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전 징수에 대한 논의
영의정 서명선(徐命善)이 아뢰기를,
"6도(六道)의 의승(義僧)들에게 입번(入番)을 면제해 주는 대신에 번전(番錢)을 징수하는 것은 선대왕(先大王)께서 치도(緇徒)들을 진휼히 여기시는 훌륭한 덕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그 후 30여 년 동안에 사찰(寺刹)의 성쇠(盛衰)가 아주 달라졌습니다. 평민들이 폐해를 받는 것이 도리어 심하게 되었으므로, 이번에 이것을 바로잡아 줄이고 적당히 다른 데에서 대신 지급하는 것을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 신 등이 확실히 강구한 바가 있으니, 각각 자기 소견을 말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좌의정 홍낙성(洪樂性)이 아뢰기를,
"번전(番錢)을 재량해서 감해준 뒤에 다른 데에서 대신 지급하는 비용에 대하여 여러 사람들은 말하기를, ‘보충하는 양곡 한 가지 이외에는 달리 구차할 방법이 없다.’고 말하는데, 신도 아마 착수하기가 어려울까 합니다."
하고, 수어사(守禦使) 정상순(鄭尙淳)이 아뢰기를,
"본청(本廳)에서 지출하는 것은 실상 여유가 없으므로 다른데서 대신 지급하는 비용을 달리 변통할 길이 없습니다. 수어청과 총융청의 두 군영에 한해 건너 보충하는 양곡의 수량이 2천 석이나 되는데, 차라리 이것을 가지고 두 관청에 해마다 1천 석씩 지급하는 것만 못합니다. 또 본청에 보충하는 양곡이 본래 2천 5백 석이었는데, 경오년011) 에 출진(出鎭)할 때에 5백 석을 강도(江都)에 옮겨다 주었습니다. 이제 만일 도로 찾아온다면, 총융청에 줄 절반 몫 1천 석과 함께 아울러 해마다 돈으로 만들어, 절반을 탕감(蕩減)하는 대신으로 보충하여 지급하고, 그 나머지 1천 냥을 가지고 대미(大米) 2백 50 석을 바꾸어 군량을 보충한다면, 오히려 아주 없애버리는 것보다 나을 것입니다."
하고, 총융사(摠戎使) 이창운(李昌運)이 아뢰기를,
"수어청과 총융청 두 군영에 양서(兩西) 지방에서 바치는 2천 석의 보충 양곡을 가지고 번전(番錢)의 원래 수량 중에서 4분의 1을 감한 다음에 보충 양곡조에 2천 석은 두 군영으로 하여금 한 해 간격으로 받아오지 말게 하고, 해마다 각각 1천 5백 석씩 주어서 돈으로 만들어 그 줄인 수량을 채우게 하며, 5백 석은 그전대로 보충 양곡으로 한다면, 승도(僧徒)들이 돈을 감할 혜택을 받게 되고, 보충 양곡도 모두 잃어버릴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하고, 이경무(李敬懋)가 아뢰기를,
"빠진 사람을 대신하는 것을 한결같이 장정을 징발하는 관례와 같게 하여, 물고(物故)한 사람은 본사(本寺)에서 보충하여 정하고, 이사한 사람은 신칙하여 쇄환(刷還)하게 하면, 의승(義僧)의 정원을 채울 방도가 생길 것이고, 번전도 받기가 어려울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하고, 서유대(徐有大)가 아뢰기를,
"번전을 절반으로 감해 주고, 그 감해 준 수량은 양서(兩西) 지방의 소미(小米)를 가지고 적당히 더 지급하되, 각 도에 엄하게 신칙하여 여러 가지 승역(僧役)을 특별히 더 감면시켜주는 것이 더욱 사리에 합당할 것입니다."
하였다. 유사 당상(有司堂上) 정일상(鄭一祥)·조시준(趙時俊)·서유린(徐有隣)이 아뢰기를,
"보충 양곡 조문 중에 추쇄(推刷)하여 옮겨다가 보충하여 지급하는 것도 무방할 것입니다."
하고, 정창순(鄭昌順)이 아뢰기를,
"번전의 전체 수량은 1만 4천 냥인데, 이제 만일 절반을 줄인다면, 7천 냥이 됩니다. 이것을 가지고 6도의 의승(義僧)이 있는 각 고을에 나누어주고, 그 원래의 수량을 취해서 그 절반을 줄인다면, 큰 고을은 1백여 냥에 차지 못하고, 작은 고 을은 혹은 다만 5,6냥 정도여서 아주 영쇄(零鎖)할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번잡하게 묘당(廟堂)에서 구처하여 지급할 수 있겠습니까? 각각 그 고을의 수령들로 하여금 그 고을에 있는 공하 전곡(公下錢穀) 중에서 취하여 밑천으로 삼고, 해마다 그에 상당하는 양을 대신 지급하게 한다면, 그 구처하는 것이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각각 그 고을로 하여금 의견을 내어 영문(營門)에 보고하게 하고, 비국(備局)에서 절목(節目)을 만들어 시행하면, 영구히 폐단이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서명선(徐命善)이 아뢰기를,
"그 조처하는 방도를 도신(道臣)에게 한 번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으니, 청컨대, 여러 도에 관문(關文)을 보내어 전곡을 보충할 방도와 평민들에게 대신 징수할 수량을 의승(義僧)들이 있는 고을의 수령들에게 왕복하면서 의논하여, 한 가지 의논을 내어서 계달한 뒤에 품신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 【태백산사고본】 19책 19권 10장 B면【국편영인본】 45책 494면
- 【분류】재정(財政) / 군사(軍事) / 사상(思想)
- [註 011]경오년 : 1750 영조 26년.
○領議政徐命善啓言: "六道義僧之除番徵錢, 寔出於先大王軫恤緇徒之盛德, 而伊後三十年間寺刹之盛衰頓異。 平民之受弊反甚。 今此釐減量宜給代, 在所不已。 臣等有所講確, 各陳所見好矣。" 左議政洪樂性曰: "番錢裁減後給代之需, 諸議以爲: ‘添餉一條外, 他無區劃’ 云, 而恐難着手矣。" 守禦使鄭尙淳曰: "本廳支放, 實無贏餘給代之需, 他無變通。 守摠兩營, 間年添餉, 數爲二千石, 毋寧以此逐年劃給各千石於兩廳。 且本廳添餉, 本爲二千五百石, 而庚午出鎭時, 移劃五百石於江都。 今若還推, 幷與摠廳, 分半條千石, 逐年作錢, 充給折半蕩減之代, 以其所餘一千兩, 換作大米二百五十石, 添補軍餉, 則猶勝於全廢矣。" 摠戎使李昌運啓言: "守摠兩營, 有兩西二千石添餉番錢元數中, 減四分一, 而添餉條二千石, 勿使兩營, 間年受來, 逐年各授一千五百石作錢, 充彼所減之數, 五百石, 依前添餉, 則僧徒有減錢之惠, 添餉無全失之歎。" 李敬懋曰: "有闕之代, 一如簽丁之例, 物故者自本寺充定, 移去者申飭刷還, 則義僧有充額之道, 番錢無難捧之患。" 徐有大曰: "番錢減去折半, 而其所減省之數, 以兩西小米, 量宜加劃, 而嚴飭各道諸般僧役, 另加蠲恤, 尤合事宜矣。" 有司堂上鄭一祥、趙時俊、徐有隣曰: "添餉條中, 推移充給, 無妨矣。" 鄭昌順曰: "番錢都數, 爲一萬四千兩, 今若減半, 則爲七千兩。 以此分之六道, 義僧所在各邑, 取其元數, 減其折半, 則大邑不滿百餘兩, 小邑或只五六兩, 零瑣甚矣。 何足以煩廟堂之區劃? 使各其邑守令, 取其邑所在公下錢穀中, 立本代給, 年年相當, 則其所區處, 不至甚難。 各令其邑, 出意見報營門, 自備局成節目, 行之爲永久無弊矣。" 命善啓言: "其所措處之方, 不可不一問道臣。 請行關諸道, 錢穀充備之道, 平民代徵之數, 使之往復於義僧所在邑守令, 指一論啓後稟處。" 從之。
- 【태백산사고본】 19책 19권 10장 B면【국편영인본】 45책 494면
- 【분류】재정(財政) / 군사(軍事) / 사상(思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