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조보감》이 완성되어 춘당대에 나아가서 직접 받다
《국조보감》이 완성되었다. 편집을 맡은 여러 신하들이 전문(箋文)을 갖추어 올리자, 임금이 춘당대에 나아가서 친히 받았다. 그 총서(總敍)에서 말하기를,
"보감의 체재(體裁)는 송(宋)나라 인종(仁宗)의 《삼조보훈(三朝寶訓)》에서 비롯되었는데, 역대로 내려오면서 앞을 다투어 의례(義例)를 만들어냈다. 예를 들면 《법보신록(法寶新錄)》·《전법보록(傳法寶錄)》·《삼조성훈(三朝聖訓)》의 등속은 아랫사람이 가정의 법도를 외워서 임금에게 덕을 권면하는 것이고, 《조훈록(祖訓錄)》·《황조보훈(皇朝寶訓)》·《문화대훈(文華大訓)》의 등속은 윗사람이 선열(先烈)을 선양하여 후손에게 물려주는 것인데, 이 모두가 똑같이 이전 삼모(二典三謨)194) 의 유범(遺範)이고 전기(傳記)의 일종이다. 법을 거울삼아 계술(繼述)하는 바탕에 있어서 어찌 얕고 작다고 하겠는가? 처음에 우리 조정이 천명을 받으면서부터 문헌이 점점 갖추어졌다. 세종께서 즉위하여 일찍이 예문관 대제학 권제(權踶)와 집현전 대제학 정인지(鄭麟趾)로 하여금 송나라 사원(史院)에서 보훈(寶訓)을 편찬해서 왕손들이 강독하는 것에 대비한 것을 모방해서 태조와 태종의 큰 훈계와 중요한 정사를 채집해서 보감(寶鑑)을 만들도록 하였는데, 결국 이룩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세조 2년 정축에 이르러 세종께서 끝마치지 못하셨던 일을 이룩하여 태조·태종·세종·문종 네 조정의 보감을 편찬하라고 명하였다. 찬수청(纂修廳)을 설치하고 집현전 대제학 신숙주(申叔舟)·권남(權擥)은 모두 춘추관사를 겸직하고 이조 판서 이극감(李克堪), 판전농시사 강희맹(姜希孟), 판 사재감사 성임(成任)은 모두 춘추관 편수관을 겸직하여 당상이 되었다. 그리고 예문관 직제학 한계희(韓繼禧), 직집현전 김지경(金之慶), 예문관 응교 김수녕(金壽寧)은 모두 춘추관 기주관을 겸임하여 낭청이 되었다. 그리하여 3년 무인년195) 에 이르러서 글 7편을 만든 다음 전문을 갖추어 올리고 신숙주가 서문을 썼는데, 이것이 《국조보감》이다. 이때부터 열성들께서 서로 이어받아 오면서 여러 번 보감을 계승하여 만들어 네 임금의 아래에 이으려고 하였으나 모두 미처 하지 못하셨다. 예를 들면 예종조에 글을 잘하는 신하를 명하여 《세조보감》을 편찬하게 한 것과 성종조에 영의정 한명회(韓明澮)의 건의에 따라 대제학 서거정(徐居正)을 명하여 세조훈사(世祖訓辭)와 병법을 편찬하여 《국조보감》을 잇게 한 것과 중종조에는 찬집청을 설치하여 조종조(祖宗朝)의 아름다운 말씀과 좋은 정사를 편차하여 《국조보감》을 잇게 한 것과 인조조에는 대제학 이식(李植)을 명하여 《선조실록(宣祖實錄)》의 남은 초고를 다시 편찬하고 후세의 법이 될 만한 성상의 훈계를 모아 별도로 한 책을 만든 것과 효종조에는 참찬관 김익희(金益熙)의 건의에 따라 세조로부터 선조에 이르기까지 보감을 이어 편찬하여 전서(全書)를 완성한 것인데, 대부분 명만 내렸지 그 글은 없다. 그리고 명종조에 이르러서는 군자 판관(軍資判官) 윤영(尹齡)이 올린 《국조보감유초(國朝寶鑑類抄)》는 원래의 글을 줄이고 종류별로 나누어서 보기에 편리하게 한 본(本)에 불과하다. 지금 글을 잘하는 고가(故家)에 전하는 필사본 《속보감기(續寶鑑紀)》는 세조와 성종의 때의 일로서 서거정이 편찬하였다고 하는데, 책의 대체적인 짜임새가 상당히 패관(稗官)196) 에 가까울 뿐만이 아니라, 서거정이 성종 시대에 죽었으므로 그가 미리 성종보감을 짓지 않았을 것이니, 그것이 거짓의 작품임을 의심할 것 없다. 그래서 우리 숙종 6년 경신년에 공조 판서 이단하(李端夏)가 상소를 올려 말하기를, ‘신의 아비가 역사를 편수할 때에 직접 인조의 분부를 받아 실록 가운데 훈계를 뽑아 한 책을 만들어서 올리려고 하였는데, 완성되기 전에 신의 아비가 갑자기 죽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보감의 범례를 모방하여 실록에서 뽑아내어 왕세손께서 보시도록 대비하였는데, 필시 본받는 방도에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묘당에서 이단하로 하여금 끝까지 그 일을 관장할 것을 청하였는데, 10년 갑자년197) 에 이단하가 글 10편을 만든 다음 차자와 아울러 올렸으니, 이것이 《선묘보감(宣廟寶鑑)》입니다. 우리 영종 5년 기유년198) 에 태조·태종·세종·문종·선조는 모두 보감이 있으나, 다른 열성들은 모두 빠졌다고 하여 문학이 있는 사람을 잘 가려 뽑아서 이어 편찬하여 일통(一統)의 글을 만들라고 명하셨다가 일이 중대하고 역사가 커서 곧바로 그 명을 정지하셨습니다. 이어 전 대제학 윤순(尹淳)을 춘추 관사를 겸임하게 하고 찬집청을 설치하여 《숙묘보감(肅廟寶鑑)》을 편찬케 명하고 어필(御筆)로 범례 세 조목을 써서 내렸습니다. 첫째는 ‘이번에 보감을 편찬하라고 한 명은 우리 성고(聖考)께서 40여 년 간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돌보고 정사를 부지런히 하고 간하는 말을 따르고 선비를 존중하고 검소를 숭상하신 성대한 공열(功烈)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니, 모름지기 정밀히 뽑아서 편찬하도록 하라. 그리고 상소에 있어서는 사건으로 인하여 포상한 것만 기록하되, 상소의 원본도 《국조보감》의 예에 따라 대략만 기록하도록 하라.’ 하였고, 둘째는 ‘기해년199) 예설(禮說)의 일은 본래 국가의 예절이니 어찌 소중하지 않겠는가? 그에 관한 전후의 상소가 매우 많고 또 사기(史記)가 있으니, 만약 낱낱이 기록한다면 한만(閒漫)한 것을 간추려 지극한 덕을 드러내는 뜻이 아니니, 모두 기록하지 말라.’고 하였으며, 셋째는 사문(斯文)의 일은 유림들 사이에 일어난 일이니, 국가의 예절과는 차이가 있다. 그리고 말이 엄청나게 번다하니 일체 기록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때 마침 장령 신처수(申處洙)가 예설과 사문의 일을 보감에 기록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윤순을 탄핵하자, 영종께서 신처수를 귀양보내라고 명하였는데, 윤순이 끝내 출사하지 않았다. 드디어 대사성 이덕수(李德壽)로 하여금 춘추관 수찬관을 겸하고 대신 당상이 되어 전적으로 편집하도록 명하고, 부호군 유엄(柳儼)은 춘추관 편수관을 겸하고 교리 정우량(鄭羽良)은 춘추관 기주관을 겸하고 정언 윤지원(尹志遠), 부사과 이재후(李載厚), 승문 부정자 남태제(南泰齊)·박수(朴璲)·유일(柳逸)·남태온(南泰溫)은 춘추관 기사관을 겸하여 모두 낭청이 되었다. 6년 경술년200) 에 이덕수가 글 15편을 만들고 전문을 갖추어 올리니, 이것이 《숙묘보감》이었다. 지금 주상께서 왕위를 계승한 지 5년 7월에 《영종실록(英宗實錄)》이 완성되자, 대신과 각신을 불러 하교하시기를 ‘선대왕의 50년 성대한 덕업(德業)은 역사에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이다. 하늘을 공경하고 선조를 받드는 정성과 표준을 세우고 백성을 돌보시는 덕이 사람들의 이목에 젖어 백대에 빛나고 있다. 그런데 실록은 석실(石室)이나 금궤(金櫃)에 매우 비밀히 간직해 두지만, 오직 보감의 글 성격은 사기와는 조금 다르다. 비록 편년(編年)의 체재를 존속하지만 선양하는 방안에 주력하는 것이고 보면 지금 실록을 편성한 끝에 보감을 편수하는 역사를 시작하는 것이, 내 한 사람이 선왕의 훈계와 선왕의 공열을 빛내고 천양하는 도리에 있어서 거의 유감이 없다고 하겠다.’고 하시자, 여러 신하들이 모두 매우 성대한 일이라고 대답하였다. 이어 하교하시기를 ‘세조(世祖)에서 보감을 편찬한 뒤로 선조와 숙종 두 보감만 있을 뿐이고 그 나머지 열두 조정은 아직도 글이 없으니, 세 보감이 일통(一統)의 문자가 이룩될 수 없을 뿐만이 아니다. 또한 듣건대 《국조보감》이 중간에 유실되어 전해지지 않고 있다가 백여 년 전에 비로소 고로(故老)의 집에서 얻어 세상에 간행되었다고 하였다. 여러 보감들이 서로 연속되지 않아 각자 따로 유행되고 있는데, 시대가 가고 사건이 지나가면 또 어떻게 《국조보감》처럼 중간에 유실되어 전해지지 않을지 알 수 있겠는가? 나는 열두 조정의 사실을 모두 편집하고 세 보감과 《영묘보감》을 합하여 한 책으로 만들어서 길이 무궁하게 전하고 싶다. 경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열성조에서 미처 하지 못하였던 일을 성취시킨다면 어찌 우리 국가의 억만 년 끝이 없는 경사가 아니겠습니까?’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조준(趙㻐)·이명식(李命植)·김익(金熤)을 춘추관사에 겸임시켜 찬집 당상(纂輯堂上)으로 차출하여 영종조의 사실을 차례로 엮어서 교정소(校正所)에 보내라고 명하였다. 또 원임 대제학 이복원(李福源)과 서명응(徐命膺)을 명하여 이식과 이덕수의 사례에 의거해 집에서 보감의 체재를 교정하여 만들도록 하였다. 낭청 조성진(趙城鎭)·윤행원(尹行元)·윤이상(尹履相)은 편수·기주·기사를 겸하고 원임 영의정 김상철(金尙喆)은 총괄하여 살피게 하였다. 《영묘보감》이 완성되자, 차례로 열두 조정의 보감에도 일을 착수하였다. 이에 하교하기를, ‘옛날 선묘조 때 《동국명신록(東國名臣錄)》을 편찬하기 위해 열성조의 실록을 상고해내라고 명하였는데, 이 사실이 문익공(文翼公) 정광필(鄭光弼)의 유고(遺稿)의 부록(附錄) 가운데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조정의 신하 언행도 실록을 상고하는데 더구나 보감을 편찬하는데 말할 것이 있겠는가? 또 더구나 일찍이 실록의 개수(改修)로 인하여 수차 옮겨 봉안한 과거의 전례가 있는데 보감을 편찬하면서 어찌 혹시라도 실록을 개수하는 것보다 가볍게 여길 수 있겠는가?’ 하고, 이어 춘추관 당상을 명하여 강화의 정족산성(鼎足山城)에 가서 정종·단종·세조·예종·성종·중종·인종·명종 여덟 조정의 실록을 가져다 인조·효종·현종·경종 네 조정의 실록이 봉안된 춘추관에다 봉안하게 하였다. 그러고 나서 열두 명의 당상과 열여섯 명의 낭청을 차출하여 모두 춘추관을 겸임하고 본원(本院)에서 숙직하면서 각 조정의 사실을 뽑아내게 하고 자주 찬거리와 시를 하사하여 위로하였다. 한달 남짓 지나서 열두 조정의 실록을 모두 뽑아내자, 드디어 조준을 명하여 정종·단종·예종·인종·경종의 다섯 조정의 보감[五朝寶鑑]을 편찬하도록 하였다. 정창성(鄭昌聖)은 세조조의 보감을 편찬하고, 김노진(金魯鎭)은 성종조의 보감을 편찬하고, 홍양호(洪良浩)는 중종조의 보감을 편찬하고, 서유린(徐有隣)은 명종조의 보감을 편찬하고, 민종현(閔鍾顯)은 인조조의 보감을 편찬하고, 김익(金熤)은 효종조의 보감을 편찬하고, 이명식(李命植)은 현종조의 보감을 편찬하였다. 한 편이 끝날 때마다 계속 교정소로 보냈는데, 교정은 한결같이 《영묘보감》을 교정하는 예와 같이 하였다. 정종·단종·예종·인종·경종의 다섯 조정 보감은 이복원이 주관하고, 세조·성종·중종·명종·인조·효종·현종의 일곱 조정의 보감은 서명응이 주관해 주상의 뜻을 여쭈어서 버리거나 취하고 증가하거나 줄였다. 예악(禮樂) 횟수로부터 전장(典章)의 인습과 개혁에 이르기까지 실록에 미비된 것과 명유(名儒)들이 의심하고 어렵게 여겼던 것을 많이 미루어 부연하고 닦아 밝혔다. 이어 세 보감으로 의례를 상호 참조해서 합하여 68권을 만들었다. 주상께서 친히 서문을 짓고 대제학 김종수가 발문을 붙였다. 다시 시임 대신, 원임 대신 및 시임 문임(文任)을 명하여 반복해서 참조해 본 다음에 감인청(監印廳)을 설치하여 새기게 하였다. 먼저 활자로 한 책을 찍어내고 이어 인본(印本)을 가지고 재목(梓木)에다 번각(翻刻)하여 석 달이 지나 공사가 끝났는데, 이것이 《국조보감》이다. 이때에 이르러 의식을 갖추어 봉모당(奉謨堂)에다 봉안하였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4책 14권 27장 A면【국편영인본】 45책 331면
- 【분류】역사-편사(編史) / 출판-서책(書冊) / 어문학-문학(文學)
- [註 194]이전 삼모(二典三謨) : 《서경(書經)》의 편차인데, 이전은 요전(堯典)·순전(舜典)이고, 삼모는 대우모(大禹謨)·고요모(皋陶謨)·익직(益稷)임.
- [註 195]
무인년 : 1458 세조 4년.- [註 196]
패관(稗官) : 옛날에 임금이 민간의 풍속이나 정사(政事)를 살피기 위하여 가설 항담(街說巷談)을 모아 기록시키던 벼슬아치.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 "소설가의 부류는 대체로 패관에서 나왔다. 마을에 이야기나 길거리의 이야기를 쓴 것이다."고 하였는데, 후세에 야사(野史)나 소설을 패관이라고 일컬었음. 패관의 글은 자연히 창의성과 윤색(潤色)이 가미되어 점차로 일종의 문학 형태를 갖추게 되었음. 우리 나라에서는 이제현(李齊賢)의 《역옹패설(櫟翁稗說)》이나 《죽부인전(竹夫人傳)》 등이 패관 문학의 대표적인 것으로 꼽히며, 이는 근대 소설의 기원에 심대한 의의를 가지는 것임.- [註 197]
갑자년 : 1684 숙종 10년.- [註 198]
○丁巳/《國朝寶鑑》成。 編輯諸臣, 具箋以進, 上御春塘臺親受。 總敍曰:
寶鑑之體, 肇自宋 仁宗之《三朝寶訓》, 而歷代相沿, 競出義例, 如《法寶新錄》、《傳法寶錄》、《三朝聖訓》之屬, 下所以誦家法, 而勉君德也。 《祖訓錄》、《皇朝寶訓》、《文華大訓》之屬, 上所以揚先烈, 而貽後昆也。 均之爲典謨之遺範, 傳記之一類。 其有賴於鑑法繼述之資, 豈淺尠哉? 初, 我朝受命, 文獻浸備。 世宗在宥, 嘗使藝文館大提學權踶、集賢殿大提學鄭麟趾, 倣宋朝史院之撰《寶訓》, 以備邇英講讀之例, 采摭太祖、太宗宏謨要政, 編爲寶鑑, 而竟未之成。 及世祖二年丁丑, 克成世宗未卒之志事, 命撰太祖ㆍ太宗ㆍ世宗、文宗四朝寶鑑, 而設纂修廳, 以集賢殿大提學申叔舟ㆍ權擥, 皆兼知春秋館事。 吏曹參議李克堪、判典農寺事姜希孟、判司宰監事成任, 皆兼春秋館編修官而爲堂上。 藝文館直提學韓繼禧、直集賢殿金之慶、藝文館應敎金壽寧, 皆兼春秋館記注官而爲郞廳, 至三年戊寅, 爲書七編, 具箋以進, 而申叔舟序之, 是爲《國朝寶鑑》。 自是厥後, 列聖相承, 屢欲續成寶鑑, 以系四朝, 而皆未遑焉。 如睿宗朝命詞臣, 撰《世祖寶鑑》, 成宗朝, 因領議政韓明澮之奏, 命大提學徐居正, 纂《世祖訓辭》及《兵法》, 以續《國朝寶鑑》。 中宗朝, 命設纂集廳, 編次祖宗朝嘉謨善政, 以《續國朝寶鑑》。 仁祖朝命大提學李植, 改撰《宣祖實錄》之餘抄, 輯聖謨之爲後世法者, 別爲一書。 孝宗朝, 因參贊官金益熙之奏, 續纂世祖至宣祖寶鑑, 以成全書, 而率皆有其命無其書。 至如明宗朝, 軍資判官尹齡所進《國朝寶鑑類抄》, 不過節略原書, 分門便覽之本也。 今文苑故家所傳寫本《續寶鑑之紀》, 世祖、成宗時事, 而稱徐居正撰者, 不但義例之頗涉稗官, 居正卒於成宗之世, 則不當預撰《成宗寶鑑》, 其爲贗作, 又無疑也。 肆我肅宗六年庚申, 工曹參判李端夏疏言: ‘臣父修史之日, 親承仁祖聖敎, 抄出實錄中聖謨, 別爲一書以進, 而事未及就, 臣父遽歿。 今倣寶鑑凡例, 抄出實錄, 以備睿覽, 則必當有補於取則之方。’ 於是, 廟堂請令端夏, 卒掌其事, 十年甲子, 端夏爲書十編, 隨箚以進, 是爲《宣廟寶鑑》。 粤我英宗五年己酉, 以太祖、太宗、世宗、文宗、宣祖, 皆有寶鑑, 而列朝俱闕焉, 命極選有文學人, 續纂爲一統文字, 而旋以事重役巨, 寢其命。 仍命前大提學尹淳兼知春秋館事, 設纂輯廳, 編《肅廟寶鑑》, 以御筆書下凡例三條。 一曰, 今玆纂集寶鑑之命, 欲彰我聖考四十餘年敬天恤民, 勤政從諫, 尊儒崇儉之豊功盛烈, 其須精抄纂集。 至於章奏, 只錄因事褒嘉者, 而原疏亦依《國朝寶鑑》例, 記其大略焉。 一曰, 己亥禮說事, 本邦禮, 豈不重也? 而前後章奏甚多, 且有史焉, 有記焉, 若一一載錄, 非簡閒漫彰至德之意, 竝勿錄。 一曰, 斯文事, 乃儒林間事, 興邦禮有間。 且辭說浩繁, 一體勿錄。 會掌令申處洙, 以禮說斯文事之不載寶鑑, 啓劾淳。 英宗命竄處洙, 而淳終不出。 遂命大司成李德壽兼春秋館修撰官, 代爲堂上, 專管編摩, 而以副護軍柳儼兼春秋館編修官、校理鄭羽良兼春秋館記注官、正言尹志遠、副司果李載厚、承文副正字南泰齊ㆍ朴璲ㆍ柳逸ㆍ南泰溫, 兼春秋館記事官, 竝爲郞廳。 六年庚戌, 德壽爲書十五編, 具箋以進, 是爲《肅廟寶鑑》。 逮上嗣服之五年秋七月, 《英宗實錄》告完, 召大臣、閣臣, 敎曰: "先大王五十年盛德大業, 史不勝書。 敬天奉先之誠, 建極恤民之德, 塗人耳目, 照映百代, 而第實錄則石室、金櫃, 其藏甚秘, 惟寶鑑爲書, 與史記稍異。 雖存編年之體, 務主揄揚之方, 則今因實錄編成之餘, 仍始寶鑑纂修之役, 其在予一人光前謨、闡先烈之道, 庶乎其無憾矣。" 諸臣皆對以甚盛。 仍敎曰: "光廟朝撰成寶鑑之後, 只有宣廟、肅廟兩寶鑑, 其餘十二朝, 尙爲闕文, 非但三寶鑑, 不得成一統文字, 且聞《國朝寶鑑》, 間逸不傳, 百餘年前, 始得於故老家, 印行于世。 諸寶鑑不相聯屬, 各自孤行, 時移事往, 安知又不如《國朝寶鑑》之間逸不傳耶? 予欲以十二朝事實, 竝加編輯, 與三《寶鑑》、《英廟寶鑑》, 合成一書, 永垂無窮。 卿等以爲如何?’ 諸臣皆對曰: ‘列朝未遑之事, 若果成就, 豈非我國家億萬年無疆之慶耶?’ 乃命趙㻐、李命植、金熤兼知春秋館事, 差纂輯堂上, 編次英宗朝事實, 以送于校正所。 又命原任大提學李福源、徐命膺, 依李植、李德壽例, 在家校正, 勤成寶鑑之體。 其郞廳趙城鎭、尹行元、尹履相兼編修、記注、記事, 而原任領議政金尙喆檢攝之。 《英廟寶鑑》旣成, 以次及於十二朝寶鑑。 於是, 又敎曰: ‘昔在宣廟朝爲纂《東國名臣錄》, 命攷列朝實錄, 此事詳載於文翼公 鄭光弼遺稿附錄中。 朝臣言行, 尙攷實錄, 況於寶鑑撰次乎? 又況實錄, 曾因修改, 有數次移奉之己例。 寶鑑撰次, 豈或輕於實錄修改乎? 因命春秋堂上, 至江華之鼎足山城, 奉定宗、端宗、世祖、睿宗、成宗、中宗、仁宗、明宗八朝實錄, 移安于仁祖、孝宗、顯宗、景宗四朝實錄所奉之春秋館。 差十二堂上、十六郞廳, 皆兼春秋, 直宿于本院, 抄出各朝事實, 頻賜法膳、御詩以勞之。 甫閱月, 盡抄十二朝實錄, 遂命趙㻐, 編定宗、端宗、睿宗、仁宗、景宗 《五朝寶鑑》, 鄭昌聖編《世祖朝寶鑑》, 金魯鎭編《成宗朝寶鑑》, 洪良浩編《中宗朝寶鑑》, 徐有隣編《明宗朝寶鑑》, 閔鍾顯編《仁祖朝寶鑑》, 金熤編《孝宗朝寶鑑》, 李命植編《顯宗朝寶鑑》。 每一編訖, 陸續以送于校正所。 校正一如《英廟寶鑑》校正之例, 而定宗、端宗、睿宗、仁宗、景宗 《五朝寶鑑》, 李福源主之。 世祖、成宗、中宗、明宗、仁祖、孝宗、顯宗 《七朝寶鑑》, 徐命膺主之, 稟裁取旨, 去取增損。 自夫禮樂度數, 以至典章因革, 實錄之所未備, 名儒之所疑難者, 多有推演修明, 仍以三寶鑑, 參互義例, 合成六十有八卷。 親製序文, 大提學金鍾秀爲之跋。 復命時ㆍ原任大臣及時任文任, 反復參證, 爲後設監印廳, 付諸剞劂。 先以活字, 印出一本, 仍將印本, 翻刻梓木, 閱三月工告訖, 是爲《國朝寶鑑》。 至是, 具儀奉安于奉謨堂。
- 【태백산사고본】 14책 14권 27장 A면【국편영인본】 45책 331면
- 【분류】역사-편사(編史) / 출판-서책(書冊) / 어문학-문학(文學)
- [註 1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