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은 정사 박명원과 부사 윤승렬의 장계
사은 정사(謝恩正使) 박명원(朴明源)과 부사 윤승렬(尹承烈)이 장계(狀啓)하기를,
"신 등은 정월 26일에 북경(北京)에 도착하여 남소관(南小館)에 묵었으며, 당일 예부(禮部)에 나아가 표문(表文)과 자문(咨文)을 바쳤더니, 한시랑(漢侍郞) 육비지(陸費墀)가 이를 받았습니다.
신 등이 듣건대, 황제께서는 일찍이 재작년에 호부 상서(戶部尙書) 유용(劉墉), 예부 상서(禮部尙書) 덕보(德保), 공부 상서(工部尙書) 김간(金簡)에게 명령하여 태학(太學)의 서쪽에 벽옹(辟雍)을 짓게 하고 장차 이번 2월 첫째 사일(巳日)에 친히 석전제[釋菜祭]를 행하고, 이어서 벽옹에 행차하여 유학을 강론한다고 하였습니다. 28일에 예부에서 황제의 명령을 통지하기를, ‘2월 초7일에 조선 사신을 접견하고 예식을 진행한다.’라고 하고, 신 등으로 하여금 먼저 예식을 연습하는 데에 참가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29일에 신 등이 국자감(國子監)에 나아가자, 예부 상서 덕보가 벽옹 안에 앉아있다가 각별히 친절하게 대하면서 말하기를, ‘사은 방물(謝恩方物)은 경자년016) 에 성절(聖節)을 진하(陳賀)하는 사행(使行)에서 황제의 명령을 받고 감면시켜 주었는데, 그 후에는 천수연(天叟宴)과 같은 따위의 성대한 행사가 아니면, 다시 방물을 바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해당 부에서 이미 황제의 유시를 받들었으므로, 이번의 방물도 또한 사은하는 것과 관계되므로 이것을 받기가 어렵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신 등이 또 말하기를, ‘이번에 봉전(封典)은 실지로 저의 나라의 경사와 관계되는 것이니, 우러러 황상의 은혜에 감동하여 조금이라도 정성을 표시하는 방도는 오직 방물을 바치는 길밖에 없습니다. 만일 바치지 못하면, 우리들은 돌아가서 국왕에게 아뢸 말이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상서가 말하기를, ‘마땅히 그러한 뜻으로서 황제에게 전주(轉奏)하겠습니다.’라고 하였기 때문에, 신 등은 그길로 하직하고 물러 나와서 벽옹전(辟雍殿)을 두루 돌아보고, 이어서 예식을 연습하는 데에 참가하였습니다.
이달 초2일에 통지가 있었기 때문에 또 예식을 연습하는 데에 참가하였습니다. 황제가 사은하는 표문을 훑어보고 명령을 내리기를, ‘국왕에 사례하는 글과 아울러 표문에 따르는 공헌 방물(貢獻方物)을 보니, 모두 정성을 알 수가 있다. 모든 공물을 해당 아문(衙門)에 알려주고 은혜를 다하여 상을 주도록 할 것이다. 전번에 사신 서명(西明)과 아숙(阿肅)을 보내었는데, 북경(北京)에 돌아와서 복명하면서 자세히 아뢰기를, 「해당 국왕이 즉석에서 지은 시(詩)로 보아 학문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라고 하고 아울러 그 지은 시를 바쳐서 보게 하였다. 짐이 이를 읽어보고 매우 가상하게 여겨 상으로서 내부(內府)에 있는 송판(宋板)을 모방한 《오경전부(五經全部)》와 아울러 필묵(筆墨) 등의 물건을 주어서 특별히 우대하는 뜻을 보였었다. 이것은 곧 보통으로 우대하고 상을 준 것인데, 반드시 전사(專使)가 와서 사은할 것이 없다.’라고 하였으므로 흠차(欽此)하였습니다. 내각(內閣)에서 특별히 송판본을 모방하여 《오경전부》 12투와 벼루 1개, 화전지(花箋紙) 2권, 휘묵(徽墨) 4갑, 호필(湖筆) 4갑, 감옥 여의(嵌玉如意) 1자루, 문죽합(文竹盒) 4개, 파려기(玻瓈器) 4건, 자기(磁器) 4건, 우추(羽縐) 4필, 정향견(程鄕繭) 4필, 홍사녕주(紅絲寧紬) 4필, 홍보로(紅氆氌) 4개를 주었는데, 예부에서 통역[任譯]을 불러다가 전해 주었기 때문에, 신 등이 일일이 내려주는 물건을 받았습니다. 사은하는 표문 2통은 모두 국왕의 사은하는 글을 읽어보고, 아울러 표문에 따르는 공물(貢物)은 이미 명령을 내린 것이 있었기 때문에, 해당 아문에서 그 명령을 내린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초7일 5경(更)에 신 등은 서장관 이정운(李鼎運)과 역관 3인과 함께 벽옹전(辟雍殿)의 뜰에 나아가니, 특별히 신 등의 반열을 서반(西班) 뒷자리에, 거인(擧人)들의 앞자리에 마련하였습니다. 날이 밝을 무렵에 황제가 석전제를 친히 행하고, 이어서 벽옹에 나아가서 유학을 강론 하였는데, 동반·서반의 관리들이 수백 명이고 공생(貢生)·감생(監生)·거인(擧人)·수재(秀才)로서 뜰에 들어온 사람이 수천 명이었으며, 공자의 72대 자손으로서 세습한 연성공(衍聖公) 공헌배(孔憲培)도 또한 곡부현(曲阜縣)에서 와서 참가하였습니다. 모두 삼궤구고례(三跪九叩禮)를 행한 뒤에, 비로소 신 등으로 하여금 일궤삼고례(一跪三叩禮)를 행하게 하였습니다. 전위에 강론에 참가한 여러 신하들에게도 모두 낙차(酪茶) 한 순배씩 내려주고, 신 등과 역관에게도 또한 낙차 한 순배씩을 내려주었으며, 또 동반·서반의 관리들과 공생·감생·거인·수재 등에게는 차를 주는 일이 없었습니다. 조금있다가 황제가 강론을 파하고, 이어서 원명원(圓明園)에 행차하였는데, 신 등은 그대로 반차(班次)에서 지송례(祗送禮)를 행하였습니다. 황제가 가마 안에서 돌아보며 말하기를,‘이 사람들이 조선 사신인가?’라고 하니, 시신(侍臣)이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는데, 시신은 바로 태학사(太學士) 화신(和珅)이었습니다.
초9일에 예부에서 황제가 벽옹에 친림(親臨)한 것을 축하하는 연회를 베풀었는데, 신 등으로 하여금 와서 참가하라고 하였기 때문에 신 등도 또한 연회에 참가하였습니다. 연회에 참가한 사람들은 곧 연성공(衍聖公), 태학사(太學士), 각부의 당상관, 국자감 관원, 선현의 후손들로서 모두 3백 30여 명이었습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9책 19권 17장 B면【국편영인본】 45책 497면
- 【분류】외교(外交) / 무역(貿易)
- [註 016]경자년 : 1780 정조 4년.
臣等正月二十六日, 到北京, 住接于南小館。 當日詣禮部, 呈表、咨文。 漢侍郞陸費墀祗受。 臣等聞皇帝, 曾於再昨年間, 命戶部尙書劉墉、禮部尙書德保、工部尙書金簡, 建辟雍於太學之西, 將以今二月上巳日, 親行釋菜, 仍幸辟雍講學。 二十八日, 禮部知會諭旨: "二月初七, 朝鮮使臣接駕觀禮。" 令臣等先參演禮。 故二十九日, 臣等詣國子監, 禮部尙書德保, 坐於辟雍內, 另致款洽曰: "謝恩方物, 庚子聖節陳賀之行, 下旨蠲減。 嗣後非如千叟宴等盛擧, 則無得更進方物。 該部旣奉聖諭, 今番方物, 亦係謝恩, 有難收受’ 云, 故臣等又曰: "今番封典, 實係小邦之慶, 仰感皇上之恩, 一分展誠之道, 惟在方物。 若不得呈納, 則職等無以歸奏國王。" 尙書曰: "當以此意轉奏。" 云。 故臣等仍爲辭退, 遍觀辟雍殿, 仍參演禮。 本月初二日, 因知會, 又參演禮。 皇帝覽謝恩表文, 下旨曰: "覽王奏謝, 竝隨表貢獻方物, 俱見悃忱。 所有貢物, 該衙門知道, 着加恩賞賚。 再前遣使西明、阿肅, 回京復命, 具奏該國王, 卽席賦詩, 頗知好學, 竝所賦詩章呈覽。 朕閱之, 深爲嘉奬, 着加賞內府, 仿宋板五經全部, 竝筆墨等物, 以示優眷。 此乃尋常優賚, 不必專使謝恩。" 欽此。 自內閣特頒仿宋板五經全部十二套、硯一方、花箋紙二卷、徽墨四匣、湖筆四匣、嵌玉如意一柄、文竹盒四個、玻瓈器四件、磁器四件、羽縐四疋、程鄕繭四疋、紅絲寧紬四疋、紅氆氌四個。 禮部招任譯傳給, 故臣等一一祗受賜物。 謝恩表文二道, 俱以覽王奏謝, 竝隨表貢物, 已有旨了, 該衙門知道旨下。 初七日五更, 臣等與書狀官臣李鼎運, 任譯三人, 詣辟雍殿庭, 則別設臣等之班於西班之後, 擧人之前。 黎明, 皇帝親行釋奠祭, 仍御辟雍講學。 東西班數百人, 貢生、監生、擧人、秀才入庭者, 數千人。 孔子七十二世孫, 世襲衍聖公 孔憲培, 亦自曲阜縣來參。 俱行三跪九叩禮後, 始令臣等, 行一跪三叩禮。 殿上參講諸臣, 俱賜酪茶一巡, 臣等及任譯處, 亦賜酪茶一巡。 東西班及貢生、監生、擧人、秀才等處, 無賜茶之事。 少頃, 皇帝罷講, 仍幸圓明園。 臣等仍於班次, 行祗送禮。 皇帝自轎內顧視曰: "此是朝鮮使臣乎?" 侍臣對曰: "然矣。" 侍臣, 卽太學士和珅。 初九日, 行臨雍筵宴於禮部, 令臣等來參, 故臣等亦爲赴宴。 與宴者卽衍聖公及太學士、各部堂官、國子監官員、先賢後裔, 計爲三百三十餘人。
- 【태백산사고본】 19책 19권 17장 B면【국편영인본】 45책 497면
- 【분류】외교(外交) / 무역(貿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