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은사 서장관 이태영이 올린 별단
사은사(謝恩使) 서장관(書狀官) 이태영(李泰永)이 별단(別單)을 올렸는데, 그 별단에 이르기를,
"천수연(千叟宴)은 일찍이 강희(康熙) 50년 임진년044) 에 설행(設行)되었는데, 금년이 또한 황제가 즉위한지 50년이 되기 때문에 특별히 고사(故事)를 따라서 각 성에 조서(詔書)를 반포하여, 작질(爵秩)이 있는 사람은 65살까지, 군사와 백성인 경우에는 70살 이상까지 모두 연회에 참가하게 하였는데, 도합 3천 6백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1. 지난해 7월에 황제의 현손(玄孫)인 애친 재석(愛親載錫)이 태어났는데, 그는 바로 황제의 증손인 보국 장군(輔國將軍) 애친 혁순(愛親奕純)의 아들입니다. 황제의 맏아들인 화석 안친왕(和碩安親王) 애친 영황(愛親永璜)이 애친 면덕(愛親綿德)을 낳고, 애친 면덕이 애친 혁순을 낳고, 애친 혁순이 애친 재석을 낳았습니다. 그리하여 5세대가 한 집에 있는 것은, 인간 세상에서 어려운 일인데, 더구나 제왕의 집에서는 더욱 드문 일이라고 하여 새벽에 천하에 유시하기를, ‘만일 5세대가 한 집에 같이 사는 사람이 있으면, 경사(京師)에 모이게 하라.’ 하였는데, 촉(蜀)지방에 사는 백성으로서 명령을 받고 온 사람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1. 지난해에 태학(太學) 이륜당(彛倫堂)을 증수하였고, 이어서 벽옹(壁雍)을 크게 일으켜 세우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이것은 새로 창설하는 것인데, 제도는 옛날 법식을 따랐습니다. 금년 2월 6일 황제가 친히 석전제(釋奠祭)를 행하고, 이어서 벽옹에 납시어 연성공(衍聖公)과 태학사들로 하여금 10철(十哲) 자손들을 거느리고 오경 박사(五經博士)가 진강(進講)하는 일을 행하였으며, 이어서 여러 생도들로 하여금 다리를 둘러싸고 이것을 듣게 하였는데, 그것은 한(漢)나라의 고사를 본딴 것이라고 합니다.
1. 감숙(甘肅)은 곧 서량주(西凉州)인데, 백성은 아주 작고 땅은 매우 넓습니다. 몇 해 전에 여러번 회족[回子]을 정벌하고, 그 백성들을 사로잡아 감숙 지방에 옮겨 놓았는데, 그들은 다만 사납고 무서운 버릇을 가지고 언제나 배반하고 돌아갈 마음을 품고 있는 데다 감숙 총독(甘肅總督)인 근이근(勤爾謹)이 뇌물 받는 짓만 일삼아서, 그들로 하여금 농사에 안착할 수 없게 하였으므로 난리를 일으키는 일이 있게 되었습니다. 황제는 즉시 명령하여 근이근을 귀양보내고, 이시요(李侍堯)를 대신 총독으로 임명하였습니다. 작년 여름에 회부(回部)의 추장 전오(田五) 등이 또 난리를 일으키니, 섬서(陝西)·농서(隴西) 여러 지방에 명령하여 군사를 일으켜 토벌하여 평정하게 하였는데, 두 길을 나누어 열어놓고 남자와 여자로 하여금 각각 따로 서게 한 다음에 남자는 다 구덩이에 파묻어 죽이고, 여자들은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또한 북경까지 잡아온 자도 있었습니다. 또 이시요가 잘 단속하지 못하였다고 하여, 그의 집 재산을 몰수하고, 이어서 감숙 지방에 가두었습니다.
1. 섬라국(暹羅國)은 남쪽 바다 가운데 있는데, 광동(廣東)에서 뱃길로 1만 여 리나 떨어져 있으며, 광동에서부터 연경(燕京)까지의 거리는 육로로 5천 리입니다. 그 나라 국왕[國長]이 새로 즉위하여 사신을 보내어 책봉하여 주기를 청하였는데, 공사(貢使)는 바로 3품관이었고, 종자(從者)는 50여 인이었으며, 북경에 들어와 공물을 바치고 표문(表文)을 ‘금엽표(金葉表)’라고 이름 하였는데, 가로 쓴 글자들의 줄들이 범서(梵書)와 같았기 때문에 전혀 이해할 수 없었으므로, 광동 통사(廣東通事)를 시켜서 근근이 한문으로 번역하여 상주(上奏)하였습니다. 황제는 9경(九卿)으로 하여금 모여서 의논하게 하였는데, 각로(閣老)인 아계(阿桂)는 말하기를, ‘책봉을 요청하는 중요한 일에 품계가 높은 대신을 보내지 않고 다만 나이 젊은 미관(微官)을 보냈으니, 황제를 존경하는 뜻이 전혀 없다. 또 그 주문(奏文)도 정식(程式)에서 크게 벗어나니 허락해 줄 수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황제께서는 특별히 먼 나라를 너그럽게 대하는 뜻으로서, 허락하여 주고자 하였으나 여러 사람들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만 그 예물과 방물만을 받고 그 국왕과 사신에게 후하게 상을 주어서 보냈습니다. 신이 언제나 반열에서 서서 그들의 얼굴 모습을 보았는데, 보통 사람과 다름이 없었으나, 관복(冠服)은 지극히 괴이하였습니다. 그 머리털을 깎고 목에는 금구슬을 드리웠으며, 그들이 쓴 모자는 금실로서 만들었는데 높이가 거의 한자 남짓하고 윗부분이 점점 가늘고 뾰족하여 마치 소뿔처럼 되었으며, 끝에는 진주 하나를 매달아습니다. 옷은 금실로써 짠 천에 붉은 빛깔이 섞이고 꽃무늬로 수를 놓았으며, 소매는 좁고, 치마는 길며, 허리에는 큰 띠를 매었는데 그들이 입은 옷이 너무 엷어서 추위를 견디지 못하였으며, 비록 말은 하였지만 또한 다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1. 이부 상서 화신(和珅)은 지난해에 군기 대신(軍機大臣)으로 승진(陞進)하고, 아들이 황제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며, 딸은 황제의 손자에게 시집을 가서 권세가 날로 높아가고 있으며, 황제께서도 그 집에 번갈아 가며 내시를 보냅니다. 그리하여 세력이 하늘을 찌를 듯이 대단하여, 조정의 관리들이 붙좇지만 오직 각로(閣老)인 아계(阿桂)만은 대단한 공신의 가문임을 자랑하고 청렴하고 근신하는 마음을 스스로 지녔으므로, 화신의 공명과 꺼림을 받고 있어 조야에서 자못 신임한다고 합니다. 공부 상서 김간(金簡)도 또한 황제의 외척으로서, 은총을 많이 받으며 상사가 자주 빈번하여 세력이 화신의 다음 간다고 합니다.
1. 저쪽 조정에서 상하간에 예절이 전혀 없고, 다만 간편한 것만을 숭상하므로, 황제가 행차할 때 칼을 찬 사람들의 행렬을 볼 수 없고, 행군할 때에 기나 북 같은 것을 쓰지도 않습니다. 오직 화신과 복장안(福長安) 등 몇 사람은 모두 대신(大臣)으로서 언제나 황제 앞에 있는데, 말할 때에 신하라고 칭하지 않고 반드시 노재(奴才)라고 하였으며, 명령을 받는 사령(使令)들도 거의 조례(皂隷)와 같이 전혀 예모(禮貌)가 없었는데, 풍속이 본래 그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 황제가 지난해에 남쪽 지방으로 순행하였는데, 그 공억(供億)이 너무 방대해서 주(州)·현(縣)들이 조잔해지고 농민들은 다 쉴사이가 없었으며, 상선(商船)들도 혹은 나루에 다니지 못하였으며, 비록 풍년이 들었다 하더라도 흉년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누에치기 같은 것도 또한 그 때를 놓쳤기 때문에, 비단같은 물건들도 천하에서 오로지 남쪽 지방에 의존하여 왔는데, 금년에는 연경의 사람들의 의상(衣裳)의 물자와 신발 등 물건이 보통해보다 아주 귀하다고 합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9책 19권 43장 B면【국편영인본】 45책 510면
- 【분류】외교-야(野) / 무역(貿易)
- [註 044]임진년 : 1712 숙종 38년.
○辛未/謝恩書狀官李泰永進別單曰:
千叟宴, 曾於康熙五十年壬寅歲設行, 今年, 亦以臨御五紀, 特遵故事, 須詔各省, 有爵秩者限六十五歲, 爲兵民者, 限七十以上, 皆令赴宴, 合爲三千六百餘人。 一, 去年七月, 皇玄孫載錫生, 卽皇曾孫輔國將軍奕純之子也。 皇一子, 和碩安親王 永璜, 生綿德, 綿德生奕純, 奕純生載錫, 以爲五世同堂, 人世所難, 況帝王家, 尤是罕有, 曉諭天下, 若有五世同居者, 來會京師, 有蜀民人應旨而來者云。 一, 去年太學彝倫堂重修, 仍命大起辟雍, 卽創設也, 制遵古式。 今二月六日, 親行釋奠, 仍臨辟雍, 使衍聖公及太學士, 率十哲子孫, 五經博士行進講之禮。 仍使諸生, 圜橋聽之, 倣漢朝故事云。 一, 甘肅卽西凉州也, 民甚稀少, 地多閒曠, 年前屢征回子, 擒其民人, 徙置於甘肅, 徒售强悍之習, 每懷叛歸之心, 兼以甘肅總督勤爾謹, 頗事黷貨, 使不安業, 致有作亂之擧。 皇帝卽命安置勤爾謹, 以李侍堯代爲總督矣。 上年夏間, 回部酋長田五等, 又作亂。 命陜、隴諸路, 起兵討平, 分開兩路, 使男女各立, 男丁則盡數坑殺, 婦女則分給軍兵, 而亦有執致京師者。 又以侍堯之不善, 禁戢抄沒家産, 仍囚於甘肅地方。 一, 暹羅國在南海中, 距廣東水路萬餘里, 自廣東距燕京陸路五千里。 其國長新立, 遣使請封、貢使, 卽三品官。 從者五十餘人, 進京納貢。 表文, 名曰金葉表, 橫寫字行, 恰似梵書, 全不可解, 使廣東通事, 僅僅翻漢以奏。 皇帝使九卿, 會議閣老阿桂, 以爲: "請冊重事, 不用品高大臣, 只送年少微官, 殊欠尊敬之義。 且其奏文, 大違程式, 不可依準。" 皇帝則特以柔遠之意, 欲爲許施, 而群議不一, 故只收其禮幣與方物, 厚賞其國長及使臣而遣之。 臣每於班行, 見其容貌, 無異常人, 冠服極其詭異。 剃其頭髮, 項垂金珠, 所着帽子, 鏤金爲之, 高幾尺餘, 上漸尖細, 若牛角然, 而末懸眞珠一枚。 衣則金絲織布, 雜以紅色, 繡以花紋, 狹袖長裙, 腰纏大帶, 所着甚薄, 不勝寒逼, 雖有言語, 亦不能盡解。 一, 吏部尙書和珅, 去年陞爲軍機大臣, 子尙皇女, 女配皇孫, 權勢日隆, 皇帝且遣內侍輪番其第。 勢焰薰天, 搢紳趨附, 惟閣老阿桂, 勳代旣盛, 而淸謹自持, 爲珅敬憚, 朝野頗以倚賴云。 工部尙書金簡, 亦以戚畹, 恩寵甚赫, 賜與便蕃, 爲和珅之亞。 一, 彼朝上下, 全沒儀節, 徒尙便捷, 動駕未見劍佩之列, 行軍不用旗皷之屬。 惟和珅、福長安輩數人, 俱以大臣常在御前, 言不稱臣, 必曰奴才, 隨旨使令, 殆同皂隷, 殊無禮貌, 可見習俗之本然。 一, 皇帝去年南巡, 供億浩繁, 州縣凋弊, 農民擧未息肩, 商船或不通津, 雖値豐登, 無異歉荒。 至於蠶桑, 亦失其時, 紬緞之屬, 天下專靠於南邊, 而今年則燕京人衣裳之資, 鞋襪之屬, 絶貴於常年。
- 【태백산사고본】 19책 19권 43장 B면【국편영인본】 45책 510면
- 【분류】외교-야(野) / 무역(貿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