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용을 석방하고 양형·이율·홍복영을 국문하다
김이용(金履容)을 석방하라고 명령하였다. 양형(梁衡)에게 묻기를,
"네가 문양해(文洋海)에게 편지를 부칠 때에 겉봉에는 ‘이 진사(李進士)’라고 썼으나, 편지 내용은 분명히 너의 서찰이니, 편지를 부칠 때에 이율(李瑮)과 충분히 서로 의논하였다는 것은 불을 보듯이 명백한 일이다. 어느날 어느 시각에 누구와 같이 앉아서 서로 의논하고 편지를 부쳤으며, 기일을 3월로 정한 것과 간악한 것들을 없애버린다는 것과 와주(窩主)·도당(徒黨)과 군사를 일으킬 날짜를 모두 바른대로 고(告)할 것이다."
하니, 공초하기를,
"원컨대, 고발한 사람과 대질시켜 주소서."
하였다. 묻기를,
"오영장(五營將)의 복색(服色)을 분배한 것은 과연 그것이 무슨 뜻이며, 오영장은 또한 누구누구인가? 네가 만일 오영장을 분배한다고 적은 종이를 본다면, 이것을 알 수가 있겠는가?"
하니, 공초하기를,
"그것은 지방의 휴지(休紙)인 것 같은데, 지금 이 종이를 보더라도 실지로 알 수 없습니다."
하였다. 묻기를,
"김이용이 전한 서찰을 이율이 보았는가?"
하니, 공초하기를,
"그것을 보지 못하였으나, 그전부터 겉봉에 ‘이 진사’라고 쓴 것은 신이 상놈[常漢]이기 때문에 서찰을 왕래할 적에 반드시 ‘이 진사’의 이름을 빌려 썼습니다. 두 흉악한 사람이라는 것은 바로 홍극영(洪克榮)과 홍익영(洪益榮)이고, ‘두 흉악한 사람을 제거한다.’는 것은 곧 성 거사(成居士)의 말인데, 이런 말을 참견하여 들은 것은 곧 신의 죄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홍복영(洪福榮)이 스스로 한 일이 아니고, 바로 신이 홍복영을 위하여 이러한 일을 한 것입니다. 당초에 홍복영이 신에게 서찰을 보낼 때에 혹은 ‘소자(小子)’라고 하고 혹은 ‘선생(先生)’이라고도 하였는데, 이것은 우연한 일입니다."
하였다. 묻기를,
"너는 어찌 성 거사의 말을 알지 못하는가?"
하니, 공초하기를,
"성 거사는 세상 사람을 만나지 않는다고 하기 때문에 만나지는 못하였고, 다만 그가 풍수[地術]에 밝다는 소문만 들었는데, 문양해가 산중에서 그를 만나보니, 과연 《주역(周易)》을 잘 알더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금년 3월에 홍복영을 위하여 마땅히 초제(醮祭)를 지내고 재해를 없애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을 대신하여 도를 행한다.’는 말은 신이 정말 쓰지 않았습니다. ‘잔악한 것들을 없애버린다.’는 말은 홍복영이 형제간에 그렇게 하기가 곤란하였기 때문에 신이 홍복영을 위하여 이 일을 담당하였던 것입니다. 또 연전에 이율이 시골에 가서 살려고 하였기 때문에 신이 갈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말하니, 이율이 말하기를, ‘이왕 벼슬살이를 경영할 수도 없다면, 어찌 낙향(落鄕)할 마음이 없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도당이 누구인가를 물으니, 공초하기를,
"홍복영이 그의 처가(妻家) 이뇌(李耒)의 집에 오면 때때로 혹은 가서 만나곤 하였습니다. 성 거사(成居士)와 김정(金鼎)은 산중에 살고 있는데, 아궁이에 불을 떼지 않았으나 화식(火食)하였습니다. 그 중에는 또 현도 진인(玄都眞人)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나이는 5백 살이 넘었으며, 지리산 깊은 곳에서 살고 있는데, 성명은 백원신(白圓神)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사람은 4명이라고 하였습니다. 재작년에 명년 농사를 물었더니, ‘명년에는 틀림없이 흉년이 들 것이다.’고 하였으나 그 말은 맞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몇 해를 두고 경영(經營)하였다.’는 말은 곧 토지를 구하고 살 집을 물은 것인데, 홍복영은 홍극영·홍익영으로 하여금 그 사실을 알지 못하게 하고, 때때로 은전(銀錢)을 신에게 주어 전토를 매입하게 하였으며, 심지어 흉악한 계책을 면밀하게 꾸몄다는 것에 대해서는 절대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묻기를
"현도 진인이란 과연 어떤 사람이며, 천고에 드물다는 말은 과연 무슨 말인가?"
하니, 공초하기를,
"천고에 드물다는 말은 바로 성 거사와 일양자(一陽子)가 《학통(學統)》이라는 책을 보니, 그런 말이 있었다고 합니다. 일양자는 남달리 총명하기가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났기 때문에 한번 《학통》을 보면 곧 술술 암송을 하였고, 산에 들어가 머리를 깎으면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는데, 이것은 세상에 드문 일이라는 말입니다."
하였다. 묻기를,
"이른바 신인(神人)이라는 것과, 한두 해 안으로 큰 변란이 일어난다는 것과, 셋으로 갈라졌다가 뒤에 다시 합쳐서 하나로 된다는 말은 이율이 이미 바른대로 공초하였는데, 너는 어찌 감히 말하지 않는가?"
하니, 공초하기를,
"이율이 이미 공초를 바쳤다고 하니, 원컨대 이율과 대질시켜 주소서. 셋으로 갈라진다는 말은 성 거사가 이를 말하고 문양해(文洋海)가 이를 전하였는데, 조선은 산천(山川)과 천문(天文)과 지리(地理)가 모두 셋으로 갈라질 징조가 있는데, 임자년에 사변이 있어서 도적이 일어나며, 그 뒤에 마땅히 셋으로 갈라졌다가 다시 합쳐서 하나로 되며, 셋으로 갈라진다는 성씨는 정가(鄭哥)·유가(劉哥)·김가(金哥)이지만, 필경에는 정가가 마땅히 합하여 하나로 만드는데, 그는 남해(南海)의 섬 가운데에 있으며, 유가는 통천(通川)에 있으며, 김가는 영암(靈巖)에 있다고 합니다. 임자년에 정가가 먼저 해도(海島)에서 군사를 일으키면, 유가·김가가 그 뒤를 이어 일어난다고 하였기 때문에, 신은 이렇게 주고받은 말을 홍복영에게 전하였는데, 임자년 2월에 배가 바다 가운데에서부터 온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묻기를,
"네가 홍복영과 말을 주고받은 것은 무슨 일이고, 어디에서 말을 주고받았는가?"
하니, 공초하기를,
"두서너 달씩 사이를 두고 아현(阿峴)에서 만나보았으나, 정월 초8일 이후에는 만나보지 못하였습니다. 그 날 서로 만나보았을 때에는 ‘땅임금[坤帝]에게 초제(醮祭)를 지내면, 3월 이후에는 모든 재앙이 다 없어진다.’고 하였습니다. 홍복영의 사람됨이 능히 흉계를 꾸밀 수 없는 사람이니, 신이 감히 남을 무고할 수 없습니다."
하니, 묻기를,
"문가(文哥)가 회답한 서찰과 홍복영이 모두 3월이라는 말을 한 것은 곧 을사년 3월을 가리킨 것이다. 네가 홍복영과 모의한 것과 나라에 대하여 원망한 말을 바른대로 고할 것이다."
하니, 공초하기를,
"피난한다는 말은 과연 이율과 홍복영에게 전하였습니다. 그것은 대개 이상한 사람이 지리산 중에 있으면서 말하기를, ‘임자년에 마땅히 사변이 있을 것이니, 미리 피난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홍복영이 이 말 때문에 하동(河東)에 가려고 하였고, 이율은 하동에 갈 계획을 신에게 물었기 때문에 대답하였더니, 이율도 또한 하동에 같이 가려고 하여 이미 2백 냥의 돈을 먼저 내려보낸 것입니다."
하였다. 묻기를,
"이미 병란(兵亂)이 남방에서 일어난다고 하였는데, 가서 살려는 계획을 반드시 남방으로 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니, 공초하기를,
"성 거사가 말하기를, ‘이미 그 곳은 깊은 산중이고, 또 우리들이 있으면 마땅히 보호하여 줄 방도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묻기를,
"이른바 이상한 사람이 4명까지 된다면, 반드시 다소간 신통한 일이 있을 것이다."
하니, 공초하기를,
"문광겸(文光謙)이 체포당할 때에 그 문서를 수색하였더니, 그중에 연대순으로 엮은 책자(冊子)가 있었는데, 임자년부터 정묘년까지 연달아 병란[兵火]이 있고, 그뒤에는 잇따라 셋으로 갈라질 것이며, 을사년 봄에는 마땅히 수재(水災)가 있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 글에 이르기를, ‘임주(林州)와 옥구(沃溝)사이가 물에 몇 자 깊이로 잠기고, 기유년에 마땅히 비참한 흉년이 들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무신년에는 북방의 도적이 크게 일어나서 집을 부수고 절간을 허물어도 관군이 능히 대적하지 못하며, 정미년에는 곤양(昆陽)과 고성(固城) 사이에 수재가 있고, 경술년과 신해년간에는 들에 푸른 풀이 없어지며, 임자년에는 남쪽섬의 군사가 강을 건너온다.’고 하였으며, 임자년 이후에는 쓴 것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묻기를,
"문광겸은 반드시 그와 같이 모의하고 주장한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하니, 공초하기를,
"문광겸의 아들 문양해가 금강산 절에서 김정을 만나서 서로 친하게 되었는데, 연대순으로 엮은 책이 그와 같았다는 것입니다."
하였다. 이율에게 묻기를,
"양형이 공초한 이른바 이상한 사람과 연대순으로 엮은 책 가운데 허다한 음흉한 말들을 너와 충분히 토의하였다는 것과, 또 전화(錢貨)를 수송한 정상은 또한 이미 다 여지없이 드러났으니, 다시 숨기지 말 것이다."
하니, 공초하기를,
"양형에게서 들으니, 과연 이상한 사람의 말이 있었다고 합니다. 전화는 전후하여 보낸 것이 모두 수천 냥이나 됩니다. 신이 하동에 가려고 한 것은 좋은 묘자리가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과연 내려가려고 한 것이며, 신의 죄는 오로지 양형의 ‘세 가지 재앙이 들지 않는다.’는 등의 말을 곧이 들은 데에 있는데, 호랑이 걱정·흉년·전염병[時患], 이것이 세 가지 재앙입니다."
하였다. 묻기를,
"너는 양형의 허탄하고 요망한 말을 듣고 하동에 가고자 하였다는데, 허탄하고 요망한 말과, 양형과 교제를 맺은 것이 어느 곳에서 언제였는지를 바른대로 고할 것이다."
하니, 공초하기를,
"임진년032) 부터 계사년 사이에 신의 형 이찬(李璨)이 순안 현령(順安縣令)이 되었을 때 신이 평양을 지나갔습니다. 김헌주(金獻柱)가 그때 본 고을에 있었는데, 양형이 따라왔기 때문에 과연 만나보았으며, 상경(上京)한 뒤에도 친숙하여져서 서로 왕래하였습니다."
하였다. 홍복영에게 묻기를,
"너의 집은 나라에 후한 은덕을 받았으니, 의리상 공신과 귀족과 같은데, 불행하게도 네가 반역 행위를 하는 일이 있게 되었다. 너의 도리로서는 다만 마땅히 자기 가문을 보전하지 못한 것을 통탄하고, 망극한 나라의 은덕에 감격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도리어 마음속에 몰래 딴 마음을 품고, 몰래 흉계를 꾸며서 변란을 일으키려는 무리들과 결탁하여 세상을 유혹시키려는 음모를 퍼뜨리고, 불러모은 사람들이 올빼미 같이 지독한 같은 무리들이고, 포치(布置)한 사람들이 물여우 같은 나쁜 무리였다. 심지어 지극히 흉악하고 너무나 발칙하고 지극히 요망스럽고 너무나 허탄스러운 말까지 입으로 내뱉고 글로 쓰고 책을 엮고 편지를 쓰면서, 서로 제창하고 서로 화답하여 연락하지 않은 날이 거의 없었다. 만나는 자리를 밤중으로 정한 것이 많이 있었고, 만금(萬金)의 재물을 투자하여 1백 칸 짜리의 집을 짓고 겉으로는 숨어서 사는 체하면서 속으로는 반란을 일으킬 계책을 꾸몄다. 혹은 현사(玄師)라고 일컫고, 혹은 백석(白石)이라고 일컫고, 혹은 운재(雲齋)라고 일컫고, 혹은 설우(雪友)라고 일컫고, 혹은 향악(香嶽)이라고 일컫고, 혹은 명궁(溟宮)이라고 일컬었는데, 일양자(一陽子)라고 부르는 것은 누구를 말하는 것이고, 노선생(老先生)이고 부르는 자는 과연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가? 부서를 먼저 결정하고 모일 기일을 이미 정하였으며, 삼도(三道)에서 몰래 세 장수를 두고 이상한 사람은 각각 이상한 칭호를 가졌으며, 잔악한 것들을 없애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고, 하늘을 대신하여 도를 행한다는 것을 말과 행동의 기본 바탕으로 삼았다. 북방의 도적이 나와 싸움을 일으키고 군사를 동원할 기미가 드러났다고 하며, 남쪽에서 배가 건너와서 나라를 빼앗고 임금을 해칠 계책을 급히 서두른다고 하였다.
압수한 문서를 보건대, 언제나 몇 해를 경영하는 일이 모두 3월에 있다고 여러번 말하였고, 몰래 기회를 엿보았으니, 흉악한 정상이 이제 와서 다 드러났다. 네가 비록 입이 석 자라고 한들 어찌 변명할 수가 있겠으며, 어찌 너 한 사람이 혼자 변명할 수가 있겠는가? 홍극영은 곧 너의 서형(庶兄)이고, 홍익영은 바로 너의 4촌이다. 보통 인정으로 헤아리더라도 해칠 생각이 없을 것 같은데, 역적 모의에 급급한 나머지 친혈육도 돌아보지 않았다는 것이 더욱 명백하다고 말할 수 있다. 임금에게 불충하고 부모에게 불효하고 형제사이에 불목한 죄는 만번 죽더라도 속죄하기가 어렵다. 조정에서 이것을 가지고 신문하는 중에 일일이 거론하는 것은 대개 간사한 정상을 환히 꿰뚫어 보고 증거를 삼으려는 데에서 나온 것이다."
하니, 공초하기를,
"신이 비록 불충하고 불효하다고 하더라도 어찌 나라의 은혜를 알지 못하고 감히 나라에 대하여 원망하는 말을 하였겠습니까? 심지어 ‘몇 해를 두고 경영하던 일이 모두 3월에 있다.’고 하였던 것은 신이 하동으로 가려고 하자, 친한 사람인 양형이라는 자가 중간에서 주선하여 집을 짓게 하였습니다. 양형이 말하기를, ‘하동 땅에 집터를 잡고 살 만한 곳이 있으나, 가사를 맡아보는 부친께서 틀림없이 가도록 허락할 리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대개 양형은 언제나 외사촌을 보고 싶다고 하였기 때문에 ‘너의 외사촌이 누구냐?’고 물으면, 양형이 말하기를, ‘바로 문가인데, 풍수를 잘 알아서 같이 살 만한 사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임인년033) 에 신의 부친이 죽은 후에 양형이 와서 조문하였기 때문에, 신이 말하기를, ‘하동에 가서 살려고 계획한지 이미 오래이다. 3년상을 치른 뒤에 가서 사는 것이 어떻하겠는가?’라고 하였더니, 양형이 말하기를, ‘먼저 돈을 내어서 토지를 사고 3년상이 지난 뒤에 가서 사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신이 말하기를, ‘화개동(花開洞)에 내가 가서 살려고 한다.’고 하고, 이어서 은자(銀子) 3,4백 냥과 동전(銅錢) 5천 냥, 도합 1만여 냥을 주었는데, 계묘년034) 봄에 비로소 다 주었던 것입니다. ‘몇 해를 두고 경영한 일이 3월에 있다.’고 한 것은 곧 을사년 3월을 가리킨 것입니다. 대개 문씨의 아들이 이른바 노사(老師)에게서 글을 배웠는데, 노사가 점치는 이치를 잘 알며, 그가 말하기를, ‘신이 하동에 가서 사는 것은 3월이 길하다.’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신이 하동으로 가려고 하면서도 신의 4촌과 서형(庶兄)으로 하여금 알지 못하게 한 것은 대개 양형이 신의 4촌과 신의 서형과 서로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홍익영·홍극영 등을 언제나 원수같이 미워하였던 것입니다."
하였다. 허다한 이상한 사람들의 성명(姓名)과 거주하는 곳을 물으니, 공초하기를,
"운재(雲齋)는 바로 향악(香嶽)이고, 성은 김가이며, 일양자는 성이 모가(茅哥)라고 하는데, 이름은 양형도 또한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말 알지 못합니다."
하였다. 묻기를,
"너는 양형에게 속았으니, 이제 비록 바른 대로 말하더라도 너의 죄가 아니다. 주모자(主謀者)와 도당을 바른 대로 고할 것이다."
하니, 공초하기를,
"양형이 와서 말하기를, ‘이상한 사람의 말을 들으니, 「나라가 장차 어지럽게 된다.」라고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른바 이상한 사람[異人]이란, 바로 향악(香嶽)과 노사(老師)를 일컫는 것인데, 그 중에는 또 징담(澄潭)이라는 자가 있으며, 문양해는 곧 향악(香嶽)·징담(澄潭)·노사(老師) 세 이상한 사람의 제자입니다. 향악은 평안도에서 나서 지금 하동 지리산에 살고 있으며, 징담도 또한 지리산에 있으며, 일양자에 대해서는 양형이 말하기를, ‘중국 사람인데 스스로 모선(茅仙)이다.’라고 일컫고, 나이는 40세 미만인데 정처없이 돌아다닙니다. 이른바 노사라는 자는 지금 향악에게 갔습니다."
하였다. 묻기를,
"노사를 향악에게 보낸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공초하기를,
"집안으로 하여금 말들이 없게 하려고 그런 것입니다. 어찌 종형과 서형을 해치려는 마음이 있었겠습니까? ‘나라가 장차 어지러워지면 시운(時運)을 어떻게 할 수 없다.’고 노사의 말이 이와 같았기 때문에 과연 시골로 내려갈 계획을 냈던 것입니다."
하였다. 군사를 일으킨다는 말을 물으니, 공초하기를,
"노사(老師)가 말하기를, ‘영암(靈巖)에서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다만 앞으로 두 해가 남았다.’고 하였습니다. 대개 세 곳에서 군사를 일으키는데, 하나는 충청도이지만 고을 이름은 자세히 모르겠습니다. 또 들으니, ‘무신년에 신병(神兵)이 바다를 건너온다.’고 하였으나, 바다 가운데 있는 섬 이름은 잊어버리고 기억하지 못하겠습니다. 그 중에 정가(鄭哥) 성씨를 가진 신인(神人)이 나이는 지금 13살입니다. 영암에서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곧 김가 성씨를 가진 사람이고, 충청도에서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바로 유가(劉哥) 성씨를 가진 사람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모두 양형의 말입니다."
하였다. 묻기를,
"양형의 도당은 누구인가?"
하니, 공초하기를,
"노사·향악이 모두 그의 도당이고 서울에서는 이율과 양형이 막역한 친구입니다. 심지어 ‘기일을 3월로 정하였다.’고 하는 것은 영암에서 군사를 일으키는 것이 과연 금년 3월이나 4월에 있다는 것이고, 그 사람은 바로 노사·향악의 무리들이고, 이른바 ‘하늘이 낸 사람이다.’라는 것은, 그 성씨가 김가이고, 이름은 자세히 모르겠는데, 김가는 금년에 군사를 일으키고, 유가는 정미년에 군사를 일으키고, 정가는 무신년에 군사를 일으켜서, 세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장차 1백 년 동안 서로 싸우기 때문에 객성(客星)이 남방에서 이미 서울[京城]로 들어왔다고 하였습니다. ‘양형은 또 말하기를, 도사(道師)의 말을 들으면, 정가는 세 번 사람을 나라 안에 들여보내서 사정을 탐지하였다.’고 하였으며, 통틀어서 말한다면, ‘도사(道師)와 향악(香嶽)과 서쪽 이웃[西隣]이 영암(靈巖)의 김가와 일을 꾸몄다.’고 하였는데, 서쪽 이웃이란 바로 이율의 집인데, 양가의 집 서쪽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묻기를,
"신선(神仙)과 도사(道士)라는 말은 특히 인심을 현혹하려는 계책에서 나온 것인데, 아직 그 말을 다 언급하지 않았으니, 지금 바른대로 진술해야 할 것이다."
하니, 공초하기를,
"양형이 일찍이 향악이 직접 쓴 서찰을 가지고 와서 신에게 보였는데, 그 글은 아주 잘 썼으며, 편지 가운데에 사연에서 이르기를, ‘양형과 신은 전생(前生)에 지리산 공중에 살면서 한 나라에서 같이 금단(錦緞) 창고를 지키다가 귀신 하나를 찔러 죽였는데, 그 죄 때문에 양형은 인간 세상에 귀양살이를 내려왔고, 신은 20년 동안 갇혀 있다가 비로소 세상에 나왔다. 그러므로 현생[今生]에서 거취를 같이 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또 향악의 말을 가지고 와서 전하기를, ‘나이 30이 되면 반드시 죽을 것이지만, 만약 은전 7백 냥을 구해서 기도하면 5,60살까지 살 수있다.’라고 하였기 때문에 은전 5백 냥을 내주어서 양형과 향악이 이 은전을 가지고 수신(水神)에게 기도하여 나이를 60살까지 연장하게 하였고, 심지어 수신의 수표(手標)를 얻었는데, 수결(手決) 모양과 같았으며, 그것을 양형이 있는 곳에 두었습니다."
하였다. 양형에게 묻기를,
"징담(澄潭)이란 누구인가?"
하니, 공초하기를,
"징담은 고가(高哥) 성씨이고 이름은 화구(花晷)이며 평안도에서 났는데, 바다 속 깊은 물밑에 숨어 있어서 사람들이 만나 볼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홍복영과 양형을 대질시켰는데, 홍복영이 양형에게 말하기를,
"네가 신축년(申丑年)035) 4월 아현(阿峴)에서 서로 만났을 때에 하나는 을사년에, 하나는 정미년에, 하나는 무신년에 있다고 어찌 분명히 나와 말하지 않았는가?"
하니, 양형이 말하기를,
"세 곳에서 군사를 일으키는 것이 어느 해에 있다는 말을 나는 실로 알지 못한다."
하였다. 홍복영이 말하기를,
"네가 어찌 영암에서 군사를 일으킬 사람은 곧 김가(金哥)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하니, 양형이 말하기를,
"유가(劉哥)·정가(鄭哥)·김가(金哥)가 군사를 일으킨다는 말은 정말로 하였으나, 그들의 이름은 실지로 알지 못한다. 내가 말한 것은 다만 연대순으로 엮은 책 가운데 있는 사실인데, 문양해의 문서를 수색하여 올 때에 그 책자가 반드시 그 가운데에 있었을 것이다."
하였다. 홍복영이 말하기를,
"아현에서 만났을 때 네가 을사년 봄이라는 말을 하였고, 그뒤 계묘년에 네가 또 서선(西仙) 등이라는 말로 서찰을 썼던 것이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9책 19권 31장 A면【국편영인본】 45책 504면
- 【분류】정론(政論) / 사법(司法) / 변란(變亂) / 사상(思想)
○命放金履容, 問梁衡曰: "汝寄書洋海時, 外封則書以李進士書, 裏面則明是汝札, 則付書時與李瑮爛漫相議, 明若觀火。 何月何日何時, 與誰某同坐相議付送, 而期在季春及除殘去惡, 窩主、徒黨, 稱兵日字, 竝直告。" 供曰: "願與發告人面質矣。" 問曰: "五營將服色之分排, 果是何意? 五營將亦是誰某耶? 汝若見五營將分排所書之紙, 則可以知之乎?" 供曰: "似是外方休紙, 而今見此紙, 實無所知矣。" 問曰: "金履容所傳之札, 李瑮見之乎?" 供曰: "此則不見, 而從前皮封之書以李進士者, 臣則常漢之故, 書札往來, 必借李進士名矣。 二凶, 卽克榮、益榮, 而除去二凶, 卽成居士之說也。 參聞此言, 卽臣之罪矣。 然此非福榮自爲之事, 乃臣爲福榮作此事矣。 當初福榮之貽書於臣也, 或曰小子, 或曰先生者, 此是偶然之事矣。" 問曰: "汝豈不知成居士之說乎?" 供曰: "成居士, 不見世人云, 故未得見。 只聞其明於地術, 而文洋海逢着於山中, 則果善《周易》云, 而以爲: ‘今三月, 爲福榮當醮祭除害。’ 云, 故替天行道之說, 臣未果書之矣。 至於除殘去惡之說, 福榮於兄弟間, 難於爲此, 故臣爲福榮擔當此事。 且於年前, 李瑮欲往居鄕中, 故臣以不必往之意言之, 則瑮曰: ‘旣無科宦之可營, 則豈無落鄕之心?’ 云矣" 問徒黨爲誰。 供曰: "福榮若來於其妻家李耒處, 則時或往見矣。 成居士、金鼎, 居在山中, 絶烟火食。 其中又有玄都眞人, 年過五百, 在智異山中深處, 姓名則白圓神, 而異人爲四人。 再昨年, 問明年年事, 則以爲: ‘明年, 年必不登。’ 云, 而其言不驗矣。 至於幾年經營云者, 卽求田問舍, 而福榮, 不使克榮、益榮知之, 時給銀錢於臣, 使之買得田土, 而至於凶計之綢繆, 則萬萬無此矣。" 問曰: "玄都眞人, 果是何人, 千古絶罕之言, 果是何言也?" 供曰: "千古絶罕之言, 卽成居士、一陽子見《學統》書, 有此言云, 而一陽子, 聰明絶人, 故一見《學統》, 輒成誦, 入山落髮, 則天降花雨, 此是絶罕之言矣。" 問曰: "所謂神人及一兩年內生出大變, 三分後復合爲一之說, 李瑮旣已直招, 則汝何敢不言乎?" 供曰: "李瑮旣納供云, 願與瑮面質矣。 三分之說, 成居士言之, 文洋海傳之, 而朝鮮山川, 天文地理, 皆有三分之兆, 壬子年有事賊起, 其後當三分復合爲一, 而三分之姓, 則鄭哥、劉哥、金哥, 畢竟鄭哥當合而爲一, 而在於南海島中。 劉哥在於通川, 金哥在於靈巖云矣。 壬子, 鄭哥先爲起兵於海島, 劉、金則繼此而起云。 故臣以此酬酢, 傳於洪福榮, 而壬子二月, 船自海中來云矣。" 問曰: "汝與福榮所酬酢者何事, 酬酢於何處耶?" 供曰: "間數三朔, 逢見於阿峴, 而正月初八日之後, 更不逢見。 伊日相見之時, 以醮祭於坤帝, 則三月後諸厄盡消云, 而洪福榮之爲人, 不能爲凶圖, 臣不敢誣人矣。" 問曰: "文哥答札及福榮, 皆有季春之說, 卽指乙巳三月也。 汝與福榮, 謀議及怨國之說直告。" 供曰: "避亂之說, 果傳及於瑮與福榮許, 而蓋異人, 在於智異山中, 以爲: ‘壬子年, 當有事, 預爲避亂爲好。’ 云, 故福榮果以此, 欲往河東, 而瑮問臣以往河東之計, 故答之, 則瑮亦欲同往河東, 已以二百兩錢, 先爲下送矣。" 問曰: "旣云兵亂起自南方, 則卜居之計, 必欲向南, 何也。" 供曰: "成居士以爲: ‘旣是深山之中, 且有吾輩, 則當有保護之道。’ 云矣。" 問曰: "所謂異人, 至於四人, 則必有多少神通。" 供曰: "文光謙, 當就捕, 搜探其文書, 則其中有編年冊子, 而壬子至丁卯, 連有兵火, 其後仍爲三分, 乙巳春, 當有水災, 其文曰: ‘林、沃之間, 水深數尺, 己酉年當爲慘凶。’ 云。 ‘戊申北賊大起, 打家破寺, 官兵不能敵, 丁未, 昆陽、固城之間, 有水災。 庚戌、辛亥, 野無靑草。 壬子, 南島兵渡江’ 云, 而壬子後, 則無所書矣。" 問曰: "文光謙, 必有同謀主張者。" 供曰: "文光謙之子洋海, 逢金鼎於金剛山寺, 與之相親, 而編年者如此云矣。" 問瑮曰: "梁衡所供所謂異人編年中, 許多陰慘之說, 與汝爛漫酬酢, 錢貨輸送之狀, 亦已畢露無餘。 勿復隱諱。" 供曰: "聞於梁衡, 則果有異人之說。 而錢貨, 則前後所去, 合爲數千兩矣。 臣之欲往河東者, 聞有好山地, 故果欲下往, 而臣罪專在於信聽梁衡三災不入等說, 而虎患、凶年、時患, 此爲三災矣。" 問曰: "汝聞梁衡誕妄之說, 而欲往河東云。 誕妄之說及與梁衡結交之在於何處何時, 直告。" 供曰: "壬辰癸巳年間, 臣兄璨, 爲順安縣令時, 臣過平壤。 金獻柱, 時在本官, 梁衡隨來, 故果爲逢見, 上京後, 親熟往來矣。" 問洪福榮曰: "汝家受國厚恩, 義均勳貴, 不幸有汝從事矣。 在汝道理, 但當痛私門之莫保, 感國恩之罔極。 乃反陰懷異志, 潛逞凶圖, 締結思亂之徒, 譸張惑世之謀, 嘯聚者梟獍, 排布者鬼蜮也。 至以窮凶絶悖, 至妖極誕之說, 發之口而筆之書, 聯篇累牘, 雄唱雌和, 裁簡殆無虛日。 接席多在卜夜, 捐萬金之財, 起百間之第, 外示隱遯之跡, 內售醞釀之禍。 或稱玄師, 或稱白石, 或稱雲齋, 或稱雪友, 或稱香嶽, 或稱溟宮, 一陽子之號, 阿誰爲也? 老先生之名, 果何指也? 部署先決, 期會已定, 三道潛置三帥, 異人各有異稱, 以除殘去惡, 爲己任。 替天行道爲話欛云, 有北賊出, 而興師動兵之機露矣云, 有南艘渡, 而簒國射日之謀急矣。 觀於所捉文書, 每以幾年經營, 都在季春, 言之重複, 密伺暗覘, 窮凶情節, 到此綻露。 汝雖喙長三尺, 烏可發明, 而豈汝一人所可獨辦乎? 克榮, 卽汝之庶兄。 益榮, 卽汝之從也。 揆以常情, 似無殘害之意, 而急於謀逆, 不顧天屬之親者, 尤可謂明的矣。 不忠不孝不悌之罪, 萬死難贖。 朝家以此, 歷擧於盤問之中者, 蓋出覷破奸情, 以作證援也。" 供曰: "臣雖不忠不孝, 豈不知國恩, 而敢有怨國之說乎? 至若幾年經營, 都在季春云者, 臣欲往河東, 而所親人梁衡者居間, 使之作舍矣。 衡云: ‘河東地, 有可卜居之所, 而執事之父親, 必無許往之理’ 云云。 蓋衡每欲見外從云, 故問: ‘汝之外從爲誰?’ 則衡曰: ‘卽文哥, 而頗知地術, 可與同居者也。’ 壬寅年, 臣父死後, 梁衡來弔, 故臣曰: ‘往居河東, 計已久矣。 過三年後, 往居何如?’ 衡曰: ‘先出錢買土, 過三年後往居爲好。’ 故臣曰: ‘花開洞, 吾欲往居。’ 仍給銀子三四百兩及錢五千兩, 合爲萬餘金, 而癸卯春, 始盡給矣。 幾年經營, 在於季春云者, 卽指乙巳三月也。 蓋文生之子, 受學於所謂老師, 而老師頗解占理。 其言以爲: ‘臣之往居河東, 三月爲吉。’ 云矣。 臣欲往河東, 而不使臣從及庶兄知之者, 蓋衡與臣從及臣庶兄, 不相好。 故益榮、克榮輩, 常嫉之如仇讎矣。" 問許多異人之姓名居住。 供曰: "雲齋, 卽香嶽, 而姓金哥。 一陽子, 姓茅哥云, 而名則梁衡, 亦不言及, 故果不知矣。" 問曰: "汝爲梁衡所欺, 今雖直告, 非汝之罪。 謀主徒黨直告。" 供曰: "梁衡來言曰: ‘聞異人之言, 則國家將亂’ 云云。 所謂異人, 卽香嶽、老師之稱。 而其中, 又有澄潭者矣, 文洋海, 卽香嶽、澄潭、老師, 三異人之弟子。 香嶽生於平安道, 方住河東 智異山。 澄潭亦在智異山。 至於一陽子, 則梁衡以爲: ‘中原人, 而自稱茅仙。’ 年未滿四十, 行止無定處, 所謂老師, 則方往香嶽矣。" 問曰: "送老師於香嶽者, 何也。" 供曰: "欲使家中, 無辭說而然矣。 豈有殘害從兄、庶兄之心乎? ‘國家將亂, 時運無奈何’, 老師之言如此, 故果出下鄕之計矣。" 問擧兵之說, 供曰: "老師以爲靈巖起兵, 只隔二年。 而蓋三處起兵, 一則忠淸道, 而未詳邑名。 又聞: ‘戊申生神兵渡海’ 云, 而海中島名, 忘未記得。 其中有鄭姓神人, 年今十三歲。 靈巖起兵, 卽金姓人, 忠淸道起兵, 卽劉姓人云。 此皆衡之言。" 問曰: "梁衡之徒黨誰也?" 供曰: "老師、香嶽, 皆其徒黨, 而京中, 則李瑮與梁衡爲莫逆。 至於期在季春云者, 靈巖起兵, 果在今年三月四月, 而其人, 卽老師、香嶽輩所謂天之所生之人, 其姓金也, 名則未詳, 而金哥起於今年, 劉哥起於丁未, 鄭哥起於戊申, 三姓將百年相戰, 故客星自南方, 已入京城云矣。 衡且云: ‘聞道師之言, 則鄭哥三送人於國中, 探知事情’ 云。 而統以言之, 則道師、香嶽、西隣, 與靈巖 金哥綢繆云。 西隣, 卽李瑮之家, 而在梁衡家之西故也。" 問曰: "神仙、道士之說, 特出於誑惑人心之計, 而未及畢其說, 今可直陳乎。" 供曰: "衡嘗持香嶽親筆書, 來示於臣, 文則極善, 而書中辭意以爲: ‘衡與臣, 前生在智異山空中, 一國同守錦緞庫, 刺殺一鬼, 因以其罪, 衡則謫下於世, 臣則二十年被囚, 始乃出世, 故今生爲同去就之人’ 云。 又以香嶽之言, 來傳曰: ‘年至三十, 必死, 若得七百兩銀祈禱, 則可至五六十歲’ 云, 故出給五百兩銀, 衡與香嶽, 持此銀祈水神, 俾延六十之壽, 至得水神手標, 如手決樣, 而此則置於梁衡之所矣。" 問衡曰: "澄潭誰也?" 供曰: "澄潭, 高姓, 名爲花晷, 生於平安道, 而藏於海中水底深處, 人不得見矣。" 福榮與衡面質。 福榮向衡曰: "汝於辛丑四月, 阿峴相逢時, 豈不曰: ‘一則在於乙巳, 一則在於丁未, 一則在於戊申。’ 云者, 分明與吾言及矣。" 衡曰: "三處起兵, 在於某歲之說, 吾實不知矣。" 福榮曰: "汝豈不曰: ‘靈巖起兵之人, 卽金哥。’ 云乎?" 衡曰: "劉、鄭、金起兵之說, 果爲之, 而其名, 則實不知矣。 吾之所言, 只編年冊中事, 而洋海文書搜來時, 冊子必在其中矣。" 福榮曰: "逢於阿峴時, 汝爲乙巳春之言, 其後癸卯年, 汝又以西仙等說, 作札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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