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조하 홍봉한에게 시호를 내릴것을 명하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아! 천리(天理)와 인정(人情)은 사실상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치에 없는 것이라도 정리로는 용서할 수 있으며, 정리상 온당한 것은 곧 이치와 부합되는 것이다. 세상에 어찌 이치 밖의 정리가 있을 수 있으며, 또한 어찌 정리 밖의 이치가 있겠는가? 나는 홍 봉조하(洪奉朝賀)의 일에 대해서 매양 한번 유시하고자 하였으나 하지 못하였다. 이번에 또 유시하지 않는다면 다시 어느 때를 기다리겠는가?
아! 봉조하가 조정에 있을 때의 시말(始末)에 대해서는 사람들의 이목(耳目)에 남아 있다. 대개 그 문장의 풍부함과 모유(謨猷)의 능란함은 가령 한미한 집안에서 출세를 하였다 하더라도 오히려 밝은 세상에서 큰 일을 할 능력을 지녔던 것이다. 폐부(肺腑)에 몸을 의탁하고 높은 지위에 올랐을 때에는, 언제나 국사(國事)를 스스로 책임맡아 성의를 다하여, 먼저 선대왕(先大王)의 위임에 우러러 부응하였다. 그가 건의하여 일을 폐치(廢置)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닐 정도이다. 안으로는 각사(各司)와 밖으로는 여러 도(道)에서 지금까지 법식으로 삼아 따르고 있는 것은 대부분 그의 손에서 나왔으니, 사업(事業)을 경륜(經綸)한 것은 족히 칭찬 받을 만한 것이 있었다. 만년에는 대체로 불행한 일들을 많이 만났는데, 그의 행적을 의심하고 주벌(誅伐)하려는 마음을 먹거나, 취모 멱자(吹毛覓疵)하여 죄를 성토하려는 자들이 마침내 시끄럽게 들고 일어났던 것이다. 반 평생 동안의 똑같은 말은 곧 공의(公義)를 이루었기 때문에 왕명을 내리는 사이에서도 또한 혹시 그대로 따라서 아래에서 말하여 아무런 고려가 없었으나, 자세히 사실을 따져봐도 끝내 진적(眞跡)은 없었다.
김귀주(金龜柱)·정이환(鄭履煥) 등이 전후로 상소하여 논(論)한 것은 무릇 세 가지인데, 그중 하나는 모년(某年)의 일이다. 내가 차마 다시 거론하지 못하고 상소에 대한 비답 가운데에서 이미 선대왕(先大王)이 손잡고 한 하교를 되뇌였으니, 다시 더 변명할 필요가 없다. 그 하나는 인삼(人蔘)에 대한 일인데, 그때 도제거(都提擧)가 상소하여 봉조하를 위하여 변명하였으니, 그 말도 또한 이미 헛소리였다. 나머지 하나는 사적(私的)으로 만났을 때 이야기한 일인데, 여기서 이러이러 하다는 말의 줄거리에 대해서도 또한 상소의 비답 가운데에서 상세히 언급하였다. 어찌 마음 먹은 바가 있었겠는가? 실로 다른 뜻은 없었던 것이다. 사석(私席)에서 조용한 때에 마음속에 품고 있던 생각을 죄다 말하지 않은 것이 없었지만, 그것은 너무 지나치게 걱정하는 마음에서 후일을 가상해서 논한 것이다. 더구나 나와 함께 담론(談論)한 것은 궁중에서 주고받은 말인데, 결국 외간(外間)에서 칼자루를 잡고 이러한 큰 죄안(罪案)을 만들 줄이야 어찌 헤아리기나 하였겠는가? 아! 이로써 죄안을 삼는다면, 봉조하가 기꺼이 심복(心服)하겠는가?
심지어 홍인한(洪麟漢)의 범죄를 가지고 봉조하 집안의 흠집으로 삼고 헐뜯기를 마지 않는다면, 역시 그렇지 않은 점도 있다. 착하고 나쁜 것의 구별이 동기(同氣)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은 예로부터 이미 그러하였다. 비록 지향하는 바에 대해 논의(論議)하는 사이에도 왕왕 서로 갈라져서 차이가 생기는 것이 거의 타인(他人)과 같은 것이다. 유인궤(劉仁軌)가 현달(顯達)하자, 그의 동생은 형이 벼슬에 오른 것을 가지고 원망을 품었으며, 유조약(劉祖約)이 임용(任用)되자, 그의 형은 품계(品階)를 어지럽힌다고 말하였다. 신법(新法)을 시행하게 되자, 동생은 영당(影堂)에서 곡(哭)하였고, 정상적인 제도를 새로 만들게 되자, 형은 가묘(家廟)에서 읍(泣)하였다. 이러한 예들을 이루다 헤아릴 수 없으니, 모든 공과(功過)에 대해서 어찌 형제라는 것을 가지고 혼동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역적 홍인한은 평일에 그의 형에게 공손하거나 화목하지 못해서 따로 문정(門庭)을 세운 정상에 대해서 사람들 가운데 누가 모르겠는가? 그의 본래의 흉악하고 패악한 버릇은 비단 봉조하의 깊은 우려와 숨은 고통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바로 우리 자궁(慈宮)께서도 또한 그러하셨으니, 이것은 내가 익히 들어서 알고 있는 것이다. 그가 기강을 어기고 순종하는 것을 범하였을 때는 의리를 가지고 결단하였으니, 그것이 봉조하에게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병신년251) 에 돈독히 유시를 할 때 이미 그 형제가 초(楚)나라·월(越)나라 사람처럼 서로 멀리 떨어진 사이로 되었다는 뜻을 보였었고, 무술년252) 의 치제(致祭)하는 제문에서도 또한 안세(安世)에게 사고가 많았고 유하혜(柳下惠)가 불행했다는 문구가 있었다. 정이환이 지어서 바친 역적을 토벌하는 반교문(頒敎文) 가운데에서도 왕봉(王鳳)을 왕음(王音)에게 비유하였으니, 그의 말이 한쪽으로 치우친 데에서 나왔다는 것을 명백하게 알았다. 그러므로 임인년253) 겨울에 홍수영(洪守榮)을 녹용(錄用)하라는 전교(傳敎)에서도 또한 변명한 것이 있었으니, 나의 생각이 단연코 의심이 없었다는 것은 이것으로서도 알 수 있다.
그리고 한 마디 밝혀야 할 것이 있는데, 봉조하는 바로 자궁(慈宮)의 부(父)이고, 나의 외조부이다. 그가 나에게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성의가 부족할 이치가 있겠는가? 이것이 내가 말한 바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을 정리로 용서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그런만큼 이것을 구실삼아 죄를 주려는 것은 우리 자궁의 마음을 섭섭하게 할 뿐만 아니라, 그 마음의 자취를 밝히지 않고 한갓 그 의사(疑似)한 사실에만 집착하게 된다면, 그 외손자로 하여금 외조부를 해치게 만드는 것이니, 또 어찌 천리(天理)와 인정(人情)에 벗어난 것이 아니겠는가? 나 소자(小子)는 자궁(慈宮)를 믿고 살아왔는데, 등극한 이래 한 가지 일도 우러러 위로해 드린 것이 없고, 과격한 의논으로 도리어 섭섭히 생각하실 단서만 만들고 있다. 이것이 내가 한을 품고 근심을 하면서 하루도 잊지 못하는 까닭이다. 더구나 지금 은덕을 입어 나라에는 큰 경사가 있고, 은택이 널리 베풀어져 앉은뱅이도 모두 일어나 기뻐하는 판인데, 이때에 자궁의 마음을 위로하고 기쁘게 해드리지 못한다면, 비록 8도에 귀양간 사람들을 모두 석방한다 하더라도 어찌 내가 경하를 드리는 뜻이겠는가? 자궁께 존호(尊號)를 올리는 것은 비록 아름다움을 선양하려는 정성에서 나왔다고 하더라도 매번 봉조하가 아직도 씻기 어려운 무함을 당하고 있다고 하교를 하시니, 자전(慈殿)께서도 이에 대해서 또한 민망스럽게 여기고 있는 것이다. 이런 처지에서 비록 청의(淸議)를 고집하는 자로 하여금 논하게 하더라도 필시 헤아리는 것이 있을 것이다. 더구나 내 마음에 있어서야 어떠하겠는가? 대개 자전의 마음을 위로하고 기쁘게 해드리는 것은 곧 현재의 가장 중요한 도리인데, 봉조하가 온전한 사람이 된 다음이라야 자전의 마음이 위로 받고 기쁘게 될 수 있고, 자전의 마음이 기쁘게 된 다음이라야 내 마음이 편하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말한바 정리상 편안한 것이 바로 이치와 부합된다는 말이다.
아! 역적 홍인한의 일은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한 부(部)의 《명의록(明義錄)》은 백대를 내려가도록 밝게 비추는 천지 간의 경의(經義)로서, 임금은 임금으로서 신하는 신하로서의 도리가 그에 힘입어 몰락되지 않고 있는데, 홍인한은 그것을 망친 괴수이다. 만약 봉조하로 하여금 만분의 일이라도 그 사이에 간여하여 집착할 만한 흔적이 있고 성토할 만한 죄가 있다면, 내가 어찌 감히 사(私)로써 공(公)을 해치겠으며, 은혜로써 의리를 덮어버릴 수 있겠는가?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추향(趨向)하는 바가 본래 달라서 경수(涇水)와 위수(渭水)가 쉽게 판별된다. 이 사건은 백간(白簡)과는 무관하고 죄명은 단서(丹書)에 실리지 않았는데, 아직도 해명에 무슨 의심을 가질 것이 있어서 자전의 마음을 위로하지 못하겠는가? 이에 나는 정리와 이치 사이에서 참작하고 헤아려서 이런 하교를 내리게 된 것이다. 오직 지금 자전의 마음을 위로해 드리는 길은 밝게 해명해야 된다는 것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 하교가 일단 내린 다음에 봉조하는 깨끗이 온전한 사람으로 되고, 평일의 업적과 공로가 또한 종전에 논의한 것처럼 된다면, 시호를 주는 은전을 거행하지 않을 수 없다. 홍문관으로 하여금 잘 알도록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8책 18권 17장 B면【국편영인본】 45책 461면
- 【분류】왕실(王室) / 사법(司法) / 인사(人事) / 인물(人物) / 정론-간쟁(諫諍)
- [註 251]
○敎曰: "嗚呼! 天理人情, 其實一也, 故理之所無, 可以情恕, 情之所安, 卽與理合。 世豈有理外之情, 亦豈有情外之理哉? 予於洪奉朝賀事, 每欲一諭而未果。 今又不諭, 更竢何時? 噫! 奉朝賀立朝始末, 在人耳目。 蓋其文章之該贍, 謨猷之幹敏, 假令自拔於寒畯, 猶足有爲於明時。 及夫托身肺腑, 致位隆顯, 則常以國事自任, 誠意勤摯, 仰副先大王委毗。 其所建白廢置, 難一二擧。 內而各司, 外而諸路, 至今遵爲令式者, 多出其手, 則經綸事業, 有足稱者。 晩年遭値, 蓋多不幸, 而疑跡而誅心, 吹毛而聲罪者, 遂紛然起矣。 半世同辭, 便成公議, 故絲綸之間, 亦或隨順下語, 無所顧藉, 而細究事實, 竟無眞跡。 金龜柱、鄭履煥等, 前後疏論者, 凡三件, 而其一, 某年事也。 予不忍復提, 而疏批中已誦先大王執手之敎, 則亦無待更辨矣。 其一, 人蔘事也。 其時都提擧上疏, 爲奉朝賀陳辨, 則其言又已落空矣。 其一, 私覿時說話事也。 其如是如是之語脈, 亦詳於疏批中。 言豈有心? 意實無他。 當私席從容之際, 有懷必盡, 無言不到, 而以慮患太過之心, 爲他日假設之論。 況予與之談論, 豈料宮中之酬酢, 竟作外間之欛柄, 成此一大罪案? 噫! 以此爲罪, 奉朝賀其肯心服乎? 至於以麟漢之罪犯, 爲奉朝賀家累, 而齮齕不已, 則亦有所不然者。 淑慝之別, 不係同氣, 自古已然。 雖於論議旨趨之間, 往往分張乖隔, 殆同路人。 劉仁軌之顯達, 其弟以升沈構怨, 祖約之任用, 其兄以亂階爲言。 新法行而弟哭於影堂, 經制創而兄泣於家廟。 若此類, 不可勝數。 則凡有功過, 惡可以兄弟混之哉? 況麟賊, 平日不恭不協於乃兄, 別立門庭之狀, 人孰不知? 其自來凶悖之習, 不但爲奉朝賀之深憂隱痛, 卽我慈宮亦然, 此予之所習聞習知, 而及其干紀犯順, 以義斷之, 則其於奉朝賀, 何干何豫乎? 故丙申敦諭, 已示其兄弟楚、越之意, 戊戌致祭文, 亦有安世多故、柳惠不幸之句, 而鄭履煥製進討逆頒敎文中, 以王鳳之於王音爲比, 則明知其言之出於偏係。 故壬寅冬, 洪守榮錄用傳敎, 亦有所辨釋者, 予意之斷然無疑, 此可知也。 且有一言可明, 奉朝賀, 卽慈宮之父, 而予之外祖也。 其於予, 豈有一毫誠不足之理乎? 此吾所謂理之所無, 可以情恕者也。 然則以此爲辭, 欲加之罪者, 不惟慼我慈心, 不明其心跡, 徒執其疑似, 使其外孫而害其外祖, 又豈非天理、人情之外乎? 予小子, 恃慈宮爲命, 而臨御以來, 無一事仰慰, 徒以乖激之論, 反爲貽慼之端。 此予之所茹恨懷憂, 不能一日忘者也。 況今仰賴庇庥, 國有大慶, 解澤旁流, 跛躄咸聳, 不於此時, 有以慰悅慈心, 則雖盡釋八方流竄, 豈予所稱慶之意哉? 慈宮上號, 雖出歸美揚休之誠, 而每以奉朝賀, 尙冒難洗之誣爲敎, 慈殿於此, 亦爲之憫惻。 似此境界, 雖使執淸議者論之, 必有所商量。 況於予心乎? 蓋慰悅慈心, 卽目下第一義, 而奉朝賀爲完人, 然後慈心可以慰悅, 慈心慰悅, 然後予心可以安矣。 此吾所謂情之所安, 卽與理合者也。 噫! 麟賊之事, 思之痛心。 一部《明義》, 昭垂百世, 天經地義, 君君臣臣之道, 賴以不墜, 而麟則其魁也。 苟使奉朝賀萬一干涉於其間, 有迹可執, 有罪可討, 則予何敢以私害公, 以恩掩義? 而今則不然。 趨向本殊, 涇、渭易判。 事無關於白簡, 名不載於丹書, 尙何持疑於申辨, 而不爲仰慰慈心地乎? 此予所以參量於情理之間, 而有此下敎者也。 惟今慰慈心之道, 無出昭晣二字。 此敎一下, 奉朝賀脫然爲完人, 而平日事功, 又如向所論, 則易名之典, 不可不擧。 令弘文館知悉。"
- 【태백산사고본】 18책 18권 17장 B면【국편영인본】 45책 461면
- 【분류】왕실(王室) / 사법(司法) / 인사(人事) / 인물(人物) / 정론-간쟁(諫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