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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17권, 정조 8년 3월 11일 병신 4번째기사 1784년 청 건륭(乾隆) 49년

지평 이익진이 궁방 도서의 폐단을 계진하니 하교하다

지평 이익진(李翼晉)이 궁방 도서(宮房圖署)의 폐단을 계진(啓陳)하자, 비변사(備邊司)에서 복주(覆奏)하여 절목(節目)을 만들어 금지시키기를 청하니 하교하기를,

"궁방(宮房)에 도서패자(圖署牌子)가 있는 것은 제아문(諸衙門)에서 인신(印信)을 간혹 관문(關文)이나 첩정(牒呈)하는 제도와는 크게 같지 않으니 사용하는 곳이 땔감이나 곡식을 재촉하는 것 및 도장(導掌)과 마름(舍音)을 임명하거나 파출하는 등의 일에 불과할 뿐이다. 이 밖의 것은 크고 작은 일을 논할 것 없이 내수사(內需司)에다 반드시 수본(手本)의 사유를 갖추어야 하며 내수사에서는 각 해조(該曹)에 전보(轉報)하며, 각 해조에서는 각도(各道)에다 행관(行關)하도록 되어 있는데 그 전부터 내려온 법의(法意)가 대개 이와 같다. 그리고 이른바 도서는 단지 한 궁속(宮屬)의 사표(私票)이니 궁속의 무리가 비록 도답(圖踏)하여 침징(侵徵)하려고 하더라도 외읍(外邑)에서 만약 법에 의거하여 잘 따라주지 않는다면 어찌 이런 등의 폐단이 있겠는가? 이 대계(臺啓)를 보니 일의 매우 놀라움이 무엇이 이보다 심하겠는가?

조정에서 즉위한 이후로 궁방(宮房)의 일을 가지고 적절히 조종하며 단속하고 얽매이게 하여 정녕(丁寧)할 뿐만이 아니고 사패 문서(賜牌文書)는 반드시 이조와 형조에서 서경(書經)하게 하고, 장획 절수(臧獲折受) 역시 모두 내수사와 탁지(度支)059) 에 첩보(牒報)하게 하였으며, 수본(手本)은 직접 올릴 수 없도록 하였고, 계목(啓目)은 역시 스스로 결단하지 못하게 하여 더러는 묘당(廟堂)에 의논하고 더러는 해조에 내리도록 하였다. 그리고 또 백성들의 실정을 캐고 탐지하여 사리를 논하여 장문(狀聞)한 뒤에 다시 관할 아문(衙門)으로 하여금 복계(覆啓)하여 품처(稟處)하도록 하였으니, 조정의 본래 뜻은 대체로 궁중(宮中)과 부중(府中)으로 하여금 일체가 되게 하여 요행(僥倖)을 바라는 마음을 막고 간구(干求)와 청촉을 금지시키려는 것이다. 지금까지 단지 병신년060) 의 수교(受敎)를 다듬고 밝히는 것이 적합하며 별도로 교정[矯捄]을 가할 필요는 없다. 지금 만약 도서를 금단(禁斷)하는 일에 대하여 절목(節目)을 만들어 내어 곧바로 보내게 한다면 이는 도리어 법에 없어서 법을 만드는 혐의가 있게 된다.

대저 관첩(關牒)에는 모두 인신(印信)의 자취가 있으니 때문에 위조한 자는 일률(一律)061) 을 적용하고, 도둑질하여 찍은 자에게는 다음 형률을 시행하게 하였다. 이른바 패자는 관첩이 아니며 이른바 도서는 인신이 아닌데 궁속(宮屬)들이 망령되게 인신을 찍은 관첩의 형식을 인용하여 영읍(營邑)에다 호령(號令)을 행하였으니, 그 죄상을 논한다면 자못 관첩을 위조하거나 도둑질한 것 보다 지나침이 있다.

이 뒤로 제궁방(諸宮房)에서 말한 바가 아닌, 즉 땔감과 곡식을 재촉하거나 도장(導掌)과 마름(舍音) 등을 임명하고 파출하는 일을 제외하고 만에 하나라도 전토(田土)와 노비(奴婢)를 타량(打量)062) 하거나 망정(望定)하는 것 및 어세(漁稅)를 침탈하며 채전(債錢)을 징수하는 일을 해조(該曹)를 경유하지 않고 도서패자를 서울과 지방에 지위(知委)한 자에 대해서는 해당 궁방의 수임(首任)은 엄중하게 형신하여 정배(定配)하고, 작용(作俑)063) 한 궁임(宮任)은 세 차례 형신하여 햇수를 기한하지 말고 먼 지역에다 정배하며, 영곤(營閫)이나 읍(邑)에서 숨기고 아뢰지 않는 자에 대해서는 도신(道臣)과 수신(帥臣)은 먼저 파면한 뒤에 잡아들이며 수령은 도(徒) 3년으로 정배시키고 5년을 기한하여 금고(禁錮)시키는 것을 규정으로 정하여 시행하게 하며, 경사(京司)의 당상관이나 낭청으로 즉시 적발하지 않은 죄는 감사(監司)의 당상관이나 낭청으로 즉시 적발하지 않은 죄는 감사(監司)와 수령에게 적용한 형률을 준행하여 이것을 판부(判付)하게 하되 본사(本司)에서 등서(謄書)한 별관(別關)을 제도(諸道)에 엄중히 신칙하여 각기 게판(揭板)하도록 하여 늘 눈으로 보며 조심하는 입장을 삼게 하고 또한 의금부와 형조로 하여금 수교(受敎)에 기재하여 영구히 준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7책 17권 25장 A면【국편영인본】 45책 431면
  • 【분류】
    행정(行政) / 정론(政論)

  • [註 059]
    탁지(度支) : 호조(戶曹).
  • [註 060]
    병신년 : 1776 영조 52.
  • [註 061]
    일률(一律) : 사형.
  • [註 062]
    타량(打量) : 측량(測量).
  • [註 063]
    작용(作俑) : 옳지 못한 예(例)를 처음으로 만들어 냄.

○持平李翼晋啓陳各宮房圖署之弊。 備邊司覆奏, 請成節目禁之。 敎曰: "宮房之有圖署牌子, 與諸衙門印信, 或關牒之制大不同, 用處不過柴穀催促及導掌舍音差汰等事而已。 外此則勿論大小事, 必具由手本於內需司。 自內需司, 轉報各該曹。 自各該曹, 行關於各道, 自來法意槪如許矣。 所謂圖署, 特一宮屬之私標, 宮屬輩雖欲圖踏侵徵, 而外邑若能據法不從, 則豈有此等之弊? 觀此臺啓, 事之駭痛, 孰甚於此? 朝家御極以後, 以宮房事, 操切拘束, 不啻丁寧, 賜牌文書, 則必令署經, 吏曹刑曹臧獲折受, 則亦皆牒報內司、度支, 而手本則毋得直呈。 啓目則亦不自斷, 或議廟堂, 或下該曹。 又令採探民情, 論理狀聞之後, 更令所管衙門, 覆啓稟處, 朝家本意, 蓋欲使宮府, 一體杜僥倖而禁干囑也。 到今但宜修明丙申受敎, 不必別加矯捄。 今若以直送圖署禁斷事, 成出節目, 則此反有無於法, 而創法之嫌焉。 大抵關牒, 俱有印跡, 故僞造者, 用一律, 盜踏者施次律。 所謂牌子則非關牒。 所謂圖署則非印信, 而宮屬等, 妄引踏印關牒之式, 行號令於營邑, 論厥罪狀, 殆有浮於關牒之僞盜。 此後諸宮房, 除非上所云, 柴穀催促導掌舍音等差汰外, 萬一以田土、奴婢, 打量望定及奪漁稅徵債錢事, 不由該曹, 直以圖署牌子, 知委京外者, 該宮房首任, 嚴刑定配, 作俑宮任, 刑三次勿限年遠地定配, 營閫邑之匿不以聞者, 道、帥臣先罷後拿, 守令徒三年定配, 限五年禁錮, 定式施行。 京司堂郞之不卽摘發之罪, 遵監司、守令之律, 以此判付, 自本司謄書別關, 嚴飭諸道, 俾各揭板, 以爲常目惕念之地。 亦令禁府、刑曹, 載之受敎, 永久遵行。"


  • 【태백산사고본】 17책 17권 25장 A면【국편영인본】 45책 431면
  • 【분류】
    행정(行政) / 정론(政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