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지 겸 사은 정사 정존겸과 부사 홍양호가 연경의 일을 보고하다
동지 겸 사은 정사(冬至兼謝恩正使) 정존겸(鄭存謙)과 부사(副使) 홍양호(洪良浩)가 연경(燕京)에서 급히 보고하기를,
"신들의 일행이 지난해 12월 20일에 북경에 도착하였습니다. 29일에 황제께서 친히 태묘에 제사를 지냈는데, 예부(禮部)에서 받은 지시에 ‘특별히 조선 사신으로 하여금 환궁할 때 맞이하라.’고 한다기에 신들이 단문(端門)과 묘문(廟門)의 사이에 나아가 맞이하였습니다. 그런데 황제의 연(輦)이 반열 앞으로 지나갈 때에 호부 상서 화신(和珅)으로 하여금 ‘국왕께서 편안하시냐?’고 묻기에 신들이 ‘편안하시다.’고 대답하였습니다. 또 신들의 여행길이 편안하였는지의 여부를 묻고 또 사신의 관작의 등급을 물어보았습니다. 이해 정월 1일에 태화전(太和殿) 뜰 서반(西班)에 들어가 조참의 예를 거행하였는데, 우리 나라 외에 다른 나라에서는 연한(年限)이 맞지 않았기 때문에 조공을 바치러 온 자는 없었습니다. 신들이 대궐에 들어갈 때에 예부 상서 덕보(德保)가 통역관을 보내어 위문하면서 반열에서 성의를 보였는데, 그뒤 대궐에 나갔을 때에도 번번이 그렇게 하였습니다. 2일에 관외(館外)에 왔을 때 역관을 불러 신들을 위로하였는데, 성의가 상당하였습니다. 예부의 공문에 ‘5일에 조선의 정사와 부사는 자광각(紫光閣)의 연회에 참석하라.’고 하였기 때문에 그날 신들이 자광각 밖에 가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날이 훤히 밝자 황제가 황옥교(黃屋轎)를 타고 나왔습니다. 신들은 자광각 밖 의장(儀仗)의 안에서 맞이하였습니다. 황제가 어좌에 오르자 음악을 연주하며 놀이를 펼쳤습니다. 신들이 왕공(王公)들의 뒤를 따라 들어가서 연탁(宴卓)에 나아가 낙다(酪茶) 두 순배를 든 뒤에 황제가 안으로 돌아와서 연회에 참여한 신하들에게 모두 상을 주었는데, 신들에게도 주었습니다. 신 정존겸에게는 금(錦) 세 필, 장융(漳絨) 세 필, 소권팔사단(小卷八絲緞) 다섯 필, 소권오사궁주(小卷五絲宮紬) 다섯 필, 하포낭자(荷包囊子) 열 개, 화자배(畵磁杯) 한 개를 하사하고, 신 홍양호에게는 금 한 필, 장융 한 필, 소권팔사단 세 필, 소권오사궁주 세 필, 하포낭자 여섯 개, 화자배 한 개를 하사하였습니다. 예부의 공문에 ‘11일에 황제가 원명원(圓明園)에 거둥할 것인데, 조선 정사와 부사에게 알리어 어가를 전송하고 이날 원명원에 가서 기다릴 것이며, 12일에 연회에 참석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11일에 신들이 서안문(西安門)에 들어가 대기하고 있었는데, 동이 트자, 황제가 궁을 출발하였습니다. 예부 상서가 신들을 인도하여 서반(西班)의 끝에 앉도록 하였습니다. 황제가 신들이 맞이하는 곳에 도착하여 황옥교의 문을 열고 눈여겨 보면서 ‘조선 사신인가?’라고 묻자, 시위하는 사람이 ‘그렇습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황옥교가 지나갔는데도 여전히 몸을 기울여 한참 동안 돌아보았습니다. 12일에 신들이 원명원에 갔는데, 산고수장각(山高水長閣)의 서북쪽에다 높이 황옥(黃屋)을 쳐 놓았습니다. 해가 뜰 무렵에 황제가 보련(步輦)을 타고 산고수장각을 거쳐 악차(幄次)로 나오자 신들이 여러 신하들의 뒤를 따라 맞이하고 이어서 악차로 올라가 왕공(王公)의 밑에 앉았습니다. 연탁은 미리 설치해 놓고 명주보로 덮어 놓았습니다. 황제가 자리에 앉은 뒤에 명주보를 차례로 거두어 놓고 나서 음악을 연주하며 놀이를 펼쳤습니다. 이어서 낙다(酪茶) 한 순배와 술 한 순배를 든 뒤에 황제가 조선 정사를 앞으로 나오게 하라고 명하였습니다. 그러자 예부 상서가 신 정존겸을 인도하여 어탑(御榻) 위의 의자 앞에 이르렀습니다. 대체로 어탑의 제도는 아홉 계단을 만들었는데, 납폐(納陛)045) 의 위에 어좌를 설치하였습니다. 앞으로 나아갈 때에 황제가 먼저 사신이 한어(漢語)를 아는지의 여부를 물었습니다. 그런데 통역관은 전폐를 올라가지 못하므로 예부 상서가 몸을 돌려 아래에 있는 통역관에게 묻자, 모른다고 대답하였습니다. 황제가 신에게 어탁에 있는 옥술잔의 술을 하사하고 나서 묻기를, ‘사신이 시를 지을 줄 아는가?’ 하자, 예부 상서가 이 말을 통역관에게 전하고 통역관은 신에게 전하였습니다. 신이 ‘글이 거칠어서 시를 잘 짓지 못합니다.’고 대답하니, 황제가 예부 상서를 돌아보고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습니다. 신이 비록 잘 알아듣지는 못하였으나, 황제의 환한 얼굴과 기쁜 빛이 보는 사람의 눈에 넘쳐흘렀습니다. 조금 있다가 예부 상서가 신을 인도하여 자리로 가게 하고 황제는 곧바로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예부 상서가 길옆에서 신들을 맞이해 보고서 통역관에게 말을 전하기를, ‘외국 사신을 어탑까지 오게 하여 술을 내렸는데, 이번 은총은 전에 없었던 것이므로 사신은 돌아가서 일일이 본국에 보고해야 할 것이다. 조금 전에 황제가 「사신이 시를 잘 짓는가?」라고 물었을 때 내가 필시 잘 지을 것이라고 아뢰었었다면, 바로 지어 올리라고 명하셨을 것이니, 두 사신은 빨리 지어 올려야 할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들이 각자 칠언 율시(七言律詩) 한 수씩 지어서 예부에 보냈습니다. 13일 오후 늦게 황제가 산고수장각의 처마 밑에 나와서 조선 사신을 불렀습니다. 예부 상서가 신들을 인도하여 어좌 앞에 나아가니, 황제가 말하기를, ‘그대들이 지은 시를 내가 가상히 여겨 특별히 상을 준다.’ 하고 나서 신들에게 각기 문단(紋緞) 한 필, 견지(絹紙) 한 축(軸), 묘금전(描金牋) 한 축, 공필(貢筆) 한 갑, 공묵(貢墨) 한 갑을 하사하였습니다. 호부 상서 화신과 시랑 복장안(福長安)이 각기 한 상자씩 들고와서 전하기에 신들이 받은 뒤에 감사의 인사를 하고 바깥 반열로 나갔습니다. 이어 온갖 놀이를 펼치고 또 각종 등포(燈砲)를 설치하였습니다. 신들에게 떡, 과일, 고기 등의 음식을 하사하고 수행 관원과 수행한 사람들에게도 두루 주었는데, 모두 안에서 마련했다고 하였습니다. 연회 때마다 여러 가지 놀이를 펼치었는데, 회달(回㺚), 금천(金川), 묘만(苗蠻)의 등류에 이르기까지 각기 자기 나라의 옷을 입고서 자기 나라의 음악을 연주하면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는데, 모두 새해에 기도하는 의미였습니다. 이는 대체로 사방의 미개인들이 모여들어 태평의 기상을 꾸민 것인데, 기타 불꽃놀이도 날마다 달랐으며 이 또한 화창한 양기(陽氣)를 격발시키는 의미라고 하였습니다. 14일에 오후 늦게 또 산고수장각에 들어가자, 내반(內班)으로 인도하였습니다. 어전의 각종 곡예 놀이를 관람하고 낙다 한 순배를 마신 뒤에 외반으로 나왔는데, 등불 놀이를 펼쳐 놓고 음식물을 13일과 똑같이 하사하였습니다. 또 15일에 예부의 통보에 따라 정대광명전(正大光明殿) 밖에 가서 기다리고 있다가 아침이 되어서야 전상(殿上)의 내반에 참석하였습니다. 조금 있다가 황제가 전상으로 나오자, 음악을 연주하면서 포로를 바치는 것과 살려 보내는 것 등등의 각종 기예를 펼쳤습니다. 연탁을 설치하고 나서 낙다 한 순배와 술 한 순배를 든 뒤에 연회를 파하고 물러나왔습니다. 그런데 제왕(諸王), 패륵 대신(貝勒大臣), 액부(額駙)046) , 청·한 상서(淸漢尙書), 청시랑(淸侍郞) 등등의 관원은 참여하였으나, 한시랑(漢侍郞) 이하의 관원은 참여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날 오후 늦게 또 산고수장각 밖에 나갔는데, 가장 성대하고 화려하게 등불을 늘어 놓고 놀이를 펼쳤습니다. 먼저 내반에 들어가자, 낙다를 하사하고 놀이를 펼쳤으며, 외반으로 나가자 14일날 하였던 것처럼 등불을 늘어 놓고 음식물을 하사하였습니다. 또 16일 오후 늦게 산고수장각의 앞에 갔는데, 그전처럼 놀이를 관람하고 음식물을 하사하였습니다. 전후로 음식물을 하사할 때에 화신과 복장안이 그때마다 신들이 앉아 있는 자리로 와서 일부러 오랫동안 서서 얼마나 먹는가를 보았고 또 신들에게 무슨 과거에 급제하였는가와 직품을 물었습니다. 그래서 신들이 불안하다는 뜻으로 사례하자, ‘이는 황제의 명으로 온 것이지 사적으로 와서 보는 것이 아니다.’라고 즉시 대답하였습니다. 19일에 예부 상서가 통역관을 불러 말을 전하기를, ‘황제께서 조선 사신으로 하여금 오늘 산고수장각의 연회에 참석한 뒤 경풍도(慶豊圖)로 따라 들어가 관람하게 하라고 명하셨다.’하고, 이어 말하기를, ‘이는 매우 엄숙한 곳이므로 수행 관원은 따라 들어갈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신들이 그날 산고수장각에 갔는데, 늘어놓은 등포(燈砲)의 거창함과 음식을 하사하는 절차가 15일과 같았습니다. 초저녁에 황제가 일어나 안으로 들어가자, 시위하였던 사람과 연회에 참석한 신하들이 일제히 물러나왔습니다. 예부 상서가 즉시 신들을 인도하여 산고수장각의 우측 복도를 거쳐 들어가 몇 개의 산마루를 오르내렸는데, 그 앞에 얼음같은 호수가 있었습니다. 미리 대기해 놓은 설마(雪馬)를 신들에게 타라고 하더니, 몇 사람이 이끌고 갔습니다. 언덕의 좌우에 기이한 암석들이 빙 둘러 서 있었고 단청을 한 누각이 줄지어 있었는데, 곳곳마다 등불을 펼쳐 놓아 어지러울 정도였습니다. 구불구불 돌아서 몇 리를 가다가 삼홍교(三虹橋)를 지나서 비로소 설마를 타고 중문(重門)의 층계를 거쳐 들어갔는데, 즉 이른바 경풍도로서 기둥과 집의 화려함이 산고수장각보다 더하였습니다. 황제는 채각(彩閣)에 앉았는데, 배후에는 빙 둘러 등가(燈架)를 설치하여 마치 병풍과 같았습니다. 이곳은 영주불야천(瀛洲不夜天)이라는 편액을 붙여 놓았으며, 뜰 앞에는 화란(畵欄)을 세우고 주궁서채(珠宮瑞彩)라고 편액을 붙여 놓았는데, 모두 각종의 꽃등을 매달아 놓았습니다. 누각의 안에는 연소한 귀인 10여 명이 모시고 앉아서 마치 집안 사람처럼 웃으며 이야기하였는데, 이는 제왕(諸王)과 액부(額駙) 같았습니다. 예부 상서가 신들을 인도하여 누각 앞의 계단 오른쪽 털방석 자리에 앉게 하였는데, 신들과 열지어 앉은 사람들은 화신과 복장안 몇 명뿐이었고, 예부 상서는 신들의 뒤에 서 있었고 좌석에 앉지 않았습니다. 여러 기예를 펼쳤는데, 대부분 풍년을 기원하고 장수를 비는 모양으로 모두 산고수장각에서 보지 못하던 것이었습니다. 얼마 있다가 황제가 일어나 안으로 들어가자, 예부 상서가 신들을 인도하여 물러나왔습니다. 또 설마를 타고 다른 길을 거쳐 가다가 몇 개의 언덕을 넘고 중문을 거쳐서 나왔는데, 이는 복원문(福源門)의 앞길이었습니다. 대체로 이곳은 황제가 내부에서 노니는 곳으로서 동락원(同樂園)이라고 부르는데, 경풍도는 그 집의 이름입니다. 정말 귀척(貴戚)의 신하가 아니면 들어가라고 허락한 적이 없었는데, 특별히 신들을 참여하라고 허락하였으므로 그곳 사람들이 너나없이 놀랐습니다. 20일에 예부 상서가 황제의 명에 따라 비로소 물러가라고 하기에 신들이 그날 관소(館所)로 돌아왔습니다. 정월 29일에 황제가 원명원에서 대궐로 돌아왔고 이달 6일에 태학에 거둥하였고 10일에 역주(易州)에 가서 태릉(泰陵)을 참배하였는데, 이는 옹정황제(雍正皇帝)의 능침(陵寢)이었습니다. 심양으로 거둥한다고 예부에서 알려 왔기 때문에 통역관으로 하여금 그 날짜를 알아보라고 하였더니, 5월 초순 무렵에 황제가 열하(熱河)의 행궁(行宮)에 들렀다가 7월 초순 무렵에 열하에서 출발하여 산해관을 거치지 않고 구외(口外) 지방의 길을 따라 먼저 흥경(興京)에 나아가 영릉(永陵)을 참배하고 8월 초순 무렵에 심양으로 돌아와서 복릉(福陵)과 소릉(昭陵)을 참배하고 나서 심양에서 탄일(誕日)을 보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날짜는 아직 결정을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예부에 자세히 물어보았더니, 예부에서, ‘분부가 내리면 어가를 접할 수 있는 날짜를 다시 알려주겠는데, 심양에서 탄일을 보내는 것은 확실하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5책 15권 27장 A면【국편영인본】 45책 354면
- 【분류】외교-야(野)
○戊子/冬至兼謝恩正使鄭存謙、副使洪良浩, 在燕馳啓曰: "臣等一行, 昨年十二月二十日到北京。 二十九日, 皇帝親祭太廟, 自禮部奉旨: ‘特令朝鮮使臣, 祗迎於還宮時’, 故臣等詣端門內廟門外祗迎。 皇帝輦過班前, 使戶部尙書和珅, 問: ‘國王平安乎?’ 臣等對曰: ‘平安矣。’ 又問臣等行役安否, 又問使臣爵秩。 本年正月初一日, 入太和殿庭西班, 行朝參禮, 而我國外他國, 則不値年限, 故無來貢者。 臣等入闕時, 禮部尙書德保遣通官委問, 而致款於班次, 其後赴闕, 則輒如之。 初二日, 來到館外, 招出任譯, 勞問臣等, 意頗勤摯。 禮部知會內, 初五日朝鮮正副使臣, 赴紫光閣參宴云, 故當日臣等, 詣紫光閣外等候, 平明, 皇帝乘黃屋轎出。 臣等祗迎於閣外儀仗內。 皇帝陞御座, 張樂陳戲。 臣等隨入班次於王公之次, 進宴卓, 酪茶二巡後, 皇帝還內, 而參宴諸臣, 竝皆賞賜, 亦及於臣等。 賜臣存謙錦三匹、漳絨三匹、小卷八絲、緞五匹、小卷五絲、宮紬五匹、荷包囊子十箇、畫磁杯一箇。 臣良浩錦一匹、漳絨一匹、小卷八絲、緞三匹、小卷五絲、宮紬三匹、荷包囊子六箇、畫磁杯一箇。 禮部知會內, ‘十一日皇上幸圓明園, 相應傳知朝鮮正副使臣送駕, 卽於是日, 赴圓明園恭候, 十二日, 入宴可也’云, 故十一日, 臣等入西安門等候, 黎明, 皇帝出宮, 禮部尙書引臣等就坐西班末。 皇帝到臣等祗送處, 開轎諦視曰: ‘朝鮮使耶?’ 侍衛者對曰: ‘然矣。’ 轎過而猶傾身回視者良久。 十二日, 臣等赴圓明園, 則高張黃屋於山高水長閣西北邊。 日出時, 皇帝乘步輦, 由水長閣, 出御幄次, 臣等隨諸臣祗迎, 仍陞幄內, 就坐於王公之下。 宴卓則預爲排陳, 覆以紬袱。 皇帝御座後, 以次開袱, 設樂張戲。 仍進酪茶一巡、酒一巡後, 皇帝命朝鮮正使進前。 禮部尙書引臣存謙, 至御榻上椅子前。 蓋御榻之制, 設九級, 納陛上, 設御座。 進前之時, 皇帝先問使臣之解漢語與否, 而通官則不得上陛, 故禮部尙書, 卽回身俯問於通官之在下者, 對以未解。 皇帝賜臣以御卓玉杯之酒, 仍問曰: ‘使臣能詩乎?’ 禮部尙書傳語通官, 通官傳語於臣, 故臣對曰: ‘文詞鹵莾, 未能工詩矣。’ 皇帝顧禮部尙書, 多有酬酢。 臣雖未諦解, 而皇帝之和顔喜色, 溢於觀瞻。 少頃禮部尙書導臣就坐, 皇帝旋卽還內。 禮部尙書邀見臣等於路左, 使通官傳語曰: ‘外國陪臣, 引至御榻, 饋以御酒。 今番恩數之隆異, 前所未有, 使臣宜一一歸奏於本國。 俄者, 皇上問使臣能詩否, 吾奏必能之, 則仍命製進, 兩使臣須速製進’云。 故臣等各製七言律詩一首, 送禮部。 十三日晩後, 皇帝出御山高水長閣簷楹間, 命召朝鮮使臣。 禮部尙書引臣等進御座前。 皇帝曰: ‘儞等所製詩, 予庸嘉之, 特爲頒賞。’ 仍賜臣等各紋緞一匹、絹紙一軸、描金牋一軸、貢筆一匣、貢墨一匣。 戶部尙書和珅、侍郞福長安各捧一函來傳, 故臣等領受謝恩, 出就外班。 仍陳諸般雜戲。 又設各樣燈砲, 賜臣等餠、糖、果、肉等饌, 遍給於從官、從人, 而俱係內辦云。 每宴輒設諸戲, 以至於回㺚、金川、苗蠻之類, 各着其國之服, 各奏其國之樂, 舞蹈歌唱, 俱是新年祈壽之意。 蓋示賓服四夷, 賁飾太平之象, 而其他火戲, 每日異觀, 亦出皷發陽和之意云。 十四日晩後, 又入山高水長閣, 則引就內班。 觀御前諸般奏(伎)〔技〕 , 行酪茶一巡後, 出就外班。 設燈戲及頒賜內饌, 一如十三日。 又於十五日, 依禮部知會, 詣正大光明殿外等候, 平明, 入參殿上內班。 少頃, 皇帝出御殿上, 奏樂, 陳獻俘放生等諸般雜技。 設宴卓酪一巡、酒一巡後罷宴退出, 而諸王貝勒、大臣額駙。 淸、漢尙書、淸侍郞等官進參, 而漢侍郞以下, 不得與焉。 當日晩後, 又詣山高水長閣外, 張燈設戲, 最爲盛麗, 而先入內班, 賜酪茶陳戲。 出就外班, 設燈賜饌, 亦如十四日。 又於十六日晩後, 入山高水長閣前, 依前觀戲賜饌。 前後贈饌之際, 和珅、長安, 每到臣等坐處, 故久立視所食之多少, 又問臣等科名職品, 故臣等謝以不安之意, 卽答以此是皇命, 非私自來視云。 十九日, 禮部尙書招通官傳言曰: ‘皇上命朝鮮使臣, 今日水長閣參宴後, 使之隨入慶豐圖觀光。’ 仍言: ‘此是深嚴之地, 從官不可隨入’云。 當日臣等, 詣山高水長閣, 燈砲之盛, 賜饌之節, 亦如十五日, 而初昏, 皇帝起身還內, 侍衛與參宴諸臣, 一齊退出。 禮部尙書, 卽引臣等, 由水長閣右邊複道而入, 上下數岡, 則前有氷湖, 預待雪馬, 使臣等乘之, 有數人挽曳, 而夾岸左右, 奇巖環峙, 畫閣相望, 處處張燈, 頗覺眩輝。 逶迤行數里, 穿過三虹橋, 始卸雪馬, 歷重門層階而入, 卽所謂慶豐圖也, 棟宇之華麗, 過於水長閣。 皇帝坐於彩閣, 而背後環設燈架, 有若屛障, 扁曰瀛洲不夜天, 庭前立畫欄。 扁曰珠宮瑞彩, 皆懸各樣花燈。 閣內則年少貴人十許輩侍坐, 笑語如家人禮, 似是諸王額駙也。 禮部尙書引臣等, 坐於閣前階右氈席上, 與臣等列坐者, 只是和珅、福長安輩若而人而已。 禮部尙書, 則立於臣等之後, 而亦不入坐所。 設諸技, 多是祈豐獻壽之狀, 皆水長閣所未見者。 少頃, 皇帝起身還內, 禮部尙書, 引臣等退出。 又乘雪馬, 由他路而行, 越數阜, 歷重門而出。 乃是福源門前路。 蓋此處, 卽皇帝自內讌遊之所, 號稱同樂園, 而慶豐圖, 卽其閣名也。 苟非貴戚之臣, 則未嘗許入, 而特令臣等入參, 彼人莫不動色。 二十日, 禮部尙書, 因旨意, 始令退歸, 故當日臣等還館所。 正月二十九日, 皇帝自圓明園回闕, 本月初六日, 幸太學, 初十日詣易州, 謁泰陵, 卽是雍正皇帝陵寢也。 瀋陽幸行, 自禮部奉旨行會, 故使任譯, 探其日期, 則五月旬間, 皇帝幸熱河行宮, 七月旬前, 自熱河起駕, 不由山海關, 仍從口外地方作路, 先詣興京, 謁永陵, 八月初旬間, 回到瀋陽, 謁福陵、昭陵, 仍過聖節於瀋陽。 日字, 旨意姑未下, 故詳問於禮部, 則以爲: ‘待其旨下, 本部當以接駕日期, 更爲知會, 而過聖節於瀋陽則的實’云。"
- 【태백산사고본】 15책 15권 27장 A면【국편영인본】 45책 354면
- 【분류】외교-야(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