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임·원임 대신, 각신 등을 소견하고 대사령을 내리다
시임·원임 대신, 각신(閣臣), 의금부, 형조·이조·병조의 당상관, 비국(備局)의 유사 당상관(有司堂上官), 장신(將臣)을 소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황천(皇天)과 조종(祖宗)이 묵묵히 돕고 독실히 돌보아주신 가운데 어제 책봉하는 예식을 마치고, 오늘 대사령(大赦令)을 반포하게 되었으니, 종묘 사직의 무한한 영광이다. 지금부터 시작하여 우러러 보답하려는 생각과 이것에 계속하여 나라가 영구하도록 하늘에 기도하는 방도가 나 한 사람에게 달려 있기 때문에, 어제 조세를 견감(蠲感)해 주고, 백성들을 진휼하는 전교(傳敎)가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대개 백성들을 화목하게 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나라가 영구하도록 기도하고 백성들을 화목하게 하는 근본은 역시 자손에게 계책을 물려주는 것이니 바로 이 전교가 그것이다. 경 등은 시험삼아 생각해 보라. 병신년238) ·정유년239) 이후에 난역(亂逆)이 겹겹이 생겨나서 세가(世家)·대족(大族) 가운데 온전한 사람이 드물다. 혹은 애매한 일을 분명히 해명하지 못하기도 하고, 혹은 법망에 걸려들어 폐색(廢塞)되는 운명을 면치 못하기도 하였다. 삼가 을묘년240) ·기묘년241) ·임인년242) 의 전례에 의거하여 친히 스스로 초출(抄出)하기에 고심을 다한 것은 황천(皇天)과 조종(祖宗)에 보답하려는 뜻에서였다. 경 등도 또한 대양(對揚)하는 방도를 생각하고 혹시라도 이의(異議)가 없도록 하라. 이번에 만백성들에게 혜택을 골고루 베풀고 8도에 널리 죄를 용서하였는데, 유독 자전(慈殿)과 자궁(慈宮)의 마음을 위로하지 못한다면, 내 마음에 있어서도 오히려 어떻다고 하겠는가? 내가 깊이 생각하고 자세히 헤아려 보았다. 경 등이 나를 몸받아 행하려는 뜻에 있어서도 또한 어찌 하늘의 뜻을 보답하고 자전(慈殿)의 뜻을 위로하여, 한편으로 나라가 영구하기를 기도하는 근본으로 삼고, 한편으로 자전을 위로하고 기쁘게 하는 방도가 없을 수 있겠는가?"
하고, 이어서 대사령(大赦令)을 내렸다. 하교하기를,
"이조와 병조의 세초(歲抄)243) 로 귀양을 갔다가 석방된 사람인 전 판부사 한익모(韓翼謩)는 병신년244) 9월에 처분한 전교 가운데 이미 언급한 것이 있었다. 을미년245) 겨울의 경연에서 아뢸 때에 다만 뜻을 제대로 진달하지 못하고, 청대(請對)할 때에 이르러서도 미처 들어오지 못한 것은 또한 일의 형편이 마침 그러하였기 때문이었다. 그 마음에 다른 뜻이 없으니 역적 홍인한(洪麟漢)과 더불어 홍계능(洪啓能)을 상대하지 않았다는 한 가지 사실만을 제외하고는 세상에서 누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는가? 만약 일이 을미년에 관계되기 때문에 능히 구별할 수 없다면, 정유년246) 봄에 석방하고, 임인년247) 겨울에 죄의 등급을 감해준 뜻은 아주 잘못된 것이다. 이 사람을 참작해서 용서해 주는 과조(科條)에 넣은 다음에라야 역적 홍인한의 죄가 더욱더 드러나게 될 것이다. 임인년의 사전(赦典) 가운데 신회(申晦)에게 직첩(職牒)을 주고, 김상복(金相福)을 논죄하지 않은 것도 또한 이러한 뜻에서였다. 그러니 직첩을 특별히 환급(還給)하도록 하라.
전 국청 죄인(鞫廳罪人) 안대제(安大濟)·김상정(金相定), 전 제학 정이환(鄭履煥), 전 부사 이상직(李尙直), 전 참의 김상무(金相戊), 전 참판 조덕성(趙德成), 전 승지 이택진(李宅鎭), 전 참판 구상(具庠), 전 부사 김제행(金齊行)·윤이복(尹彝復), 전 통제사 조완(趙𡷗), 전 대장 이윤성(李潤成), 전 영(令) 이준영(李俊永), 전 정자(正字) 이심전(李心傳), 전 현감 김수묵(金守默)·정택부(鄭澤孚), 전 부사 이성모(李聖模)는 모두 직첩을 환급하라.
전 사직 신광리(申光履)·장령 정덕필(鄭德弼)·전 부제학 이의필(李義弼)은 모두 서용(敍用)하라. 안치 죄인(安置罪人) 김귀주(金龜柱)는 별도의 전교(傳敎)를 내리겠다. 정의현(旌義縣)의 홍주익(洪柱翼)과 영광군(靈光郡)의 이보행(李普行)은 모두 육지로 나오게 하고, 기장현(機張縣)의 한광계(韓光綮)는 석방시키라. 정배 죄인(定配罪人) 강진현(康津縣)의 이방익(李邦翊)과 진도(珍島)의 윤득부(尹得孚)는 모두 석방시키고, 남해현(南海縣)의 임관주(任觀周)·곤양군(昆陽郡)의 신상권(申尙權)은 모두 석방시키라. 먼 변방에 정배(定配)한 죄인 조원철(趙元喆)은 금년(今年)을 맞아 그의 할아비의 충성과 절의를 생각할 때 의당 그 10대(代)를 용서해 주는 뜻을 생각해야 하니, 특별히 석방시키라. 의령군(宜寧郡)의 성윤검(成胤儉)과 운산군(雲山郡)의 이노춘(李魯春), 구례현(求禮縣)의 조우(趙嵎)는 석방시키고, 무산군(茂山郡)의 이만식(李萬軾)은 양이(量移)시키며, 종성군(鍾城郡)의 조제 태(趙濟泰)는 석방시키라. 방축 죄인(放逐罪人) 서유신(徐有臣)·박종갑(朴宗甲)·이의준(李義駿) 등은 비록 모두 처신을 조심하지 않아서 이름이 백간(白簡)248) 에 오르게 되었지만, 본사(本事)는 종내 분명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서연(書筵)에 드나들던 사람들인데, 지금과 같이 대사(大赦)하는 때에 어찌 참작함이 없을 수가 있겠는가? 모두 석방시키라. 곤양군의 이홍제(李弘濟)·김창록(金昌菉)은 모두 석방시키라.
회계(回啓)할 때에 비답을 내리지 않은 죄인 오석충(吳錫忠)은 그의 할아비 오시수(吳始壽)의 복관(復官)하는 일을 가지고 여러 차례 징을 쳐서 호소하였으나, 그 때마다 거절당하였는데, 지난번에 또 호소하여 이번 대사령의 문서 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대개 본사(本事)에 대하여 마땅히 용서할 것인가, 용서하지 말 것인가에 대하여 나는 우리 왕조의 전고(典故)를 잘 모르고, 비록 그 상세한 내용도 잘 모르지만, 그의 공초 가운데에 나열하여 말한 것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그때 조정의 의논에서 진실로 그 죄의 경중(輕重)을 따질 수가 없다고 갑론 을박이 있었으며, 명성 대비(明聖大妃)의 《비망기(備忘記)》와 숙종조의 비지(批旨)에 모두 명백히 기록된 것이 있다. 이런 경우에 그 손자의 말을 근거 없는 데로 돌릴 수 없다. 그렇다면 지금 대사(大赦)하는 때를 맞아 용서하지 않는 과조(科條)에 그대로 둘 수는 없다. 대신(大臣)에게 의논하여 소원대로 시행하더라도 의리에 크게 어긋나는 데에 이르지는 않을 듯 하다. 본부(本府)에서 잘 알아서 거행하라. 출륙(出陸)시키는 부류들은 해당 부(府)와 조(曹)의 관문(關文)을 기다릴 것 없이 곧바로 각 해당 도(道)에서 먼저 거행하게 하는 것도 또한 임인년의 전례대로 하라."
하니, 대신(大臣)들이 모두 김귀주의 석방 문제를 놓고 쟁집(爭執)하였다. 또 용서하는 것도 본부(本府)를 거치지 않고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곧장 놓아주게 하기는 곤란하다고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김귀주의 죄는 《명의록(明義錄)》과는 관계가 없고, 다만 홍 봉조하(洪奉朝賀)를 모해하려고 한 것과 신사년249) 의 글을 올린 것이 그의 죄안(罪案)으로 되고 있다. 이번에 감등(減等)하려고 하였으나, 또 신사년의 한 가지 문제가 나와서 마치 죄 위에 다시 죄를 보태는 것과 같이 되었다. 그렇지만 외간(外間)에서 그가 범한 죄가 네 가지 안건의 문제에는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심지어 홍 봉조하의 일에 대해서는 내가 자전(慈殿)의 하교 가운데 들은 것이 있다. 그리고 지금은 여지없이 해명된 뒤이니, 경 등은 그 사이에서 딴 의견을 가질 필요가 없을 듯하다. 비록 명성 왕후(明聖王后)가 문에 나와서 여러 대신들을 불러 놓고 청풍 부원군(淸風府院君)을 구원한 일을 가지고 보더라도, 초방(椒房)250) 의 가까운 친척을 처리하는 뜻은 참으로 자별(自別)해야 마땅한 것이다. 경 등은 결코 쟁집할 수 없을 것이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8책 18권 16장 A면【국편영인본】 45책 460면
- 【분류】왕실(王室) / 사법(司法)
- [註 238]병신년 : 1776 정조 즉위년.
- [註 239]
정유년 : 1777 정조 원년.- [註 240]
을묘년 : 1735 영조 11년.- [註 241]
기묘년 : 1759 영조 35년.- [註 242]
임인년 : 1782 정조 6년.- [註 243]
세초(歲抄) : 매년 6월·12월에 이조와 병조에서 관원들의 공과(功過)를 초록(抄錄)해서 상주하여 왕의 분부를 받아 감등 또는 서용(敍用)하는 것.- [註 244]
병신년 : 1776 정조 즉위년.- [註 245]
을미년 : 1775 영조 51년.- [註 246]
정유년 : 1777 정조 원년.- [註 247]
임인년 : 1782 정조 6년.- [註 248]
○召見時ㆍ原任大臣、閣臣、金吾、秋曹ㆍ吏ㆍ兵曹堂上、備局有司堂上、將臣。 上曰: "皇天、祖宗, 默佑篤棐, 昨日禮成, 今日頒赦, 宗社無疆之休。 自今伊始, 所以仰答之意, 繼此祈永之方, 在予一人, 故昨有蠲恤傳敎。 蓋出於諴小民之義, 而祈永諴民之本, 亦惟在貽謨。 卽此傳敎是耳。 卿等試見之。 丙丁以來, 亂逆層出, 世家、大族, 鮮有完人。 或事在䵝昧, 未得昭晰; 或過於隄防, 未免廢塞。 謹依乙卯、己卯、壬寅已例, 親自抄出, 用費苦心, 所以對皇天, 祖宗之意也。 卿等亦思對揚之道, 無或異議, 見今兆民均惠, 八路曠蕩, 而獨不得仰慰慈殿、慈宮之意, 則於予心, 倘作何如? 予所以思之深而量之詳矣。 在卿等體行之義, 亦豈無仰答天意, 仰慰慈旨, 一以爲祈永之本, 一以爲慰悅之道乎? 仍下赦典。 敎曰: "吏、兵曹歲抄被謫蒙放人, 前判府事韓翼謩, 丙申九月處分傳敎, 己有提及者, 乙未冬筵奏, 特辭不達意, 至於請對時未及入來, 亦因事勢之適然。 其心之無他, 不待與逆麟不相能一事, 而世孰不知? 若以事屬乙未, 不能區別, 則大非丁酉春放送, 壬寅冬減等之意。 此人置之參恕之科, 然後逆麟之罪, 尤爲彰著。 壬寅赦典中, 申晦給牒, 金相福勿論, 亦此意也。 職牒特爲還給。 前鞫廳罪人安大濟ㆍ金相定、前提學鄭履煥、前府使李尙直、前參議金相戊、前參判趙德成、前承旨李宅鎭、前參判具庠、前府使金悌行ㆍ尹彛復、前統制使趙𡷗、前大將李潤成、前令李俊永、前正字李心傳、前縣監金守默ㆍ鄭澤孚、前府使李聖模幷職牒還給。 前司直申光履、掌令鄭德弼、前副提學李義弼幷敍用。 安置罪人 金龜柱, 別下傳敎。 旌義 洪柱翼、靈光 李普行竝出陸。 機張 韓光綮放。 定配罪人康津 李邦翊、珍島 尹得孚竝放。 南海 任觀周、昆陽 申尙權竝放。 邊遠定配罪人趙元喆, 當今年念渠祖忠節, 宜思十世宥之義, 特放。 宜寧 成胤儉、雲山 李魯春、求禮 趙嵎放, 茂山 李萬軾量移。 鍾城 趙濟泰放。 放逐罪人徐有臣、朴宗甲、李義駿等, 雖皆不謹持身, 名登白簡, 本事終涉不分明, 且是出入冑筵之人, 如今大赦, 豈無參量? 竝放。 昆陽 李弘濟、金昌祿竝放。 回啓未下罪人吳錫忠, 以其祖始壽復官事, 屢度鳴錚, 輒令勿施, 而向又呼籲, 至入今番赦典文書中。 槪其本事之當宥與不當宥。 予素昧本朝典故, 雖未知其詳, 以渠供中所陳列言之, 其時廷議之有甲乙, 固不足爲輕重, 而明聖大妃 《備忘記》及肅宗朝批旨, 俱有昭載者。 此則不可以其孫之言, 歸之無實。 然則値今大霈, 不宜仍置勿施之科。 議于大臣, 依願施行, 似不至大悖於義理。 本府知悉擧行。 出陸之類, 不待該府曹關文, 直自各該道, 先爲擧行, 亦依壬寅年例。" 大臣皆以龜柱之疏釋爭執。 又以赦宥之不由本府, 使道臣直放爲難。 上曰: "龜柱之罪, 不關於《明義錄》, 而其謀害洪奉朝賀及辛巳封事, 爲渠罪案。 今欲減等, 而又出辛巳一事, 似若罪上添罪, 而欲使外間, 知渠罪犯之不在於四件事也。 至於洪奉朝賀事, 則予有仰聞於慈殿下敎。 且今昭晣無餘之後, 則卿等似不可容議於其間矣。 雖以明聖王后臨門招諸大臣, 救淸風府院君事觀之, 椒房近親之處義, 固當自別。 卿等決不可爭執。"
- 【태백산사고본】 18책 18권 16장 A면【국편영인본】 45책 460면
- 【분류】왕실(王室) / 사법(司法)
- [註 2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