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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 16권, 정조 7년 11월 18일 을사 1번째기사 1783년 청 건륭(乾隆) 48년

부사직 이재간의 상소에 따라 세자 책봉을 의논하다

부사직(副司直) 이재간(李在簡)이 상소하기를,

"생각하건대 황천(皇天)이 우리 동방(東方)을 권우(眷佑)하여 경사(慶事)를 쌓았다가 발상(發祥)하여 원사(元嗣)를 독생(篤生)하게 되었는데, 돌아보건대 이번에 미월(彌月)의 주년(周年)이 돌아와 첫번째 영신(令辰)을 이미 지내게 되었으니, 성상께서 마음에 기쁘심과 신민(臣民)들의 송축(頌祝)하는 마음이 더욱 어떠하게 되겠습니까? 따라서 생각하건대 우리 열조(列朝)께서 미리 건저(建儲)하는 예법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어 유충(幼沖)의 나이 때 하는 수가 많았고, 책봉(冊封)의 조만(早晩)도 오직 그때의 사세 여하(如何)를 보아서 하여, 대저 일찍이 혹시라도 늦추는 수가 없었습니다. 하물며 삼가 생각해 보건대 우리 전하(殿下)께서 춘추(春秋)가 정성(鼎盛)하신 때가 되었는데도 궁곤(宮壼)께서 진색(震索)230) 의 경사가 지체되어, 국본(國本)이 정해지지 못하므로 사람들의 마음이 매이는 데가 없었는데, 얼마나 다행한 일이겠습니까? 하늘의 경운(景運)이 돌아와 조윤(祚胤)을 탄석(誕錫)하게 되어, 국가의 기업(基業)이 이제는 비로소 전정(奠定)하게 되었고, 사람들의 마음도 이제는 속하는 데가 있게 되었으니, 주창(主鬯)231) 의 자리를 잠시도 비워둘 수 없게 된 때이고, 정명(正名)하는 예법을 조금도 늦출 수 없게 된 때입니다. 바야흐로 일양(一陽)이 장차 다시 돌아오고 다음 해가 막 닥치게 된 때를 당했기에, 태래(泰來)의 새 복지(福祉)를 맞이하고 갑관(甲觀)232) 의 상휘(祥暉)를 첨가하게 되었으니, 마땅히 이때에 있어서 시급히 책봉(冊封)하는 예식을 거행해야 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 국가의 대계(大計)를 생각하시고 열조(列朝)의 이전(彛典)대로 준수(遵守)하시어, 곧장 유사(有司)에게 시급히 욕례(縟禮)를 거행하도록 명하신다면 종사(宗社)가 더없이 다행하고 신민(臣民)들도 더없이 다행하겠습니다."

하였다.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이 예조 당상을 거느리고 청대(請對)하였다. 임금이 영의정 정존겸(鄭存謙) 등을 불러 보니, 시급히 책봉하는 예식을 거행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중신(重臣) 한 사람 만의 말이 아니라 경(卿)들도 또한 여러 차례 진청(陳請)한 것인데, 본조(本朝)의 고사(故事)에 현종조(顯宗朝)께서는 8세에 책봉되었고 숙종조(肅宗朝)께서는 7세에 책봉되었으니, 진실로 마땅히 우리 조가(朝家)의 상례(常禮)를 따라야 한다. 또한 지금 아직도 강보(襁褓) 속에 있기에 예식을 거행하기가 또한 어렵기도 하니 조금 1, 2년을 기다리더라도 어찌 방해로운 것이 있겠는가?"

하므로, 정존겸이 아뢰기를,

"원자궁(元子宮)은 책봉 예식 이전에 보양관(輔養官)을 계하(啓下)하는 것이 곧 응당 거행해야 하는 것이 전례(典禮)입니다. 바야흐로 예질(睿質)이 숙성(夙成)하여 지혜와 생각이 날로 열리는 시기를 당했기에 보양관 차출(差出)을 조금도 늦출수 없으니 청컨대 즉시 계하(啓下)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고, 임금이 승지에게 이르기를,

"원수(員數)가 얼마인지를 그전의 사례를 고찰해 보아 아뢰라."

하므로, 승지가 아뢰기를,

"《문헌비고》 직관고(職官考)에 ‘원자 보양관 3원(員)을 정1품 이하에서 종1품 이상까지로 대신에게 물어보아 차출한다.’고 하였고, 갑술년 보양청 일기(輔養廳日記)에는 ‘보양관 2원을 대신이 연석(筵席)에서 아뢰어 차출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정존겸 등에게 이르기를,

"마땅히 갑술년 사례대로 해야 하겠는데, 누가 가합한 사람이겠는가? 산야(山野)의 사람 중에는 지금 적임자가 없으니, 차라리 지망(地望)을 우선 삼아야 한다."

하므로, 정존겸이 아뢰기를,

"임하(林下)의 선비는 이미 구득할 수 없으니, 정1품 중의 원임 대신(原任大臣)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시임(時任)이나 원임(原任)을 꼭 논할 것이 아니다. 마땅히 글과 지망(地望)을 위주로 하되 또한 반드시 단량(端良)하고 개제(愷齊)한 자질의 사람을 취택한 다음에야 몽양(蒙養)하는 책임을 맡길 수 있을 것인데, 내 생각에는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와 우상(右相)이 좋을 듯하다."

하므로, 영중추부사 김상철(金尙喆) 등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가리신 것이 진실로 공론과 맞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제신(諸臣)들이 이미 물러나 나가자, 이재간(李在簡)에게 비답하기를,

"소청(所請)은 곧 요사이에 대신들이 매양 연석(筵席)에서 진달했던 말인데, 책봉 예식을 아직 이렇게 지대(遲待)하고 있음은 진실로 깊은 뜻이 있는 일이니, 연석에서의 말을 들어보면 알게 될 것이다. 보양관에 있어서는 방금 대신의 신청에 따라 이미 정사(政事)하게 될 때에 계하(啓下)하도록 명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6책 16권 75장 A면【국편영인본】 45책 412면
  • 【분류】
    왕실(王室) / 인사(人事)

  • [註 230]
    진색(震索) : 진(震)은 《주역(周易)》의 괘(卦) 이름으로, 장남(長男)을 뜻하는데, 곤괘(坤卦)의 한 효(爻)가 변하여 진괘(震卦)가 되었음을 이르는 말.
  • [註 231]
    주창(主鬯) : 울창주(鬱鬯酒)를 맡았다는 뜻으로, 울창주는 종묘(宗廟)에서 제사지낼 때에 태자(太子)또는 세자(世子)가 올리므로, 태자 또는 세자를 이르는 말로도 쓰임.
  • [註 232]
    갑관(甲觀) : 세자 시강원(世子侍講院)의 별칭.

○乙巳/副司直李在簡上疏曰:

惟皇天眷佑我東方, 積慶發祥, 篤生元嗣。 顧今彌月之周歲載回, 初度之令辰已過, 聖心之嘉悅, 臣民之頌忭, 尤當如何? 肆惟我列朝深重豫建之禮, 多在幼沖之齡, 封冊之早晩, 惟視時勢之如何, 而大抵未嘗或緩也。 伏況我殿下春秋, 臻鼎盛之時, 宮壼遲震索之慶, 國本未定, 人心靡係, 何幸天回景運, 誕錫祚胤, 邦基於是乎始奠, 人心於是乎有屬。 此時主鬯之位, 不可暫曠。 正名之禮, 不可少緩也。 方當一陽將復, 亞歲初屆, 迎泰來之新祉, 添甲觀之祥暉, 宜及此時, 亟行冊禮。 伏願聖明, 念國家之大計, 遵列朝之彝典, 亟命有司, 遄擧縟禮, 宗社幸甚。 臣民幸甚。

時原任大臣, 率禮堂求對。 上召見領議政鄭存謙等。 請亟擧冊禮。 上曰: "此非重臣一人之言, 卿等亦當屢次陳請。 而本朝故事, 顯廟朝八歲冊封, 肅廟朝七歲冊封, 固當遵我家常禮。 且今尙在襁襁, 行禮亦難, 稍待一二年, 有何所妨?" 存謙啓言: "元子宮冊禮前, 輔養官啓下, 乃是應行之典禮。 方當睿質夙就, 知思日開之時, 輔養官差出, 不容少緩。 請卽爲啓下。" 從之。 上謂承旨曰: "員數爲幾, 取考已例以奏。" 承旨奏: "《文獻備考》 《職官考》云: ‘元子輔養官三員, 正一品以下, 從二品以上, 問于大臣差出。’ 甲戌年《輔養廳日記》, 則輔養官二員, 大臣筵奏差出矣。" 上謂存謙等曰: "當用甲戌之例, 誰可合者? 山野之士, 今無其人。 毋寧以地望爲先也。" 存謙曰: "林下之士, 旣不可得, 則正一品中, 原任大臣好矣。" 上曰: "時原任不必論。 當以文學、地望爲主, 而亦必取端良、愷悌之資, 然後可以委卑蒙養之責。 予意, 則領敦寧、右相似好矣。" 領中樞府事金尙喆等曰: "聖簡允協公議矣。" 諸臣旣退。 賜在簡批曰: "所請, 卽近日大臣, 每筵陳達之言, 而冊禮之姑此遲待, 誠有深意存焉, 聞於筵話, 可以知之。 輔養官, 才因大臣申請, 已命開政啓下矣。"


  • 【태백산사고본】 16책 16권 75장 A면【국편영인본】 45책 412면
  • 【분류】
    왕실(王室) / 인사(人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