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숭상하는 폐단, 도고법의 폐지 등을 아뢴 장령 구수온의 상소문
장령 구수온(具修溫)이 상소하기를,
"전하의 치법(治法)은 모두 문(文)으로 하고 있고 정모(政謨)도 또한 문(文)으로 하고 있으며, 직임을 맡기고 벼슬을 제수하는 것도 문(文)으로 하고 흉역을 다스리고 역적을 토죄하는 것도 문(文)으로 하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에 아래에서 위를 받드는 데 있어서도 또한 문(文)을 쓰게 되었는데, 문이 진실로 아름다운 제목(題目)이기는 합니다만, 그 폐단이 이와 같습니다. 돌아보건대, 오늘날의 급선무는 어찌 실상을 힘쓰고 문(文)을 제거하는 데 있지 않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다스려지기를 구하는 것도 실상으로써 하고 간언을 따르는 것도 실상으로써 하여 모두 실심(實心)에 의거하여 행한다면, 문·실(文實)이 서로 부합되고 체용(體用)이 구비하게 될 것입니다. 기강(紀綱)은 나라를 나라답게 하는 방법인데, 법령이 행해지지 않으면 곧 기강이 확립되지 않는 것입니다. 여염(閭閻)의 가사(家舍)가 법도에 어긋나고 시정(市井)의 복식(服飾)이 법제에 지나치게 되었으므로 백성이 법금(法禁)을 두려워하지 않고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범하기에 이르렀는데 심하게는 엊그제 막중한 자리에 난입(攔入)하는 변(變)이 있기에 이르러 극도에 달하였으니, 오늘날의 기강은 땅을 쓴 듯이 남아 있는 것이 없다고 할 만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법령을 밝게 전하여 기강을 확립시키소서. 무릇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능멸하고 천한 사람이 귀한 사람을 무시하는 데 관계되는 것은 조금도 용서없이 상전(常典)에 의거하여 단죄(斷罪)한다면 나라의 기강은 확립시킬 것을 기약하지 않아도 절로 확립될 것입니다.
도하(都下)에 사는 백성들은 농사를 짓는 업(業)이 없기 때문에 각사(各司)의 이예(吏隷)가 되는 이외에는 거개가 싼 것을 사다가 비싸게 파는 것으로 이익을 남겨 생활하여 가고 있는 사람이 열이면 8, 9명입니다. 대개 사방의 물화(物貨)가 도하(都下)로 폭주(輻湊)하기 때문에 값이 쌀 때에 사람들이 살 수가 있고 값이 비쌀 때를 당하여 사람들이 팔 수가 있는데, 있고 없는 것을 열심히 옮겨다 파는 것으로 이익을 남겨 아침 저녁 먹고 사는 것이 이것이 실로 도민(都民)들 생애(生涯)의 근본인 것입니다. 근래 듣건대, 도고법(都賈法)이 새로 나와서 한 사람이 겸병(兼幷)하고 있으면서 다른 사람은 감히 사사로이 살[買] 수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부민(富民)들이 계방(契房)을 만들어 헐값으로 사들여 가지고는 계방 이외의 사람들에게 전매(轉賣)하는데 값을 배로 받아들이고 있으니, 이것이 이른바 이익은 한 사람에게로 돌아가고 해는 만민(萬民)이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도민들이 생업(生業)을 잃게 되었으므로 실로 지탱하여 보전할 가망이 없게 되었으니, 이는 도민의 하나의 큰 폐단인 것입니다. 신은 청컨대 경조(京兆)와 평시서(平市署)로 하여금 각별히 엄히 금단하게 하여 도고법을 파기시키고 각기 스스로 매매(賣買)하게 하여 전처럼 생활하여 갈 수 있게 하소서.
신이 서읍(西邑)에 대죄(待罪)하고 있었으므로 그 곳의 폐단을 익히 알고 있는데, 청남(淸南) 여러 고을의 환곡(還穀)을 해마다 돈으로 만들어 서울로 올려보내고 있습니다만, 원수(元數)와 비교하여 보면 거의 7, 8분(分)은 모자랍니다. 이를 분급(分給)할 즈음 그 반을 꺾어서 유치(留置)시키는데, 흉년이 든 해에는 그것을 가지고 백성을 구제할 수 없습니다. 신은 진실로 돈으로 만들어서 서울로 올려 보내는 것이 공용(公用)에 긴요하다는 것을 알겠습니다만, 만일 본의(本意)를 논한다면 이것이 어찌 말이 되는 것이겠습니까? 청북(淸北)의 여러 고을들은 도로(道路)가 멀어서 수운(輸運)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환곡이 그대로 있어서 해마다 묵어서 썩는 탓으로 먹을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어 백성들이 도리어 고통으로 여기고 있으니, 이는 관서(關西)의 하나의 큰 폐단인 것입니다. 신은 청컨대 청남에서 돈으로 만드는 것을 영원히 방색(防塞)하고 청북의 묵은 곡식을 순차로 이전(移轉)시켜 청남과 청북의 곡식을 균평(均平)하게 마련하게 하소서. 그렇게 하면 청남의 모축(耗縮)된 숫자를 충당시킬 수 있고 청북의 곡식이 묵어서 뜨는 폐단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호남(湖南) 각읍(各邑)의 세곡(稅穀)의 다소(多少)는 그 고을의 대소(大小)에 따라 혹 6, 7천 석(石)도 되고 작아도 3, 4천 석(石)을 밑돌지 않는데, 민간(民間)에게서 받아들이는 데 이르러서는 1천 석의 잉수(剩數)로 번번이 1백여 석이나 더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감색(監色)의 무리들이 그 반을 먹어치우고 또 그 반은 전의 잘못된 규례를 답습하여 그 고을 수령(守令)에게 바칩니다. 1천 석의 잉수가 이렇게 많으니, 수천 석의 잉수는 참으로 작지 않은 것입니다. 이를 시가(市價)의 고하(高下)에 따라 그 잉수의 다과(多寡)를 계산하여 세선(稅船)에 장재(裝載)할 적에 절가(折價)하여 은밀히 바치는데 많은 경우에는 5, 6천 금(金)이 되고 작은 경우에는 2, 3천 금이 됩니다. 이와 같이 명색(名色)이 부정한 물건을 자신의 주머니에 챙겨 넣는 것을 마치 응당 받아먹는 것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딱하고 불쌍한 저 소민(小民)들은 일년 내내 근고(勤苦)하는데 응당 바쳐야 될 것 이외에 이와 같이 더 징수하므로, 동쪽에 가서 꾸어오고 서쪽에 가서 애걸하지만 고소(告訴)할 데가 없습니다. 이는 호남(湖南)의 하나의 큰 폐단인 것입니다.
그리고 선척(船隻)은 수령의 사인(私人)이 배를 얻어가지고 싣고 가는데, 1천 석의 선가(船價)가 1백 석이며 그 1백 석 안에서 10석을 그 사인에게 획급(劃給)하여 주기 때문에 선한(船漢)들이 억울하다고 일컫고 있으니, 패선(敗船)되는 걱정이 여기에서 연유되지 않는 것이라고 기필할 수 없는 것은 물론, 심한 경우에는 원곡(元穀)을 물에 적시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막중한 국곡(國穀)의 이익이 아랫사람에게로 돌아가고 해는 나라에 돌아오게 되니, 일이 한심스럽기가 이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신은 청컨대 본도(本道)의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실상을 조사하여 장문(狀聞)하게 해서 잉곡(剩穀)을 더 받아들이는 폐단을 영원히 파기시키고 선가(船價)를 빼앗아서 주는 습관을 엄히 금단함으로써 소민(小民)들이 지탱하여 보존될 수 있게 하고 국곡(國穀)이 순조롭게 도착하여 정박할 수 있게 하소서.
선혜청(宣惠廳)에 바치는 위대두(位大豆)는 고을마다 각각 있는데 수령이 내려갈 적에 먼저 첩(帖)을 만들어 자기의 사인(私人)에게 주어 그로 하여금 스스로 담당하여 상납하게 합니다만, 본읍(本邑)에서는 돈을 민간에게서 배로 징수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거두어들이는 즈음에 폐단이 한둘이 아닙니다. 비록 백성들의 소원에 따라서 방납(防納)한다고는 하지만 그 배로 징수하는 것은 실로 공사(公事)를 빙자하여 사리(私利)를 영구(營求)하는 것이니, 이 또한 법식을 정하여 엄히 금단해서 전처럼 배로 징수하는 폐단이 없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문폐(文弊)에 대해 조목조목 진달한 것은 나에게 있어 타산지석(他山之石)536) 이요 정문 일침(頂門一針)537) 이 되는 말이다. 기강이 확립되지 않고 능멸하는 것이 풍속을 이루었다고 한 것에 대해서는 한두 사람의 힘으로 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다. 경중(京中) 도고(都賈)에 관한 일은 또 거듭 금하게 하는 것이 실로 시의(時宜)에 합치되는 것이지만 오직 그 너그럽게 하고 급박하게 하는 것을 조종하는 즈음에 모두 시의에 맞게 하도록 힘쓰는 것이 또 부서(府署)의 신하들이 마땅히 힘써야 할 급무이니, 아울러 이런 뜻을 알고 있으라. 관서(關西)의 환곡(還穀)에 관한 일은 그런 폐단이 있다는 것을 진실로 익히 들어 왔으나 효과가 있기를 책임지우기는 실로 어려운 일이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도신(道臣)과 상의한 다음 추후 사리를 논하여 품처(稟處)하게 하겠다. 호남(湖南)의 세곡(稅穀)에 관한 일은 그대의 말이 매우 옳다. 또한 묘당으로 하여금 특별히 관문(關文)을 보내어 해도(該道)에 엄히 계칙하여 사실을 조사하여 장문(狀聞)하게 함으로써 잘못된 습관을 영구히 파기하는 방안을 강구하도록 하겠다. 혜청의 대두(大豆)에 관한 일은 뒷날 차대(次對)할 때 품처(稟處)토록 하겠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2책 12권 55장 A면【국편영인본】 45책 277면
- 【분류】교통-수운(水運) / 정론-정론(政論) / 윤리(倫理) / 상업-상인(商人) / 금융-계(契) / 구휼(救恤) / 재정-국용(國用) / 재정-전세(田稅)
○掌令具修溫上疏曰:
殿下之治法, 皆以文也。 政謨, 亦以文也。 任職授官, 莫不以文。 治逆討賊, 罔非以文, 故下之奉上者, 亦用文焉。 文固美題目, 而其弊若是。 顧今日所先務者, 豈不在懋實而祛文乎? 伏願殿下, 求治以實, 從諫以實, 皆以實心而行之, 則文實相符, 體用具備矣。 紀綱者, 國之所以爲國也。 法令之不行, 卽紀綱之不立也。 閭閻家舍之踰度, 市井服飾之過制, 以至民不畏禁, 下而犯上, 甚至於日昨莫重之地, 攔入之變而極矣。 則今日之紀綱, 可謂掃地而無餘矣。 伏願殿下昭垂法令, 以立紀綱。 凡係以下凌上, 以賤踰貴者, 不少饒貸, 斷以常典, 則國之紀綱, 不期立而自立矣。 都下之民, 本無農作之業, 故各司吏隷外, 率皆貿賤販貴, 興利資生者, 十之八九。 蓋四方之物, 輻湊都下, 故方其賤也, 人得以貿之。 方其貴也, 人得以賣之。 懋遷有無, 朝夕食利者, 此實都民生涯之本也。 近聞都賈之法新出, 一人兼幷, 他人莫敢私買。 富民作爲契房, 歇價買取, 轉賣於契外人, 而價則倍受。 此所謂利歸於一人, 而害受乎萬民也。 以此都民失業, 實無支保之望。 此則都民之一大弊也。 臣請令京兆、平市, 各別嚴禁, 罷其都賈, 使之各自買賣, 如前資生焉。 臣待罪西邑, 熟知其弊, 淸南諸邑還穀, 年復年來, 作錢上京。 較諸元數, 殆減七八。 分給之際, 留其折半, 則歉荒之歲, 無以救民。 臣固知作錢上京, 緊於公用, 而若論本意, 則是豈成說乎? 淸北諸邑, 道路悠遠, 難於輸運, 故還穀自如, 年年陳腐, 至於不可堪食之境, 民反爲病。 此關西之一大弊也。 臣請淸南作錢, 永爲防塞;淸北陳穀, 鱗次移轉, 使淸南、淸北之穀, 均平磨鍊, 則淸南耗縮之數, 可以充矣;淸北陳腐之弊, 可以除矣。 湖南列邑稅穀多少, 隨其邑之大小, 或爲六七千石, 小不下三四千石, 及其捧於民間也, 千石剩數, 輒捧百餘石。 監色輩食其半, 而抑其半, 則從前襲謬, 納於其邑守令。 千石之剩數, 若是夥然, 則累千石剩數, 誠爲不少。 從其市直之高下, 計其剩數之多寡, 稅船裝載時, 折價密納, 多者爲五六千金;小者爲二三千金。 如此不正名色之物, 作爲囊橐, 殆同應食。 哀彼小民, 終歲勤苦, 應納之外, 如是加徵, 東貸西乞, 無處告訴。 此則湖南之一大弊也。 且船隻, 則守令之私人, 得船以往, 千石船價爲百石, 而百石之內, 劃給十石於其私人, 船漢稱冤, 臭載之患, 未必不由於此, 甚至於元穀和水之境。 莫重國穀, 利歸於下, 害及於國, 事之寒心, 莫此爲甚。 臣請令本道道臣, 査實狀聞, 永罷剩穀加捧之弊, 嚴禁船價奪給之習, 使小民, 得以支保, 國穀得以順泊焉。 惠廳所納位大豆, 邑各有之, 而守令下去之時, 先爲帖給其私人, 使之自當上納, 而本邑以錢倍徵於民間, 收歛之際, 弊端不一而足。 雖云從民願防納, 而其所倍徵, 則實是憑公, 而營私者也。 此亦定式嚴禁, 俾無如前倍徵之弊焉。
批曰: "條陳文弊, 在予他山之石也, 頂門之針也。 曰若綱紀不張, 凌蔑成俗, 恐非一葦可抗。 京中都賈事, 又令申禁, 實合時宜, 而惟其操縱寬迫之際, 務皆得宜, 又是府署之臣, 當務之急, 幷以此意知悉。 關西還穀事, 弊固稔聞, 效實難責, 令廟堂, 往復道臣, 從後論理稟處。 湖南稅穀事, 爾言甚是, 亦令廟堂, 別關嚴飭該道, 査實狀聞, 以爲永罷謬習之地。 惠廳大豆事, 後日次對時稟處。"
- 【태백산사고본】 12책 12권 55장 A면【국편영인본】 45책 277면
- 【분류】교통-수운(水運) / 정론-정론(政論) / 윤리(倫理) / 상업-상인(商人) / 금융-계(契) / 구휼(救恤) / 재정-국용(國用) / 재정-전세(田稅)