伊)라고 하고 그도 또한 몇 차례 가서 산당(山堂)에서 문양해를 만났는데, 매번 만날 때마다 그가 가면 갑자기 지게문을 나와서 맞이하고 말하되, 속히 가기를 바라는 기색이 현저하게 드러났으므로, 마음속으로 항상 이상하게 여겼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이미 한 동네에 같이 살며 서찰을 왕래하였고, 또 더구나 자신이 산당에 간 것이 다만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그들이 친숙함을 알 수가 있습니다. 설령 흉악한 음모가 무엇인지를 비록 참여하여 듣지는 못하였다고 그는 말하지만, 이른바 향악(香嶽) 등의 왕래한 사람들을 의당 보지 못하였을 리가 없었을 것이며, 서찰이 이미 압수되었지만 그가 왕래한 것도 또한 확실하기 때문에 우선 그를 본 부(本府)의 옥에 엄하게 가두어 놓았습니다.

하동부(河東府)의 삼일장(三日場)에 사는 정운경(鄭雲慶)과 그의 아들 정필린(鄭必麟)문광겸(文光謙)과 가장 친하였다고 말하기 때문에 먼저 평소에 행동 거지를 탐색하고 그 다음에 문서를 수색하였더니, 그속에 이율의 서찰 2통이 있었는데, 바로 집을 지을 때 재목을 매입하는 일과 그 아비 이정태(李廷泰)가 순장(巡將)의 자리를 얻으려고 도모한다는 등의 말이었습니다. 또 정운경은 본래 선주(船主)로써 작년에 홍복영이 보낸 서책과 병풍, 족자 등속을 그가 과연 배에 실어 날랐으며, 정필린은 과거 출신으로서 서울에 와서 벼슬살이를 하다가 이어서 친숙하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서로 알지못한다고 한사코 변명하다가 막상 서찰을 내보인 뒤에야 비로소 이에 자백하였으나, 그밖의 숨은 정상은 끝내 바로 고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부유한 사내로서 이미 문광겸과 친하였고, 또 이율과도 친하였으니, 끝까지 핵문(覈問)하는 방도에서는 내버려 둘 수는 없으므로 정운경 정필린도 또한 일체로 엄하게 가두었습니다. 대개 지금 긴급한 일은 학이를 체포하는 것 보다 더 긴요한 일이 없는데, 문광겸향산(香山)에 갔다고 하고, 학이의 동생 관이(觀伊)문양해의 동생 문금득(文錦得) 등은 통천(通川)에 갔다고 하는데, 이들 말이 서로 달라서 그들이간 곳을 정확히 알기가 어렵습니다. 학이의 얼굴을 잘아는 사람 두 명을 고을 포교가 데리고서 동쪽, 서쪽 두 곳으로 이미 발포(發捕)하였으나 반드시 체포한다고 담보하기가 어렵습니다. 또 얼굴을 아는 사람 세명을 보내어 그들과 함께 가서 발포하게 하였으며, 발포하는 포교와 포졸들에게 절대로 소란스럽게 하지 말라는 뜻을 연달아 각별히 신칙을 다하였습니다. 진행 상황을 치계(馳啓)하겠습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9책 19권 50장 B면【국편영인본】 45책 514면
  • 【분류】
    정론(政論) / 사법(司法) / 변란(變亂) / 사상(思想)

○宣傳官李潤春密啓言: "臣入山, 多般詗察, 而智異一山, 延袤廣闊, (豁)〔谿〕 壑深邃, 所謂天王盤若兩峰, 最是高峻處, 東西對峙, 相距百有餘里, 間有鷲嶺, 自鷲嶺東至天王峰, 亦爲六七十里。 此峰近處, 卽光謙所稱仙苑也。 先從此地, 與地方官河東府使張鉉佐, 幾盡搜括, 庶無遺漏, 山之東北以外, 則議于道臣, 又令晋州營將, 遍加搜察, 所謂仙苑, 與賊徒等形影, 尙無所得。 第伏念洋海旣處深僻, 前後所隣, 無非寺刹, 脈絡相通者, 恐或多在於僧徒中, 故尤加密探於寺刹間。 鷲嶺七佛菴, 距洋海所居荷川山堂西爲十里, 而且其門額, 題以東國第一禪苑。 其中有亞字僧房, 稱以大師, 終日不語, 向璧而坐者, 有九人, 而擧皆朝聚暮散之徒也。 地旣相近於荷川, 名又偶合於仙苑, 或恐此中有端緖, 故此輩行止, 先使密探, 臣又潛到其處, 留宿兩宵, 多般詰採, 竟無疑端。 今於荷川東十里許雙磎寺尙華處, 搜得洋海手札三張, 不過等閑往復, 而試加盤問, 初云不知, 及示書札, 始言相識。 愚迷之輩, 怯於株連, 以知爲不知, 容或無怪, 而渠之言內, 持書札往來者, 卽鶴伊, 渠亦數次往見洋海於山堂, 則每見渠到, 輒出戶迎語, 而顯有欲速去之色, 心常爲怪云。 渠旣同居一洞, 書札往來, 又況身到山堂, 非止一二, 則其親熟可知。 設若渠言凶謀之如何, 雖不得參聞。 所謂香嶽等往來之人, 宜無不見之理, 而書札旣現捉, 往來又丁寧, 故姑爲嚴囚於本府獄。 河東府三日場居鄭雲慶及其子必麟, 最親於光謙云, 故先探平日行止, 次搜文書, 則其中有李瑮書札二度, 而乃是作舍時材木買得事及其父廷泰圖得巡將等語。 且雲慶則本以船主, 昨年洪福榮所送書冊、屛簇之屬, 渠果載運, 必麟則以出身, 來仕京中, 仍以親熟, 而初則以素不相知, 抵死發明, 及至書札出示後, 始乃自服。 其他隱情, 終不直告。 渠以饒富之漢, 旣親於光謙, 又親於李瑮, 其在窮覈之道, 不可置之。 雲慶必麟, 亦爲一體牢囚。 蓋今肯綮, 莫緊於捉得鶴伊, 而光謙則謂往香山, 鶴弟鶴伊洋海錦得等, 則謂往通川, 兩言若是相左, 去處有難的知。 鶴伊面目熟諳者二人邑校, 眼同東西兩處, 業已發捕, 而難保其必捉。 又送知面者三人, 使之眼同發捕, 而發捕校卒等處, 切勿騷擾之意。 連加各別飭察形止馳啓。"


  • 【태백산사고본】 19책 19권 50장 B면【국편영인본】 45책 514면
  • 【분류】
    정론(政論) / 사법(司法) / 변란(變亂) / 사상(思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